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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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는 마스다 미리의 <수짱의 연애>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다. 수짱이 카페 일을 그만두고, 보육원에 취업하여 우연히 쓰치다라고 하는 남자를 만난다. 쓰치다는 수짱이 카페 일을 할 때 그 건물 옆의 서점에서 일하고 있던 점원이었다. 성격을 보면 소탈한 면과 소심한 요소가 보이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과거의 일본과 달리 이제 일본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쓰치다의 한 달 월급 이야기나 나오는데, 그의 임금은 월 25만엔이라고 한다.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250만원이다. 이 책이 2012년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쓰치다의 나이 32 전후로 그 정도 월급이면 무척 박봉인 점을 보여준다. 그의 성격과 더불어 그의 월급으로 나오는 숫자는 그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난다. 왠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현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현실이란 점이다. 마스다 미리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분명 심리적인 요소를 잘 보여주고, 상황에 대한 절묘한 묘사를 잘 나타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현실적 조건, 즉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적인 요건이 들어간다.

 

보통 만화작가의 연애 장르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보단 오히려 낭만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낭만주의란 낭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점이다. 연애의 조건에서 현실의 일상적 모습보단 오히려 그 과정을 다루는 요소가 많다. 그래서 연애 장르에 큰 매력이 느끼는 것과 그렇지 못한 점은 현실적인 조건을 너무 무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박탈감과 욕망은 작품으로 하여금 신화적인 요소를 부여한다.

 

여자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지위가 낮은 여성 혹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여성이 부와 지위를 갖춘 남성을 원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로 써먹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은 현실 안에서 가상의 이야기로 될 뿐이지, 일반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드물다. 물론 0.001%가 된다고 하여 안 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은 분명하나, 나머지 99.999%는 분명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경제적 조건이 연애의 조건이 되는가에서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그것을 은연히 드러낸다.

 

수짱이 그동안 왜 남성과 사귀지 못했는가에서 그녀의 직장을 보면 남성이 없다는 점이 드러나고, 그렇다면 수짱이 카페와 보육원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일본사회의 상류계층이 아니라 중하위계층에 가깝다는 점이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 보통 일본작가의 작품과 다른 이유는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이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도 쓰치다는 평소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소시민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집이나 회사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쓰치다 같은 경우 자신의 현실을 어렴풋이 잘 알고 있다. 월급이 적은 것과 그에 따라 연애도 힘들다는 점이다. 사랑은 돈과 관련 있는지 혹은 없는가에서 사랑의 조건에서 돈은 필요하다. 단지 돈으로만 인간을 대할 수 없기에 적당한 균형관계가 필요하다. 쓰치다 월급을 한국의 32살 남자와 비교하여 거의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자와 비슷한 여건이다. 거기다 임대받아 사는 집세와 생활비를 제외하면 그가 한 달에 여유로 가질 수 있는 돈은 매우 적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건이 어려울 경우 일상생활에서 활동이 제한받는다. 그가 평소 계속 집과 회사 가끔 들리는 부모님 댁(명절)과 큰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은 그의 생활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평소 하는 것이랑 독서생활이다. 쓰치다가 서점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큰아버지 댁에 가서 장서에 꽂힌 책들을 보고 나서부터다. 일본 문학 소설 응모대회에서 상을 받은 작품을 다 읽을 정도이며, 그의 독서생활이 직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신 철학과 사회학보단 소설 위주란 점에서 그의 성격이 매우 감성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감성적인 남성들은 일반적인 여성과 조우하기 어렵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명확히 있기에 그것과 유사하거나, 혹은 자신의 감성적인 감각으로 왠지 느낌이 끌리는 대상에게 마음을 품는다.

 

쓰치다가 마음이 약한 남자라는 것은 작품 내에서 큰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할 때 큰어머니가 쓰치다보고 큰아버지의 병환으로 우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나중에 진짜 큰아버지가 병환으로 죽자, 가족들 중에서 쓰치다만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집으로 온 큰아버지의 유품을 보며 쓰치다는 혼자 서럽게 운다. 남들에게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쓰치다는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소개팅에서 잘 보여준다. 서점 동료와 그 동료의 여자지인은 야요이, 야요인 친구까지 4명이서 자리를 마련한다.

