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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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만수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모든 이야기가 만수만 나오는 것은 아니나, 분명 만수의 행동과 만수와의 대화가 <투명인간>의 중요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이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분은 만수라는 인물이 자신의 세대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나이가 50대 중반 분들은 만수가 학교를 다닐 시절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고, 그가 격은 시대적 흐름과 많이 공감대가 형성되어 마치 소설이기보단 하나의 역사적 기록을 실어놓은 이야기 같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어느 시대적 배경과 흐름을 두고 하나의 결과가 필요하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거나 또는 환상의 이야기로 말이다.

 

작품에서 환상의 세계는 만수가 투명인간이란 점밖에 없다. 단지 그가 마지막에 자동차에 박혀 교량 아래로 추락하는 것에서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혈흔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말 처음부터 만수라는 인물은 존재했는가? <투명인간>이란 존재는 아마도 만수로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과 모습을 다시 회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수의 가계를 보면 조부는 원래 양반후예로 나름 사회적 지식인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불온사상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게다가 큰 아들마저 죽게 되자, 작은 아들을 데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지 화전민 마을로 유입된다.

 

거기서 만수의 아버지는 화전민의 딸과 결혼하여 6남매를 낳고, 중간아들 만수가 태어난다. 다른 형제와 비교 해봐도 얼굴이 크고 못난 만수, 그런데 만수를 보면 집안의 일을 가장 많이 돕고, 여러모로 학교나 직장 그리고 군대까지도 사람들과 가장 잘 지낸다. 만수라는 인물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어디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50대 남성 주변으로 형제들 이야기가 나오면 만수 같은 인물이 있고, 그들은 항상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연탄가스는 인상적이다. 2명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 <투명인간>에서 큰 누나를 선택하고, 작은 누나는 뇌가 손상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간다. 곁에 계신 분도 중학교시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옆에 자던 할머니와 동생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이야기도 그렇다. 학교에 등교할 때 책가방 대신 보자기를 싸고 다녔는데, 모임에 계신 분들도 그런 상황을 이야기했다. <투명인간>은 말 그대로 현실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그때 어떤 일이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 감상들을 대화할 때, 이 책은 전근대 사회와 근대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은 한국사회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 주체는 남성이란 점이다. 만수의 할아버지는 전통사회에서 농민공동체가 존재하던 마을에서 선비의 후손, 거기에 지식인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을 거쳐 근대의 어둠까지 본 것이다. 당장 오늘 하루 먹고 살아가는 것이 걱정인 시절, 몸이 약한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를 두고, 계속 그 마을에 약사와 정신적인 지주로 지켜왔다.

 

그러나 배고픈 것과 정신적인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나무하러 가고, 풀을 뜯고, 소와 돼지를 치는 일에 자란 아이들은 학교조차 가는 것도 높은 장벽이었다. 그나마 백수는 할아버지를 닮아 영특하고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 몸이 약한 것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대학교에서 가난과 외로움만 아니었다면 불운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만수의 모든 가족들은 오직 백수 하나만 바라보고 움직인다. 백수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그 모든 비용이 만수의 가족에 의해 만들어진다. 백수를 보면 그가 마치 당연한 가족의 희생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가족의 기대에 억지로 자신을 내몬다. 그 마지막이 월남전이다. DDT라는 약품은 제초제로서 상당히 위험한 독극물이다. 다이옥신은 중금속보다 더 위험하고, 소량이 첨부되어 코끼리에게 투여해도 죽을 정도다.

 

다이옥신에 중독된 백수, 그 이후로 만수의 가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족의 정체성에서 백수의 상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인생의 목적을 빼앗아 가버린다. 백수가 죽고, 만수와 석수의 실랑이에서 불씨가 집으로 번져 모조리 태운다. 그리고 그들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 올라오면 희망이 있을 것이라 보지만, 사실은 돈에 의해 울고 웃는 비정한 시간이 왔다. 만수는 학교를 마치고 공장에서 일을 하여 나중에 전경으로 들어간다. 전경이 되어 교통경찰 업무를 보조하며 이른바 뒷돈을 모아 집안을 부양한다.

