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과 함께>를 처음 접한 것은 신화편이었다. 신화편이 저승편과 이승편보단 먼저 앞의 세계를 다룬 것이고, 각 신마다의 이야기를 다룬 본풀이로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신과 함께>는 저승편부터 먼저 웹툰으로 연재되어 이승편과 신화편으로 연재되었다. 처음 신화편을 보면서 차사전이 비중이 높았는데, 차사의 비중이 높은 이유가 아마 이승편과 신화편에 등장하는 인물이 일직차사 해원맥, 월직차사 이덕춘, 강림도령이기 때문이다. 가끔 전설의 고향 내지 귀신을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를 보면 저승사자들의 복장은 과거 조선시대 선비들이 입는 의상과 흡사하다. 물론 얼굴은 혈색이 없으며 눈매는 날카로우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신과 함께> 저승편에 등장하는 저승사자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차사복장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검정색 양복을 입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화란 원래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작가 주호민이 개인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했어도 그것은 현대적인 인식과 상황에 근거하여 만든 것이다. 저승 가는 길은 보통 망자가 걸어가거나 혹은 배를 타고 간다. 그러나 현대의 망자들은 지하철을 타고 저승으로 향한다. 재미있는 설정은 지하철 이름이 바리데기호라는 점이다. 바리공주, 바리공덕이라고 하는 바리는 원래 부모에게 버림받은 공주다. 그녀는 저승에 가서 고난을 마친 후 자신을 버린 부모의 목숨을 살린다.

 

그리고 죽은 인간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무속신이 된 것이다. 바리공주 신화를 보면 불교적인 색이 강한 반면, <신과 함께>에서는 바리공주의 본풀이가 나오지 않는다. 바리공주보단 조선시대의 냄새가 강한 차사들의 활약이 높았다. 차사들의 이야기는 물론 <신화편>에 등장하나 그들의 복장과 신분을 보면 충분히 조선시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원맥이 죽게 만든 것을 토포사로 부임한 장군으로, 토포사란 조선시대 산적을 잡기 위해 만든 관직이다. 무속신화가 시대를 지나면서 계속 바뀌거나 추가로 반영되는 특징이 있다.

 

해원맥의 모습도 그런 것처럼 다른 존재도 역시 그렇다. 조선시대의 복장의 차사가 아니라 현대적인 모습의 차사도 역시 가능한 설정이다. 저승편에서 소개되는 것은 어느 한 기업에서 일하는 회사원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병으로 죽자 저승에 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진 것도 없고 가난하며, 직장에서 고생만 하다 저승으로 오자, 그의 심판이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시왕이 망자에 대해 재판을 하고, 그의 죄질에 따라 지옥에서 벌을 받게 하거나 또는 윤회되거나 천국으로 영원히 가게 되는 것을 결정한다.

 

재판과정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남자는 자신의 재판과정에 따라 각종 지옥을 구경하고, 지옥에서 벌을 받는 인간을 보게 된다.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짓을 한 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속이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이승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지옥에 남는 자리가 부족하고, 지옥 내에서 사람들은 다툰다. 사람들이 가진 이기심과 비인간성은 지옥에 와서 벌을 받아도 뉘우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본 회사원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대해 돌이켜보면서 재판과정을 임한다.

 

그는 그렇게 착하게 산 것도 아니나, 그렇게 나쁘게 산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힘없이 살아온 서민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종선고는 지옥의 벌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이다. 살아생전 속기만 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한 그에게 왠지 모를 연민과 공감대가 느껴졌다. 저승에 와도 다른 사람도 있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 자신이 모은 돈을 남에게 베푼 할머니나, 이제 갓 태어났는데 저승으로 가는 아기, 남에게 거짓말만 한 정치인까지 나온다. 저승에 오는 사람들의 과거는 모두 다르지만, 저승의 심판은 공정했다. 인간의 삶에서 공정한 순간이 언제 제대로 있었던가?

 

공정함의 척도는 그 사람에게 얼마나 권력이 있는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저승편>에서 회사원 이야기가 진행될 때 한편으로 차사들의 활약이 나온다. 차사들이 망자를 저승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어느 귀신 하나가 거기서 탈출한다. 그 자는 총기사고로 죽은 군인이었다. 매년 군대에서는 총기 및 기타 사고로 죽는 군인이 많으며, 그들의 죽음에서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은 의문사도 많다. 이번 <저승편>도 마찬가지로 휴가를 앞둔 말년 병장의 죽음은 그냥 단순히 총기사고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고의적인 방치로 인한 타살로 이어졌다.

 

분명히 응급처치와 적절한 대응만 있었으면 살릴 수 있었지만, 지휘관의 진급과 부대가 소란스러운 것을 막기 위해 억지로 죽음을 위장한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웨툰이나 만화에 나올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많은 군의문사가 있었으며, 아직도 그 원인이 판명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심지어 시체도 장례식을 치루지 못한 채 꽁꽁 얼어붙은 채 영안실에서 영혼의 명복조차 찾아가지 못했다. <신과 함께> 저승편에서 등장하는 망자들은 현실에서 고난을 받거나 억울하게 죽은 자가 중심이다.

 

차사들은 그들을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복수를 하지 못했다. 대신 강림은 병장의 죽음을 보고 분노하여 그 병장을 죽게 만든 지휘관이 저승에 오면 중벌에 처해지도록 주문을 건다. 현세는 공정하지 못하기에 그 죄 값을 저승에서 확실히 받고자 하는 것이다. 저승세계도 나름 현실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과거 삼도천을 지나던 경로는 3가지로 각 경로마다 특징이 있었지만, 하천정비사업 이후 하천이 직선화하여 물의 유속이 빨라졌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면서 강물의 흐름을 보니 마치 4대강 사업을 하던 것에 대한 풍자도 보였다.

 

<신과 함께>에서 등장하는 차사들과 신들은 인간이 살아생전 부와 명예를 누리던 자들의 편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핍박받고 고통 받던 자들의 편이다. 거기에 어려운 이웃을 돕던 사람은 저승의 신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 진짜 인간이 죽으면 사후세계인 저승으로 가는지 안 가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이승의 세계에 살면서 너무 부조리하고 억울한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저승에서 명부시왕의 재판인 걸까? 저승의 이야기를 다루는 <신과 함께> 저승편을 완독할 순간, 씁쓸한 감정을 느낀다. 착하게 사는 게 정말 바보 같은 짓일까? 아니면 정말 옳다고 여기고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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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8-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만화 왜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학습만화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05 15:20   좋아요 0 | URL
재미보단 왠지 모를 시대적인 감정이 녹아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개미처럼 일하고, 술에 찌들린 남자가 죽는 최후란..
한편으로 보면 재미보단 그냥 일생학습만화인듯

만화애니비평 2015-08-05 15:40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저는 8월14일 부천에 갑니다.
부천에 만화축제 세미나 듣고 그날 만화영상진흥원에서 일하는 분과 저녁일정이 있고
나머지 일정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있는데, 아마 저는 월요일 정도 내려가려 합니다.
토요일에 아는 동생놈과 맥주와 감자튀김하자 했지만, 만약
곰곰발님이 생각나시면 어떻습니까? 다음주말?
 

