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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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유혹과 광기 또는 낯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힌다. 나는 과연 여기에 휘말려야 하는지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혹이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해 “그래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란 항상 어느 키치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왜 사비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을 나오게 할 것인가? 육감적인 몸매, 아름다운 얼굴, 예술적인 손 흔적, 그녀 사비나는 끊임없는 남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전혀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체코 프라하에 있었기도 했고, 취리히도 있었고, 나중에 미국에 있다가 캄보디아 전쟁터에도 있기도 했다.


 

그녀가 느낀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존재의 가벼움이란 자신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살아가는 현재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이다. 그녀는 그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려는 것을 싫어했다. 왜 그런가? 그녀는 소련이 공산진영 국가에 했던 기계적인 행위를 거부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5월 1일 메이데이, 미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가사도 외우지도 못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은데도 계속 행진하면서 노래를 하는 게 싫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비나는 어느 세계의 키치를 싫어했다. 미국에서 자신의 예술품을 사랑하던 노부부와 같이 살면서 그들이 죽자, 노부부의 아들에게 맡기는 순간, 사비나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여겼다.


 

우리의 인생이란 항상 부유하는 존재다. 왜 그런 가벼움에 대한 허전한 마음을 담고 있는가? 니체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니체의 일화가 후반부에서 나온 것처럼 인간은 뭔가 자신의 현재에 얽매여 있다. 니체가 1889년 길을 걷다가 마부에 의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에게 다가가 안아주는 모습, 니체는 분명 매독에 걸려 정신착란을 보였다. 그러나 니체의 광기는 세상의 광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광기다. 그 광기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 광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니체의 광기처럼 동물조차도 연민을 느끼는 자연적인 요소, 르네 데카르트가 주장한 기계론적 철학관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희생시켰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 그리고 영혼이 있기에 동물이 내지르는 비명은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장이 난 것이라 본다. 하지만 동물도 아프면 고통을 외치고, 감정이 있었다. 니체가 말의 목을 잡고 안아주듯이 사비나의 애인이었던 토마스, 그리고 그 토마스의 옆에 있는 2번째 부인이던 테레사, 그녀는 말의 목을 니체가 안아주듯이 그녀의 개인 카레닌의 목을 안아준다. 카레닌은 시계 같은 존재였다. 왜 시계인가? 동물은 정해진 자신의 패턴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고, 항상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토마스가 강박적으로 베토벤의 악곡에서 “그래야만 한다!”라는 게 아니라 “그러는 게 당연하다!” 하듯이 말이다.


 

카레닌의 존재성이란 바로 당연하게 옆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대비할 수 있는 존재다. 카레닌이 이상한 패턴을 보인 것은 암에 걸려 수술하고 나서 마취에 풀려나서부터다. 카레닌은 병에 의해 잠시 반응이 변했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변화는 카레닌의 주인 토마스와 테레사였다. 이 두 사람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벗어나길 원했다. 토마스는 자신을 얽매이는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사비나의 애인으로서 매우 적당했지만, 테레사의 만남은 그걸 벗어버리게 했다. 1번재 부인에게 아들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서도 왜 토마스는 그런 삶을 살았을까?


 

토마스의 삶에서 그가 신문사에 투고한 기사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 기사는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혀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그 죄에 모든 것을 버렸다. 토마스의 강박적인 삶, 테레사는 토마스의 몸에서 항상 성행위를 하던 여자의 성기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토마스와 테레사와 성행위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2명의 남녀가 뒤섞인 자리에서 토마스는 특이한 행동을 한다.

 

 

다른 여자보다 다소 크기가 작지만, 테레사의 가슴을 토마스의 입술이 계속 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남녀의 성행위보단 차라리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토마스는 왜 아내와 이혼하고 부모와 절교하며, 다른 여자들과 가벼운 관계의 애인이 되어야만 했을까? 인간이 가진 심리적 상황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제까지 그 전까지 같이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하던 그 혹은 그녀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예고도 없이 말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있다.