 

야요이 친구와 독서취향이 비슷하나, 그녀는 애인이 있었고, 결혼도 준비하려던 사이다. 소개팅을 나오고 말고는 자유지만, 결혼을 앞두고 소개팅에 나온 것은 조금 치사한 게 아닌가 싶다. 애인 없는 사람이 있기에 만든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재미 반으로 나온 것이라면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쓰치다는 야요이와 사귀게 된다. 야요이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과 사귀려고 했던 것조차도 쓰치다는 상상할 수 없었다. 가령 나도 군대전역 후 학원에 다니다 같은 수업을 받던 사람들과 친해지다가, 그중 한 여성과 친해져서 소개팅을 부탁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주선한 여성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성격차이와 기호적 차이(나는 기관지가 좋지 않아 담배연기를 싫어한다)로 인해 깨졌지만,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 많이 놀랐다. 마스다 미리 작가가 여성이고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남성의 심리를 잘 보여주었다. 대신 조금 더 추가했으면 좋을 부분은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사와코의 심리를 여성이 아닌 남성에 대해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와코는 나이가 40이 되지 결혼에 대한 문제도 그렇지만, 자신이 27살 이후로 남자와 사귀지 않아, 늙어가면서 자신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상실할까 겁이 났다.

 

여성의 매력에 대한 사와코의 자신감은 떨어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성적으로 욕구불만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32살 전후인 쓰치다에게 그런 욕구불만을 조금 반영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부드럽고 성향의 남자를 초식계라고 하는데, 최근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 유형은많이 등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쓰치다는 초식계 남성의 전형적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남성에게도 욕구불만 요소는 있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쓰치다가 얼떨결에 야요이에게 자고 갈래?” 물어본 장면에서 조금 억지스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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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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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는 마스다 미리 작품에서 수짱 시리즈 4번째 마지막편이다. 이번 편에서 수짱은 나이가 37살이 되었다. 이미 30대 후반을 향한 수짱에게 현실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단지 전에 카페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남자들이 왔으나 보육원에 오고부터는 남자성인 대신 남자 꼬마들만 넘친다. 그나마 같이 일하는 분이신 원장님이 남자지만, 사모님이 조리사로 계시고, 그 조리사로 일하는 사모님의 나이가 일흔이라 한다. 일흔이면 노인에 해당되는 나이다보니 수짱에게 연애의 기회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수짱에게 고민이 오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단지 매일 하루를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농장도 일꾸며, 같이 놀아준다. 수짱다운 성격인지 매사 꼼꼼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 그런 일상에 묻힌 수짱은 자신의 처지를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와코를 만나도 혹은 결혼하여 아이를 대동하는 마이코를 만나도 뭔가 고민이 풀리는 것보다 단지 그 순간 잊어질 뿐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서점에 가서 쓰치다를 만나게 된다. 쓰치다는 수짱이 카페에서 근무할 때 가끔 점심식사를 하러 온 손님이었다. 수짱이 카페에서 일할 때 그가 가끔 올 수 있었던 것은 쓰치다의 근무하는 곳이 수짱의 카페 옆에 있었다. 쓰지다의 업무는 서점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수짱의 나이가 37일 때 쓰치다의 나이는 33세이었다. 수짱의 나이가 4살이 더 많았던 것이다.

 

쓰치다를 거리에서 본 수짱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긴 것이다. 아침에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의 식단을 준비하려는 수짱이 갑작스레 쓰치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의 연락처나 메일 정도 알아보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항상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또는 고민해야 할 거리가 있어도 다른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법이다. 수짱은 언제나 단조로운 일상에 뭔가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수짱이 우연히 도서를 구매하기 위해 예전에 자신이 근무한 카페 옆의 서점에 온 것이 아니라 사무실 근처 서점에 방문했다. 그런데 그곳에 쓰치다가 먼저 와서 책을 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수짱은 당황하나 의외로 그를 만난 것에 큰 호감을 느낀다. 수짱이 원하는 책을 위해 서로 이야기하다가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중에 같이 식사도 한다. 식사를 하고 난 후 쓰치다는 갈등에 빠진다. 쓰치다는 수짱이 아닌 원래 만나던 여자 친구 야요이가 있었던 것이다.

