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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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이다. 그녀의 만화는 20~30대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흐름을 타고 최근에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우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대해 읽어보고 서로 이야기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예전에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20~30대 여성에게 잘 와 닿으며, 특히 30대 미혼의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사고 있다고 한다.

 

아마 마스다 미리의 만화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짱때문인가 싶다. 이번에 내가 읽어본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 수짱은 36세 노처녀로 등장한다. 일본의 36세와 한국의 36세는 다르다. 일본의 1살은 실제 태어난 지 1년이 지나야지 나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1살로 본다. 일본과 한국의 나이세는 차이에서 한국은 일본나이를 고려할 때 만1세라고 이야기한다. 36세의 수짱은 한국나이로 37살의 여성이다. 최근 결혼연령이 늦어진다고 하나, 남성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늦은 나이인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수짱이 어디 외모가 특이하거나 이상한 것도 아니다(만화에서 그려지는 캐릭터를 보고 미적인 판단여부를 알 수 없다). 결혼하지 못하는 것인지 결혼하지 않은 것인지가 매우 불명확하다. 수짱의 주변에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환경적 여건이 많이 큰 것 같으며,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마음에서 누적된 자기불안심리가 더 공고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연애를 중심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사소한 경계점이 중심이다.

 

여성작가라고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공감대는 형성되었다. 일단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 아르바이트생과 정직원이 있다. 그런데 정직원 한 사람이 사장의 친척이고, 그녀는 수짱이 가게 점장 인데도, 그녀와 상의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대로 해결하려고 한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까지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의 관습이 참 피곤할 때가 많다. 수짱이 느끼는 불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다음에 계속 얼굴을 바꾸고, 그 험담한 사람과 잘 지내는 모습에서 인간의 이중적 모습이 지겨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아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가만히 있는 수짱 역시 자신에 대한 짜증과 기만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 수짱의 사촌동생이 겪은 이야기도 참 공감이 갔다. 식당이나 어디 가게를 가면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내가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려고 한다면, 접대하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혹은 적을 수도 있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아르바이트생으로 와서 서빙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시내에 나가면 보통 대학생이나 휴학생들이 아직 어린 표정으로 손님을 대하는데, 가끔 가다보면 손님 중에 무례한 사람들이 많다. 반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큰 소리에 짜증까지 부린다. 물론 그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하지 못하거나 실수를 하고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거의 없다. 한국사회도 그러하거니와 일본에도 그런 요소를 지닌 점을 본다면 한일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심리적 요소는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일상에서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큰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 너무 일이 커지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침착하게 해결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인간은 어느 순간 냉정을 잃게 된다. 그동안 계속 자기 마음에 응어리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서 그런 점을 가끔 본다. 누구는 프린터에 용지가 없으면 다시 가지고 오고,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면 일일이 빼주는데, 막상 프린터에 출력을 보낸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백 장의 인쇄물을 출력버튼을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에서 지정하고, 그동안 자기 일만 한다. 다른 사람들도 출력물을 뽑아 사용해야 한다. 어느 누구만 일이 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면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소한 일에서 짜증나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사소함이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 수짱 사촌동생이 식당에 가면서 남자친구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다. 점원에게 물을 주세요.”가 아니라 여기! 이라 말한다.

 

평소 사람을 대하는 인격이 거기서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수짱의 사촌동생은 불쾌감만 느끼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도 가족과의 스파크가 튄다. 신발을 벗을 때 가지런히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되는대로 벗어버리고, 말투나 분위기도 조금 감정적으로 나가기도 한다. 밖에서 왠지 모르게 불만을 받으면 거기서 해소되지 못한 채 어딘가 폭발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TV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에서 위에 계시는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종종 이유 없이 짜증내거나 업무로 꼬투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보이는 그런 돋보임이란, 바로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표현력이다. 그림체는 왠지 모르게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림에서 보이는 상황과 대사내용은 엄청난 공감대가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맞지 않은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싶으면 그 사람의 전반적인 것보다 사소한 모습이 자신의 시야에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나, 거대한 성곽 역시 사소한 돌멩이로 이루어진 것이라 본다면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인간관계도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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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0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한국 만화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김혜린 작가 리뷰도 부탁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7 17:28   좋아요 0 | URL
테르미도르라는 만화가 인상깊어 보이는데
한 번 어디서 구하여 읽어보겠습니다!!!
 