 

그게 무의식적인 자신의 이기심 내지 정체성에서 발휘된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무엇인가? 그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없었다. 아니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심리적으로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왜 다른 여자의 성기냄새가 나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머리부터 나온다. 태아의 머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여자의 성기냄새는 인간 누구에게나 가진 공통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에 이끌리기도 한다. 토마스의 성행위는 아마 그런 것이랴.

 

야생적인 여자 사비나, 그녀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다. 토마스에게 그녀가 하나의 자연적 존재일 수 있지만 사비나 그 자체는 자연적이지 못해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허무함을 느낀다. 사비나의 허무, 토마스의 허무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 가벼운 자신의 삶의 감정에서 토마스에게 테레사의 만남이란 정말 가볍다. 6회의 우연, 과장의 좌골신경통 그 모든 게 우연의 일치, 가벼운 삶의 흔적이 무거운 인생으로 이어진다. 테레사라는 여자, 이때까지 모든 여자와 성행위를 하더라도 같이 침대에 누워 수면을 취하지 않은 토마스에게 새로운 만남이다.


 

토마스에 의해 취리히에 가고, 테레사에 의해 다시 체코 프라하로 오고, 그런 직후 어느 시골로 가고, 그들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에 의해 사는 곳을 바꾼다. 테레사의 인생은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비참하고 한심한 모습에서 거기서 바꾸려한다. 사실 테레사에게 토마스란 남자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토마스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녀 하나만 지겨운 삶, 그녀를 무겁게 누르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녀가 사진기자가 되어 체코에 침공한 소련군의 탱크를 찍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소련탱크의 커다란 포대, 그것은 남성의 성기다. 어떤 남성이 먼저 테레사에게 접근했다면 그녀는 따라갈 것이다. 단지 조건은 그녀는 무지한 어머니가 싫었기에 책 한 권이 남자에게 들려있어야 했다. 단지 우연히 토마스였고, 토마스는 아무 생각 없이 테레사와 만난 것이다. 우연이란 가벼운 삶의 흔적, 그 흔적이 토마스에게 계속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테레사가 된 것이다. 가벼운 토마스의 우연, 그곳에 무거운 테레사의 만남에서 우리 인생은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지 모를 모호한 관계로 빠져든다.


 

그리고 존재적 무거움을 향하여 우리는 억지로 꾸민 키치에 빠진다. 사비나의 매력에 이끌린 프란츠는 자신이 있을 곳을 계속 찾기 위해 여행을 한다. 소멸의 미학에서 인간이 계속 이동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프란츠의 이동성은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신의 행동이며,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성행위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사비나와 여행을 떠나는 것에 행복감이 젖은 프란츠카 취리히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은 그녀를 보고 자신의 꿈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낯선 나라에서 사고를 당한다.


 

사비나라는 여인을 사랑한 프란츠와 사비나를 사랑하기보단 그저 몸으로 즐기려한 토마스에게 자신의 행복은 바로 자신의 품어줄 공간을 찾는 것이다. 왜 체코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시골농촌으로 토마스와 테레사는 갔을까? 도시에 온 토마스의 머리에서 더 이상 여자들의 성기냄새가 나지 않았다. 시골이 비록 소련군에 의해 변해있다고 해도 그 시골에서 삶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쉬고, 조용한 일상, 마치 카레닌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 일상은 무거운지 가벼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조로운 인생은 가벼울지 모르나, 토마스에겐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의사로서 삶을 강요받은 토마스, 혹은 억지로 주변의 흐름에 따르기보단 그 흐름에 거부하려는 자신의 강박적 삶을 선택받지 않은 것은 분명히 말하여 토마스에게 행복이다. “그래야만 한다!”가 “그러든 말든가!”로 변한 것이다. 시골농부가 되어 트럭을 수리하고 농사일을 거두는 것이란 그 누구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의사를 그만둔 토마스는 도시에서 창문닦이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삶의 쾌락이 되어도 행복은 되지 못했다. 과거의 외과의사 그리고 지식인이란 신분은 그에게 하나의 특권을 부여하는 만큼 또 다른 모순적인 고뇌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토마스에겐 가벼운 일상적 삶에서 행복의 무거움을 느낀 것이다.