 

야요이와의 관계는 얼마나 신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야요이를 밤에 만나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가는 쓰치다의 모습에서 뭔가 둘 사이의 벽이 시자된 것을 알 수 있다. 야요이는 쓰치다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말은 한다. 하지만 쓰치다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밤에 달이 뜬 상태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의 집에 같이 가자는 의미는 같이 침대로 올라가자는 의미다.

 

잠자리를 거부한 것이 단순히 업무적인 요소라고 핑계를 둘러대지만, 쓰치다의 마음 한편에 수짱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이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쓰치다는 여자 친구 야요이도 있고, 수짱은 자신보다 나이가 4살이 많았다. 일본은 연애관계에서 나이의 요소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여자의 나이가 남자보다 어린 경우가 다분하다. 야요이는 쓰치다보다 2살 어린 31살, 한국에서 평균적인 나이일 것이다. 단지 차이점은 한국에서 남자는 군대를 강제로 복무를 해야 하는 법이 있기에 그런 상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남녀가 같이 대학을 졸업하면 같은 조건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남녀의 나이에서 한국보다 덜 구속받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애 그 자체에서 상대방에게 이성의 연인이 있고 없고는 별개의 문제다. 쓰치다에게 야요이란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수짱에게 상당한 벽으로 다가왔다. 겨우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밥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했는데, 안타깝게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수짱의 처지가 가엾기도 했다.

 

왜 그때 카페에서 한 번 제대로 말을 걸어보지 않았을까? 왜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까? 기회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오더라도 상대방이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지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잘 어울리면 한 번 상대방에게 권유를 해볼 가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상대방이 배려의 차원인지 아니면 그저 그냥 그렇게 대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사람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쓰치다와 수짱은 서로에게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고, 안타깝게도 수짱이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여러모로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인연의 반쪽은 어디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나, 그것도 상황과 여건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렇게 적으면 너무 비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막상 그 중간에서 헤매야 하는 사람에게 그 자체가 현실이다. 현실의 속내를 거기에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을 것이다. 수짱 시리즈에서 사와코가 독신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40살 주변의 골드 미스 이야기가 등장한다. 왜 그녀들은 혹은 그녀들의 반려가 되어야 할 남자들은 왜 서로에게 도통 나타나지 않을까?

 

사회에서 나이가 많이 찬 미혼의 남녀에게 결혼문제 건으로 가끔 이런저런 쓴 소리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말을 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은 없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하고 있니? 끝나는 무책임한 발언보다 혹시 주변에 상대가 없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 볼 것이니 생각 있으면 이야기해주겠니? 라고 말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너무 불성실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타입이 아니라면 대체로 결혼하여 생활하는 것에 문제는 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그런 점을 알아주는 것인데 말이다. 알아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골키퍼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짱은 그렇게 자신의 희망이 다시 현실의 우울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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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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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두고 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 예전에 내가 책에서 본 문구가 기억난다. 여자가 남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 순간은 남자와 같이 침대에 있을 때가 아니라 침대에 나오는 순간이라고 말이다(원래의 말은 다르지만, 표현적인 요건에서 수정).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조금 바꾸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여자는 침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침대에 가기 전에 더 조심해야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나 혹은 일본사회에서나 어떤 식으로 연애관계가 발전할지는 모르나, 남자인 내가 생각해도 남자는 기본적으로 리비도(Libido)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욕구가 원래 강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억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통제할 뿐이다. 보통 남자들에게 당신은 여자에 대해 성적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한 국가에서 그런 남자를 두고 뭐라고 여길까? 동성애자도 아니고 이성애자도 아닌 무성애자라면 더욱 어떤가? 여자에게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남자에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약간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여러모로 불리한 점은 많지만, 그런다고 남자도 불리한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차이는 남녀의 성적인 차이를 떠나 그 사람이 현재 처해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할 수 없는 현실이고,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사정을 보고 사회적 여건을 토대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번에 읽은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이전에 읽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보다 조금 심화된 내용이다. 주인공 수짱이 예전보다 나이가 더 찼다는 점과 수짱의 친구인 마이코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이번에 새로 등장할 노처녀로 사와코 씨가 등장한다.