[eBook] 식물의 인문학 -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박중환 지음 / 한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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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인문학>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환경공학 전공자인 점에서 많은 동질감을 느낄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식물을 다루는 것은 생태환경을 다루는 것이고, 생태환경이라는 것은 환경학에서 반드시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 여기는 것을 아주 간사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환경이 왜 깊이 봐야 하는 것일까? 환경이란 영역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면 아주 거시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자원고갈, 식수오염, 지구온난화 등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래 말하면서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의식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거시적인 영역보단 미시적인 영역에 치중한다. 환경은 단순히 환경 속에서 움직이는 분야가 아니라 인문,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관여한다. 특히 님비현상과 같은 경우 내 주변에 대규모 공사가 일어날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집 근처에 대단지 아파트가 설립되면 2가지로 나누어진다. 1가지는 공사로 시끄럽고 먼지 날려 생활이 어렵다는 점과 다른 1가지는 집값이 올라 부동산시세의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환경은 이런 저런 논리에서 치고받는 논쟁거리로 올라선 것이다.

 

환경이 소중한 이유는 처음에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물과 공기를 마시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단지 숨을 쉬는 이유는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율신경에서 조절하는 부분이고, 물을 마시는 것은 물의 맛을 음미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선택적인 부분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물과 공기는 인간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이 물과 공기가 공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집 옆에 공사장에서 먼지가 날려 창문을 못 열고, 퇴근 길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배기장치가 불량한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연은 매우 괴로운 고문이다. 이때 비로소 공기의 중요함을 알지만, 공기를 마시는 시간 중 그 순간은 짧은 찰나와 같기 때문에 금방 잊어진다. 물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 이후 하천에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물고기가 떼죽음이 일어나도 눈도 꼼짝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 문제를 말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만약 당사자 그 하천유역에 사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물이 하도 오염되어 수돗물에서 악취가 발생하고 트리할로메탄이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대거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반응이 순간적으로 바뀐다.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슈퍼에서 구매한 생수로 식수로 활용할 것이다. 인간의 간사함에서 나는 가끔 어이없는 형태를 본다. 자연의 소중한 것을 망각하면서 막상 자기 집이 아닌 곳에 환경 분쟁이 일어나면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내만 안 당하면 되지! 란 심보가 우리 사회에 인간성을 마비시킨 것도 모자라 자연까지 파괴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에서 자연이 없다면 생물이 살 수 없고, 생물이 살수 없는 곳에 인간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새가 살지 않는 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대지가 병이 들어 생명의 기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에 인간이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의 행위는 이때까지 그런 것을 막기보단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주거환경의 악화로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다. 그런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방안은 주거환경의 개선이겠지만, 사유재산인 부분이므로 수많은 노동자를 구제할 방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규모 자연을 보호하고, 공유지로 삼아 자연의 맑은 공기와 물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물론 그 곳에서 어떤 개발과 오염은 불허한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하고 연결되어 있다. 산소가 일정치 않으면 인간의 뇌만 아니라 신체조직도 망가지기 시작한다. 장시간 열악한 노동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공기가 환기되지 않고, 밀폐공간에서 계속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야 했다. 산소농도가 저하되어 면역력의 감소와 인구감소까지 일어난다. 인간에게 자연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미적으로 쾌락함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한 대지를 지탱하는 토양, 그 토양 아래 머물고 있는 물과 식생이다. 토양에 언제나 지하수가 있고, 지하수가 없이는 토양도 존재하지 못한다. 물의 기능은 응력이란 것이 있어서 일정 수분은 지반의 붕괴를 막으며, 지반에 가해지는 충격도 완화한다. 그리고 그 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토지도 필요하나 그것과 동시에 갖추어야 할 존재가 바로 식물이다. 식물이 왜 중요한 것인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생태조건에서 식물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푸른색의 식생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유지될 수 없다. 이미 그것 오래전 우리 인류에 의해 증빙된 것이다. 인간은 하루에 1끼이든 2끼이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대부분 우리 식단에 올라오는 것은 육류나 생선보다는 식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설사 육류가 올라와도 그 육류를 키우기 위해 식물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키우는데 곡물과 여물이 필요하다. 결국 식물이 기반이 되어 고기가 우리 입으로 전달된다. 식물의 종말은 인류와 세계의 종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식생의 중요성을 잊는다. 너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착오일까? 과거 인간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물에서 곡식을 찾았고, 아픔 몸을 치료하기 위해 식물에서 약초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성웅으로 받드는 이순신 장군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상당했을 때 조치한 방법이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발을 고정시킨 것이다. 버드나무에는 진통제의 효과가 있다. 약을 만들 때 쓰는 식물을 보면 약초도 있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채소가 있다. 도라지나 감 같은 식물은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찬에 이용된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점에서 자연에 모든 약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물론 외과적인 시술도 필요하나, 내과적으로나 혹은 간단한 외상 약에서 식생의 도움은 화학약품보다 뛰어나다. 화학약품은 부작용이 매우 심하나, 예로부터 사용된 한방은 부작용이 거의 최소화한다.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서 보고 그 조화를 맞추었기에 자연적 흐름에 인간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억지로 무리하게 떼거나 붙이면 결국 탈이 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식생을 이용한 것이라 보나, 결국 우리 인간은 자연과 자연의 소생인 식물에게 도리어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자연은 변화와 흐름에 충실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간다. 돌연변이가 인간에게 흔하지 않아도 식물에게 흔하다. 인간의 돌연변이는 오히려 도태되거나 생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식물의 변이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종족을 보존한다. 식물은 토지 위에서 자란다. 그래서 토지가 한정된 영역이기에 서로들 싸우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한다. 그 대상은 같은 식물이기도 하고, 곤충 혹은 동물에 미생물까지 포함된다.