 

 

사비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것은 그 모든 것에 얽매이려는 것과 그 자체를 거부하자는 얽매이는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관념이란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 가지기 위하거나 해야 한다는 무거운 신념이 우리를 가볍게 만든다.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가 갈 때 어느 신문기자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기자가 지뢰를 밟아 지뢰가 폭발하여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고, 그의 피가 주변을 뿌릴 때 국경 없는 의사회와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곳에 온 미국 미녀 여배우 모습처럼 억지로 매스컴에 결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토마스와 사비나의 마지막 모습처럼 살아가는 것도 좋은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모른 채 충동에 의해 사로잡히고, 다시 그 충동이 육감적인 심리에서 원해도 정신적인 심리에서 거부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비나가 느낀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벼움을 느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참기 힘들 정도의 공허감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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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ED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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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Revolution No.3>는 좀비들 시리즈로 유쾌한 재미와 쾌감을 날려준다. 다소 카타르시스가 뒤따르는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 세계관과 공유하고 있다. <Revolution No.3>가 <Revolution No.0>, <Fly daddy fly>가 연계되고 다시 <speed>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연애소설>은 좀비들 시리즈와 전혀 다른 소재와 느낌을 다루고 있어서 별개의 소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다시 수정하였다. 이 작품 역시 좀비들과 이어지고 있었다. <연애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니나, 주요인물로 다니무라 교수가 있다. 다니무라 교수와 불륜을 맺은 미모의 여대생 아야코는 사랑의 불의와 허무한 자신에 절망하여 자살한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아야코를 사랑하던 아야코 남자후배는 자신이 죽기 전에 친구로 위장한 살인청부업자에게 다니무라 교수 암살을 의뢰한다. <speed>에선 아야코의 제자 가나코는 아야코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 한다. 단지 중간 매개에 <Revolution No.3>가 보이지 않았을 뿐, 좀비들의 무리와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단순히 남자후배는 사랑하는 아야코 선배를 위한 복수를 원했다면, <speed>는 그 복수가 일어나기 반년 전의 이야기다. 작품에서 아야코를 좋아하는 남자이야기도 있었고,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관계도 있었다.


한 미모의 여대생이 선택한 죽음, 석연치 않은 자살 장소는 여러 가지로 의문을 만들게 했다. 가나코는 처음 아야코의 죽음이 타살이라 여겼다. 물론 아야코는 자살이었으나, 타살과 마찬가지이었다. 자살은 사회적 자살이란 말이 있다. 그녀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죽음이었다. 아마 남자후배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내었다면 아야코는 자살을 조금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 남자후배에겐 인생의 절망을 가나코에겐 친구를 잃게 만들었다.


가나코는 아야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이 숨은 진실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이상한 에세이대학교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이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대생의 죽음, 에세이대학교의 축제는 뭔가 이어지는 고리가 있었다. 그 고리의 시작은 가나코가 가진 어느 증거고, 그 증거를 노리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좀비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여기서부터 가나코와 좀비들은 운명의 공동체가 된다. 이미 <Fly daay fly>에선 순신은 40대 아저씨를 인생의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바꾸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젠 40대 아저씨가 아니라 10대 여고생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3년 동안 계속 침입하려한 세이와여고의 우등생이었다. 좀비들의 활약과 주인공의 노력은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하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고를 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가나코 역시 그런 역할 중에 하나다. 공부에 충실한 여고생이 우연히 불량학교 문제아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하는 시간은 달콤한 꿈만 같은 시간인지 아니면 악몽보다 더 심한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단지 가나코를 만난 좀비들은 이태까지 삶에 지친 약자들과 연대했다면, 이번에 얼마든지 위로 갈 수 있는 존재와 만났다.