 

수짱의 사촌동생 아카네가 등장한 <아무래도 싫은 사람> 편에서 등장한 아카네 직장동료인 기무라의 나이는 40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등장한 사와코의 나이 역시 40이다. 그런데 같은 40이라도 여자나 남자나 혹은 모든 인간들은 나이만으로 판단해서 안 되는 것이다. 기무라는 아주 사소한 것에 자기 편의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사와코의 경우 자신의 생활에 나름 충실하다. 그런 그녀는 40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아직 미모도 좋은데, 몸매관리하려고 요가학원도 다니는데, 잘 풀리지 않는다.

 

요가학원에서 만난 수짱과 친해진 사와코는 집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신다. 내용을 봐서는 할머니가 친가 쪽이 아니라 외갓집의 할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 남자가 없이 여자 3명이 3대를 걸쳐 살고 있다는 것은 왠지 쓸쓸하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나마 어머니는 연세가 있어도 정정하시나, 할머니는 치매가 있는지 제대로 몸도 못가누고, 기억력조차 없어졌다. 할머니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왠지 슬픈 일이다.

 

인간이 가장 슬플 때가 언제인가? 여러모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가 혼자가 될 때이다. 혼자가 되는 순간이 슬픈 이유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같이 기뻐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군대생활을 사병이 아닌 간부로 복무할 때 심하게 감기가 걸린 적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혼자 돌아와 너무 아파 아무 것도 안 먹고, 방 안에 이불을 혼자 덮고 있을 때 참 서러움 기분을 느꼈다. 혼자라는 것이 왜 슬픈가에서 이미 확실히 체험한 추억이다. 사와코의 걱정은 자신이 결혼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막상 어머니까지 연세로 인해 돌아가시면 자신은 그때 정도 할머니가 된다.

 

아무도 보살펴주는 이도 없고, 아무도 찾아주는 이도 없다. 외로운 생활이 젊어서 편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사와코의 마음은 여러모로 괴롭다. 그녀는 27살 이후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13년 동안 혼자였고, 그동안 같이 남자와 침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럴 때 가장 느끼는 자괴감은 다시 남자와 침대로 갈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여성의 40대는 30대와 다르게 신체 구조적으로 노화의 영향이 확실히 온다. 피부에 윤기도 없고(직원이 선물로 피부기름을 제거하는 화장세트를 줘도 오히려 기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뱃살도 늘고, 가슴의 탄력도 약해진다.

 

결혼은 둘째치더라도 사와코는 자신이 여자로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소개팅을 하여 우연히 남자를 만나 17년 만에 같이 침대에 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가족에게 인사하는 것부터다. 남자의 집 쪽에서 사와코에게 아이를 어서 낳아달라고 요구하는 것까지 이해갈 수 있다. 하지만 임신이 가능한지 안 한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해달란 소리에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 40이 되면 거의 늦은 시기라 하더라도 그냥 되는대로 결혼해서 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덕분에 사와코는 자신이 소개받은 남자와 인연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난감한 것이 남녀사이에 가장 더 중요한 부분이 남녀로서 대하는 것 이상의 인간으로서 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독특한 성향과 취향으로 수짱이나 사와코처럼 되어갈지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혼 후 처음 인지하지 못한 상대방의 모습이 드러나면 엄청난 곤경에 빠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오래 알게 되면 사소한 것들에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처음에 몇 차례 만난 사람에겐 속내를 보이는 것보다 자기포장으로 통해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서 자기포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같이 살아야 하는 가족의 경우 조금 말은 다르다. 사람의 성향이 처음에 맞게 느끼는 것은 상대방을 보고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금방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게 쉽다. 물론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면 적당히 넘어갈지 모르나, 상대방의 입장에 따라 매우 예민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런 예민한 부분을 어떻게 잘 보여주고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란 제목처럼 결혼하지 않으면 곤란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곤란하다. 마이코가 결혼 후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서로 간의 대화주제가 다르고, 공감되는 부분도 다르다. 불편하지 않은 친구가 불편해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체된 듯 유동하는 존재이므로 자신의 정체성, 즉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과 살아온 날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저런 고민은 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다가온다. 심리적으로 뭔가 잘 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은 인간의 현재진행형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의 역설적인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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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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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이른바 수짱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성작가가 그것도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는 것은 남성인 나에겐 약간 턱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읽어보는 순간, 그렇게 낯설게 느낀 게 아니었고, 오히려 내 나이와 비슷한 상황의 미혼 여성의 마음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전반적인 여성이 그런 것은 아니나, 적어도 보편적인 성향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짱의 심정과 상황이 옆에서 관찰하면 왠지 공감이 가기도 하고, 한편으로 얄미운 부분이 있구나 여겼다.