 

1. 들어가면서

19세기 서구사회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경제의 성장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 등 다양한 문명을 발전해왔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서구문명은 팽창하게 되면서 기존의 서양사회가 아닌 동양을 비롯한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서구사회의 문명은 합리주의를 토대로 정치적 이념과 사회경제적 요소들을 비서구권에 적용시키려 했다그 과정에서 서구는 기존 동양문화가 서구문명보다 우월하지 못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탄생하게 되었다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의 관점은 동양사회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인 요소가 부족하므로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겼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 서구에 비해 미개하고 열등하므로서구인들은 동양인들을 계몽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이것은 서구사회가 동양을 침략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서구의 침략은 기존 영토노동력자원뿐만 아니라 동양사회의 문화까지 침범했다동양문화에서 다양한 문화에서 가장 심하게 훼손당하는 것은 종교 내지 신앙이었다서구사회의 지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동양권에 대하여 근대화가 진행되었고그 결과 기존 동양사회에서 전통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다한국사회 역시 20세기에 도래하면서 전통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서구사회화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 세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이 도래하면서 기존 서구사회의 편견과 억압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동양문화권 및 제3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世界化)라는 슬로건은 획일화된 국가의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유하게 되었다한국사회는 근대문명 및 민주주의 도래로 서구화를 진행시켰으나세계화를 위한 문화적 정체성에서 그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서구화 과정에서 많은 전통문화가 해체되었고그중에서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민간신앙이나 민속종교 등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쇠퇴했다.


신화(神話)는 어느 특정한 국가와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가진 무의식적인 집단 심리이다신화를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고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성을 확립하는 것이다한국 신화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한국 신화를 어떤 매체로 통해 전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과 같은 대중매체보단 만화애니메이션웹툰 등과 매체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따라서 본 논문은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애니메이션 작품을 소개하고작품에 등장하는 한국 신화에 대해 연구하였다.

 

2. 한국 신화의 특성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는 정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으로 다스리기 시작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에게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기고, 인간 세상에 삼백 예순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다가와 자신을 인간이 되길 바라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양식 삼아 동굴에서 100일 동안 견디라고 한다. 호랑이는 인내력이 부족하여 굴에서 뛰쳐나온다. 곰은 환웅과 약속을 지켜 인간의 여성이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웅녀였고, 웅녀는 환웅과 혼인을 맺은 후 단군왕검을 출산한다. 단군왕검은 고조선(古朝鮮)을 설립하고 한국인의 국가 시조가 된다. 단군은 고조선을 1,500년 정도 다스린 후 1,908년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국가 시조인 단군왕검이 홍익인간 정신으로 만든 고조선이란 국가를 설립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군신화의 특징은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점이고, 신이 인간으로 변신(출산)하여 지상에 살다가 다시 신으로 돌아가는 점이다. 단군신화 이후 한국의 고대국가 건국신화를 보면 신적인 존재가 하늘에서 강림하거나 또는 알에서 나와 최후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변신하는 모습으로 이야기도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단군신화는 단순히 신화로서가 아니라 전통종교로서 그 흐름이 이어져있다. 한국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것으로 본다. 단군신화는 한국 최초의 건국신화이기도하나 한편으로 무속신화(巫俗神話)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왕검(王儉)은 국가의 지배자인 군주를 의미하나, 단군(檀君)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수명이 다하여 사망할 경우 넋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천(歸天)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국인의 시조인 단군은 신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의 군주가 되어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서양사상의 토대가 되는 플라톤의 사상에서는 신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고, 인간이 죽으면 저승세계인 하데스의 궁으로 가게 된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신은 완벽한 존재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신에 대한 경건함을 가짐으로서 신과 이어지려고 했다. 현재 서양의 문화적으로 자리 잡은 크리스트교 역시 신과 인간은 완벽하게 분리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신화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서양의 사상과 달리 한국 사상의 토대가 되는 한국 신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분리보단 일체형으로 보여준다.


신과 인간이 일체적 요소라는 점은 단군신화만 아니라 다른 한국 신화에서 보여준다. 한국의 신화는 크게 2가지로 나눈다. 1가지는 단군신화와 같이 건국영웅들이 출현하여 국가를 세우는 건국신화이고, 다른 1가지는 건국신화처럼 기록으로 전승되는 게 아니라 민간에서 구비 전승되는 무속신화이다. 무속신화는 간의 생활에서 민중들을 보살피는 민간신앙의 신들에 다룬 이야기다. 그래서 무속신화는 민중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보여준다. 건국신화는 신적인 존재가 인간세계의 왕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라면, 무속신화는 인간적 존재가 신격으로 화하게 되어 인간사를 관장하는 주요 신들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무속신화의 신은 역사 내지 기록으로 전승되는 건국신화처럼 고정되는 게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같이 변화한다.


단군신화가 가진 샤머니즘(shamanism) 요소와 더불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도교(道敎), 불교(佛敎), 성리학(性理學) 유교(儒敎) 등이 민간신앙에 흡수되어 계속 반복적으로 변천되었다. 무속신화에서 다루는 신은 같으나 이야기의 구조나 인물, 배경 등이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기적으로 또한 변한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는 무속신화의 특징은 인간들의 상상력으로 재생산되므로 이야기가 끊임없이 생산되므로, 스토리텔링으로 그 가치를 지녔다. 근대문물이 유래되고 서구화의 도입은 한국 무속신화를 해체시켰으나, 최근 전통문화의 문화적 가치와 보전을 위해 무속인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전통문화는 단순히 문화재로서 관리하기보단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발휘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에서의 한국 신화

일반 대중들이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방법으로 영화, 드라마, 연극 등과 같은 대중매체로 접할 수 있지만, 이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과 같은 서브컬처 콘텐츠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그리고 상황들은 카메라 내지 실사영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림 위에 그려놓는 만화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이 더 재현성이 좋다. 게다가 애니메이션(Animation)은 생명이 없는 존재에 대해 혼을 불어넣어 생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Animate란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특성에 따라 신화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예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1988, 스튜디오 지브리),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 1997, 스튜디오 지브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尋神隠, 2001, 스튜디오 지브리) 등이 있다. <이웃집 토토로>는 나무에 사는 정령을 소재로 한 작품이고, <모노노케 히메>는 재앙의 신과 신의 숲이 등장하는 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일본의 다양한 신과 요괴들이 등장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에 대해 영적인 존재를 불어넣는 애니미즘(Animism)적 요소에 일본의 전통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일본 신화와 전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를 작품 내 등장인물로 내세운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일본 내에서만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의 나라에서 흥행하여 작품성과 재미를 인정받았다.


신화의 상상력을 작품에 반영하여 일본 특유의 문화를 통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한 장면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 내 존재하는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화애니메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이고, 그 신화에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환웅이다. 환웅이 웅녀를 선택한 모티브를 활용하여 만든 만화로 주간만화집지 소년챔프에서 연재 완료된 <사신전>이란 작품이 있었다. <사신전>의 시놉시스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환웅은 웅녀와 힘을 합하여 성품이 난폭한 호랑이족을 사해로 추방한다.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자 호랑이족이 다시 인간계를 침범하고, 평범한 고교생으로 환생한 환웅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미소녀 사신(四神)을 만나 각성하는 것에서 작품은 종결난다. <사신전>은 단군신화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요소에서 사신이란 영물(靈物)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도교적 요소를 작품 내 반영하였다.


또한 단군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라이트노벨 및 만화로 출간된 <나와 호랑이님>이 있다. 환웅이 웅녀와 결혼했는데, 그럼 남은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모티브를 부여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와 호랑이님>의 시놉시스는 주인공 소년이 호랑이와 웅녀의 후예 사이에서 연애를 다루고 있는 러브코미디 장르로 전개되며, 작품 내 추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보다는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요괴들이 등장한다. <사신전>은 기존 세계가 붕괴되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건국신화의 요소를 반영하였고, <나와 호랑이님>은 단군신화를 이야기가 시작되는 설정으로 삼아 민담과 전설의 요소를 반영하였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제와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을 전개되나. 기본적으로 단군신화를 소재로 하여 만든 작품인 점에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점과 더불어 작품의 독특한 설정과 개성을 보여준다.


