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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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에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타계하셨다. 아마 하늘 위에서 한국 땅을 바라보는 그분의 아들인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하여 귀천(歸天)이라 한다. 죽어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세상 밖의 어디서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에 부끄러운 일을 남기면 후회하게 된다. 나라고 그렇게 올바르고 좋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 하고, 만약 했었다고 느끼거나 주변에서 충고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반성을 조금이라고 실시하려 한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우나,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다.

 

나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타인의 정신 안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전태일 평전>은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책이다. 전태일이란 이름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들어본 것 같았다. 당시 상당한 연기력을 가진 홍경인 씨가 드라마가 아닌 영화촬영을 한 것이다. 홍경인 씨가 연기한 배우와 영화 제목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전태일의 연기를 하기 위해 스턴트맨이나 대역 없이 홍경인 혼자서 했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모습을 재현하려면 가장 어려운 고비가 남았다.

 

전태일은 비참한 노동환경에 한탄하며,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에 불을 붙여 스스로 화형을 거행하였다. 노동근로기준법을 손에 잡고, 법전이 있어도 아무런 쓸모없는 그 책을 부여잡고 자신의 몸과 같이 불길 속으로 타올랐다. 홍경인 씨가 연기할 때 그 장면은 무척 위험했다. 하지만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모든 것의 의미였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희생하여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죽음조차 불사할 수밖에 없던 한 노동자의 슬픔은 우리 사회에 깊은 파동을 넘긴다.

 

사실 한국의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인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그러나 노동문제가 매우 심각한 이유는 인간은 하루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결국 삶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제적인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어 임금에 대한 갈등이 생기고, 최근 임금피크제도라는 이름으로 신구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대부분 고용되어 일을 한다.

 

일을 하면 임금에 의한 인건비가 기업으로서 많은 지출비용에 해당된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하고, 그들에게 장기계약보다 단기계약을 원한다. 퇴직금이나 휴가, 각종 복리후생 규정에서 비정규직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그나마 현대에 개선된 점은 아동노동이다. 그러나 아동이 현재 가혹한 노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이 성장하면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신의 자녀들을 좋은 근무조건에 일하게 하고 높은 수익을 받기 원하여 많은 부모들은 현실의 문제를 뒤로 한 채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아무리 강요해도 일부 누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분명히 일을 해야 한다. 지금은 일부일지 몰라도 전태일이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그래 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앞으로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금의 문제가 계속 사회적으로 문제되어 근본에 대한 해결안이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피해보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이다. 자신이 겪은 배고픔을 자식에게 주지 않겠다며 공부시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이런 세상에 희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경제적인 임금보단 노동환경에 대한 부분이다. 아버지가 선원 노동자로 일하면서 나이가 연로하여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퇴직금도 못 받는 일도 생기고, 일하던 중에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와 바늘자국 그리고 눈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가득한 것을 볼 때가 있다. 노동자의 몸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근로조건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지 그의 인생과 인간성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외면하고, 설사 그것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시끄러운 잡음만 들릴 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 세상의 흐름에서 바닥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영원히 되풀이는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도처에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을 쇠사슬 밖에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나 이미 세상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 선천적 자연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거나 또는 특별한 신체능력을 가졌다면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 문제다.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고의적인 요소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생각났다. <자본>에서 영국 공장 감독관이 작성한 기록이 나온다. 다행히 공장 감독관은 당시 암울한 공장노동자의 현실을 자세히도 기록했다.

 

대부분 공장에 어린 소녀들이 옷을 만드는 작업공정에 투입되었다. 이들에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을 시켰으며, 하다못해 잠을 못 자게 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강제노동을 시킨 적도 다분했다. 이제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들은 기계의 사이 끼여 있는 불순물을 골라내기 위해 추운 날 맨손으로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환기가 좋지 않아 신선한 공기도 흡입하지 못하고, 음식도 볼품없다. 게다가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온갖 욕설과 심지어 구타까지 일어난다.

 

이게 인류가 발전했던 원동력 중에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된 성과의 열매는 모조리 기득권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우리의 인류의 역사였고, 그 비극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60년대 산업화란 이름으로 공장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터도 가열되면 고장이 나므로 쉬는 시간은 노동자들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터가 돌면 노동자도 돌고, 모터는 기계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는 그 모터의 부품 중에 하나였다. 사람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일만 하면 몸에 병이 든다.