 

경쟁을 하면서 공존하는 이들은, 우리가 흔히 자연의 야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하나, 그 투쟁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그 생태계는 붕괴되는 점이다. 토끼를 잡아먹던 늑대를 죽이자, 토끼가 처음에 많이 번성하다 어느 순간 멸종했다. 그 이유는 토끼들이 그 지역의 풀을 모조리 갉아먹는 바람에 풀이 자라는 시간이 이들의 식량공급과 일치할 수 없어서, 대부분의 토끼가 굶어 죽은 것이다. 억지로 자연에서 한 가지를 건들면 어느 순간 도미노현상이 일어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생태계를 이해하지 않아 과오를 범한다. 식물이 자라는 저 생태계가 왜 저렇게 되어 있을까 에서 저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균형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균형이 파괴된 대도시에서 자연의 녹취를 잃어버린 지가 옛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이 있는 곳으로 여행하고, 거기에 자신의 심신을 회복하려는 순간, 물질만능주의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발동된다. 그리고 자신의 편리성을 위해 자연의 공간을 개발하고, 또 다른 개발자가 와서 또 개발하는 방식이 반복되어 천연자연의 명소는 어느 순간 그 자연의 색을 잃어버린다.

 

맨 처음 그곳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는 부지정지작업이다. 바로 땅을 억지로 밀고, 땅위에 있던 나무와 풀을 강제로 철거하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중세 이전의 인간이 식생을 두고 정원을 삼은 이유는 미적인 감각도 있지만, 식물에게서 식량과 약을 구하기 위해서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자 인간은 자신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군림하는 압제가가 된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인간이 도시화로 인해 지구이상기상현황이나 사막화 그리고 각종 질병은 자연의 식생을 스스로 잘라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교육과 경제조차고 삶의 경쟁에 의해 모든 것을 배제시켜 승리독식을 향하여 서로 파괴시킨다. 자연에 향한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이 평등한 영역으로 흐른다. 교양서적으로 <식물의 인문학> 좋은 도서인 것 같다.

 

그러나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메탄과 탄산가스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 화산폭발이나 지반에서 내뿜는 가스에서 탄소가스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동차나 공장매연 같은 화석에너지 사용이 대기오염에 해당이 되는 것에 대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다. 환경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일정 부분 자정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 수질에서 BOD(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 SS(부유물질량), T-P(총인) 등과 같은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물속에 있는 DO(용존산소)와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제거해준다. 물론 미생물은 생물화학적 방법에 의해서라고 하나 물의 이동에 의한 와류현상이나 물속의 산소 그 자체도 산화하기에 화학적 처리가 일어난다.

 

그럼 오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정능력 이상의 오염물질을 유입 돼서 부터다. 수질에서 비점오염원이 문제되는데, 비점오염원은 강우 시 지표면의 먼지나 토사 등이 하천에 유입되면 오염시키는 오염원이다. 그런데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다른 지역에서 비점오염원은 발생하고, 자연적으로 정화된 곳에서도 폭우가 내리면 산사태에 의한 토사의 대량유입이 일어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토사유출이 된 하천은 다시 원상복귀를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이미 자정능력의 한계가 도달했기 때문이다.

 

대기 역시 그렇다. 대기 중의 공기의 이동에 따른 확산과 나무와의 생물화학적 반응은 공기에 유입된 대기오염물질을 저감시킨다. 이때까지 그것이 균형을 맞추어 배출과 자정능력의 균열이 없었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대기오염물질이 발생하여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 전 대기환경에서 다이옥신의 배출이 극지방의 동물에게 누적되어 있는 점에서 미량의 다이옥신도 그러한데 탄산가스의 경우 전혀 지구온난화와 극지방 빙하와 문제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환경공학 전공자에서 의아한 부분이다.