늘 악운만 따르는 야마시타가 가나코에게 자신은 산하(山下)라는 의미의 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산 아래에 사는 야마시타는 산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영원한 발바닥 인생이다. 좀비들은 그런 야마시타가 멸망하지 않을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 한다. 볼품없지만, 언제나 맑은 눈으로 친구를 걱정해주는 착한 친구들, 바보 같은 그 꿈을 언제나 비웃고 조롱하는 사회에 대해 좀비들은 대항한다. 단지 이번 대상은 조금 다르다. 권력의 중심은 언제나 대학교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돈과 인맥으로 연결된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이벤트를 놓치지 않으려한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은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시대정신이 돋보인다.


이 사건들의 원흉에게 잡힌 가네코는 그와 대화하면서 엘리트인 원흉이 되고 싶은 것은 묻는다.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을 움직이고, 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밖으로 보낸다. 전형적인 일본극우의 사고방식이다. 뇌물수수 뿐만 아니라 미성년 매춘행위로 낙인찍힌 전 장관과 결탁한 점에서 지식인의 사회인 대학은 이미 권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것이다. 과거 1960년대 일본은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그들은 동아리로 자금을 충당했으나,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자본의 공급처로 활용된다.


일본사회는 그렇게 섞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가나코는 그런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좀비와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보통 <Revolution No.3> 좀비들 이야기에선 다소 마초적인 감성을 가진 남학생 중심이야기라면 이번 <speed>는 조금 다르다. 연약한 여고생이 직접 몸을 날려 싸우고, 운전을 배워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장식한다. 가나코의 가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집안은 가족이 3명이 아니라 4명이어야 했다. 가나코의 어머니는 꼰대적인 가부장인 남편에 대해 실망해서 낙태를 선택한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나코의 어머니가 느낀 소외감, 게다가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에서 아야코의 죽음, 원흉이 모든 운동부들을 조직할 수 있던 것은 강간사건을 어떻게 잘 덮어준 것이다. 일본사회가 가진 문제인 성적인 억압이 이 작품에 녹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가나코는 투쟁을 하였고, 특히 어릴 때 배운 발레를 다시 해보려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어느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질투하여 그의 다리와 팔, 나중에 목까지 베어버렸다. 그는 죽어가면서 눈으로 리듬을 맞추어 마음의 춤을 추었다.


춤을 추지 못한 나그네, 하지만 그 나그네를 본 다른 누군가가 춤을 추어주었다. 아마 가나코는 억압받는 이상한 세계에 새로운 발화점이 될 인간이란 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에 힘이 필요하나, 정말 필요한 것은 그 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의지다. 신호등이 적색과 녹색이 있는데, 만약 그 신호등이 조작된 적색이라면 우린 그 선을 넘어야 하는지 마는지 고민하게 된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달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자동차에 차키를 꽂아 넣으면 우린 엑셀 페달을 힘껏 밟아 막혀있는 문을 향해 돌진한다.


안에서 열리지 않고, 밖에서 밀어내는 형식이라면, 그 간극의 틈을 찾아 마주쳐 나가는 게 좀비들의 인생이다. 물론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고, 탐욕에 물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 계속 희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거부하기보단 그 이익에 붙으려 한다. 우리에겐 정말 그런 사회를 비웃으며 돌파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로 <speed>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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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벌루션 No.0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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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이 탄생한 시기를 알리는 것이 <Revolution NO.0>이다. 1학년 때부터 친구들이 뭉치게 된 동기 그리고 그들이 언제부터 도전이란 단어를 찾았는지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다. 누군가 우리보고 "너희들은 할 수 있다 내지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다. 바꾸기 위해선 우리는 단순히 하면 되? 라는 말만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하게 될 수 있는 계기나 상황이나 길라잡이는 되어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도 나 자신도 어른이란 범주를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런 연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사리사욕을 위해 어떻게든 희생시킨다. 희생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른바 문제아들, 사회가 포기하고 학교가 포기한 사람이다. 문제아란 이정표가 붙는 순간 세견이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길가에 죄 없는 사람을 건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질 하는 사람이라면 비난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누구에게 해를 주지 않는데도 단지 아웃사이더(out-sider)란 신분에 의해 몰리는 경우가 많다. <Revolution NO.3>에서 좀비들은 자신들이 아웃사이더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것보다 아웃사이더이기에 새로운 바람으로 만들었다. 세이와여고라는 아가씨 학교에 난입하여 그녀들과 사랑을 꿈꾸는 좀비들, 우리 사회는 계층의 구분화가 사회의 고립화를 몰고 왔다.