 

병자를 두고 가련하다고 말 한 마디로 못해줄망정, 그들에게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그런 병자들은 낡은 골방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위선으로 넘치고 폭력적인 권력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비정한 현실에 자신과 세상을 저주하면서 사라진다. 전태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입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여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나이가 중학교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며 지내야 할 그 소녀들이 입에서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그런 노동은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어졌다. 외국에서 온 노동자 그것은 여성노동자에게 그때보다 설비와 제도가 발전했다고 해도 무서운 세상의 욕심에서 한도 끝도 없는 억압에 시름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전태일과 친구들처럼 당장이라도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거나 몸에 휘발유를 뿌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을 읽고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의 비극을 맞이한 후에 깨닫는다. 우리의 앞날에 그런 비극을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태일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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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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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순환선>을 말하면 서울지하철 2호선을 말한다. 지방에 사는 나라도 서울 을지로를 순환하는 지하철을 알고 몇 번 타 본적이 있다. 서울에 가면 중요한 시내를 환승할 때 2호선을 빠질 수 없는 구간이다. 신도림역과 합정역, 잠실역과 사당역, 우리 형이 작년까지 서울 봉천동에 살 때 내가 내리던 역도 2호선이었다. 2호선을 타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서울의 지하철은 서민의 발이다. 교통체증이 심하고, 인구 대부분이 서울경기도에 집중된 한국사회에서 지하철의 만원사태는 항상 본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울은 지하철 중심의 교통체계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일반 아파트 단지부터 시작하여 쇼핑센터, 대학교 및 정부 공공기관마저 그렇다. 모든 중심이 지하철로 매개되어진다. 그러나 최호철 선생의 <을지로순환선>은 지하철 내부를 보여주거나 지하철에 탑승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을지로라고 하는 것은 지하철 노선이기도 하겠지만, 맨 처음 검은 바탕에 그려진 하얀 실선의 그림들은 서울의 한 바퀴를 돌아가는 것처럼 서울이란 도시를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로 보고 그려낸다.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거나 혹은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은 발전되면 될수록 좋아진다고 하나, 왠진 그것은 꿈과 같은 이야기다. 꿈이라도 좋은 꿈이 아니라 최악의 악몽이다. 남의 입에 들어가는 좋은 떡을 보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인가? 내 입에도 하다못해 콩고물 하나라도 들어가 그 달콤한 맛을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세상은 오로지 그것을 멀리서 부러운 시선으로 보도록 한다.

 

이런 세상에서 매일 같이 일상을 전쟁터로 보는 이들의 삶은 어떤가? 삶에 흔적에 언제나 행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울한 하늘 위에 구름이 잔뜩 끼여 낮에 맑은 하늘과 밤에 반짝이는 별조차 볼 수 없다. 하지만 구름은 언제나 이동하고, 그 농도가 강해지면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 하늘은 맑고 푸르며,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왠지 우리의 서울하늘은 언제나 여름철 장마전선인 모양이다. 눈에는 분명 하늘은 맑은데, 마음의 눈에는 언제나 흐림이니 말이다.

 