무속신화를 소재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으로 만화 및 웹툰 작가 주호민의 <신과 함께> 신화편이 있다. <신화 함께> 신화편은 인간세상에서 저승이 만들어진 계기와 저승에서 죽은 인간을 관장하는 무속의 신들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별소별전으로 하늘의 신 옥황상제가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에게 저승과 이승의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시험한다. 인품과 성격으로 형인 대별왕이 뛰어났지만, 지식과 계략은 동생 소별왕이 뛰어났다. 동생 소별왕은 속임수로 이승의 왕이 되었고, 형인 대별왕은 저승을 주관하는 왕이 된다. 이 점에서 무속신화에 등장한 인간사는 이승은 부조리한 반면 저승은 공정하다고 여기는 부분에서 무속신앙은 당시 살아가는 민중의 억압된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대별왕이 저승의 왕이 되어 죄를 지은 인간을 벌을 내리는 염라대왕 및 저승 시왕(十王)을 임명하고, 염라대왕은 죽은 인간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차사를 임명하기 위해 차사전강림전이 나온다.


그리고 서천 꽃밭을 관리하는 사라도령과 그의 아들 할락궁이를 이야기인 할락궁이전과 집터와 집을 수호하는 신의 이야기인 성주전녹두생이전이 있다. 작가가 창작으로 만든 지장보살전칠융전도 있지만, <신과 함께> 신화편에 등장하는 신들은 본래 신이 아니라 인간에서 시작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인간이던 시절, 부조리한 현실을 이겨내어 신이 된 점에서 제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무속신화를 소재로 개봉된 작품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고스트메신저>가 있다. <고스트메신저>21세기에 도래하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죽은 자를 관리하는 저승이 디지털화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저승세계를 묘사하였다. 무속신화가 고정된 이야기로 전승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하여 변화하는 것처럼, 한국 신화는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에서 계속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 마무리하면서

세계화에 따라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상으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있다. 다양한 부류의 국가와 민족이 모여 공감대 이상으로 상대방의 개성과 특징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화의 정신은 다양성과 상호공존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한국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세계로 향하여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화적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매체가 필요하고 그 매체는 영상매체가 탁월하다. 그동안 한국은 서구화로 인해 자국의 전통문화를 크게 훼손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이것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영상매체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사라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으로 제작하고, 더 나아가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등과 같은 대중문화로 제작하여 많은 소비자들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화는 그 민족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만화애니메이션은 상상력으로 가득한 매체이며,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매체다. 신화가 만화애니메이션에게 전해주는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무속신화가 종교적으로 무속신앙으로서는 쇠퇴했지만, 무속문화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성묘나 제사를 지낼 경우 산신제를 올리고, 집과 자동차를 새로 구매할 때 고사(告祀)를 지낸다. 어촌지역의 어민들은 선원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뜻에서 무속인을 불러 용왕제(龍王祭)라는 굿판을 벌인다. 무속문화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야기의 모티브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특정지역과 상징물을 아는 것보다 한국인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화는 그 문화집단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는 점에서 한국인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신화를 이용한 만화애니메이션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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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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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에서 지배이데올로기에 관한 도서는 줄기차게 발간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류기록에서 아마 최초로 마녀사냥으로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대화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아테네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더불어 스파르타라는 국가정체를 도입하기를 바란 내용이 나온다. 플라톤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분량이 많은 <국가(政體)>이다.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이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끝이 볼테르고, 루소는 그 끝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상가다. 왜냐하면 볼테르가 프랑스대혁명에서 위대한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그는 결국 다른 누군가보단 우월한 지위와 부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국내 루소 저서 전문번역가이면서 전문가인 김중현 교수가 말한 것처럼 루소 역시 가난하고 지위한 낮은 힘이 없었던 자였기 때문이다. 힘이 없었던 사상가인 루소는 그토록 많은 적과 싸우며 마지막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의 몽상이란 단순히 자폐적인 망상이 아니라 자아성찰과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루소의 마지막 명저 <고독한 몽상가의 산책>은 글이 매우 안정적이며 부드러운 반면, 이번에 다시 또 읽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은 매우 글이 날카롭고 열정적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10번째 산책 글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서거한 루소이기 때문에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올랐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성인에서 소크라테스보다는 나는 차라리 루소를 선택하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자신 안의 신과의 대화로 통해 진실과 정의를 추구했다면, 루소는 소크라테스를 넘어 신뿐만 아니라 자연이란 공간까지 동원했다. 소크라테스는 인류애적인 요소가 같은 아테네인 내지 더 나아가 헬라스(그리스)지역 사람 정도일 것이다. 노예와 어린아이, 여성, 그리고 이방인에게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였다. 루소는 오히려 노예제를 경멸했고, 여성과 남성의 자연적 불평등을 인정해도 그는 결코 여성 그 자체를 내려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인종차별(<新엘로이즈> 참조)을 미워했고, 심지어 동물까지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철학은 르네 데카르트부터 시작했다. 이성의 의해 과학적 법칙을 세웠지만, 인간을 구분하는 것도 모자라 인간 이외에 존재하는 것은 도구로 보았다. 심지어 동물은 인간처럼 이성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생각했다. 기계론적인 철학관은 동물들을 무참하게 죽였고, 자연을 짓밟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성을 살리는 것에서 자연을 짓밟는 행위를 바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이기심과 병폐만 안겨주고, 가난한 자들이 일하면 할수록 더 비참한 삶을 영위하여 마침내 차형을 당해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최후로 이어진다.

 

루소에게 불평등이란 자연적 신체적인 요소와 도덕적 정체적 불평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도덕이란 가치를 윤리하고 같은 조건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윤리와 도덕은 명백히 다르고 도덕이란 단순히 옳은 가치가 아니라, 단지 그 사회에서 옳아야 했던 가치이다. 즉 사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거나 모순이 있어도 그 어긋난 가치가 하나의 정당성을 가진 것이다. 정의라는 가치 혹은 도덕이란 가치가 그런 것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무슨 과오가 있는지를 명확히 생각해야 하나, 그것이 용납되지 않은 점이다.

 