그렇다면 이 고립을 부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제3의 계급인 좀비들이야말로 그 바람의 중심점이다. 단 조건은 무관계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들과 같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난자질을 당한 열등이웃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 열등해질 수밖에 없는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그 열등한 위치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Revolution NO.0>는 바로 그 혁명 이전의 이야기다. 미완으로 이어진 혁명, 그러나 미완의 실패가 있었기에 좀비들은 성공했다.


<Revolution NO.0> 역시 좀비스 시리즈로 매우 유쾌하고 재미난 소설이다. 순수문학보다 장르문학에 가깝고, 가네시로 가즈키 작품은 만화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이 학교에 등교하면서 친구 순신과 만난다. 순신은 항상 손에는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Fly daddy fly>와 <Revolution NO.3>에서 항상 책을 잡고 있던 순신이다. 그런데 이번에 순신이 잡고 있던 책은 단 1권이었다.


순신은 주인공에게 책 제목을 이야기해준다. <감옥의 탄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책제목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다. 고등학생이 읽는 것은 물론이거나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학부생조차 어려운 서적이 푸코의 서적이다. 이 소설에서 푸코의 서적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학교란 곳이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공장, 병원, 회사, 군대, 학교, 고아원 등과 같은 집단수용시설은 인간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처벌을 내린다.


감시체계는 판옵티콘 시스템, 즉 일망감시시설로 작용한다. 넓은 산 안의 수용소(학교)는 학생 전체를 감시할 수 없지만, 그 감시를 대신하는 게 사루지마와 선생들이다. 그들은 손에 죽도나 방망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이 자신들의 시각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한다. 소설후기에 이 모든 폭력적 행위가 있었냐는 말에 작가는 실제 겪은 일이라고 한다. 이런 폭력교사가 우리에겐 생소할지 모르나, 우리 한국사회 역시 익숙한 인물이다. 좀비들만큼은 아니나 비인간적으로 학교교사로부터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폭력을 나 역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군가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모르나, 그들이 진짜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부터 나는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말 잘 들으라고 하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모순이 많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고, 때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어른도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합리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Revolution NO.0>에서 좀비들이 당하는 것을 말이다. 억지로 입학생을 느려 입학금을 받고 교묘한 술수로 학생들을 퇴학 및 정학시키는 모습에서 교육의 가치는 인간의 완성이 아니었다. 학교의 이익, 자신들의 편익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시작점이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선생들은 감시체제에서 처벌을 담당하던 존재지, 진정으로 감시하는 존재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말이나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를 생각하면 순신이 들고 다니는 책 제목 <감시와 처벌>처럼 감시의 수단으로 비인간적 폭력을 합법적 처벌로 이어진다.


그래서 좀비들은 <Revolution NO.0>에서 판옵티콘의 학교를 도망치기로 한다. 감옥을 탈옥하여 다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 안의 죄수처럼 살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판옵티콘이 이미 작용된 사회는 자기검열이란 무서운 의지가 살아있다. 남의 감시가 결국 하나의 생활적 양식이 되어 그 감시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주변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인간 사이의 감시와 고발은 사회 대다수 약자에게 속박을 쇠사슬만 안겨준다.


