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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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그리고 그와 대담한 선정우 역시 한국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한일 양국의 문화평론가 거기에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보단 하위문화라고 불리는 서브컬처에 대한 연구자들이 대담하는 것이란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이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된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보며 일본 하위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하위문화까지 지평을 넓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한다면 오쓰카 에이지의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한다>는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지식과 사유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과 담론을 이어간다.

 

국내에서 하위문화 연구자로 선정우는 명성이 있는 분이다. 하위문화가 한국에서 그동안 탄압받고 규제되어 왔으며, 단지 아이들이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여겼다. 그러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서사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하나의 문학성을 인지하게 되면서 하위문화에 대한 다방면적인 검토가 가능했다. 하위문화적 특성 즉 오타쿠문화에서 보는 내 입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대중사회를 거치면서 자신에게 언제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 자신의 취향과 성향 그리고 상황적 순간에 따라 그런 대중적 가치를 받아들이기도 하나 때론 거부하기도 한다.

 

인간의 성향과 취향은 모두 같을 수가 없지만, 대중문화 코드에서 언제나 일괄적이고 전체화된 문화적 요소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모든 주변인하고 다 잘 지낼 수는 없다. 스트레스, 강박관념, 무의식적인 욕구 등이 인간에게 하나의 집착을 보이게 하고, 그 집착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오타쿠문화에서 잘 인지할 점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만족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길 원하는 점이다. 끊임없이 생기는 욕망은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공허감이 자신들에게 창작 내지 생산적인 관점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과거 오타쿠문화는 그러했다. 일본 대표적 오타쿠이면서 현재 전 세계 오타쿠문화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있다. 그는 특촬물을 좋아했고, SF영화로 울트라맨 특촬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오타쿠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집착과 집중력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하위문화로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대중문화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크기 때문에 언제나 주제가 진부한 Cliche로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사람들과 만화애니메이션 등 하위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방영되는 TV드라마조차도 기존 대중문화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위문화 콘텐츠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웹툰은 그렇지 않다. 다음과 네이버 심지어 웹툰전문 사이트까지 등장하여 웹툰은 이미 한국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웹툰의 작가는 기본적으로 만화작가라는 점이고, 그들이 만화를 만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한국에서 만화작가와 웹툰작가는 동일선상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웹툰이 인터넷 매체에서 흥행되자 드라마 각본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식객>이나 <미생>이 있고, 일본 만화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도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 시나리오 제작에서 기존 드라마에서 제공되는 이야기는 흔한 주제에 흘러가고, 흔한 내용과 결말로 이어져간다. 대중들도 거기에 만족하기도 하나, 가끔 새로운 주제와 흐름 또한 재미를 요구한다. 하위문화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는 바로 대중문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 오타쿠문화가 한국에 오면서 많은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 또는 다른 문예계통 작업자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기존에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도전과 흐름이 하위문화에 숨어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거대서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고 개인이 그에 따라 움직인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도래는 개인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거대서사에서 작은이야기의 분할로서 매체가 발달된다. 대중문화는 작은이야기를 올리더라도 그 한계성은 거대서사에 맞추어진 작은이야기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처음에 색다른 이야기가 결국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것에 흘러간다. 단지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라는 점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

 

예전에 TV 드라마로 흥행한 삼순이 신드롬을 보자. 노처녀에 뚱뚱하고 잘 살지 못하는 삼순이가 재벌에 잘생긴 연하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새로운 자태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의 욕망을 보여준다. 과거에서는 계급에 따라 지위가 달라지지만, 현재는 자본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에 대한 욕망은 어느 자본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시야는 그 여성의 외모와 상관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분은 김선아 씨고, 본래 그 분은 날씬한 미인이었다. 단지 연기를 위해 살을 찌우고 미녀로 꾸미지 않을 뿐이다.

 

드라마 종영 후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미디어세계 즉 가상의 드라마에서 김선아 씨가 연기한 삼순이는 뚱보이나, 현실의 김선아 씨는 미녀연예인이다.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한계란 바로 저런 현실과 가상의 간격을 대중으로 하여금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위문화라고 모두 좋은 것만이 아니나, 적어도 하위문화에서는 대중문화와 다른 분리적인 요소를 공격하는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좋은 예처럼 마이너리티의 문화가 하위문화에 엄연히 존재한다. 예전에 재미있게 본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 시리즈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이너리티 계층을 보여준다.

 

마이너리티의 모습은 대중문화에서 나오기란 어렵다. 그곳에는 현실에 존재하나 현실의 인간들이 외면하고 감추려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revolution Number3>에서 문제아 고교집단이 나온다. 거기에 재일한국인, 이혼가정, 오키나와 주민, 혼혈인 등 다양한 사회적 소외계층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일본에서 비주류고 어떻게든 엘리트집단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밑바닥을 오고가는 사회적 약자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자였다. 그들이 이길 수 없었던 사회는 모순과 부조리의 연속이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좀비들은 열성인자 유전자를 아가씨 학교학생과 연애하여 이어가려 한다.