볼테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은 후에 루소를 숲에 곰이나 같이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답장을 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불평등기원을 밝히는 것이란 결국 부와 지위, 권력과 명예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된다. 명예를 보자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저서에서 등장한다. 플라톤은 국가 혹은 그 정체에 대한 최고의 가치는 수호자들의 행동력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심신을 단련하여 강력한 철인이 되어 적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내국인에 대해서는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호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에 관심이 없어야 한다. 단지 그들에게 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존경과 무료 숙식이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명예로운 인간이 되어 영원히 추앙받는 존재가 된다. 명예욕에서 만약 인간이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타인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 정도의 명예욕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 명예욕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명예를 가지고 싶어서 명예를 가진 게 아니라 명예를 얻는 과정에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가치에서 명예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부와 지위, 권력은 그것하고 다르다. 부와 지위, 권력은 자신의 명예를 올리기도 하나, 한편으로 땅 밑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대로 그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갈망의 끝은 반대에 위치한 자들에게 파멸을 안겨준다. 농부가 땅을 일구지 못한 채 도시에 와서 빈민과 도둑이 되어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란 국가의 멸망하고 있다는 전초를 보여준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루소가 저술했다고 해도 출판사와 번역자를 서로 다른 사람 것을 통해 읽고 있지만, 참으로 그 느낌이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망해가는 국가에 대해 루소는 그 나라는 부유할지 모르나, 농부와 시민이 가난하여 마침내 인구가 감소하게 되면 그 나라는 결국 분노에 가득한 시민들에게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나라가 무너지지 않으면 그 나라의 시민은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멸할 것이다. 국가의 토대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다. 국가의 모든 주권과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시민이 없어지는 나라란 과연 존재하겠는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깨우치지 못한다. 그것을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그런 불행을 교묘히 이용한 자들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조건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후천적인 정치적 불평등은 분명 선천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위적이라면 분명 고칠 수 있는 것이고, 고쳐야만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게다가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오히려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예로부터 마키아벨리도 말한 것이지만, 진정한 공화국이란 조용한 나라가 아니다. 지금 조용한 나라라는 말보다 차라리 침묵의 나라, 고요의 나라, 또는 전제군주 아래 모두가 시민(市民)이 아닌 신민(臣民)으로 되는 사회가 아니다. 늘 토론과 논쟁이 존재해야 하며, 그 사회의 작은 문제 하나하나 여기저기서 담론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공화국이란 우리가 추구해야할 민주공화국이란 가만히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가 하나의 운동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이 적든 크든 혹은 넓든 좁든 최소한 사회적 문제를 공론화하여 그 사회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누군가 그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이고, 누군가 고통을 받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이 고통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는 나만이 공간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줘야 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나만이 그런 공간을 가지고 타인들이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면, 최후에 나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침범은 단순히 정치적 관계로만 끝나지 않을 수가 있다. 치명적인 경우에 놓일 경우 나의 목숨 역시 보장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루소의 서적을 보면, 볼테르의 글을 보고 그가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가라고 하고, 혹은 자기 책처럼 프랑스 국민의 빈곤함을 보고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나, 정말 그의 예언대로 혁명이 다가왔고, 프랑스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16세는 압제자는 아니나, 압제자만큼의 고통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주었다. 봉건사회, 즉 왕족과 귀족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회에서 그 외의 계급은 늘 착취와 억압만 당할 뿐이다. 그래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9세기 마르크스 시대보다 100년 이전에 존재한 혁명적인 도서였다. 루소는 혁명을 하라는 말을 이 책에 적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넣었다.

 

21세기 전근대사회를 탈피하여 탈근대사회를 넘어온 우리에게 루소의 사상은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면서 소름 돋는 문구는 많다. 하지만 이 문구는 너무 놀라 때로는 루소가 현재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또 지배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을 갈라놓아 약화시킬 수 있으며, 겉으로는 사회의 화합의 분위기를 주는척하면서 실제로는 분열의 씨를 뿌릴 수 있으며, 신분들 사이에 권리와 이익을 서로 대립시켜 상호 불신과 증오심을 야기하여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를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조장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전제군주제가 서서히 그의 추악한 머리를 들어 국가의 온갖 분야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하고 건전한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마침내 법과 인민을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무질서와 대변혁들 속에서다. 이 최후의 변화 이전의 시기는 혼란과 대재앙의 시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이 그 괴물(전제군주제)에 의해 삼켜져 버릴 것이다. 인민은 더 이상 지도자나 법이 아닌 전제군주만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제군주제가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든 전제군주 외에 어떠한 다른 지배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가 입을 열자말자 고려해야할 청렴이나 의무는 없어져 버리고,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을 따르던 돼지들은 어리석은 양들에게 계속 이상한 문구가 외치도록 한다. 그 양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돼지가 주입하는 대사가 되새김질 한다.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이란 말처럼 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에 전제군주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전제군주제는 사라져도 전제군주 같은 자들은 계속 나올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계몽주의 이름 아래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마음이 들지 않으나, 적어도 계몽적인 현실자각은 필요하다고 여긴다.

 

계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은 계몽이 아닌 압제이겠지만,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파악 그리고 거기에 대한 판단력은 참으로 중요하다. 루소가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못하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문명인들은 도구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자신을 스스로 속박시킨 점이다. 자신의 편리함을 쫓을수록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즉 뭔가 자신에게 없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바보가 되는 것이다. 우리 현실은 우리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망각한 채 계속 흘러간다면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인구가 계속 감소하여 최후엔 그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기차는 탈선한 채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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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이미지 존재론

이미지라는 것은 현대사회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묻는다면 난감할지 모른다. 존재적인 구성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이미지가 아니라 관념적인 영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상이 존재해도 그것은 만지거나 느끼거나 할 수 없다. 가상의 투영체가 현실의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왔다. 흔히 2D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즉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로 존재하는 캐릭터는 현실부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한편으로 파생실재(hyper real)의 존재들은 설사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해도 우리에게 과연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TV 드라마를 그나마 보던 때 최고의 인기배우가 최진실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그의 아이들은 각종 악플과 루머로 시달린다. 그러나 최진실은 육체적으로 소멸해도 영상에서는 존재한다.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연예인조차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상에 남겨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광이라면 반드시 찾는 히로인이라면 오드리 햅번이나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일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육체적 존재는 현실은 없다. 하지만 영화광들은 그녀들의 사진을 모우고, 때로는 다른 여배우들이 그녀를 흉내 내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영상은 인간의 죽음조차 죽음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불러낸다.

 

이미지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강사 분이 갑자기 <공각기동대>를 이야기할 때 그런 존재론적인 부분이 대략 이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실재로 있다고 여긴 게 과연 진짜였는가? 공각기동대 극장판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란 존재가 등장하여 의체를 가진 인간의 기억을 해킹한다. 어느 남자가 사진을 보며 자신의 가족이라고 동료에게 소개하나, 막상 그 사진은 강아지가 찍혀있다. 그가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기억이란 과연 사실인가? 허구인가? 가상의 존재에 대해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후속 극장판 <이노센스>의 경우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그 소녀의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를 기본 자료로 삼아 섹스로이드의 운영체계로 만든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을 인간과 성행위를 한다는 설정과 더불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영상으로 가능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라는 가상의 영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여파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반드시 이미지는 위와 같이 배우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나 공상과학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그 자체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광고를 넘어가면 그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 섬뜩한 자본주의의 미학

현대인들에게 신용카드를 가지지 않을 자는 얼마나 있을까? 나도 보통 마트나 술집에 결재할 때 신용카드보단 현금결제를 하려고 한다.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나 사고, 술집에 가서 소주 몇 병 혹은 막걸리 몇 통 정도 마시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보단 현금을 우선하려는 이유는 카드의 이용은 물리적으로 자신의 지갑에 꽂힌 화폐의 수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통장에 있는 잔액을 소비한다. 현대인들은 화폐를 지폐나 동전으로 들고 다니겠지만, 나머지 재산을 봉건시대처럼 집에 금화나 보석으로 나두지 않는다. 유럽 봉건사회에도 은행은 있었지만, 은행 내에 화폐 역시 금화와 보석이다. 강도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그대로 사라질 존재다. 현대의 화폐는 지폐보단 은행에 기록된 사이버머니다.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여 은행계좌에 보이는 금액이 나의 현재 재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의 숫자로 보일 뿐, 자신의 손 안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신용카드의 신기루란 바로 그런 식으로 작용하기에 내가 당장 어느 정도 결재해도 많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게 해준다. 하지만 1달에 1번씩 우편으로 날아오는 대금청구서는 자신의 소비생활의 비극성을 알려준다. 신용카드의 경제적 패턴이 우리 일상을 깊이 침투할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학에 빠지게 된다. 원하는 데로 물건을 구입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자유는 오로지 그 개인의 자유이며 권리다. 그러나 뒤에 다가올 경제적 책임은 자유롭지 못한 결박이 된다. 신용카드 광고에서 모든 것이 그 카드 하나로 되는 순간, 우리는 카드로 인해 모든 것이 매개되고, 자신의 생활에 불편함까지 느끼게 된다.