 

그런 이론이 전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이론을 내놓은 연구소가 어느 대규모 자본력을 소유한 외국기업과 결탁한 것이 있으며, 특히 석유와 관련된 곳이 있다고 들었다. 자연파괴와 대기오염에서 석유를 팔아 이익 보는 쪽, 혹은 하이브리드차로 세금을 이익 보는 쪽에서 생각하면 조금 의아스럽다. 더 의아스러운 부분은 전 지구적인 영역이 아니더라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있으면 배기가스가 상당히 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실효과가 없다면 국소적인 열오염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지구광역적이 아니더라도 국가 내부의 크고 작은 광역 범위를 생각하면 조금 논리가 성립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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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9-0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럽게 써주신 서평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8 20:55   좋아요 0 | URL
더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 임석재 교수의 대중을 위한 건축 강의
임석재 지음 / 안그라픽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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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건축을 본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그 민족의 정서를 보는 것과 같다. 한국의 건축이 우월한지 아니면 열등한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건축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분명 내가 생각할 때 한국의 동양 문화권과 서구의 문화권의 차이점이나 각각의 장단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시대인 것이다. 한국 건축에 대해 다루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다루는 것이고, 삶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가치관을 다루는 것과 같다.

 

건축이 미학적으로 예술로 볼 수 있는 이유도 다 인간의 삶을 그대로 베여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하나의 광학적으로 보는 것도 있으나, 삶의 가치 그 자체를 건축에 담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표현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건축은 그런 삶을 어떻게 보여주는 것일까? 현대사회에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서구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그 이전에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족을 죽이야 하는 비극까지도 말이다. 온갖 고통과 슬픔이 나라와 민족을 닥친 후 우리는 문득 낯선 곳에 와 있다.

 

문제는 그 장소가 낯설어 보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지금 모습을 제대로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데아적인 요소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온갖 사물들이다. 인간이 원하는 바를 그리지만, 인간이 원한 세계는 완벽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철학은 인간의 현실세계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고, 완벽한 세계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존재하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실적 조건에 대해 정체되어 있기보다는 계속 자신의 이상적 가치와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자신에 대해 발견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정립하는 여정인 것이다. 건축물은 아마 그런 것이다. 삶은 무엇인지 내가 살아가는 방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여기는 모습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한국인의 삶에서 보이는 그 운명적 결정체는 바로 건축양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온 도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시골에 가면 친족으로 올라가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가에 가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다. 시골마다 어른들이 계시는 댁으로 방문하면 그 집이 요새 나온 집이 아니다. 아주 예전에 지어진 건물이고, 특히 친할아버지 집은 전형적인 한옥구조 형태였다. 외갓집도 그렇지만, 친할아버지의 집은 한옥구조로서 기와가 있었고, 처마가 달려 있었으며, 지붕 아래에는 까치가 둥지를 짓고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논과 산으로 펼쳐져 있었고, 방의 형태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작은방 2개가 모여 있었다. 두 분이 귀천하시고, 현재 작은 아버지 댁이 사시고, 옛날과 비교하여 조금은 변해있지만, 과거 한옥의 형태를 어릴 적에 본 것은 행운인지도 모른다. 소 한 마리가 외양간에 살고 있었고, 부엌에는 가마솥이 하얀 밥을 머금고 있었다. 벽은 흙으로 되어 있고, 기둥은 나무로 되어 있다. 나무도 현대 한국의 도시처럼 직사각형으로 만든 목재보단 나무를 그대로 뽑아 껍질만 벗겨내어 만든 기둥이었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예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있던 때가 기억났다. 우리 할아버지 댁은 그나마 외양간을 떨어져 소를 키웠지만, 작은할아버지 댁은 마루 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의 문을 열면 소가 보였다. 옛날부터 농사를 지어온 한국인에게 소는 가족과 같아보였다. 소여물 먹이려 들판에 나가고, 겨울에 소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볏짚을 말아 소 등에 얹힌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듣는다. 서구사회로 된 한국에서는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하다. 지구온난화와 열오염 등은 지나친 열로 인해 인간에게 큰 고통을 준다.