16세기 영국의 왕국은 국가재정을 탄탄하기 위해 혹은 영주가 자신의 부를 늘리기를 위해 농지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내쫓았다. 농민들은 왕과 영주를 위해 농사를 짓던 농노였다. 그들을 내몬 이유는 그 자리에 목축지를 만들어 양을 풀었고, 양에서 나오는 양모를 팔아 수익원을 삼았기 때문이다. 농지를 잃은 주민들은 모두 도시로 흘러가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름 앓는다. 운이 좋으면 공장의 노동자나 부잣집 하인으로 고용되나, 대부분 거지나 좀도둑이 되어 마지막에 범죄자로 몰려 고문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서울이란 도시 혹은 서울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 급격한 성장한 현대사회에서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자들은 계속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내쫓기게 된다. 그들은 더 저렴하고 개발이 당장 되지 않을 것 같은 곳을 찾다가 멀리 이동한다. 나쁜 주거환경, 불편한 교통여건, 각종 공공성 재산이 없어 항상 생활은 허덕인다. 우리 이웃은 이렇게 우리의 이기심에 의해 우리의 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 역시 살아가야 한다. <을지로순환선>으로 그려낸 최호철 선생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이렇게 아프지만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이 있는데 말이다. 땅 밑이 있어야 땅 위에가 존재한다. 토대가 있어야 멋진 건축물과 빌딩들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갈 수 있다. 거만한 인간의 욕망은 마치 하늘 위에 존재하는 절대자처럼 되고 싶은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이런 차가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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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0-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양반은 그림 자체가 스펙타클하잖아요. 저번에 세종문화회간인가 거기서 이 분 그림 본 적 있는데.. 진짜 보니까 후덜덜합니다. 그 크기부터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10-03 15:30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글 자체가 스펙타클합니다..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10-03 15:51   좋아요 0 | URL
앞으로는 글자 폰드 34로 쓰겠습니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김경훈 옮김, 토베 스나호 그림 / 서울문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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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로미오의 필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번째 시리즈,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7권 이후의 녹나무 마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상황에서 보는 현실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주인공의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 마을을 초토화하는 바람에 녹나무마을은 점차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마을이 황폐해졌기 때문에도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버드란트 러셀이란 영국 철학자는 인간에게 가장 즐거울 때는 바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보통 우리 일상생활에서 흥분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성적인 욕망을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적욕망을 위해 새롭게 시도하는 각종 행위들은 흥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흥분은 한계점이 있다. 성적인 에너지인 리비도는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도 욕망의 분출에서 욕구의 한계로 만족하면 그 다음 욕망을 느낄 때까지 인터벌이 존재하는 것이다.

 

식욕, 수면욕, 성욕과 같은 동물적 기능은 인간에게 한계성을 준다. 밥을 먹는 양도 어느 정도 한도가 있고, 잠을 계속 자면 어느 순간 불면증까지 이어진다. 성욕은 과도한 체력소모로 충분한 휴식과 영양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흥분이 왜 동물적 요건으로 보는 것이 한계라는 점은 도출되었다. 인간에게 육체적인 흥분은 언제나 그 한계가 있기에 결국에 이와 다른 정신적 흥분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생활사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문제 되는 것은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인간에게 여가생활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지나친 중독은 일상생활에 좀을 먹게 만든다.

 

게임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게임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계속 흥분을 하기 때문이다. 뇌에서 전해오는 화학물질이 눈에 보이는 게임영상에 의해 계속 생성된다. 뇌에 작용하는 화학물질로 인해 인간은 극단적인 흥분을 느낀다. 게임을 하거나 혹은 거리에서 운전할 때 주변 차량과 레이싱을 하려는 상황에서 흥분을 느낀다. 인간에게 흥분은 육체적인 조건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영역에 가까운 곳이라 볼 수 있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권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정신적인 흥분을 잘 보여준다. 물론 작가의 시나리오에서는 마을의 재건을 고민하는 조정관 주인공의 모습에서 보이나, 그 주변은 분명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인가에서 러셀의 말을 인용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즐거울 때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자신의 자아실현에서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 인정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이다. 그 답은 바로 할아버지의 선택이다. 만물박사이며, 유엔 업무담당관 중에서 가장 총명한 그는 사실 영락없는 모험탐락가다. 사냥을 좋아하고, 미지의 유적지를 가는 것도 좋아하며, 특히 골동품(특히 무기들)을 모우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총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사격연습을 하는 박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도전정신이 빛이 난다. 과연 그것은 8권에서 어린 시절 아주 말썽꾸러기로 살아갈 때 입었던 알로하셔츠를 거치고 우주여행 모험에 참여한다. 솔직히 작품배경이 의상과 건축형태를 보자면 19세기 정도 보이나, 실제적으로 30세기에 근접한 쇠퇴하는 인류이다. 지금의 최첨단 기술인 우주비행선이 우리에겐 미래를 열어갈 도구지만, 작품에서는 우주비행선이란 과거에 존재했던 우수한 기술이었다. 마치 우리가 미스터리로 가득한 마야문명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위험한 곳인 것을 알면서 우주비행선을 타고 달에 가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다. 일상생활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을 것도 없고, 마을은 늘 분위기가 시골마을을 보는 것처럼 조용한다. 총기를 손질하며 하루를 보내고, 조정관의 업무를 맡은 손녀에게 일만 주고 딴청 피우는 할아버지에게 새로운 이벤트는 눈에 확 들어오는 찬스다. 게다가 주인공 옆의 조수마저 할아버지와 같이 달에 가고 싶어 한다. 다행히 초대권이 없기에 다행이지 만약 있었으면 상당한 골치로 되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흥분의 시작이다. 소풍 전날 잠 못 드는 아이처럼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은 할아버지나 조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주 성향이 특이한 주인공의 학사동기 Y의 경우 남성끼리 연애하는 BL장르에 빠져있고, 자신의 취미를 살려 주변마을에 사는 소녀들까지 녹나무마을에 이끌어 온다. 마을이 침체된 상태에서 주인공은 그런 망상을 이용하여 마을을 번창 하려 했지만, 의외로 골치를 썩는다. 요정의 힘으로 만들어진 약물로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영상이 투과되는 증강현실을 마을에 도입한다. 우리 일상에서는 가장 좋은 예를 네비게이션이다. 네비게이션에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지역까지 화면 위에 지도로 나타낸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 전경을 볼 수 없다.