 

인간의 모습이란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다.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따라 계속 변해간다.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나, 나에게는 짜증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일상은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그 유동적 일상생활도 하나의 정해진 패턴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수짱의 이야기는 카페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일하면서 옆에 근무하는 이와이는 수짱보고 어리고 외모가 예쁜 편이다.

 

카페에 들리는 본사직원인 나카다 매니저를 두고 수짱은 은근히 흠모한다. 그러나 나카다 매니저는 수짱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므로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입장이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 주변에서 당신은 왜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개인적인 성격이나 취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주변 여건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일상생활이 그리 만들어지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수짱의 경우 카페에서 일하므로 주변에 일하는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이 모두 여성이다.

 

여성들만 모인 공간에 남성이 없으며, 여성들 자체가 많은 집단에 남성이 들어가서 일하는 것조차 벅차다. 남성들의 공간에서 여성 소수가 지내기는 하지만, 은근슬쩍 남성들의 권위의식에 압박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남녀인원이 골고루 퍼진 곳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연애기회를 가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수짱의 가게에 오는 다나카 씨의 본사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이와이 씨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솔직히 누군가 사귀거나 만나지 않았지만,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아는 주변인이 그 사람과 사귀거나 계속 만나고 있다면 한편으로 심술이 날 것이다. 수짱의 인간적인 모습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이와이 씨와 다나카 매니저가 사귀는 것을 알고, 어느 날 결혼한다는 사실까지 알 때 수짱은 집에서 우울한 눈물을 흘린다. 물론 자신에게 다나카 매니저가 연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사항까지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짱은 결혼과 연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수짱 시리즈를 보면 항상 옆에 친구나 혹은 다른 여성인물이 조연 이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등장한 조연급 주인공은 수찡의 친구 마이코다. 그녀는 회사에서 일하는 오피스레이디로 노처녀 자리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로 평범한 남성이 아니라 가정이 있는 유부남을 두고 있다. 가끔 그녀의 집에 그를 초대하여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에서 그 남자를 두고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다 큰 남자 아이처럼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위안을 받는 행위는 먹는 것도 되고, 음악을 듣거나 혹은 영화 같은 것도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몸으로 직접 닿는 촉감 역시 피하지 못하는 유혹이다. 마이코는 그렇게 회사에서 사소한 일이 치여 살며, 주말에 억지로 직장상사의 이사한 집에 가서 집들이를 해야 한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라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나, 직장의 상사라면 그렇지 못하다.

 

옷도 제대로 차려 입어야 하고, 들어가서 편하게 앉아 있지 못한다. 주말 하루 편하게 쉬고 싶은 일정이 모조리 사라진다. 마이코에게 일상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변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어도 쉽게 변화할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계기나 기회가 있어야 한다. 주변에서 사람들은 왜 너는 그렇게 살아가니 어떻게 할 수 없어? 라고 이야기하지, 그에 대한 대안이나 도움은 전혀 주지 않는다. 흔히 말해 답은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하든지 혹은 너는 부족한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런다고 은근히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도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마이코는 유부남 애인을 정리했지만, 그런 만남을 하면서 처음부터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는 게 어리석었고(진정 사랑한다면 그 남자에게 현재의 아내와 이혼하라고 요구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수짱도 진정 마음이 있었다면 이와이가 만나기 전에 한 번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이야 쉽지!”