 

우성인자라도 계속 머물면 도태되는 것처럼 교류 없이 정체된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각자에 대해 정체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적 속성이나 취향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많은 이야기와 흐름이 요동친다. 대중문화는 아주 넓은 호수가 있지만, 호수의 수심은 1m 안 되는 곳이고, 하위문화는 관로의 직경이 1000㎜ 된다. 단지 어떤 사회인지 조건에 따라 관로 안의 물탱크는 1㎥도 될 수 있고, 1000,0000,0000㎥도 될 수 있다. 드러난 것은 수도꼭지이고, 수도꼭지 아래에 숨어있는 물탱크는 미지수다.

 

보통 사람들이 미지수의 수원이 자리 잡은 하위문화를 접하면서 생각하는 점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하위문화 특성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다른 작품들을 모르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과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은 작품으로 여기고 비평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기 비판적 태도이고, 어떤 주제에 대해 흔한 결말로 이어지는 Cliche를 벗어나고, 더 중요한 이유는 프로파간다를 벗어나 상상력을 우선 시하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판 25화와 26화는 신지가 인류보완계획 이후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이코드라마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자기 안의 결단력을 세워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표심이 생기자 주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끝이 난다. 만약 이렇게 끝이 나면 서사의 완결은 갈등의 해결점, 어째 보면 카타르시스의 해소와 더불어 현실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가능하다는 회피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7년에 <Death & Rebirth>와 <End of Eva> 2편이 상영된다.

 

<Death & Rebirth>는 TVA 1~24화까지 축약하고 거기에 다른 장면을 추가로 집어넣고, <End of Eva>는 인류보완계획으로 모든 지구생물이 멸망하고 신지와 아스카가 남는 것으로 끝이 난다. <End of Eva>의 절망적인 결말은 주인공 파일럿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오직 고립만으로 현실의 상황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바로 이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는 현실적 절망에 작품적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단절성을 보여주고, 거대서사로부터 벗어나 거기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런다고 모든 게 그렇지는 않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작품 <반딧불의 묘>처럼 일본과 한국에서 보는 관점도 다르고, 거기에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미도 보는 이에게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도 흥행한 <코드 기어스>도 한국에서 제국주의적인 요소로 비난당하고, 일본에서 극우세력에게 비난당하고, 미국에도 비난당한다. 자신들이 과연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오해가 있을지라도 보는 이에게 다른 관점을 주는 것이다. 작품을 만든 작가들은 의도하던지 혹은 의도하지 않던지 그 작품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윤리성에서 작가에게 달린 것보다 소비자 즉 향유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 작품이 문제성을 보고 느끼는 것은 관중의 입장이지 제작자의 입장이 아니다. 제작자는 창의적인 사고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다면 그것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향유자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관객이라면 작품에서 다가오는 이야기가 바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관객에게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던지 혹은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고 싶은 불편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제작자의 의지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현실의 대다수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심어주려 하지 않는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서 기존 일본인들이 피하고 싶은 것은 은근 집어넣는다.

 