 

21세기 스마트폰, PC인터넷의 발전은 단순히 가상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라, 증강현실에도 큰 변화를 준다. 그래서 디바이스가 해킹되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니라 엉뚱한 길을 찾아 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진짜가 아닌 가짜가 오히려 진짜같이 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마을을 부흥하려 하나, 그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임신을 한 여성이 의사도 없어서 애태우는 모습은 정말 골치 아프다. 그런 증강현실은 하나의 게임플레이 어플리케이션처럼 작용하여 어느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해진 루트를 밟아 진행하는 것이다.

 

오락실에서 비트 마니아처럼 박자에 맞추어 키보드를 누르면 good & bad가 뜬다. 게임이 아닌 분야에 마치 게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라 한다. 녹나무마을을 융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의욕을 줘야 한다. 의욕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나 기회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문화콘텐츠가 중요한 것은 문화적 감성은 결국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달해주고, 삶에 대한 만족과 새로운 목적을 준다는 점이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삶보단 능동적인 삶에서 재미를 찾는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바로 동기유발이 없다는 점이다. 마을이 피폐해져도 이미 확보한 군용텐트가 완벽히 주거환경을 제공했고, 주변지역에서 구호물품이 계속 쏟아진다. 마을재건을 막상 하려니 도저히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삶에 흥분을 일으킬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요정이 준 수면제는 이상한 약초로서 꿈을 꾸게 되면 마치 마약을 먹은 것처럼 환각 증세를 일으키는 것이다.

 

꿈이란 세계는 인간이 깊은 잠이 아니라 엷은 잠에 들었을 때 이미지가 보인다. 이미지의 세계인 꿈에서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가려진 욕망을 마음대로 분출할 수 있다. 이상한 모양의 물건을 만들고, 자신의 신체를 특이하게 강화시킨다. 게다가 요정의 수면제는 개인에게만 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꿈이라 그 마을 전체를 꿈의 세계로 이끈다. 꿈의 세계란 인간에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신화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많은 인간들이 꾸는 꿈나라는 마치 환상의 세계에 온 것 같다. 신화란 환상의 세계이나, 그것이 현실의 인간을 반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회의적인 자세는 마을을 떠나는 악순환도 발생하나, 자신이 처한 현실에 빠져 현실도피를 하는 경우도 다분하다. 어느 쪽이든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극단적 처방전으로 일시적인 구호물품을 받지 않는다. 물건이 오지 않으니 다들 불만이 쌓이고, 불만 역시 하나의 흥분에 가깝다. 기분 좋지 않은 흥분일지 모르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녹나무마을을 다시 재건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발전한 마을이나 도시로 사람들이 유입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오는 게 정답이다.