 

어느 날 석수가 총을 탈취하여 탈영할 때 석수는 만수를 못 알아보고 발포하고, 자신은 죽는다. 석수는 그렇게 행방불명 처리로 되어 남자는 만수만 남았다. 아버지와 불화로 큰 누나의 결혼도 엉망이 되고, 공장에 일하던 만수가 처음에 흥하려 하다가 어느 순간 회사사장이 업체를 일부로 도산시키고 도주한다. 직장을 지킨 만수와 일행은 거기에 불만을 느껴, 저항하나 결국 남은 건 빚이다. 그래도 만수는 그 모든 것을 안고 가고, 마지막에 빚도 갚으나 계속 불운한 일만 터진다.

 

가족을 위해 일만 하고, 자신에게 이때까지 제대로 된 즐거움을 찾지 않은 채 반 세기를 살아온 만수, 20세기문턱에서 IMF 여파에 남은 것이란 빚이고, 가족들은 다들 좋은 길보단 불운한 현실에 좌절한다. 그런다고 시대적 흐름에 바르지 않은 조류를 거꾸로 거슬려 가려한 이들도 절망하여 도박에 미친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고, 아무 것도 가질 수가 없었던 우리 지난 세대들은 마침내 최후에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자기 자신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단지 그 존재적 정체성을 자아의 관찰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서 비추어진다. 타인의 눈은 자아의 눈에 비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자아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세세하게 볼 수 없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 자아의 탐구와 타인의 관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아간 점이 있었을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닌 것까지도 포함하여 공장과 그 후에 어른이 될 때의 가족관계, 만수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억지로 떠밀린 책임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것처럼 행동한다. 늦게까지 일만 하여 결혼도 거의 미루다시피 생활했고, 결혼해도 신혼의 축복도 없다.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아니라면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만수다.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제 자신을 위해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한국 남성들은 만수와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 대략 40대부터도 그 생활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30대조차도 그런 영향을 조금 받는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적에도 연탄가스로 중독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형이 어린 시절 어머니하고 같이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을 피하기 위해 겨울밤 창문을 열고 자다가 형이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때 형이 감기 걸린 후 폐렴에 걸렸을 때 병원비가 없어서 어머니가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고 한다. 가난이 결국 우리사회의 에너지가 되면서도 발목을 잡던 딜레마인 점에서 <투명인간>에서 보인 우리 사회의 모습이란 우리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대상을 존재했다고 믿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존재하고 존재했다고 인식하더라도 그를 인간적 가치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었을까? 아니라면 단지 자기 편하게 지내려고 하려고 만수란 인물을 대했을까?

 

어느 쪽이든 만수를 위해 그나마 옆에서 위해주던 사람은 중학교 시절 친구와 공장에서 밥을 하고 나중에 결혼한 여자 정도일까? 모두 만수에게 다가오고 했지만, 진심으로 와준 것이 아니라 필요성에 의해 상황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가족조차 마찬가지다. 만수에게 많은 돈은 없지만, 돈을 착실히 모아 여유자금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만수는 결국 이용하기에 좋은 일꾼이고 자금줄이었을 뿐이다. 만수는 그런 자신에 대해 불만보단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다. 만수 주변사람에게 만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투명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 독서모임에서 대표적인 투명인간은 만수지만, 비단 만수만이 아니다. 만수를 처음 만날 화자가 맨 마지막에 만수를 찾지 못할 때조차 이어질 때, 그 자신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얼굴과 온몸을 가리며 자전거를 타는 그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누군지 알 수 없다. 진짜 투명인간이 겉옷만 두르고 다니는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라면 거대한 국가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은 모두 다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배고픈 시절을 지나 막상 살만하니 다른 문제들이 나온다.