하위문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상상력을 억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화에서 상상력에 대한 언급에서 나는 진중권 교수의 서적에서 본 말이 생각난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을 말이다. 윤리적인 태도에서 상상력이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적 상황에서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만약이란 것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에 대한 사유와 판단을 하게 할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단순히 소비하고, 그 의미의 전후맥락을 놓친다면 단지 불편하게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불편한 것들에 대하 성찰은 내가 살아있는 현재를 말해준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한편으로 단점도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문화는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여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들의 소비와 향락에 침식당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는 아키하바라에서 모여 무언가를 만들고 활동한다면, 지금은 아키바계 상업적 비즈니스의 고객으로 변했을 뿐이다. 물론 소비의 영역에서 창작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오로지 소비에만 치중하여 오타쿠 문화에 유입되는 부류는 현실에 불만족에 대해 자신이 만족할 것을 찾기보단, 그저 현실적 문제에 눈을 돌려 자신만의 세계 갇히게 된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갇혀있는 사람에 대한 비판성이라면, 그것이 오타쿠문화 3번째 혁명이란 점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거대서사 해체 후 작은이야기의 진입에서 모에요소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모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소비시장으로 계속 집중되고, 하위문화 향유자들은 현실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성보단 현실 그 자체의 부적응자에 의해 채워져 간다. 일본 넷우익이나 한국의 극우성향 사이트에서 애니메이션 소비자가 많다는 점은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기보단 그 현실적 문제를 자신과 사회적 구조보단 어느 다른 누군가로 전가시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담에서 계속 느끼나, 과거 내가 잠시 읽어본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의 내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은 기존 소설이 몰락하고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 계통의 이야기들이 앞으로 흥행할 것이라 보았다. 근대성의 종언, 즉 모더니즘의 종료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에서 단절되어 기존에 없었던 것들의 탄생이다. 오타쿠문화는 거대서사에 대해 생각하면 대중문화 기류에서 분리된 존재다. 그런다면 대중들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대중들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없는 점과 그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지는 하위문화일 수밖에 없는 점을 나는 위에 언급했다. 그렇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기에 극단적 행동도 불사하는 요소도 보인다. 과거 일본과 한국은 농경중심의 사회다.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결혼, 장례, 식사, 교육, 기타 수많은 문화적 유산이 가족들 안에서 해결되었다. 자급자족 사회에서 생산된 것이 교환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로 이환되면서 개인의 존재는 집단사회 즉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신의 정체성 및 자아에 대한 혼돈에서 캐릭터적인 요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이야기를 보면 사회에서 보면 그 당사자는 매우 불합리적이고 악의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에서 그 인물 중심으로 전개될 경우 그만의 합리성과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윤리성의 영역하고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혹은 현실적인 부분과 괴리성이 생기는 원인도 된다. 하렘이나 미소녀연애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점에서 그것이 하나의 장르로서 이용하는 게 문제는 아니어도, 그 자체로 빠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남성은 왜소하고 특별한 것이 없지만, 어느 계기로 주변에 수많은 미소녀들이 모이고, 남자주인공 한 명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연애 공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력보단 자기 캐릭터를 합리화하기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들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대리만족으로 채워 나가고, 그 현실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한 이성적 판단력과 사회구조적 모순보단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약자라는 존재가 자신의 피해자 심리를 두고, 주변에 다른 약자에게 적으로 간주하여 피해자 심리로서 가해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그에 따라 보상 및 응징에 대한 대가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거대서사에서 응징의 용사는 가해자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봤기에 응징의 명분이 생성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응징은 실제의 피해를 주는 대상과 응징당해야 하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캐릭터설정을 계속 부여한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다르게 억압된 것들이 표출되는 요소를 보여준다.

 

대중문화이든 하위문화이든 이제는 소비중심 사회로 이환되어 더 이상 사람들은 사고와 비판을 하지 않은 세상이 도래했다. 지나친 억압보단 오히려 지나친 물질적 쾌락에 길들여져 우리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응시하기 것보단 단지 현실에 안주한다. 당장 길거리에서 나가 투쟁하는 시기는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질적 혜택과 재미라는 쾌락에 의해 그런 행위에 대한 반감만 불러올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모순과 부조리는 감지한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되고, 그 문제를 볼 수 없거나 보지 않는 사회라면 어두운 사회가 될 것이나, 하위문화는 바로 그런 사회를 비꼬거나 뒤돌아 볼 수 있게 만든다.

 

강풀의 <26년>이나 최규석 작가의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는 작품이다. 역사의 왜곡과 수정 그리고 은폐가 이루어지는 현실사회에서 어떻게든 그런 불만들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기억에 각인되고, 단절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려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탄생은 바로 저런 거대한 흐름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간다. 그런 이야기들이야 말로 오타쿠의 문화의 특성이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잘 안 되는 게 현실이고, 그것을 밝혀내어 새롭게 해석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의문이 작품에 드러나도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단지 스쳐가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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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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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다시 생각났다. <1984>의 해설을 적은 비평가의 글에서도 쾨슬러의 소설을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1984>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낮의 어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소비에트가 일국사회주의가 거의 완결될 됨 1936~1938년 대대적인 숙청기간이 지속된다. 모스크바재판의 4차례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남기고, 당시 스탈린에 의해 죽은 자가 수백만이란 말도 있고, 수천만이란 말도 있다. 러시아인구의 엄청난 비율이 당시 스탈린이 자행한 공포정치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 중에서 특히 많았던 것이 반() 사회주의자 내지 반() 볼셰비키주의자라는 점이다. 반대되는 세력이 자국에 있어서 스탈린과 그의 수하들은 부지런히 자신들의 적을 찾으러 다녔다. 문제는 그 많은 적들이 과거에 볼셰비키혁명에서 활동하던 자라는 점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레닌과 같이 활동했지만, 사실 그가 혁명 당시 관여한 것은 트로츠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혁명 이후 각종 상급기관의 위원회로서 참여했지만, 레닌이 죽고 나서부터는 서기장으로서 권위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자기에게 가시 같은 존재 혹은 가시처럼 될 수 있는 존재, 더 심하게는 자신에게 충성했으나 뭔가 자신하고 동질의식을 느낄만한 자는 모조리 죽이기 시작한다. 아서 쾨슬러의 소설인 <한낮의 어둠>은 회의적이고 암울한 사실적인 작품이다. 루바쇼프라는 볼셰비키혁명가는 볼셰비키 내에서 상당히 공적이 높았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고, 차가운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간수의 손에 죽게 된다. 그때 처형방법이 앞을 걸어가는 죄수의 목덜미에 권총을 사격하는 것이다.