 

그런다고 처음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기나 동기가 필요하다. 환각 증세와 Y의 BL의 공세는 처음에 마을에 이웃에 사는 소녀들을 대거로 오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욕망의 목적에 치중하지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을의 청년과 친하게 지내는 부류도 있었다. 대규모 군중이라도 모두가 같은 인간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 8권에서는 요정의 역할이 적은 편이었다. 기억나는 부분은 루이16세를 따라하려던 요정이었다. 루이16세는 같은 세대에 살았던 장 자크 루소를 두고 조롱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저서 <에밀>의 영향으로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

 

자물쇠 만들 수 있는 것은 아주 고급된 숙련공만 할 수 있었다. 요정의 기술은 그런 세세한 손길로 만들어지는 기술이 아니라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기술인 요술과 같다. 단지 인공지능의 전원을 충전시키거나 이상한 수면제만 만들었지 직접적으로 작품의 무대 위로 나오지 않았다. 요정의 특징이 인간의 문명흔적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을 좋아한다. 전쟁의 결과 문명의 파괴이니, 예전 녹나무마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떠나니 요정들의 활동이 더딘 것도 역시 그렇다. 문명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이 기반되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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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 윤한봉 회고록
윤한봉 지음 / 한마당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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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재판에 대한 뉴스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에 대항하던 시민들의 유해가 가족 품으로 온 장면이었다. 자식과 형제 그리고 친구의 차가운 몸과 붉게 젖은 천을 바라보며 그들은 원통한 눈빛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군인이 민간인을 총으로 살해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군이란 헌법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지켜야 하나, 때로는 권력자들의 눈빛을 따라 움직일 때도 있다. 이른바 충정훈련, 공수부대를 오랫동안 훈련시키면서 전투요원의 마음에 진압당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때려죽여야 하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그들의 작전이 시작되고, 18일부터 누군가의 지시 아래 총포가 울린다. 아직도 그 총포를 지시한 지휘관은 누구인지 그 윗선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만약 진짜 518사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총을 쏘게 한 지휘관은 누구고, 그 명령을 내린 상부기관과 상관의 이름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국가의 위기를 모면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것은 바른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35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 지시를 내린 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

 

만약 진짜 북한의 음모와 반국가적 폭동이라고 한다면 그 지휘관의 이름과 상관의 이름은 분명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고, 그것을 전혀 밝혀들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518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이란 점을 반증하게 된 것이다. 진짜 북한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희생자 중에서 임신한 여성이나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나, 어린 여중생들이 왜 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비논리와 비이성적 억척은 거짓의 논란과 위증의 말꼬리를 잡고, 그런 것 같더라 혹은 그랬다고 하네요.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낸다. 518의 역사, 그리고 최근 정치권에서 광주중심으로 한 정당을 창당, 왠지 모르게 역사의 흐름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상황이 보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이번에 읽은 책이 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이 저술한 <망명>이란 책을 읽으면서다. 본래 <똥가방>이란 이름이란 책으로 발간했지만, 내용을 보충하고, 다소의 에필로그를 추가하여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윤한봉은 참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역사에서 빠질 수 없던 인물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대한민국 헌법은 권력자의 무력 앞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때부터 많은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군사정권은 고문과 감금 그리고 심지어 사법사형까지 일삼는 잔혹한 추태를 보였다. 윤한봉은 1970년대부터 유신에 대한 저항으로 체포되어 구형되었고, 출옥 후에도 계속 민주주의운동을 하였다.

 

제3공화국 말, 윤한봉은 강제로 감옥에 끌려와 각종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1026사건 이후 출옥되자, 조만간 1212사건이 일어난다. 군부가 장악하던 시절, 윤한봉은 1980년 5월이 오기 전부터 신군부가 25일 전후로 광주에 유혈진압을 할 것이란 말을 한다. 모두 다 아닌 것 같다고 하나, 막상 18일이 되자 광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윤한봉의 친구와 동무들은 무참하게 진압부대의 총과 칼 아래 주검으로 변하고, 윤한봉은 수배자로 몰리자 주변의 의견에 따라 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 35일 동안 더운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배고픔, 외로운, 억울함, 죄책감으로 사무쳐 괴로워하며 표범(leopard)호에 탑승한다. 미국에 내릴 때 그는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고, 자유가 없는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1981년대부터 시작하여 12여년을 타국에서 보낸 후 1993년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가난도 그런 것이지만,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한참 후이고, 미국정부와 미국 내 한국대사관의 공작으로 계속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미국에 한국청년연합회를 결성하여 미국 내 여기저기 흩어진 동포를 모우고 그들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망각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이 남영동 고문실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는 것을 소식으로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보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그들이 자신의 망명 때문에 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 윤한봉은 자신이 감옥에 수감되고 나올 때, 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들었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점에서 그는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돌아간다 해도 무사할지 모르는 것이다. 벼랑이 언제나 눈앞에 있는 그의 운명에서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미국 LA 한인사회를 차츰 변화시켰다. 지금의 미국 한인동포 모임에서 그가 남긴 업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미국에 온 이민자들, 고향을 잃은 사람과 고향을 등진 사람들, 그래도 한국은 우리의 고향이고 그리운 흙이 있는 곳이었다.