 

예전에 내가 사람들을 내 차를 태우고 대구 팔공산에 간 적이 있었다. 팔공산에 위치한 파이데이아 인문연구소 북 카페를 가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 같은 도서모임 한 분이 내 차를 보며 놀라듯이 말했다. “어라 중형차인데, 수동이네요. 게다가 하이패스와 네비도 모루 분리되었고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된 상태도 있었지만, 일부로 차량을 수동을 구매했다. 기름연료도 아끼고 구매비도 저렴하나, 더 중요한 건 운전은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차의 편리성에 기대기가 싫었다. 하이패스를 지날 때 단말기를 이리저리 옮기고, 일일이 하나하나 정리하는 내가 재밌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자동에 의존하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안 되면 엄청 불편해요.”라고 했다.

 

신용카드의 광고로 돌아가면 신용카드 하나가 모든 것을 통용하게 해준다. 버스지하철, 식당과 핸드폰요금 결재, 심지어 불우이웃돕기가 카드로 세금도 카드결재가 가능하다. 분리된 기능이 하나로 모이면 모일수록 편리함은 증가하나, 만약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더욱 놀란 것은 모바일 기능이었다. 모바일기능


이 작동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마트폰 단말기를 분식하고 교체하는 순간 엄청난 수고가 들인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해킹이 만연하고, 스마트폰에 금융기능은 더더욱 금융범죄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에게 편리한 도구는 인간 그 자체에게 더 불편한 족쇄를 걸게 해주는 함정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에 빠진 인간, 결국 그런 일들은 인간 스스로 의존적이고, 시스템에 의해 사육되어가는 수동적 존재로 전략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도구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루소가 이 책을 저술할 때가 1750년 중반 정도다. 250년 훨씬 지난 지금의 문명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광고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40대 남성, 실제 그가 찾아야 할 사람은 늦은 나이라도 같이 삶의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같이 열어갈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게 바르다. 광고 속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다를 수 있으나, 광고에서는 신용카드의 기능이 모든 일상을 차지했다. 인간의 곁에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대체된 것이다. 어째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자본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의 만능을 보여주는 광고는 자본주의의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30초 광고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잠시 본 기억은 난다. 3분은 아니다. 3분에 나온 광고는 신용카드의 아름다움보단 차라리 소름이 돋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3.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

위 제목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책 제목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에게 다양한 문명혜택이 돌아가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실재 이 책에서는 미국의 1960~1980년대 이야기를 해준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늘어나는데, 왜 불량품이 많은지, 소비자가 불량품을 구매하여 항의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은지 말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그런 형태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중심으로 가는 점에서 소비사회에 소비자는 권리를 누리는 경제적 주권자가 아니라 단순히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외되는 존재로 전략했다. 문제는 소비하는 주체들은 거의 대부분 많은 국민이나, 그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기보단 그저 그 개인의 영역으로 돌린다.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에서 자유적인 조건이 이런 식으로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신자유주의 국가 중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도 되겠지만, 우선 미국이다. 자본주의 영역은 자유주의와 함께 겹치어 갔지만, 자유의 조건은 철학에선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가깝다면, 현실의 자본의 차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을 따라가는 것처럼 말하나, 고전경제학의 애덤 스미스나 최후의 보루인 존 스튜어트 밀까지 넘어가면서, 밀의 <자유론>을 보면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성의 절대적 판단으로 그 사람의 판단과 논리가 중요하며, 타인에 대하여 이타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아마 이런 논리라면 현대에선 보인 신자유주의라는 게 자유주의철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드러난다.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지 않고, 자본의 자유로서 움직이나,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 그 자체는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자본은 자본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은행에 넣고 가만히 넣고 있다면 예전에는 이윤이 제법 되었지만, 금리의 조정으로 통장의 이자가 낮아지면서 어느 누군가는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돈을 제대로 굴리지 못한다고 여긴다. 결론은 누군가 계속 돈을 굴리는 일이 생기면, 반대로 누군가는 굴리지 못할 것이고, 돈을 굴리지 못한 사람 중에는 그나마 생계수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도 있는 반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처음에 나온 자들은 빈민의 여성이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활보할 때 국가세금을 낭비하는 자들을 매도하고, 그들 대부분이 흑인여성이라고 미디어에서 떠들던 시기를 예를 들었다.

 

전에 TV를 보면서 미국의 어느 백인관료가 흑인 슬램 가를 돌면 젊은 흑인남성에게 군에 입대할 것을 제안한다. 미국은 거대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이며, 군대를 운영하려면 첨단화된 시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군인이 필요하다. 군인을 선발하려면 장군과 장교 같은 지휘관과 고급인력이 필요하나 아래로 부사관과 사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력으로 본다면 장교와 부사관보단 사병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흑인여성 특히 아이를 양육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각종 감시와 언론의 매도성은 그들은 계속 그 사회에서 고립 내지 또는 소모되어야 할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위직과 재벌가문의 후예들은 군에 가지 않거나 면제받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군에 가는 것은 평범한 집의 남성이다. 그런데도 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군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남녀 간의 불평등으로 전도시킨다. 특히 미디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또는 문제가 터지면 그 일들을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물꼬를 돌린다. 최후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문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그런 일은 군대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아니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처음 주제인 이미지, 이미지는 TV의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문잡지, 인터넷, 스마트폰, 심지어 길가에 네온간판과 전단지도 포함이다.

 

우리의 관심사를 우리의 생활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접해도 아무 관계없는 것들로 대체된다. 가끔 연예인 기사가 뜨면, 주변에 사람들이 화제로 삼아 입을 올린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게 나보고 뭐 어쩌라고?”, 여자연예인들이라면 “내하고 만날 거야? 데이트할 거야? 평생 나하고 손잡을 일도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언론에 접하는 비극적 소식에 대해 논하면 사람들은 “뭐 좋은 일이라고, 나와 관계없자나.”라고 한다. 아무 관계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 반면, 타인의 불행한 사고에는 자신의 무관계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지만, 이제는 언론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고가 시보다 더 철학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전체화와 개별화란 이중적인 잣대로서 서로의 영역을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어떤 A란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B라는 사람에게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 보는 나는 C라는 사람이다. 결국 B가 당하는 상황에서 D라는 인물이 무관심하게 보고, 만약 내가 A의 비극을 논하고 B의 상태를 이야기하더라도 D는 요지부동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좋지 않은 일 대신 어떤 이익에 대한 일이라면 어떨까?

 

4. 비판과 비판에 대한 비판, 대안은 무엇으로?