 

<1984>를 예전에 읽을 때, <한낮의 어둠>을 읽기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책을 읽은 후에 <1984>를 보면서 스미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스미스의 죽음은 영락없이 <한낮의 어둠>에서 나오는 루바쇼프의 죽음과 같게 나온다. 단지 차이는 루바쇼프는 변해버린 혁명적 가치를 보면서 회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신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반면, 스미스는 혁명적인 사고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빅브라더에 대한 환희를 가지고 마감한다. <1984>에서 스미스를 감시, 고문, 회유하는 오브라이언의 대사가 끔찍한 이유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마음에서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다.

 

오브라이언의 말과 스미스의 최후에서 스미스는 먼저 총살 전에 어리석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죽은 자들의 기록을 보면 다르다. 당시 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보다 가난과 부조리한 모순에 의해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교수형의 행어 앞에 갈 때, 도부수가 있는 처형대로 갈 때 그들은 자기의 불운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군중들은 거기에 호감을 보내고, 때로는 죄수를 구해내어 도주까지 시킨다. 죄에 대한 심판이 결국 그 죄에 대한 재판이 국가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론이 뒤따른다. 만약 국가의 심판이 틀리고, 세상의 여론과 하다못해 후대의 역사적 평가가 다시 재기되어 죽은 자의 명예가 되살아난다면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죄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게 된다.

 

그들의 죽음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결국 그 죽음은 잘 못된 것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틀리지 않은 것을 인정된다. 하지만 <1984>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애정부라는 고문과 처벌을 담당하는 기구는 스미스의 그런 정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여 그 사회와 국가, 심지어 군중들 사이에서 죄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반항과 저항한 자가 잘못한 것으로 돌아가고, 그것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그 사회와 국가가 오히려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 후에 죽음은 국가도 개인도 사회도 군중도 비참하지 않게 다가온다.

 

오히려 비참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비참한 현실이 되나, 그들은 비참하다는 개념조차 잊을 것이다. 분명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 일은 없었고, 다시 새롭게 조작되어 역사는 실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조작에 의해 탄생된다. 언어는 구어인 영어에서 신어로 전이되면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으로 줄게 되고, 인간의 사고능력을 축소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군주, 그 중에서 참주는 대다수의 인민들의 빈곤과 비참함으로부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1984> 역시 그 맥락을 유지한다.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위해서이며,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층민들의 가난과 무지로부터 시작된다. 가난하면 오로지 동물적 욕망에 의해 인간은 작동하고, 무지하면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문제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영국사회주의가 움직이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당내 직원들끼리 외설적인 행동을 못하게 하나, 그 나라의 85%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아주 값이 싸고 저급한 포르노를 풀어놓는다. 그들에게 동물적인 본능만 충족하게 하여 무지가 권력의 힘으로 가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이 되는 것은 언제나 적이 필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계속 권력으로 이양되려면 외부의 적들을 만드는 것보다 내부의 적들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과학 역시 미개한 수준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지성을 확대하므로 인간의 예속은 곧 권력의 자유로 이전된다. 이런 폭력성과 억압이 모든 이유는 그 폭력과 억압이 목적이며, 이로 인해 권력을 여전히 권력만을 추구한다. 텔레스크린으로 통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그 감시체계는 텔레스크린만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이전된다. 땀 냄새가 진동되는 파슨스의 모습은 그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스미스는 의도적으로 타도! 브라더를 실천하려 했다면, 파슨스는 잠자는 도중 잠꼬대로 타도! 브라더를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은 결국 파슨스의 아이에게 전해지고, 그는 애정부에 끌려와서 스미스와 재회한다. 자식이 부모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사회, 빅브라더의 세계는 가족 관계조차 통제하고, 더 나아가 남녀 간의 사랑도 통제한다. 적어도 스미스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스미스의 아내는 키도 크고 제법 몸매가 있는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스미스는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적응하지 못한다. 부부 간의 성관계에서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한 채 아내는 치마를 올린 채 침대에 누워 마치 인형처럼 천장을 바라본다.

 

아내는 오세아니아의 정부에서 제시한 정치적 이념에 대해 충실하게 따랐으며, 그것은 스미스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게 만든 과거의 아픔이다. 7년 전에 스미스에게 정부의 감시가 체계적으로 붙은 이유는 아내의 이혼이 원인이다. 스미스 부부의 행동에서 빅브라더의 세계는 그를 고은 시선으로 볼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감정조차 하나의 과도기에 불과했다. 인간의 성적본능 악제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인체에 전기 자극을 주어 성적 욕망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권력자들은 피지배계층이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근원조차 거부한다. 그 사회는 애초부터 틀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틀린 현상이 있어도 이게 과연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옳은 것인지를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에서 오로지 사회라는 큰 구조에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생각할 것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미 며칠 전에 있었던 일상과 뉴스조차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끊임없이 조작된 역사와 현실에 살아간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는 날조되고, 현실은 왜곡되었으며, 미래는 조작되어간다.