 

거기서도 자기의 주관이나 의지도 없이 사회적 흐름에 따라 물결이 요동친다. 요동치는 세계는 단지 강요하는 삶을 보여줄 뿐이다. 만수가 수업시간에 담임이 왔는데, 자신이 대위출신이고 정직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학교 내 나무 하나가 누군가의 장난으로 훼손되자 그 장난을 친 사람이 자기반 학생이라 여기고 나오라고 한다. 사실 자기 반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그런 일에 굳이 방과 후에 종례시간을 억지로 묶여둘 필요가 없다. 다들 괴로워하자 만수가 자진으로 나오자 선생은 만수를 진짜 개 패듯이 팬다.

 

그도 학생도 만수가 아닌 것을 안다. 단지 그는 본보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이다. 만수는 이빨이 깨지고 심하게 다쳐도 선생은 사과나 보상 따위 하지 않는다. 투명인간은 색이 없어야 한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조건 색을 맞춰야 한다. 카멜레온이 어느 순간 색을 너무 바꾸다보니 본래의 색이 뭔지 모르고 계속 변색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현실의 우리조차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우리는 만수에 비하여 책임의식이 약하다.

 

만수는 자기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무리인 세대가 왔다.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서이다. 옆에 계신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사회는 현재 표백사회로 인해 표백인간이 되었다고 말이다. <투명인간>은 빛에 반사하지 않고 투과하므로 있어도 없어도 느낄 수 없다. 하얗게 모두 변색된 표백인간은 어느 색 한 가지로 칠하면 그렇게 된다. 현실에 적응조차 어려운 세상이 온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잃어버리고 박탈당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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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외 - 법과 죽음에 대한 통찰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3
플라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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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록은 서양문명에서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의 사상이 유럽을 지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플라톤의 이름과 함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이름도 퍼져 나간다. 사실 생각해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언제나 소크라테스의 옆에만 있었을 것은 아닐 것이다. 대화록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앞을 내세우고,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많은 분량을 혼자서 다 기억하여 작성했을까? 아니라면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 정리하여 기록했을까? 여전히 그런 부분은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이 적은 글들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라고 믿을 수밖에 없고, 소크라테스가 발언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600여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알 수 없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는 초기, 중기, 후기 3단계로 구분되어 작성한다. <파이돈>이란 대화록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주변 친구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책에서는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갔다.

 

<파이돈>을 읽으면서 생각할 점은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라는 인물에 의해 무고를 당하면서부터다. 관아에서 자신이 고소당한 것을 안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관아로 가는 도중에 <에우티프론>이란 대화록이 시작되고, 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 사형선고 이후 감옥에서 친구 <크리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파이돈>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니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안 상태에서 서사적 흐름으로 정리하자면 <에우티프론>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이란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펠레폰네소스전쟁 패배 이후 라케다이몬이란 스파르타에 의한 과두정부가 수립되고, 30인으로 구성된 지도자들은 민주정 해체 이후 제대로 된 정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독재와 폭력을 일삼고, 수많은 시민을 처형하고 재산을 가로채었다. 그 중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있었고, 그들은 민주정 혁명 이후 권력을 잃고 도망치거나 처형당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그들에 대한 분노를 참기 어려웠으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뭔가 하나의 사건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유는 그런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과두제의 위원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가 평소 바른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민주정 정부 수립자들에게 상당히 비위가 거슬렸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에서 단순히 그의 제자들이 반역자라서 몰아넣기 식이 아니라, 단지 그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인 영감 그리고 지혜를 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아테네지역을 돌고 돌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 아테네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로 봐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줄 철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명한 시인, 철학자, 정치가, 각계 인사들은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논리가 부족한 것이 들통 나고, 소크라테스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 앙심을 품어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에서 비롯되는 숙청보다는 사회적인 여론에 의한 숙청에 가까웠다. 단지 사회적 죽음에서 권력자들이 뒤에서 압박을 가했기에 그의 죽음은 마녀사냥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에게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 기존의 철학에 대한 역사에서 physics(물리학)는 과학적인 요소를 보았다. 지구는 무엇이고, 만물의 요소는 무엇인지,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고, 운동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탐구가 바로 과학적인 철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돌이 떨어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라도 돌이 왜 떨어지고, 떨어지는 돌이 어느 경우로 떨어지며, 그것에 작용하는 힘은 무엇인지는 물리학적으로 시각적인 영역보단 비시각적인 수학적 영역으로 도달한다.