 

각종 피부병과 열사병, 순환기 쪽으로 영향을 미쳐 심장병 같은 위험도 증가한다. 우리의 옛날에 살던 집들은 그런 일들이 별로 없었다. 내 친구 하나는 아토피성 피부질환에 시달린다. 어릴 때부터 계속 피부가 가려워 긁어대는 모습에서 우리는 몸과 마음이 약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잘 살아보세! 라고 말하며 전국을 온통 콘크리트 범벅으로 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이것들이 우리의 삶을 역행하고 있었다. 기존 서구 합리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서 동양문화를 낮추어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동양문화가 서구에서 지니지 못한 힘과 미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모습을 바꾸고 부수고 멀리하는 사이, 외국에서는 한국의 전통가옥이나 문화를 보기 위해 저 멀리서 찾아온다. 예전에 승효상 교수와 같이 활동하던 정기용 건축가를 다룬 <말하는 건축가>라는 영화를 보았다. 정기용 건축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 사저를 설계한 사람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후 한국에 돌아온 예술건축가다.

 

그가 본 한국은 끔찍했다. 한국 고유의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을 모조리 허물고, 시멘트로 도배되는 것이 말이다. 인간이 숨을 쉬고 살아가듯이 건축물의 흙도 숨을 쉬며 산다. 인간과 건축에서 인간에 의해 건축물이 도구화 되는 게 아니라 같이 숨을 쉬며 가는 것이다. 건축물은 단순히 흙과 돌, 나무와 유리로 이루어진 무기체가 아니다. 그 속에는 인간이 살아온 향기와 삶의 여운이 담긴 곳이다. 특히 건축물 중 집이란 인간이 살아있는 그 자체를 보여주는 미적 공간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빛과 공기를 마주하며 나무와 풀하고 느껴야 한다. 정기용 건축가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자연의 세계에 와서 자연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말은 잊을 수 없다. 왜 인간은 자연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우리 건축 양식인 한옥은 자연과 함께 녹아 있다. 서양의 건축은 대부분 콘크리트 자재로 이용되어 주변 환경과 소통을 차단한다. 서양의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자연은 건축물을 받쳐주기 위한 주변의 존재로 보여준다. 그러나 한옥은 오히려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같이 공존을 추구한다.

 

자연과 조화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삶에서 모두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권력층이었기 때문에 계급사회라는 특성상 다 그렇게 지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적어도 진정한 사대부 지식계급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유교학문을 정진했다. 퇴계 이황 선생이 기거한 도산서원은 그런 모습이 보였고, 각각의 건축물마다 개성을 주었고, 그 개성이 다르다고 해서 도산서원의 조화가 깨지는 것이 아니었다. 건축자재도 나무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도 좋다.

 

나무가 바로 올곧게 자랄 수 없다. 한국의 소나무들은 좌우로 휘어 마치 뱀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중간에 돌과 흙을 집어넣어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준다. 입체적인 요소에서 전체를 조화를 중시하지 서양처럼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시키지 않으려 한다. 이런 문화적 특성에 대해 내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회는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농경문화에서 단체로 논에 나가 벼를 키우고, 타작을 한다. 노동으로 놀이를 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같이 노래를 부르고 농악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문화는 개방적으로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따라서 건축모양이 자연과 동일한 느낌이 들도록 조화를 이루고, 방과 방이 마주보게 하며, 툇마루에 걸쳐 앉아 멀리서 손님이 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적 특성이 예술적 감각으로 남아 전수되는 것이다.

 

우리 친할아버지의 댁만이 아니다. 아마 원래 집터로 보자면 500년 정도 된 곳이고, 그 집터 역시 내 직계할아버지의 집이었다. 지금은 먼 일족이 살고 있지만, 그 집을 봐도 안방이 중심으로 되어 다른 방이 중앙 마루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들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공간적인 이윤만 추구한다. 거실의 기능은 분명히 통로이기는 하나 방과 방이 마주보기보단 서로의 사적공간을 위해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요새 같은 아파트가 성행하는 시대는 공간적배치가 각을 이루며, 그 각의 외부가 각자의 영역으로 가기 쉽다. 자기만이 공간에 자기만의 세계가 펼쳐진 현실에서 가족과의 관계는 친숙하기보단 그저 필요의 존재로서 보일 수 있다. 서구의 건축이 이런 한국의 미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었고, 거기에 따른 한계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직각과 직선보단 타원과 기하학적인 모습은 인간의 사유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자연을 파괴하고 짓밟는 행위로는 사유의 확장은 불가능하다. 해체주의적 특성이 20세기 말에 도래해도 역시 그것은 반 문명주의이었지, 자연의 희귀성은 아니다. 책을 보면 조금 유감스러운 것은 장 자크 루소가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란말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마음이었고, 그 본인의 원초적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에밀이란 가상의 인물로 통해 인간을 자연적 인간상을 제시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인간이 숲에 살아가는 곰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인지했다. 저자의 미학적 시야는 분명 철학적 사유에서 시작되나, 작가의 글에서 낭만주의 내지 고전주의 등과 같은 철학, 미학, 예술적 용어가 나온다. 아쉬운 것은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 좋게 잘 나온 사진만 책에 올리는 것도 좋으나, 더 중요한 것은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점이다.