 

게다가 구어의 등장으로 언어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언어의 상실은 개념의 상실이고, 개념의 상실은 사고의 상실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평등만이 존재한다. 모두가 권력 앞에서 복종하고 따르는 완벽한 평등이 말이다. 과도기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 시대에 있었던 문제를 적어도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문과 심문에 의해 기억이 조작되고, 의지가 상실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했다는 사실을 존재한다. 단지 사실이 타인에게 역사적 사실로 이어질 수 없는 게 비극이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루바쇼프를 심문하는 클레트킨은 이성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루바쇼프는 매우 이성적이고 지성이 넘치는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몰락이 필요한 이유는 그 사회에 지식인이 가진 재산인 지식 그 자체가 그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루바쇼프는 혁명가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기에 스탈린의 눈에는 상당한 가시거리다. 지식인들은 그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왜 빅브라더와 오세아니아국가는 골드스타인와 형제단을 빌미로 하여 스미스를 자극했을까? 실제 과거에 있었을 골드스타인, 있지도 않을 형제단의 가치는 자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부의 적을 색출하게 만드는 미끼인 셈이다.

 

그런 미끼가 있기에 여전히 빅브라더는 강력한 힘이 있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항하는 적이 있다는 것을 군중에게 알려준다. 증오 2, 증오주간에서 골드스타인은 솔직히 아무 힘 없는 노인으로 나오나, 오세아니아 정부에 일하는 당원들에게 그보다 더한 무서움은 없는 것처럼 나온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는 그 책, 원래 토대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1984>를 읽기 전에 다시 정독했다. 스탈린과 소비에트정부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밝히는 이 책에서 빅브라더가 가장 적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밝히려는 자들이다.

 

물론 빅브라더의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많은 독재자와 독재자의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라면 골드스타인과 스미스를 가장 예의주시할 것이다. 오웰은 프롤에게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무지는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 역시 무지가 힘을 넘어 정의로 다가온다. <1984> 같은 세계는 되기는 어렵지만, 그런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주변에 도청과 감청, 조작과 은폐 같은 일들이 넘치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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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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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예전에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김수정 작가의 <아기 공룡 둘리>는 내 어린 시절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에서 보통 30~40대 남녀 구분 없이 김수정 작가 작품을 만화로 보던지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것이다. <아기 공룡 둘리> 주제가 역시 추억이 담긴 노래이다. 그런 둘리라는 친숙한 이야기가 최규석 작가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었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둘리는 고철수와 고희동에게 이용당하는 모습만 나온다. 모두 어린 시절 순수하고 놀기만 좋아한 악동이었으나 커서는 악동이 아닌 악당 같은 모습도 나온다. 희동이는 다른 사람을 때리고, 철수는 자기 친구들을 이용해 먹는다. 또치는 동물원으로 팔려가고, 도우너 역시 외계인 연구가에게 팔려간다. 그나마 또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도우너는 해부를 당해야만 했다.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서로를 뒤통수를 날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렸던 자신과 얼마나 많은 간격이 있는 것인가?

 

그나마 둘리는 그 옛날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모두가 변한 모습에 둘리의 좌절은 그야말로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마법을 쓰지 못한 둘리에게, 단순히 둘리의 슬픈 오마주는 둘리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우리 일상에서 존재하는 이방인이란 존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겉모습이 독특한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보다 차별과 조롱 속에서 살아간다.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현실에 대한 풍자와 슬픈 그리고 고뇌가 넘치는 것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단순히 둘리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규석 작가가 만든 작품들을 모운 하나의 단편선집이라고 볼 수 있다.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재학 혹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그의 세상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본 <습지생태보고서>는 재미 속에 숨겨진 풍자라면, 이 단편선집들은 그야말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풍자한 것이다.

 

그나마 맨 처음에 인디애니메이션 <셀마와 단백질>에서 나온 <사랑은 단백질>부터 나와서일까? 자기 팔을 잘라 족발을 파는 돼지, 자기 아이를 구워 치킨을 파는 닭,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나, 작품에서 말하는 현실적 모순은 상당히 날카롭다. 대학 자취생조차 돼지저금통에 담긴 동전을 꺼내기 위해 칼로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른다. 돼지저금통은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병아리를 튀김 통닭집 아저씨 역시 고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난한 우리 소시민은 오늘 당장 먹고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버려야하는 비극적 요소를 풍자와 해학으로 보여준다. 최규석 작가 작품은 만화로 봐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나, <사랑은 단백질>은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이 매력적이다. 최규석 작가 작품을 보면 상당히 현실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담긴 웃음에 대한 미학은 아마 최근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현실에 대한 관찰에서 약자가 당하는 모습에서 정말 리얼리티 그 자체를 부여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모두 열광할 때를 대비하여 <연평해전>이란 영화도 나왔지만, 경기장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환경정화라는 슬로건 역시 문제다. 최근 <두 개의 문> 내지 <소수의견>에서는 자신의 터전을 잃는 것에 대해 공권력에 저항하다 무참히 밟혀버린 서민의 눈물이 나온다.