어떤 부당한 압제에 대해서도 그 압제자와 주변 무리들은 자신들의 테제가 있다. 되도 않은 논리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잘 포장한다. 그렇다면 이에 반대하는 안티테제가 있다. 안티테제들은 그들의 주장과 의도하는 바를 폭로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관계에 있던 자들이 서로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있고, 압제자이든 아니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태클을 거는 일도 있다. 반대를 위한 게 과연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인가? 목적보단 집단적인 행동인가? 과거 독재자와 압제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분명 안티테제의 효과는 정당성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안티테제만으로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무조건 하기와 안 하기의 경계선에서 나오는 것은 힘겨루기고 힘겨루기가 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 하나를 밟는 일이었다. 주로 우리나라에선 80년대까지라 보면 될 것이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정치적 수단은 무력에 의한 통치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지식과 행정에 의한 통치로 전환되었다. 특히 지식이 무지식의 대중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식은 국가권력과 시장자본과 결탁하기 시작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지원했다. 지식의 세분화, 관료행정의 책임보단 하위행정에 책임전가로 이어졌다. 지식과 권력은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고, 지식에 대한 폭로 역시 지식에 의해서였다.

 

지식이 인간을 속이는 도구로 되고, 속임수를 파헤치는 도구로 되었다. 강연자분이 말한 것과 뒤풀이에서 나온 4대강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4대강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치 관료와 국가행정기관의 합작품이다. 국토부와 환경부를 주도한 작품이다. 마치 거대하게 포장한 이 사업을 만약 우연히 하천 인근을 지나면 허구임을 알게 해준다. 문제는 당시 설계과정 시에 제대로 된 현장조사를 하지 않았고,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수준이라고 한 점에서 현장과 설계의 관계가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국토부가 사업자와 승인권자로 되었다면 협의권자는 환경부다.

 

환경영향평가 협의 시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위에 드러나지 않은 점은 사업자와 협의부서, 그밖에 환경관련 학회조차 문제를 제대로 의문시하지 않은 것이다. 행정기관 말단은 이 일을 실제로 담당하나, 이 일에 대한 권한은 없다. 협의과정은 담당자로부터 하나, 사업에 대한 진행은 상부에서 결정한다. 관료주의적 행정은 그 문제의 해결권을 가진 자와 그 일을 수행하는 자가 분리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말단관료는 관련규정에 따르고 결재권이 없어서 책임회피가 되고, 상부기관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기에 담당자에게 문제를 제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핑퐁게임 같은 피해보는 사람만 방황하여 결국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비단 이런 문제는 4대강만이 아닐 것이다. 그마나 4대강은 하천이 공공의 재산이고, 개인이 소유할 수 없고, 개발조차 어렵다. 하천구역은 친수구역으로 설정하여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유도하지 않은 이상 하천은 복원 및 보전구역으로 설정된다. 개발은 주로 이루어진 곳은 도시지역과 도시인근지역이다. 도시내부와 도시인근은 결국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다. 도시의 개발이 머리 아픈 것은 개인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도시의 개발은 주거환경개선, 교통소통, 공원부지로 통한 자연환경 향유라는 슬로건이 따라 붙는다. 문제는 도시의 땅은 국유지와 공유지보단 사유지에 기반 한다. 특히 부동산의 이익은 나의 영역이 아닌 옆에 있어도 영향이 온다.

 

대규모아파트 주거단지가 오면 모두 환영하고, 만약 혐오시설이 오면 반대를 한다. 강연에서 말한 푸코의 저항을 실현하려면 먼저 그 시설이 오는 기능적 요소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도시에서 아파트단지가 오고, 특히 재개발이 오면 땅값이 몇 배로 오른다. 집값이 오른 사람은 좋겠지만, 나중에 자기가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갈 수 없으면 문제가 된다. 대규모공사는 부동산증가라는 이익과 더불어 공사 시 분진, 소음, 진동, 토사유출이 문제가 되고, 완공 후에는 교통체증, 교통소음, 일조권장해, 빛 반사 등이 문제가 된다.

 

환경적으로 본다면 개발은 이중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개발은 필요하나 막상 그 지역의 주민들의 입장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나 주변 이권단체와 관련단체가 사업자와 국가세력을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부산에 당초 공원지역이나 공공시설이 유치되기로 한 지역에 대규모 상업시설이나 공업시설로 용도 변경된 경우가 있다. 그 일을 추진하는 자들은 자본가들이고, 그 자본가들은 정치행정과 결탁한다. 문제는 주민이 피해를 보는데도, 그 주민들은 자본가들에 대해 반발하면서 그 자본가와 결탁하고 있는 정치행정들에게 비판 없는 지지를 보여주는 일들이 있다.

 

강의내용에서 계몽이 새로운 억압과 차별을 만들지만, 계몽적인 요소가 배제된 경우 도시의 난잡한 개발이 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기능은 주거만이 아니라 인간생활 그 자체를 영위하는 곳이다. 도시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고,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 어느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개발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파괴된다. 도시는 토지라는 개념이 사유지로 되어 있으나 토지 아래의 지하수와 암반, 토지 위의 대기층은 사유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일정장소의 파괴는 그 장소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이어진다.

 

물론 도시개발이 중요한 사업이 되어 어느 지역에 큰 발전이 될 수 있겠지만, 때로는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주민의 입장보단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이 많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열쇠는 개발사업자와 관료집단보단 지역주민에 의해서 유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민에게 그런 지식적 배경이 없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다. 그런다고 반대만 외쳐도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든 반대하는 것은 한계성이 다다른다. 대안의 영역은 삶에서 다른 방식을 구현하기를 바란다. 도시에 대한 예술적 기능이란 바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만들게 해준다.

 

삶의 예술성에서 과거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농가를 부르는 농민들은 그게 삶의 형태다. 그러나 지금은 무형문화재 내지 민속 문화로 본다. 과거 어부들이 용왕제를 지낸 것이 근대에 이르러 미신에서 다시 그 마을의 축제 내지 그 사회의 문화행사로 전환된다. 농촌과 어촌의 행사도 사실 도시화라는 이름아래 묻혀간 전통들이다. 부산은 기본적으로 농업보단 어업이 활성화되어 있고, 어항이 있는 마을에선 용왕제 외에도 다양한 민간문화가 남아있다. 그런데 만약 주변이 개발되어 어항조차 존폐위기라면 그 문화의 유지에도 치명적인 위기로 될 것이다.

 

공간의 파괴는 정신적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어느 지역의 도시개발사업에서 당산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나무는 그 마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 민간신앙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마 몇 십 년 전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 다양한 목공용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환경영향조사로 나무 존치상태를 점검하여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환경영향평가 제도로 통한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반영되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마을은 원래 울산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에 위치했으며, 아파트보단 주택이 많았고, 상업시설도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였고,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발전으로 대규모 주거단지로 많은 인구가 생기고, 이에 대한 인프라로 대형마트로 설립되고, 도로가 넓어진다. 이런 발전은 부동산의 증가로 되고, 세를 들어가는 영세민 입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장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만약 그 지역주민에게 적정한 대안이나 혹은 그들이 안심하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외면했다. 실제 서울수도권에서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신축된 대규모 상업시설로 들어갔으나, 그곳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나머지 결국 나오게 되었고, 그 건물은 추후에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에 매각되었다.

 

영세한 지역 상인들에게 고객은 필요하나, 그 고객들이 너무 대규모로 조성된 곳으로 이동하면, 결국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없다는 점이다. 강의를 들으며 전에 읽은 최병두 교수(대구대학교 지리학과)의 <환경갈등과 불평등>이 생각났다. 위천공단 조성에서 당초 경상북도가 지역자치단체에서 대구로 이전되고, 대구시는 위천공단에 대한 문제로 중앙정부와 지역주민과 갈등을 빚어왔다. 대구지역 일자리와 산업시설용지 부족은 산업단지 조성이란 정책적인 방법이 있지만,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대규모 단지가 조성되면 사실상 대구주민보단 입주업체에 해당되는 직종과 직렬이 들어온다. 대구지역 주민들이 기계공학 전공자나 자동차학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만약 자동차공장이 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대규모 부지조성 시 곤란한 점은 자본이 중앙정부로부터 나오면 부지공사 시 지방업체가 주도되는 게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가 주도되며, 지방업체는 소외된다. 또한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이 입주하면 많은 수익이 지역주민에게 가는 것보단 수도권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부산항의 무역의 이익에서 발생하는 세금이 지방자치단체보다 오히려 중앙정부로 가듯이 기업의 이윤과 국가의 세금이 중앙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단지 오는 것으로 환영하고, 집값이 오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저하시킬 우려를 그들 스스로가 만드는 것과 같다.