 

사람이 살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선택한 적은 얼마나 될까?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도 비단 수짱의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도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조차도 선택의 권리라고 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도 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다고 이성으로 이해하도라도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인간의 심리는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고 고민하더라도 당장 답이 나오지 않으니 오늘도 내일도 같은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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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시작 - 노무현에 관한 첫 구술기록집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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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를 대변한다. 우리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은폐 및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조차도 신화로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화의 겉에 보이는 이야기와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르다. 이번에 읽은 <노무현의 시작>은 한국 노동운동역사에서 노동자를 변호하는 변호인이 탄생한 것을 적고 있다. 물론 여기에 구술된 기록은 사실적인 관계에 의해 적시된 것이고, 구술관계자는 그 당시 역사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이었다.

 

신화와 매치하면서 신화는 그 사회나 문화적 집단의 기원이나 혹은 정체성을 말해주는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신화는 과연 보는 이에게 어떤 존재로 왔는가? 노무현의 변호인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은 우리 사회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 최근에 나는 역사학자가 저술한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라는 책을 읽었다. 노무현 변호인이 활동을 하던 시기는 1980년대이고, 내가 읽은 도서는 1910~40년대 일제 식민지를 중심으로 연구한 도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소름이 끼친 이유는 일제가 펼친 노동억압정책이 1980년대의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한 점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것만 기억했지, 노동운동을 한 것은 잘 모른다. 노동운동을 한 이유는 우선 생계수단이 우선이고, 다음으로 가혹한 노동시간이다. 집에 공장에 일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잘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노동환경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일하고 있는지를 옆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런 문제가 이미 시작된 점이다.

 

기업과 공권이 결탁하여 노동자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때에 따라서는 감금, 납치, 구속, 심지어는 살해까지 하였다. 사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조선 안에서만 아니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선집들을 읽어보면 일본 내에서도 일본인에 대한 노동운동 탄압은 매우 심각했다. 국가와 민족들은 다르고, 설사 남에게 빼앗긴 나라나 혹은 빼앗은 나라에도 늘 빈자는 빈자였다. 빈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제대로 목격하기보단 또 다른 차별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려 했다. 타인에게 받은 억압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린 악순환이 연속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1980년대는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다. 물론 정부가 일본이건 한국이건 크게 변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안기부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그 가족들은 갖은 협박과 감시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이런 시기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극단적인 수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니 그 과격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노동운동을 한 반면 시위과정에서 다치거나 죽은 경관도 있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과 분노의 화살만 존재했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에 대한 중재나 해결방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과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까? 민주주의 제도는 포용성과 국민에 대한 최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정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정부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후대에 의해서 희비가 엇갈린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70~80년대의 향수로 판단한다.

 

안타까우나 그것은 한국의 자유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파괴하는 원동력인 파시스트다. 한국에서 아직도 파시스트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에서 그 역사적 철학적 가치관을 두고 깊이 고민하는 자는 없다. 사실 노무현이란 인물이 누군가에게 좌파대통령이라 하고, 누군가에게 우파대통령이라고 한다. 좌우 이념적인 부분에서 기본적 맥락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론을 100분을 하든 200분을 하든 변한 것은 없다. 정치란 결국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의 발판이 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정치가 흘러가면 나라 상태가 말이 아니게 꼬이게 된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는 자들이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된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새롭게 이권으로 등록되나, 등록되는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이권으로 자리 매김한다. 이런 악순환 고리가 반복되며, 그 과정에서 생긴 모순과 부조리는 누군가 떠맡게 되고, 결국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였다. 내가 대학에서 전공하던 과목은 환경공학이다. 환경공학에서 배운 무서운 공해역사에서 런던 스모그현상, LA 광화학스모그, 일본의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이다. 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이 인체에 누적되어 인간의 근골계에 심한 질환을 준다. 이때 병으로 인한 통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타이이타이라고 말한다. 일어로 이타이이타이는 너무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병인 온산병이라고 한다. 울산의 온산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에게 이 병이 걸린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강제로 직장에서 내쫓김은 당하고 보상조차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옆에 누군가 그러면 언젠가 그 옆에 있었던 그 누군가도 똑같은 병에 걸려 서글픈 인생에 괴로워하며 증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분노는 필요할지는 모르나 증오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아무런 희망도 빛도 없이 그저 억압을 받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심정이란 그야말로 저주가 걸린 세계일 것이다.