 

<선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과연 이성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서일까? 아니라면 그것이 무시된 것일까?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에게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도 싫었었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그것을 종용토록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의해 흙탕물에서 뒹굴 수 없는 약자의 눈물 그리고 분노, 좌절감이 보인다.

 

왜 만화가 예술로 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대중매체에 이런 불합리적인 존재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영상매체 같은 경우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고, 이 자본으로 통해 이익과 효과를 노린 자들은 대부분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화는 누구나 그릴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화면 위로 나타낼 수 있다. 글로 적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 묘사와 상황을 글로 표현하려면 많은 고민이 되나, 그림은 당장 그려내어 볼 수 있다. 대신 그 조건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기반이다.

 

최규석 작가를 전에 가까이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있었다. 토크콘서트에 가본 것과 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사장의 게스트로 참석해서 옆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때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서 그를 억압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의식이 살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늘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선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모습보단 그 모습 이면에 가려진 것들, 즉 광학적으로 틀어보는 눈빛이 그의 작품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면 다소 폭력인 장면이 많다.

 

사람의 목을 잘라내는 장면도 등장하고, 피가 흐르거나, 구타하는 장면 등등도 나온다. 만화의 문제점이 폭력성을 유발한다고 하나, 정작 사회의 폭력성에 무감각한 현실이 더 심각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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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08-1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심 이거보구 바로 인터넷에 쳐봤는데.. 내용장난아니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ㅜㅠㅠ

만화애니비평 2015-08-18 18:01   좋아요 0 | URL
작가님의 날카로운 그림이 장난이 아니죠.

카스피 2015-08-1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끼는 책중의 하나인데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20 08:39   좋아요 0 | URL
대단한 발상력이죵
 
사회계약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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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를 두고 괴테는 그로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독일 최고 문학가이자 세계적인 인물인 괴테에게 루소도 그러하고,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세계적인 작가 톨스토이 역시 루소가 새겨진 동전을 목에 걸고 다녔다. 루소의 영향은 18세기 <신엘로이즈>로 여성들의 마을을 흔들었고, 19세기 혁명의 시대에서 <사회계약론>은 혁명가들의 복음서였고, 20세기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자본주의사회와 문명사회에 자연주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주고, 21세기에 <에밀>은 교육문제에 파국으로 닥친 한국사회에 많은 것을 주고 있다.

 

루소를 다시 읽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인간인 루소이지만, 그의 책에는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한 미래보다 더 먼 미래를 향하여 루소는 눈을 돌린 것이다. 인간에 대한 문구에서 <사회계약론>의 이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는데,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실 그들보다 훨씬 더 노예가 되어 있다.” 물론 출판사마다 다루게 번역되어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그러나 도처의 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노예로 되어 있다.” 등으로 말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이 구절은 인간의 관념세계를 확장시키는 혁명적인 문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루소가 살던 18세기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된 1762년은 프랑스에서 왕정사회였기 때문이다. 루이14세의 절대왕권의 선언과 그 이후 부르봉왕가는 왕족, 귀족,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에는 모든 게 자연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으로 다른 하나는 정치적, 도덕적 불평등이다.

 

태어나는 인간은 아직 어떤 능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저 타인의 도움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약자다. 그런 인간이 정치적인 조건에 따라 성장하여 그가 어른이 되면 불평등한 세계의 일원으로 완성된다. 불평등의 세계에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인간에게 악덕을 주는 오만한 학문과 불필요한 도덕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처럼 인간의 문명과 기술은 이미 인간에게 물질적 혜택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불행과 고통을 선사한 것이다. 진보적인 사상가이면서도 반진보적인 가치를 가진 루소는 인간의 역설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살아가야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라면 누구라도 불평등하게 서로를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라는 조직은 그저 우리 인간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야 할 계약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라는 공간은 우리가 계약에 의해 존재된 것일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남김없이 고발한다. 마지막에 갈수록 그것은 자본에 대해 비판한다.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18세기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산업혁명과 동시에 가속화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소수의 거부인 부르주아와 그 밑에서 일하던 농민과 노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루소는 마르크스 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자본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중심으로 삼지 않았으나, 루소 역시 자본가 존재에 대한 경제적 착취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 자본에 의해 혹사당하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프랑스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루소가 자연적 인간을 추구한 이유는 문명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연에 살고 있는 주민을 내모는 인클로저 현상을 목격한다. 빵을 만들 사람들이 빵을 구하러 도시에 가나, 그들에게 오는 것은 비참한 현실과 절망이다. 자연에서 살아가면 인간은 산속의 열매를 따먹고, 강가의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도시에서 심각한 노동착취에 의해 고생하고, 더러운 주거환경에 병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자연의 공간이 공유지에서 사유화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쫓기게 된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도시로 가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저 거지처럼 구걸하거나 좀도둑처럼 물건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침부터 밤늦게 열악한 환경에서 심신을 소모하는 과격한 노동에 시달린다. 자연인으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이유는 적어도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억압도 없으며, 정신적으로 영혼에 병이 들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연인들을 볼 때 아마 볼테르와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사람이 어찌 숲 속의 곰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루소가 그것을 점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가 본 도시의 삶이란 척박했고, 민중의 삶은 고달픔으로 가득하여 서로의 이기심을 위해 불속에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같았다. 숲 속에 사는 곰이 될 수 없고, 농사만 짓고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대 그리스사회는 이른바 폴리스를 형성하여 살았다. 폴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주인이 되어 결정하고 의결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시민들의 가치를 공공의 이익에 반영하여 그 의지를 일반의지 혹은 보편적의지로 삼은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바로 그런 의지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고, 그것으로 정치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책이다.