문제가 있는 사회, 불만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면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만의 법칙을 구축해야 한다. 법칙이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들 편리를 위해 만든 허울 좋은 명분이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만의 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좀비들이 선택은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면 용기다. 그리고 계층이 다른 자들과의 공감과 공유다. 그래서 <Revolution NO.0> 마지막과 <Revolution NO.3> 초반에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 선생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서 말이다. 좀비들은 우리보다 더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가 더 추락한다면 어디와 겹쳐 보일까? 좀비는 진화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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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엔젤 - 스탈린의 비밀노트,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아크엔젤>이란 러시아에 위치한 작은 말이다. 로버트 해리스가 <아크엔젤>이란 소설에서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프롤로그에 소개되고 있다.

 

1. 대천사, 구품 천사 중 한 천사로 국가 통치자의 보호와 특별한 사명을 전달한다.

2. 러시아 북구 백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스탈린의 비밀노트가 가리키는 종착점


소설이라고 하나, 기본적인 세계관은 현실적 기반을 두고 있다. <아크엔젤>은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러시아의 사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러시아, 아마도 우리는 지난 과거의 변화 속에도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크엔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것은 인간이 가진 광기다. 광기가 돌출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아직도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에 옐친과 푸틴이 정권을 잡지만, 아직까지 러시아에선 스탈린과 스탈린 이후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스탈린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고,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으며, 낫과 도끼가 새겨진 소비에트마크가 달린 물건들이 종종 나오고 기차에도 새겨져 있다. 게다가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넘치고 있다. 스탈린에 대해 다시 돌아가자. 왜 사람들은 스탈린을 그리워하고, 지난날의 향수를 찾아가는가? 인간은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기 위해서 하나의 정체성을 설정한다.


인간의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본능에 치우쳐 있지만,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인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아크엔젤>에 등장하는 헥소 박사는 자신이 러시아에 방문하게 된 동기가 스탈린 연구발표하기 위해서다. 스탈린은 1936~1938년 4회의 모스크바재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가 죽인 사람 수는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이나 혹은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사람보다 더 많았다.

 

시대의 사이코패스, 광기에 젖은 인간, 스탈린이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아직까지 되살아나는 유령이다. 소비에트연방이라는 나라가 설립될 때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인터내셔널 가와 라 마르세예즈를 혁명 당시 계속 불렀고, 인터내셔널 가는 소비에트연방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 정권에서 소비에트찬가라는 곡으로 교체된다. 그 곡을 보면 Patina Lenina(Party of Lenin)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그것은 레닌의 당이란 의미다.

 

소설에서 레닌의 당, 스탈린의 당이란 가사는 없었다. 심지어 그 노래(Soviet Anthem)를 찾아 들어보면 영상편집에서 Patina Lenina 가사 부분이 나올 때 레닌과 스탈린이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러시아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아크엔젤>의 연결성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러시아에선 기존 소비에트연방이 가진 정체성 그 시대의 향수에서 많은 인간들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크엔젤>에서 헥소 박사가 스탈린의 비밀노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때 라파바와 수부린, 항구도시 아크엔젤의 사람들처럼 스탈린이란 유령에 아직 벗어날 수 없었다. 마만토프 같은 경우, 헥소 박사가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찾아가는 것을 은근히 방해하면서 그것을 유도했고,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를 때 헥소 박사는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난날 그들만의 영광과 이념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인간이 현실을 벗어난 이념을 숭배하는 순간 그 사회는 병이 든다. <아크엔젤>은 자본주의 문화가 러시아를 강타하고, 자본주의국가와 대립한 소비에트연방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현실에 고민하고 있다.


<아크엔젤>의 시기가 아직까지 늙은 노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을 기억한 자들도 있고, 1930년대 스탈린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도 기억하고 있다. 스탈린에 대한 향수는 과거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잊지 않은 것이다. 비밀노트의 주인은 스탈린이 아닌 스탈린의 저택에 들어온 젊은 여자다. 그 여자는 결국 죽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헥소 박사가 아크엔젤에 찾아가니 살아있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늙었고, 혼자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에 대한 향수와 광기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딸이 모스크바로 끌려가 심한 일을 당했는데, 자기 남편이 딸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떠나 죽었는데도 늙은 노파는 스탈린에 대해 집착한다. 스탈린은 집권을 위해서 볼셰비키 고참 당원을 모조리 숙청했고, 자신의 친구와 가족마저 잔인하게 죽도록 만들었다. 레닌이 죽고 난 후 레닌의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후계자로 스탈린이 되는 과정은 피의 숙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 사람들은 스탈린이 음울하고 속이 시커먼 사람인데도 그에게 이끌릴까?