 

한국의 건축이 자연과 소통, 인간과의 소통을 추구한 것을 말하고 싶은 분인데, 막상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배려는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상이 나온 계기와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건축과 미학을 제대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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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9-0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괜찮지요~^^

만화애니비평 2015-09-04 09:23   좋아요 0 | URL
과연 그렇군요
 
소리 없는 빛의 노래
유병찬 지음 / 만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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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란 것이 유럽에 등장할 때 화가들은 조형화나 초상화와 같이 실제 대상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사진이 그대로 선명하게 색을 나타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로 화가들은 새로운 그림을 찾아내어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사진까지도 초점과 빛의 굴절 그리고 사진촬영방식에 따라 새로운 사진영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카메라는 실용의 도구만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사고, 특히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사진은 여기저기서 찍어대는 일상이 되었다.

 

사진이 가진 미학적 가치는 그저 재미로서만 혹은 도구로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진으로 보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카메라는 사실 남이나 혹은 다른 대상물을 관찰하는 기계이다.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상과 동일하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내 눈만이 아니라 카메라로서 정리된다. 카메라의 사진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 서브컬처 계열에서는 코스튬플레이 문화에서 가끔 보면, 미학적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코스튬플레이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사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찍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만 찍는 것은 예술로서 의미가 없고, 단지 인물사진만 불과하게 된 것이다. 사진을 보는 것에서 사진의 미학이란 인간만 대상으로 할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것을 할지가 세세하게 길이 갈린다. 적어도 사람이 있든지 혹은 없든지 카메라 속에 드러난 대상보단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손길이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사진에는 객관적으로 무엇이 찍혀있지만, 주관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연히 알라딘 서점과 네이버블로그 활동하면서 알게 된 유레카 작가의 사진집을 보았다. 내가 그동안 많이 보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림은 웅장하고 거대한 것들을 주로 많이 올린다. 특히 매년 12월 말에 나오는 달력에 항상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만든 달력 카탈로그는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사진예술이다. 사진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에 소리처럼 귀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본다. 눈으로 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볼 수도 혹은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본다는 것은 곧 어느 시각자의 의지와 선택이 달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사진이란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그저 주어진 것에 익숙해졌다. 사진에 익숙해진 만큼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세상을 보지 않은 것이고, 그에 따라 세상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저 살아온 셈이다. 유레카 작가는 그런 것을 거부하여 사진을 찍고자 했다. 자연의 조금만한 모습에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커다란 잎에서 물이 고여 흘러가는 것은 자연이란 살아있는 것이고, 문명의 세계에 우리가 살아있어도 자연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이웃하고 있다.

 

자연에 대해 파노라마의 거대한 장광을 보여주기보단 오히려 안개로 가려진 도시와 유전자를 확대한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과학문명의 답답함을 보여주었다. 미세한 자연의 세계지만, 그 미세한 거대한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사진에 담아내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당연한 것들만 보고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 안에도 작은 자연은 있었고, 새들도 하늘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우연히 길가다가 보는 마네킹에서 마네킹의 얼굴이 없는 것은 우리의 얼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표정 없는 얼굴, 개성 없는 인간, 물질만능에 길들여진 인간에 의해 버려지는 쓰레기들, 우리 일상의 언제나 우리를 버리는 연습을 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산내면에 간 커피숍이다. 현대사회에서 커피가게는 늘 사람들이 붐비고, 차 한 잔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평, 저런 평이 오고간다. 산내면이라고 하니 아마 경주인 것 같다.

 

경주시는 관광과 문화역사자원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사람들, 하지만 경주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농사짓고 사는 농부가 있다. 밖에서 논밭을 보고 온 늙은 노총각 2명이 다방찻집에 들어온다. 다방 커피 맛은 뛰어날리 없다. 바리스타가 있어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틱 커피를 넣어 만들기도 그렇다. 대충 커피가루에 프리마와 설탕을 넣어 휘젓는다. 그런데 그것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커피의 맛은 커피 속에 들어가는 재료의 질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만들어내는 손맛의 지경일 수 있다. 미각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게 아니라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콤해질 것이다.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 농촌에서 농사짓는 노총각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우랴? 손님 2분이 오니 마담은 김양보고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 미묘한 기분이 든다. 그들도 사람이고 위로받고 싶은데 세상은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소외받은 자와 것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산내면 별다방의 커피가 쓰면서도 달달한 것은 아마 그런 것이다.