 

이런 인간의 사고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 있지도 않은 어느 이미지가 구현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철인군주가 있어야 올바른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국가론>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적 토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학을 모르면 안 되나, 또 하나가 중요한 학문으로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은 일반적인 도형과 다르다. 그런 모양이 구상되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서 사유할 수 있는 세계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생각되는 Simulating하는 것은 곧 가상적인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 하나의 장치로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왜 기하학이 중요하고 수학이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전쟁을 하려는데, 적군의 수와 아군의 수를 파악하고, 군부대도 수군인지 육군의 형태로 보고, 전장의 지형과 지리 그리고 아군의 진형을 파악하여 적군하고 싸우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전쟁에서 이른바 지형과 지리를 보고 진형을 짜서 치는 것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이다. 수전에서도 파도의 높이나 물의 흐름 그리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은 승부의 패배를 결정짓게 하는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에서 모방되어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기존의 physics에서 공간적 층위가 하나 더 올라간 Meta-physics라는 형이상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음이란 곧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보단 정신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파이돈>을 읽을 때 바로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하는 이유는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들을 모방했기에 진정한 진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데아에 존재하는 그 개념만이 영원불멸할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인간에게 치환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보통 동물보다 오래 산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바로 다른 동물처럼 어릴 때부터 바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을 받는 기간이 길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자연세계의 야생동물은 태어나자말자 걸어야 하고, 새들은 수개월 안으로 날개를 펴고 날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잔혹하기에 그만큼 새끼들이 보호받는 기간이 짧아 충분히 성장해야 하는 기간이 짧다. 우리 인간이 사육하는 소들도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도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길어도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죽는 나이가 70이다.

 

지금의 70이란 수명에 죽는다면 그렇게 장수했다고 볼 수 없으나, 고대 사회에서 70이라면 상당히 장수한 나이다. 죽음이 다가온 나이에 조금이라도 더 살 것이라고 추태를 부리면 그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여겼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길목에서 왜 그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일까? 현대사회는 물질적 요소가 중시되는 사회다. 즉 자본주의의 도래와 그로 인한 산업화, 인간이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치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적인 가치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현대사회는 피지배계층이 계속 억눌러 사는 것이 부당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치적인 차이는 그 당시의 사회상인 것이다. 운명의 흐름에서 그리스에서 신의 존재를 믿었다. 결단코 제우스께! 라는 말과 여러 올림포스의 신을 입으로 내뱉는 행위는 신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기에 거짓을 일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세상이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장하게 끝낼 수 있다. 그에게 각종 신과 영웅 게다가 인간지성사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성현들을 하루라고 먼저 찾아가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행복의 축복인가 불행의 저주인가? 실존주의자에 의한 판단에서는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같이 붙어있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살아있는 게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같이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야 말로 삶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바로 이런 정신적인 세계가 펼쳐진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아래 무난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이유는 인간은 죽는 것은 당연하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야 하는 것은 육체는 썩어서 없어지질 모르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하지 못한 것이 있고, 좋은 게 있다면 좋지 못한 게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서 찾아볼 점은 바로 대조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반대고, 삶은 죽음에서 나왔다면, 삶 이후에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단지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과정에서 충분히 삶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유는 <크리톤>을 더불어 참고하면 좋다. 소크라테스는 해외로 망명하거나 탈옥하면 삶을 영위하나, 그 이후 자신에게 떨어진 불명예, 주변에 친구와 가족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자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없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당시의 권력에 소크라테스의 머리를 숙인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때까지 거의 1/3에 해당되는 인생을 속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동안 자신을 속이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구하기 위해 재물과 권력을 멀리했다. 그런데 재물에 의지하여 탈옥하고, 권력에 머리 숙여 목숨을 구걸하면 자신을 고발하던 사람의 책략에 걸리는 것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없애고 싶은 마음보다 소크라테스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에 의해 죽더라도 그들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위대한 인간을 없애버린 비극이 되었고, 후대 역사에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장본인들은 어리석고 비겁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진심 영혼이 있어 천국과 지옥의 세계에서 재판이 있다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로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점에서 자신은 그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육체라는 일시적인 허물은 그저 스쳐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영혼의 불멸이 있으니 오히려 그 영혼을 갈고 닦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목적이다. 신의 분부를 따라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이 결국 마지막에 신과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한 일은 남이 다 알 수 없다. 오로지 아는 자는 신이라면, 신이 눈앞에 보이지 않다면 영혼 즉 관념 속에 세계에 존재한다.