인간에겐 누구나 어둠이 있고, 그 어둠에 쌓이면 인간은 광기에 빠져버린다. 1924년 레닌사후 스탈린은 당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당의 주요간부에 임명하다. 반스탈린주의자들은 모조리 파시스트로 몰아넣었고, 거기에 동조한 인물들은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그들이 승승장구 올라가면서 스탈린과 맞먹을 정도로 권력을 가지게 되거나 또는 스탈린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스탈린은 그들을 응징한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야 하지만, 반대로 두려워하나 그에게 더 이끌린다.


스탈린으로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 더 나아가 자신들이 스탈린으로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욕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비밀감옥지하에서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새로운 진급자들이 탄생한다. 이들이 총에 의해 죽어갈 때 국민들은 파시스트 첩자의 죽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응징이라 여긴다. 소비에트연방 해체해도 트로츠키는 아직까지 반역자의 이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각인된 러시아의 정체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기보단 그 과거에 매달리는 이유는 강력했던 지난날의 향수다.


그 시대가 정당한지 아니면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때가 좋았고,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광기와 살인이 넘치는 시대에 대표적인 사이코패스를 많은 사람들이 얽매인 이유는 <아크엔젤> 소설내용이나 후기처럼 우린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힘으로 통치하는 시대에 대한 향수는 우리 스스로 억압과 폭력이란 쇠사슬로 엮이게 만든다. <아크엔젤>은 바로 그런 시대적 간극에서 벌어지는 사회상을 하나의 가설을 내세워 만든 소설이다.

 

스탈린이란 인간 그 자체는 사라져도, 스탈린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시 계속 반복된다. 스탈린이란 인물이 죽었다 해도 그런 인간이 다시 나오지 마란 법은 없다. 하지만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그런 인간이 나와도 용납하는 세상이다. 역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인간이 나와도 무방한 사회, 오히려 그런 인간들이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이어졌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 이야기나, 그 이야기는 현실의 실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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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인 <Revolution No.3>를 읽으면 웃음과 흥미가 유발되는 작품이다. 좀비스라고 불리는 삼류 고등학교 불량아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우리 사회의 일면의 모순을 불랙코미디적 요소를 보여준다. 진짜 옳고 그른 것은 단순히 겉이 아니라 그 안의 진실성이다. 그런 소설을 쓰는 가네시로가 반드시 유쾌한 글만 적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슴이 시리고 아쉬움만 전해오는 글을 적는다. 우연히 아는 동생 녀석에게 소개받은 소설 <연애소설>, 내가 알던 가네시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기본적인 그의 작품세계관의 맥락은 많이 연계되어 있었다.


가네시로의 작품이라 하여 재미를 기대한 사람이나, 그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그 흐름에 기대는 사람 모두 가네시로의 작품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소설 제목이 <연애소설>이니 이 책은 분명 연애에 대한 내용을 적고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애 운이 없는지 내 자신이 부족한지 모르나, 그저 씁쓸한 기분도 맛 봤을 뿐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날라 가거나 시작하려고 할 때 뒤통수를 맞던지 또는 잘 될 것 같았는데도 불발탄으로 그친 적이 많다.


게다가 성격이나 가치관도 일반인과 많이 동 떨어져 있다. 예전에 어느 사람에게 내 자신을 두고 "Little Comedian"이라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Rialto 밴드에 정규앨범이 아니 싱글앨범이 실린 곡으로 차분한 모던 락으로 노래를 듣는 순간, 뭔가 어눌하고 답답한 기분이 전해온다. 아무런 성과 없이 그저 노력하지만, 끝에는 스스로 체념해야 하는 Little Comedian처럼 내 자신이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말 그런 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나만의 광대가 되었다.