 

도시의 기능은 뭐든지 환경과 연결된다. 공간의 배치성에는 수질, 대기, 토양, 소음진동 등과 같은 환경적 영역과 충돌한다. 공원녹지 역시 자연환경과의 배치에서 인간생활환경과 밀접한 연계가 되어 있다. 강의 도중 해운대 동해남부선 선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로 공간부지가 광대하고, 주변지역 철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으며, 선로구간에서 보이는 경관은 아주 탁월하다. 그런 공간을 공공재산, 즉 시민의 휴식과 여유 공간이 아닌 기업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가 해운대 달맞이고개다. 1990년대 정도만 해도 그렇게 많은 가게가 입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맞이고개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가게가 입주하면 산을 깎고 길을 내어야 하고, 그러면 녹지의 축이 좁아진다. 달맞이고개 도로 밑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었는데, 자연석이 아닌 콘크리트 내지 화강암 재질은 녹지의 축을 파괴한다.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던 과거의 해운대 앞바다는 자연적인 모습이 농후했으나, 현재는 점점 갈수록 부산시내의 커피숍과 고급상점이 많은 곳처럼 변했다. 게다가 주변에 아파트나 대규모 주거단지의 조성은 더욱 환경적 부담을 키운다. 모두가 보기 위해서 그곳을 보전하는 것이 바르나, 다들 개인적 소유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자연은 파괴되고, 아름다운 환경은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간다. 공유지의 기능이 사유지화 될수록 환경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들이고, 그에 반해 빈곤층은 나쁜 공기에 노출되고 불량한 주거환경에 의해 심신이 불편해진다. 도시에서 환경정의는 바로 이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삶의 예술이란 말은 각 개인의 삶에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민간에서 전해온 예술은 특별히 예술적인 목적이나 예술인이 모인 게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예술로서 만들어 온 것이다. 단순히 무조건 변화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변화라는 그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아닌 하나의 흐름에 따라 온 것이다. 대안의 선택에서 무조건 시도하려는 것과 반대하는 것에서 대안의 자세에서 다른 길을 보여주거나 혹은 잠시 중단하여 후에 의론을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안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예술인들이 하는 예술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혐오시설 신축예정지에 환경오염 피해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퍼포먼스로 하는 것 역시 예술이다.

 

그 예술은 특정한 세계관이 아니라 우리 삶이란 일상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주의보다. 언론과 미디어는 국민의 눈과 귀를 길들여 미디어에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에게 봉사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알아가는 것이다. 강의 자료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것처럼 제작은 그 지역의 자본을 투자하여 이익을 회수하려 하는 이고, 노동은 그곳에 투입되는 노동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느 곳을 갈취하고, 갈취당하는 곳에서는 노동으로 착취당한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행위라고 한다면 그 행위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고 해체하여야 한다. 그 행위는 일회용이 아니라 연속되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료 뒷부분에 르페브르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엉뚱하고 도발적인 행위를 하던 그들은 끊임없이 도시 안의 자본주의에 대해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이상하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행위에 대한 목적성을 전달한다. 그들을 접하는 대중들은 그들의 도발에 처음 그들에게 분노하겠지만, 상황주의자들은 그것이 목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언제나 당연한 것만 받아들이려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그 인식을 바꾸는 충격이 필요하다. 예술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생활에서 삶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수단으로 자본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자본 그 자체에 종속당할 수만은 없다. 만약 종속당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평생 소비만 하거나 노동만 하거나 또는 감시만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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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갈등과 불평등
최병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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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생각해보면우리는 기본적으로 환경에 대한 철학적인 혹은 사상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따라서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책을 잡았을 때 일반적인 환경공학 전공자 중에서 학사 내지 석사 급들은 도저히 이해가지 않을 서적이고그나마 박사과정 이상 되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봤다환경공학 전공자들은 기본적으로 화학생물학토목공학 등 다양한 이학과 공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운영된다환경공학이란 것은 단순히 환경 그 자체적으로 학문이 완성된 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문제는 그 방향적인 요소에서 공학은 철학과 사상을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다환경공학과를 입문하면 환경공학 개론 정도로 살펴보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인류 개체수의 대폭발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만 볼 것이다예전에 환경관련 교육을 받을 때 강사로 나온 분이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의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이후 고전경제학자인 리카도와 제임스 밀 그리고 영국의 천재적인 자유주의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까지 이어본다면 우리가 그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학문과 서적을 남겼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를 마르크스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구론저자 멜서스를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예언도 맞았지만멜서스의 예언도 맞았다인구의 급격한 폭발적 증가는 환경공학에서 제일 먼저 고민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환경을 바라보는데 왜 사상과 학문인가그것은 공학적으로 처리하고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경제학과 인류학이 필요하며더 나아가 법률과 윤리학까지 이어진다환경은 단순히 폐기된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것만은 아니다이제 환경은 후속처리가 아니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가치로 등급한 것이다.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도서가 나올 때 1990년 후반부였다지금은 2015년이고저자인 최병두 교수가 논문을 집약하여 정리했으니 시기적으로 약 30년 정도 차이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내용이 전혀 낡은 것이나 시기가 지난 것이라 볼 수 없었다그 이유는 아직도 그런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환경정의환경에서 보는 관점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는 인간이 모여 사는 장소에 따라 그 위해도 달라지고들어서는 환경혐오시설도 달라지는 점이다.


최근 밀양에 765KV 송전탑 때문에 말이 많다언론과 미디어는 정보를 통제하고그 지역의 주민들을 무시했다그런데 왜 이런 송전탑을 세우는가이유는 간단하고 복잡하다이런 송전탑들은 한국지역의 남측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위쪽인 서울경기지역으로 보내기 때문이다서울경기지역에는 발전소 중에 핵발전소 같은 시설이 없다부산 기장과 울산 그리고 전남 영광 등 한국에서 남측에 위치한 곳에 핵발전소가 위치해있다지정학적으로 북한과의 무력충돌 시 적의 미사일이 발전소를 강타할 때 문제점을 보면 바를 수도 있겠지만문제는 후속대책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핵의 에너지를 점차 줄여가는 게 세계추세이나 한국에서는 핵에너지 의존도가 증가한다계속되는 푸른 도시와 맑은 공기를 위해 핵발전소의 만능주의를 외치지만사실 핵폐기물 처리와 핵 사고는 치명적인 것을 넘어 국가존재조차 흔들게 만든다일본 후쿠시마발전소의 피해는 이미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그 주변에서 나온 음식을 먹은 사람은 암으로 걸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방사능의 폐해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방사능 오염도 문제거니와 해체적인 요소 그리고 원자력을 대신할 에너지도 필요하다그런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적 집단과 경제적인 조직의 이익이 합치되면 국가사업이 움직이는 일이 많다.