 

그런 삶의 미학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마지막 통기타를 잡고 연주하는데 몰두하는 어는 남성의 모습이다. 작은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말없이 기타와 악보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에겐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 소중한 것들이 있다. 비록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그런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사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새와 들판에 올라와 있는 잡초까지도 말이다. 사진에 찍힌 대상들은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말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 이 세상 앞에서 무덤덤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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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0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울컥.^^

만화애니비평 2015-09-01 15:39   좋아요 1 | URL
책 감사합니다. 울컥
 
고전, 사랑을 그리다
유광수 지음 / 한언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대학교 은사님이 저술한 <고전, 대중을 엿보다>란 책을 읽었다. 고전이란 타이틀이 내걸 듯이 주로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였고, 조선시대가 아니라면 고려시대 정도가 적당할 정도다. 고전의 이야기에서 문헌이나 혹은 구술로 전해오는 과거의 인간들에서 우리들은 오랜 시간과 흐름이 서로 간의 벽이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들어다보고, 이야기의 주석을 따라 흘러가면 그들도 우리랑 많이 차이나지 않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단지 그 시대가 지금과 다르고, 왕이 있다는 점, 계급사회로서 양반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질 뿐이다.

 

단지 그런 시대적 흐름이 더더욱 이야기의 플롯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물론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장벽은 존재한다. 예전에는 그 장벽이 엄격하고 당연하기에 그저 불복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지금은 그 장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나 은밀하게 혹은 의외의 반응으로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누구나 알 듯 혹은 전혀 모르고 갈 듯 난해한 것이기에 그렇다. 고전에서 보이는 인간 역시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것 같기도 하나 때로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뭐라 딱 하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런다고 어떤 때에는 어느 대상에 대해 정확한 관철과 표현되어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의 것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논리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란 단어를 보면 참 말로는 쉬워 보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 사랑해”라는 대사는 일상에서 가끔 볼 수 있고, TV 드라마에서 늘 십중팔구는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면 어떻게 그 개념을 정립해야 할지 난감하다. 사랑하던 남녀가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으르렁댄다. 하다못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지난날의 모습조차 부정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성적으로 따라가기 어렵고, 감정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으며, 무의식적 성적본능으로만 따를 수가 없다. 진짜 사랑만큼 이성과 감정 그리고 무의식적 요소가 골고루 반죽되어야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류애는 이성적인 윤리적 가치관만 존재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길가다가 어려운 사람을 보고 돕거나, 매달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갑자기 구호를 보고 헌혈 정도 해주는 것도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다. 물론 그 기반에는 감정이란 것이 숨어 있다. 인간의 이성에서 판단할 수 있는 논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요소는 감정이 있기에 그렇다. 눈으로 보는 비참함, 귀로 듣는 신음소리가 인간적인 감정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에게 선의의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가언명령에서 정언명령은 가식 없이 윤리적 이성과 감정적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에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의 사랑은 조금 다르다. 무조건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감정의 기폭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평소 그렇게 연애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사랑이 이래저래 말하기는 우습다. 그런다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인 故 김현식의 “사랑 사랑 사랑”이란 가사를 들여다보면 사랑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것도 모두 사랑이라 한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는 꺼내기에 쉽고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랑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을 보면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을 하면 내가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겠지만, 나는 나름 진보적이다. 사랑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긴다. 단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부터 생각한 게 우연히 이 책에서 나왔다. <고전 사랑을 그리다>의 저자분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입장에 대해 적은 게 있다. 단순히 그 글은 남녀관계로서만 다룬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확장하여 우리의 인식과 역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서 성적인 학대와 폭행 그리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다. 보통 사람들이 왜 이 문제에 그렇게 깊이 여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나는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그녀들은 모두 꽃다운 18세 전후에 강제로 차출되어 갔다. 일본에서 그녀의 도장을 받았다고 하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계약서 내용이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에서 모순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일본도 산업화나 우리나라의 산업화에서 시골에 막 올라온 아가씨가 취업알선센터에 가서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말을 듣고 따라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윤락을 강요하던 업소였고, 그 아가씨는 미성년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그들의 강요와 폭행,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처지에 그 일을 맡았다. 그러면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위안부에 끌려간 그분들이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오고, 그것도 강제로 폭력적인 남자로부터 집단 성행위를 당하는 것에서 잦은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 것이라면 이게 정당한 일인가?