연애, 그것은 사랑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이라 이야기해야할까? 말은 하기 쉬워도 인간의 감정을 쉽게 무너뜨리고 때로는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만든다. 가네시로의 <연애소설>에 나온 사랑이야기도 내가 느끼는 고독과 허무가 나온 것을 보았다. 주인공이 대학시절 옆에 동기이야기는 그야말로 끔찍한 고독과 허무다.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최후에 사랑하던 여자도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준 여자를 만나 그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이야기를 주인공 작가에게 말해주었다. <연애소설>이 일반적 연애소설과 다른 점은 죽음이란 세계를 항상 옆에 끼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연애소설”에선 주인공은 언제나 주변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두 번째인 “영원의 환”편의 주인공은 암을 선고받아 언제 죽을지 모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꽃”에서 주인공은 뇌질환으로 언제 지금 당장 죽을지 모를 운명이고, 그 주인공과 같이 드라이브를 떠난 변호사 도리고에는 암을 선고받은 초로의 남자였다.


모두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 앞에 있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이 죽기 전에 무엇이 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서 과연 글쎄 무엇일까?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서 스피노자처럼 사과나무를 심으려 들판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결국 그 최종은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인간은 1번 태어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다. 그 운명 안에서 어떻게 벗어나려 해도 답은 없다. 죽는 모습과 과정 그리고 시기는 달라도 죽고 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추모해주며, 그 사람들 마음에 내가 살아있다면,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사실 그 고통과 충격을 깊이 고민하는 것만으로 괴롭지만, 그보다 괴로운 것은 혼자 외롭게 고독과 허무 아래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눈을 감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애소설>에선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이란 어떻게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거나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거나 느낄 수가 있다.


<연애소설>에서 사랑의 시작은 정말 우연이고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별의 슬픔과 죽음 역시 생각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만약 이런 운명 앞에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혼자서는 되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면 안 될 것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나는 그 사람을 왜 사랑하는가? 그 질문에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금방 사랑은 식어간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만큼 중요한 게 나는 왜 사랑하고 있는가이다. 아마 그 표현은 “꽃”편에서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가네시로 작가의 특유의 재미가 잘 나오지 않은 소설이라 해도 그의 인생가치관이 “꽃”편에 잘 나와 있다. 게이코는 남편과 28년 넘게 떨어져 살아왔지만, 남편이 살인범(그는 1970년대 일본에 살고 있는 사회적 약자 - 아마도 징용된 - 조선인의 후예였다)의 변호를 맡은 과정을 계속 찾아 정리하였다. 가난하고 소탈한 남편이나, 남편집안의 이야기인 '도리고에 가의 전설‘은 몇 번이나 들려 달라 했고, 그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남편의 할아버지는 관동대지진 때 억울하게 핍박받은 조선인과 중국인 친구를 변호하다가 얻어맞아 죽었다.


이에 반해 아내 게이코의 집안은 한국전쟁과 일본 대공업시기에 거부가 된 사람이다. 어울리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게이코가 남편 도리고에를 진정 사랑한 이유는 그만이 약한 자를 비웃지 않고 진정으로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바로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만남은 계단에서 떨어진 게이코를 보고 다정하게 감싸준 것처럼 게이코가 바라본 도리에고의 모습은 바로 다정함이다. 그 다정함은 게이코만이 아니라 ‘도리고에 가의 전설’처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거나(“연애소설”편), 아니라면 그 사람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각오가 있는지(“영원의 환”편) 아니라면 죽음만이 유일한 화해(“꽃”편)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꽃”편에 게이코는 남편과 죽은 아들의 묘비에 남긴 꽃은 물망초다. 물망초의 말뜻은 나를 기억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고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해주어 서로 마음이 아픈 일이 많더라도, 그것조차 넘을 수 있다면 멋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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