 

이 책을 보며 느끼지만,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든 바르게 정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도 불리한 상황은 계속 압박하고 때에 따라서는 박해는 지속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무리에 대해 다른 조직이나 사람들과 연대하겠지만, 그 연대하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명분이란 이름으로 숨기며 각종 특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겨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여름의 더위와 외로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막상 어느 상자리가 차려질 것 같으면 어김없이 달려 들어와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518재단을 발기했을 때 윤한봉이 처음 공로가 많았지만, 막상 그 행사가 열린 당일에는 윤한봉을 시기하는 무리가 나와 묘소에 참배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 윤한봉이 했던 일 중에 아마 DJ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자가 있더라도, 만약 지지자들의 비판이 있으면 그것을 듣고, 반성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호남권에서 DJ의 비판은 곧 적이 되어야 했고, 윤한봉은 그것을 바로 실시하던 사람이었다. 광주에서 518의 슬픔은 윤한봉 역시 크다. 그러나 그 슬픔의 공로를 정치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DJ정신의 계승에서 김대중 대통령 사망 이후 보이는 정치권의 행태는 왠지 참 안타까웠다. 2007년 윤한봉이 사망했으니 이미 그 전에 <망명>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런데 벌써 그것을 예측하고 문제가 터졌다. 인간에 따라 공과 실은 나누어지나, 공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실책을 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하여 새롭게 나가는 게 바른 길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는 전혀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작년에 우연히 광주에 갈 일이 있어서 망월동에 있는 518묘지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다음에 갈 일이 있으면 윤한봉의 묘지 앞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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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2 08:43   좋아요 0 | URL
아~!
제 전공은 정치와 철학이 아닙니다.
저는 공대출신입니다. 전공이 환경인지라 환경 자체가 아주 조금 인류학이랑 관계가 있다보니 인류학쪽으로 관심을 돌리다가 이렇게 오게 되었군요.

오덕은 진화하는 겁니다!
 
나비의 노래 일본군 위안부 만화
정기영 지음, 김광성 그림 / 형설라이프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최근 일본 아베정권이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하려 하고, 과거 다른 국가를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려고 한다. 침략은 했으나 그것은 그 나라를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은폐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 시대 일본이 저지른 행위를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서 유네스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군함도, 그것은 완전히 지옥의 섬이었다. 조선에서 징용한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하여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그것도 더위와 피로,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의료의 혜택조차 노동력의 징발여부만 가렸다.

 

그런 과거의 행위가 왜 지금에 논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 그런다.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그것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일은 당장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정치적 형태가 자꾸 과거의 모습을 속이고, 군사적인 요소를 부각한다면 또 다시 저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영향으로 100% 재현되지 않겠지만, 어디서 모른가 저런 비인간적인 행동까지는 아니나, 많은 인간들을 절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라는 것은 왜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어느 위기에 빠지면 일본은 그때도 야욕을 보이며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고, 그 기억에서는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많다.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부담을 준다. 과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지 않는 꽃>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재로 존재했던 일들, 영원히 지옥의 악몽에서 풀려날 수 없는 저주, 사실상 마음 깊이 담아두는 것만으로 상처가 깊은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란 상당한 고통이다. 한국사회는 여성에 대한 기준이 참으로 난감하다. 성폭행은 분명 나쁜 것이고, 성폭행은 당한 대상은 약자인 여성이 많으나, 그들의 피해사실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과거 형사나 경찰이 피해 진술과정에 대해 들어보면, 피해여성에게 상황묘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해 달라고 한다. 그것은 피해자가 아주 두려워하던 순간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충격으로 인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진다.