 

루소 이전에 법철학 서적이 있었지만, 귀족이나 왕족 중심이었지 일반 민중에게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초시라고 볼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21세기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을 만들고,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념적 가치가 되었다고 하나, 막상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잘은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에서 지배하면서 다시 루소의 사상을 돌아보면 루소의 가치와 많이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팔정도로 너무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 오늘 우리 주변에 자신의 몸을 비참한 운명에 파는 인간이 너무 많다. 루소가 바라본 과거와 지금 내가 바라본 현실에 차이점은 그다지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공공성에 대한 의지성이 필요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에게 주권을 절대로 누군가에게 줄 수 없고, 파괴될 수 없으면, 인간의 주권이 파괴되는 것은 그 존재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21세기 민주주의에서 주권에 대한 의식에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체계에서 직접이 아닌 간접적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루소는 당파의 존재는 필요할지 모르나. 그 파당의 이익에 대하여 정치적 입지가 갈리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이 일어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마치 성경 이상으로 여기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도 비극이 일어났다. 단순히 누군가 소수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계약론>을 읽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성에 대한 보편적 의지를 담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 훌륭하게 만들어간 나라는 거의 없었다. 루소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의론>을 읽은 후 <만민법>이란 책을 읽어보았다. 만민이란 시민도 되고 인민도 되는 책이다. 어느 특정지역에 살아가는 인간이기보단 만민은 전 세계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권하는 게 롤즈의 철학이다. 물론 롤즈의 철학이 칸트로부터 시작하고, 칸트는 루소의 영향을 받는다. 21세기가 와도 여전히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고, 세계와 개인도 존재한다. 그 사이에 인간은 타인과의 정치적 입장에서 늘 선택을 한다. 그러나 좋은 선택보단 잘못된 선택이 많을 때가 많다.

 