핵 발전에 들어가는 원자재나 또는 발전시설을 세우기 위해 일부 독점자본기업가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노릴 수 있다이런 결과는 바로 밀양아리랑이 서글프게 울려 퍼지는 할머니들의 비명처럼소수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공리주의적인 방식은 분명 사회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이나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환경갈등에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공리주의복지주의가 구분되어 있다한국은 이미 신자유주의국가이고그러면서도 복지국가 선언을 하나복지보단 정지에 가까운 수준이다공리주의에서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관점을 다르지만기본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는 전기 공급은 중요하다하지만 대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점을 문제다.


에너지를 오염시키지 않고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최근 대체 에너지가 급부상한다그러나 정보력 부족홍보부족기존 기득권의 이익이 작용되면서 난해한 부분이 되어간다과거 참여정부에서 자동차 연료를 석유에너지보단 하이브리드 기술을 발전을 추구할 때 기존 정유회사와 자동차업체 반대에 무산된 점이 있었다환경정책은 21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자본의 권력에 무참히 밟히게 된 현실이 있었다환경정의를 필요성은 환경의 대상은 어디에 존재하느냐이다환경이란 공간은 먼저 생태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사회적 환경도 포함된다사회적인 환경법과 제도 경제적 권력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가난한 사람일수록 집은 환경적으로 열악하다근대화산업이 빛을 보던 때 한국은 경제성장에 환호했지만대다수의 서민과 노동자들은 좁은 집에 환풍기능이 열악한 곳에서 살았으며수도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하수도 이용에서 불편을 겪었다집값에서 좋은 숲과 하천이 있는 곳보단 공장지대와 황무지 쪽에 위치하면서 나쁜 공기와 물을 접하게 되어 환경위생학적으로 불량한 상태가 되었다.


환경정의를 말하려면 우선 최병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존 롤즈의 철학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른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가난한 자들은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교육이 되지 않으면 국가경쟁력이 저하되고문화적 혜택이 되지 않으면 인성의 한계성이 온다이런 자들이 정치적 사회적 참여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보일 수 없으며정치적 합의에 따른 국가운영에서 시민들의 자질이 부족하게 된다물론 이 관점은 롤즈가 칸트주의자에서 시작한 것이고칸트를 넘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환경적인 불평등을 보고 있었다가난한 자들은 비위생적인 주거공간과 음식으로 병이 들고가혹한 육체노동으로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환경과 더불어 인류 불평등적 기점에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마르크스주의에서 도시기능이 인간을 소외하고 가난한 자들을 계속 외지로 내몰며주거환경정비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연결되는 점까지 말이다환경공학에서 이런 경제적인 정치적인 요소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하지만 사상철학으로 들어가면 환경은 결국 인간의 정의와 칸트가 요구하는 선(, goods)의 가치를 말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좋은 환경을 원한다자신의 집 주변에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반대를 한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환경을 파괴되는 것은 무관심하다심지어 공장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감하기 폐수와 오수를 무단방류하고대기오염물질과 악취를 여과 없이 내보낸다그 결과 주변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호흡기질환 및 안과질환에 시달리고폐수로 인해 하류에 사는 주민들은 상류에서 공급되는 상수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다특히 과거 낙동강페놀사건과 같은 환경오염은 페놀의 화학적 반응으로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낙태될 정도였다.


결국 환경적 처리비용을 두고 기업적 이윤추구는 환경적 공공재원을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환경보건적인 문제까지 확대시켰다환경정의가 왜 정립되어야 하는가그것은 단순히 법과 제도적인 영역을 지나 인간생명과 환경적 기능의 마비로 인한 생활의 위협까지 넘어간 것이다이런 시기에 환경이란 단어는 미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경제발전 앞에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세태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이미 21세기가 아니라 <환경갈등과 불평등>에서 언급된 내용이다경제민주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에서 모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투입과 회수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기 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생기면 그 자본의 출처와 투자의 범위 그리고 고용발생과 사후관리방안을 골몰히 생각하기보단 단지 눈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한다대도시에 대규모상점이 입주하면 그 지역의 상권과 문화적 발전이 일어나나기존 골목상권과 더불어 교통체증인구증가에 따른 폐기물증가차량증가에 따른 대기오염 및 소음진동 피해가 일어난다환경이란 것은 처음 경제적 이익에 치중하면 후폭풍으로 다가오는 함정과 같은 존재다눈앞에 신기루처럼 이익의 효과범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것을 감당해야할 지역주민이다.


지역주민이 기업과 정부 혹은 환경단체에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그 지역의 환경 분쟁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다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있다는 점이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다가 점차 지방자치단체에게 업무를 위임했으나업무적인 영역에서 위임했지 권한에 대한 결정권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다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기반이 되는 지역주민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주민들의 반대의사를 억지로 무마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노동의 투입이다노동력조차 이제는 인간보단 기계로 대체되고인간은 보조적으로 투입될 뿐이다하지만 노동력의 주요 동력이 인간이든 기계든 그 파괴되는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다자연에 대한 환경파괴는 여전히 공공재원으로서 가치를 저하시킨다공동의 재원을 일개 개인이나 업체가 점유하여 개발하는 것은 용이해도 그 이후에 일어난 환경문제에 방관하는 태도도 일부 보이기도 한다환경 분쟁에 대한 해결에서 지역의 빈부격차문화수준학력차이 등이 결국 많은 불평등적 요소를 야기한다그래서 롤즈의 철학에서 보듯이 최소수혜자의 대한 입장배려는 환경정의가 필요한 이유이고환경에 대한 추가적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 환경오염에 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리에 자동차의 매연이 보도블록 위의 행인에게 덮칠 때아파트 단지에서 떨어진 공단지역에서 악취가 나면 상당히 불쾌해한다심지어 수도관에서 녹슨 물이 나와도 생활에 많은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환경피해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평소 환경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망각한다자신의 편리함만 완성되면 남의 입장을 보지 않기에 환경정의는 매우 윤리적인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하지만 만약 윤리적 조건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면 아직까지 산업재해나 환경오염 피해자가 나올 리가 없다공장 안의 악취매연도 환경오염 중에 하나다환경이란 조건은 우리 인생 그 자체에 존재하고지구 안에 어디라도 존재한다신자유주의에 대한 환경적 정책에서 내가 놀란 점은 환경제국주의다.


기존에 자신들이 이미 다 사용하여 쓸모없는 환경발생 공정을 후진국에 넘겨 그 제조과정에서 나온 상품을 다시 받는 점이나환경오염을 정화하는 기술을 토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환경산업에 대한 지적이다이들은 교묘히 환경오염을 다른 나라에 떠넘겨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최근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제3국의 발전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그들은 19~20세기 산업화 때 오염물질을 이미 지구에 뿌려놓고 이제는 후진국의 발전을 환경오염원인자라 매도하고 있다환경에 대한 국제적인 분쟁은 여전하고우리도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나연안에 불법으로 투기되는 폐기물도 문제다.


환경은 단순히 수질대기토양만이 아니라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식량도 포함된다청정지역의 확보는 식량조달의 기본이다동해 권에서 일본서해 권에서 중국 어민과 마찰을 맺으면서 식량안보에서 환경문제가 기반 되는 것이다오염된 곳에서는 생물체가 살 수 없고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이 나올 수가 없다이런 실태에서 우리는 명분이란 것을 찾아야 하고명분을 위해서는 논리와 사유가 필요하다환경하는데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 환경은 인간에게 제외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온 점이다환경정의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상적인 망상이 아니다지금 우리 삶을 지탱해야할 가치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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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8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8 14:29   좋아요 0 | URL
허허허

2015-07-28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