 

자신의 삶에 후회 없는 삶을 사려면 신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이 있어 나를 알아주면 내가 현실에 죽어도 현실을 벗어난 다른 세계에서는 충분히 자신을 알아준다는 점이다. 오늘 현실에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면 자신의 착각이나 어리석음으로 주변에 얼마나 많은 민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모를 수 있다.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가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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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 만화가 10인의 마침표 없는 인권 여행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정훈이 외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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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권리,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적정범위, 아니라면 인간이 태어나면 이 이상으로 보장받지 못한 비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기준 등 인권에 대해 생각하면 정의내리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 지난 인류의 역사란 되돌아보면 인간의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투쟁이란 자연적 조건 혹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 식량이 부족하거나 또는 날씨가 춥거나, 집에 너무 좁거나 월급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어찌 보면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자연적 혹은 신체적 불평등보단 사회적 혹은 도덕적 불평등이 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른바 대한민국 헌법 아래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참으로 애매하다. 헌법은 어찌 보면 국민과 그 국민이 선출한 국가기관의 정부요직 또는 공무원들이 제일 먼저 지켜야 하나, 오히려 헌법이 더 뒤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헌법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맨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정의를 말하는 인간들을 보고 난 뒤에 헌법 조항을 비교대조를 해보면 바로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대한민국이 인권의 나라, 자유와 평등의 나라가 되려면 헌법의 정신적 가치를 새겨보는 것이 옳으나, 헌법이 사라지고, 대신 입맛에 맞는 각종 법들이 좌지우지한다. 법만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는 지침과 규정들도 임의로 관료사회집단의 입장에 따라 계속 바뀌어간다. 인권을 말하는 것은 마침표 끝내는 대신 물음표로 항상 질문해야 한다. 여기가 지금 제대로 사람들을 위한 장소인지 제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혜택과 보장이 돌아가는지 말이다. 10월 8일 최호철 유승하 부부 만화작가의 강연을 들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 인상 남는 일화가 지하철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다리가 심하게 불편하지 않은 이상, 나이가 제법 있으신 어르신들도 충분히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나 산모, 병을 앓은 사람들에게 너무 힘든 영역이다. 레드 제플린의 유명한 곡 Stairway to Heaven, 천국으로 가는 계단만큼이나 멀고 험한 길이다. 장애우 한 분이 오랫동안 계단을 오르기가 불편하여 사회에 호소하였고, 나중에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남들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탑승한다. 그러나 그 장치가 생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 길고도 힘들었다. 말이야 쉽지? 이런 말은 바로 여기서 부터인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속이거나 외면하지만, 세상에 너무 힘든 사람이 많다. 그들을 돕는 일이란 그저 길가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주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우리 국민에게 세금을 수금한다. 하지만 그 용도가 제대로 된 것보단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자주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정작 사용할 곳은 어디인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그것을 제대로 관리감독 및 시행을 누가 잘 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 개인 하나는 어떻게든 타인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돕기도 힘들다. 아침부터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하는 직장인에게 월급봉투는 너무 잔혹한 숫자이며, 학생에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시간과 공간조차도 없다. 마치 억지로 시작도 끝도 없이 저 황무지를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처럼 우리는 항상 불안한 운명에 허덕인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싼 죽음의 모래언덕에서 발을 움직이려도 해도 다리조차 들어 올릴 힘도 없다. <어깨동무>에서 그런 사람이 나온다.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다. 노인 혼자 집에 살고 있고, 옆에 강아지 하나만 있다. 아들 내외는 언제부터인지 소식이 닿지 않고, 옆에 늙은 강아지만 열심히 그 상황에서 주변에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소리에 시끄럽게 여기고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지막에 개가 짖는 소리마저 없어지자, 그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변 친척 중에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틴 조금 먼 친척의 이야기를 들었다. 촌수로 대략 6~8촌 사이 정도랄까? 나이가 60 넘은 여자 친척이 혼자 사는 이야기를 했다. 한 분은 자신의 집이 37평, 상당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옆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옆에 오빠나 동생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챙겨줄 수 없었다. 그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이가 된 것이다. 최근 노인들의 고독하게 죽는 일들은 종종 뉴스에서 본다.