루소 이후 민주주의 철학은 발달하고, 사회적으로 발전을 계속해도 그 정치적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루소의 책은 18세기는 분명하나, 21세기에 읽어봐도 그렇게 부족하거나 시대적인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문명적 혜택은 분명 차이가 나겠지만, 인간 본래 존재적인 가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과거에 만든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는 이어져야갈 필요가 있다. 보편적 사고가 멈춘 곳에선 어느 모략을 가진 자가 나타나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보단 그것을 파괴하는 전제군주와 정치제이다. 루소의 책을 읽으면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이상적인 방향보다 오히려 그렇지 못할 경우 나타날 비참한 현실이 더 인상적이다. 모든 국민이 복종할 것은 오로지 법이지만, 독재자는 법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과 그 무리가 나타날 경우 시민들의 권리는 축소되어, 자유의 의지가 박탈된다. 전제군주라는 그 자체는 21세기에 거의 사라져도, 거기에 버금가는 자들은 많다. 그런 전제군주와 같은 사람이 판을 치는 곳에서 인간의 자유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슬의 고리는 결국 자신의 원하지 않아도 묶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슬이 묶이게 되는 동기는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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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이승편 상.하 세트 - 전2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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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이승편은 저승편을 이어 나온 작품이다. 저승편에서는 저승차사가 죽은 자를 불러오는 것과 저승에 가서 인간이 심판 받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와 달리 이승편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이다. 옷과 집이 없으면 추위와 더위 그리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먹는 것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의식주의 해결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다. 만약 그것이 곤란한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신과 함께> 이승편은 상당히 씁쓸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은폐되거나 또는 조작되는 우리의 이웃을 볼 수 있다. 최근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전쟁 후 산업화 시대에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노년층으로 전략했다. 그들이 일할 때 농촌에서 나와 모두 도시로 이주했고, 전쟁 때 특히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도 많다. 그들은 이제 20세기 중반의 아픔을 겪은 후에 가정을 만들고 행복하게 살려고 했으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행복이 간다면 어느 누군가는 그 이상의 불행의 악운이 따른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차사 외에 살아있는 인간으로 서울 산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과 손자다. 노인은 연세가 오래되어 거동이 사실 불편하나, 종이폐지를 주워 하루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손자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가난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깐 손자의 아버지가 되는 자는 병으로 죽고, 그의 아내인 어머니는 밖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으며,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다. 할머니가 눈을 감을 때 아마 제대로 눈조차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죽는 게 엄청난 불효라고 한다. 그것만큼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슬픔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의가 아닌 우연의 사건이므로 죽는 자나 살아가는 자 모두 비극이 된다. 인간의 인생은 과연 행복인가 불행인가? 가끔 생각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절망은 우리 인생에서 항상 반복되어 나타는 현상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도대체 내가 살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좌절되어 존재성마저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승편에서 아마 그런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같다. 가진 것 없이 가난하고, 매일 생계에 고민하는데, 몸은 이미 병들어 앞으로 살아갈 날조차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을 말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도 응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던 자였다. 인간이 무속신이 되어 그들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물론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신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신이란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관찰만 하는 존재, 즉 이신론(理神論)적인 가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같은 경우 거대한 자연의 힘이 신과 같은 힘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나 각종 자연 파괴로 인해 인간은 이상기상현상에 재앙을 당하고, 공기와 물이 오염되어 인간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 우리 한국인은 자신이 사는 공간과 시간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새로운 집에 이주하거나 또는 자동차를 구매하면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음식물을 올린 제단을 앞에 나두고 절을 하여 앞으로 무사태평과 안전을 기원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행복한 일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단지 그렇게 더욱 간절히 자신이 바라는 것을 더욱 공고하게 하여 스스로의 암시를 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무생물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있는 나무도 베어내면 목재가 될 뿐이고, 돌과 시멘트, 각종 건축자재는 생명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집에 조상신이 온다거나 또는 가택을 지키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집터를 지키는 성주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등이 말이다. 우리 집은 신들이 지키므로 안전하다고 여긴 것이다. 아마 그것은 지금의 건축문화처럼 대규모자본이 대량생산 대량판매로서 가옥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모두 자기 손으로 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혹은 주변 사람들이 모여 집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의지가 집에 반영되어 있다. 집에 신이 거주하는 이유는 집에 사는 인간들이 집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집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신과 함께> 이승편은 가택신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조왕신, 성주신, 측신이 거주하는 한 주택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저승차사와 겨루고, 살아있는 철거업체 업주와 싸운다. 할아버지가 연로하여 이제 곧 강림도령에게 호명당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손자가 입학하여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가택신의 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롭다. 이승의 신 가택신과 저승의 신 차사에서 직급은 가택신이 높다. 그러나 가택신들은 힘이 약하다. 저승과 이승을 다스리던 대별왕 소별왕 형제에서 대별왕은 공정하나, 소별은 공정하지 못하고 간사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승을 통치하지 못해 이승의 세계는 언제나 불행과 슬픔이 넘치는 것이다. 늙은 할아버지고 고생하여 겨우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나, 아파트 재건축 투기열풍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강제로 토지를 매입당해 집이 철거당하니 말이다.

 

이 가난한 마을에는 유독 늙은 노인이 많았다. 노인의 친구는 오락실을 운영하던 주인이나, 자녀들이 제때 찾아와 돌봐주지 않아 혼자 외롭게 병과 굶주림에서 고독사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게 노인들의 죽음이다. 예전 시대에는 노인이 죽으면 그 집에서 모든 장례절차를 밟았고, 시신도 집에서 모신 후 매장을 하였다. 이제는 시신은 병원영안실에 모신 후 화장을 한다. 하지만 가족도 없거나 제대로 봐주지 못할 경우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다. 죽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아마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은 점이다. 살아있었다는 그 자체도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철거업체에도 가난한 청춘이 등장한다. 가끔 용역업체에 등록금과 생계수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본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보단 현실의 상황에 이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약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면 후에 엄청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언젠가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신과 함께>에서는 그런 한국의 민간신앙 요소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만큼 한국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짙게 베여 있다는 점이다. <신과 함께> 전체를 읽으면 현실이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승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장담은 못하나, 만약 있다면 대부분 거기서 살아있을 때 저지른 죄 이상으로 벌을 받을 것이다. 물론 저승조차 없으면 불가능하고, 후대에서도 과거의 인물도 다른 식으로 포장이 가능하다. 힘없이 억압받는 입장이 놓인 일반 서민들에게 현실이 오히려 수라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과 함께>는 다소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승편에서 보이는 철저한 현실의 고통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쓰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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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8-10 09:01   좋아요 0 | URL
아!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