 

신화적인 요소에서 어두운 세상을 찾아오는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민중의 바램처럼 노무현의 시작 역시 그런 것이다. 다소 그에 대한 표현이 지나칠 수 있겠으나, 책을 읽든 안 읽든 만약 어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비참한 사람에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준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살아가고, 누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만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 기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주변에 일어나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그 이유만으로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기만이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를 향하여 아무런 사심 없이 도움의 손길을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각종 박해와 억압, 심지어 자신이 쌓아온 부와 명성까지 모조리 버리는 것이다. 그런 희생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변호인 노무현은 좋아해도 대통령 노무현은 조금 꺼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와 입장을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노무현이란 인간 자체가 변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소선 여사가 청와대에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이야기하던 모습이 나온다. 정말 그가 노동자들을 외면했다면 이소선 여사나, 노동운동인사와 노동관련 정당의 인사가 찾아올 리가 없다. 단지 오면 불평이나 정치적 사회적 한계성에 대해 토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점은 부림사건이란 희대의 용공조작사건이고,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에서 놓칠 수 없는 마녀사냥이다. 납치 구금되어 온갖 폭력과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사람들, 지금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당시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뒤에 일어난 노동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해결해야할 급과제이다. 최근 군대 병력 감축으로 인해 예비군의 훈련기간이 23일에서 조만간 45일로 늘어난다고 들었다. 군대에 입영해야할 남성들이 수가 줄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남성이 아니라 한국의 출산율이 저하되어 앞으로 100년 이후 이대로 가면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할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결국 한국사회를 유지하려면 인구가 재생산되어 유지 되어야 하나,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가고 있다. 그 원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렵고, 결혼 후에 출산과 육아가 더더욱 어렵다. 인구의 재생산이 되지 않으면 경제력이 축소되고, 군대에서 병력이 부족하여 이미 국방과 경제의 약화로 국가의 위기가 초래되는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월급쟁이들의 생활수준을 높여 인구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임금피크제도를 말하는 점에서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20대 청년이 50대 어른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만 일을 하던지 혹은 월급을 덜 받으라고 요구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들이 취업노선에 달려든 후 20~30년이 지나면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그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수단과 자녀의 육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때 되면 지금의 20대도 50대로 되어 추후에 나올 20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에서 당장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 모순을 다른 부조리로 대체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인력이 감축되는 것은 기계의 보급과 전자동 디지털시스템에 의해서다. 사람이 하는 일이 기계로 대체되고, 기계의 능률이 상승하여 많은 인력을 둘 필요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시장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직종을 살리고, 인력중심의 노동시장을 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건비 축소로 이윤을 지키려 하고, 기업의 유보금은 늘어간다. 현실적 문제는 알지만,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자들이 계속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부조리로서 모순을 대체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미 절벽 앞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래하면서 거리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정면으로 부딪히는 변호인들은 지금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변호인의 시작은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시작이 결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시작이 된 것이다. 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법 이외의 것으로 억압받던 시절에 유일한 대안 점은 법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무지와 가난은 독재정부의 연속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가진 것도 없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양면의 칼날처럼 대우받았다. 노무현을 두고 기존 권력자들의 시선에서 매우 귀찮고 짜증나는 인물일 것이다. 이에 반해 계속 당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속이 시원하고 통쾌한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신화로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신화는 성공의 신화가 아니라 패배의 신화다. 승리의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으나 패배의 이야기는 회자되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한다. 그가 옳고 그른 인물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차이일 것이다. 만약 적어도 현실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억울하게 그 일로 계속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노무현이란 이름은 영원히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무현 신화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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