 

모든 여자가 그런 부당한 계기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여성에 대한 편향적 관점이 이런 사태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날 기가 차는 뉴스를 들었다. 남자인 나라도 지나가는 여자 중에서 매력이 넘치면 성적욕망이 올라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내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것을 인지하여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성범죄와 관련되거나 혹은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진 남성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혹은 그것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는 게 많다.

 

뉴스에서 왜 충격을 받았냐? 자신의 어린 여자조카를 10년 넘게 성폭행한 가족이 겨우 징역 4년이란 것이다. 나라면 최소 20년 이상을 살게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성인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나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 게다가 친척이라면 인간의 얼굴이 가진 자라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벌의 강도가 낮고, 성폭행 사건에 대해 너무 안이한 대응이 아닐까 싶다. 어느 정치인은 골프를 치다가 보조원에게 자신의 손녀 같다면 가슴을 만졌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가 일본의 사과만큼 중요한 게 한국 내의 인식이다. 결국 저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일본의 망언이나, 그 망언이 나오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문제도 있다.

 

사랑에서 욕정과 욕망은 중요하다. 인간에 대해 성현들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다고 한다. 완전하지 못하나 그런다고 짐승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서 짐승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능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에 본능만 있다면 단지 기계적인 성행위만 있을 것이다. 감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이성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참 인상이 깊다. 여성이 남성의 말을 믿을 때는 성행위 중이 아니라 그게 끝나고 나서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매력이 외모와 육체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나는 이런 가치관에 매우 크게 공감한다. 단지 나라는 인간이 특이한 사고방식과 개성이 있기에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알아주는 인간에게 끌리는 법이다. 내 자신의 지나친 것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내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모순도 겪는다. 인간이 서로 만날 때 모두 자신의 좋은 모습, 포장된 자신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가려진 본심 내지 본질은 숨기고, 어느 순간 그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는 당신이 그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또는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라고 말이다. 어느 인간의 성질은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욕하거나 시비 거는 것은 장점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어느 사람의 개성과 매력이 반드시 좋은 법만은 아니다. 어느 한 쪽만 보고는 인간을 판단할 수 없으나, 인간이 사랑에 의해 상대방에 빠지면 그것을 놓치게 되고, 뒤 늦은 후회와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에 대해 이유는 필요한가에서 나는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저자가 제시한 것처럼 사랑이 처음에 불 같이 붙다가 단지 그 불에만 집중하면 불이 모두 꺼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나온 답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말은 쉽고 사랑한다는 일은 어렵다. 이상과 현실은 뭐든지 벽과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좀 더 봐주고, 알아가고, 진행형이란 말은 무척 공감한다. 사랑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사랑이 시작은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짝이 정해진 이상, 새로운 사랑이 생겨 날아갈 수 있다고 쳐도, 그 전의 사람과 쌓아온 신뢰와 시간을 배신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앞에 만난 사람을 배신하여 새로운 사람에게 가버리면, 언젠가 그 새로운 사람마저 배신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전 사랑을 그리다>를 보면 저자는 언제나 극단적인 자세를 피하고, 상황적 전황과 조건적 요소를 붙인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뭐든지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온갖 변수가 튀어 오르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생긴다. 최대한 시대적 상황적 배경적 요소를 참고하여 사랑의 대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이 되지 않으면 무척 무관심하게 대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누가 어떤 일들을 당해도 무관계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이 되면 앞과 뒤를 보지 못하고 날 뛰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고 그 사람을 향하여 조롱과 비웃음을 날린다고 해도 그 비수의 칼날이 내 등 뒤로 꽂히지 않으란 법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 형성능력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목적을 물어보면 모두 처음에 출세를 바란다. 돈과 권력을 향하여 아귀의 수라장처럼 몰려든다. 그러면 막상 그게 되면 무엇을 할 건인가? 인생은 즐기려고 한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거나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서 한다면? 인간이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혼자서 즐거움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골프 27홀을 혼자 빌려 며칠이나 친다면 지겨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혼자서 견딜 수 있는 부류는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부분에 대해 저자분이 설명한 것이 있으나, 조금 이 부분은 맥락을 약간 놓친 게 아닐까 싶다. 히키코모리가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에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가상의 대상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현실을 외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왜 외면하게 되었는지는 저자분이 조금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 글을 적는 독자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캐릭터를 좋아한다.

 

물론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집착하지 않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현실에서 뭔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처럼 대가족이 이루는 시대가 아니라 핵가족에 어릴 때부터 모두 같이 지내는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경쟁상대가 되는 적으로 만드는 삶으로 만들었다. 그런 삶에서 비상구가 되는 의지가 옆에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있다. 사랑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세상도 되기도 한다. 조금 그 부분만 잘 착안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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