 

예전에 성폭행 당해본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과정을 숨기거나 고소를 취하하던 이유가 바로 여기다. 재판과정에서 다시 그 상황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더 심각하게 찌르는 것과 같다. 위안부 할머니는 아마 그런 성폭행 피해여성에 비교하면 괴로움이 더 심할 것이다. 집단성폭행에다가 잔인한 고문과 살인위협에 항상 시달렸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꽃>에서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할머니가 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말만 믿고 따라가는데, 알고 보니 동남아 일본군 진영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패배를 겪고 있었고, 위안부의 공급은 패배의식에 짓눌린 일본군들의 사기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자의 성적인 욕구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한편으로 정복욕을 충족시켜주는 해결방안이었다. 전 근대적인 사회에서 전쟁이 나면 항상 승리한 침략자는 마을 안에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전쟁에서 항상 전리품으로 다루어진 것이다(그런다고 여성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몰살당하는 남성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는 현지에서 약탈이 불가능한 일본군들이 강제로 약탈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행위이다.

 

작품에서 사병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복무신조를 지켜야 하는 장교가 오히려 위안부 처소 안으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 이미 전쟁에 의한 정신적 외상이 극으로 치닫고, 피해의식과 파시스트의 광적인 요소는 학살과 자살 등과 같은 만행으로 연결된다. 예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16살의 꽃다운 소녀들이 끌려오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워했을까? 아직 몸과 마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강제로 성노예로서 성폭행 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성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 강제로 칼로 성기부분을 찢은 만행을 들었다.

 

<지지 않는 꽃>에서도 그 내용은 나왔다. 다행히 더 끔찍한 장면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일본군들이 전투를 벌일 때 자신들의 병력피해를 줄이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일부러 진열의 앞에 서게 하여 적군들이 쏘는 총알을 대신 맞게 하는 총알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한 많은 세상, 희망도 없이 그저 유린당한 채 죽어야 하는 그녀들의 운명에서 일본의 사죄는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패악을 저지른 자들은 현재의 자는 아니지만, 그것을 잊으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점이다.

 

독일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면서 많은 지탄이 되었는데, 그것은 인종차별로 이어지고, 인종차별의 극단성은 테러리즘으로 이어진다(물론 그걸 저지르는 광신자들은 정의라고 믿는다). 일본의 사과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망각하면 망언을 계속하고, 일반 국민들까지 그런 나쁜 정신이 유포되어 한일 양국 간의 우호가 나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사과한다고 해서 사과 받는 쪽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용서로 통해 서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행은 저지른 일본은 상당한 젊음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과 형, 친구들이 시체로 돌아오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으니, 피해자가 가진 피해의식만큼 가해자에 동조하던 자들의 주변인들도 피해의식을 가진다. 결국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야 한 게 전쟁이란 허무이다. 국가정부의 오류로서 전쟁과 전투로 죽은 군인들은 죽을죄가 없이 죽어야 했던 희생자다. 물론 그들이 전쟁 중에 무고한 자를 죽였다면 죄는 된다. 단지 그 죄를 만들도록 한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자들의 밑에서 이익을 챙기고, 이권을 이어받은 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아베정권이 오면서 일본전쟁범죄 가문의 후손들이 정계와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자국의 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국민들까지 위험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자신의 망상이 국가의 존립과 위엄이라 말한다. 피해자를 두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발뺌 하는 현실에서 <지지 않는 꽃>을 보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미래까지 지키는 것까지 연결된다. 꼭 위안부 할머니라 하여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이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일어나면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저래 당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보편적 조건에서 일어날 현실로서 접근한대도 그건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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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21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할머님들 다큐 보니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을 하고 난 뒤엔 끙끙 앓으시더군요. 잊으려했던 상처를 다시 꺼내 헤집으니 상처가 또 터지는 거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상태를 견디실 거라 생각하니....
시간이 약이 된다는 말, 아픔과는 상관없는 참 쉬운 말이라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1 09:31   좋아요 0 | URL
시간이 약인 것은 아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아픔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일 뿐이죠. 진통제 맞는다고 병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