 

사람이 죽는 것은 축복일 때도 있다고 하나, 대부분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조차 기억해주지 않은 세상이다. 내가 이 세상에 정말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물론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슬픈 현실에 처해져있다. 최규석 작가가 그린 편에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최규석 작가가 매우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그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극화 같은 그림체는 등장인물에 대해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현실의 인물을 보여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아파트 재건축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지가 나에게 큰 충격적이었다. 건물 철거 중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작업하다 죽은 사건이나, 철거민들이 철거용역업체에게 저항하다 소화기를 뒤통수를 맞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억울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재산권 침해이란 이름 아래 오히려 외면당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우리의 인권주소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으며, 그런 것과 무관하므로 모두 외면한다. 말해도 그런 신경 쓸 필요 없다거나 혹은 너나 잘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좋은 사람인양 착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인 것처럼 보여주는 행동에서 과연 그들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긴다. 차라리 이런 세상을 알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뭔가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당하면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진다. 개인이 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휘발유를 몸에 뿌릴 때 권력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 아래 많은 것을 느꼈다.

 

사회가 힘들게 되면 개인에게 어렵게 되니, 결국 개인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어 연대의식을 나누거나 혹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작은 이익에 눈이 먼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할 때 이미 자신은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어깨동무>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기보단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경우가 많다. 열심히 살아도 도저히 바뀌지 않는 불안한 오늘, 내일이란 이름은 과연 자신에게 빛으로써 비추어줄까?

 

인권은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었다. 노예가 엄연히 존재하고, 여자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권리가 박탈당하고, 인종차별과 종교전쟁이 늘 테러와 전쟁으로 이어져갔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왜 나는 되는데 남은 되지 말아야 하는가? 인권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란 존재를 위한 것도 되지만, 결국 나에게 큰 이익이 된다. 약자를 위한 시설이 있다면, 언젠가 나나 주변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보장이 잘 된 복지라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지금에 눈앞에 있는 당근을 먹으러가지만, 그 당근을 땅에 심으면 수확물이 열린다. 우리는 땅에 심어야 할 최소한의 당근마저 뿌리를 뽑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 과연 어떤 것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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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들 - 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평화 발자국 8
김성희 외 5인 글.그림 / 보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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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영화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두 개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의견>이었다. 영화는 실제 사건인 용산참사사건을 토대로 제작했다. 영화에 대한 비교에서 전자는 사실과 영화의 편집을 했다면, 후자는 순전히 가상의 인물과 이야기로 만들었다. 전자는 그래도 르포르타주 형식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면, 후자는 영화라는 특성인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반영했다. 후자의 편이 카메라 앵글의 이동과 shot by shot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미를 위한 요소에서 추리와 대립이란 플롯구조 장치도 잘 배치하였다.

 

약간의 재미를 주었는지 혹은 재현성에 대한 부분을 중시했는지 위의 영화들은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보이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제3자의 관점을 바라보았다. 카메라의 시선이 결국 어느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나, 위 영화는 주인공의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의 영웅 신화 서사를 반영한 게 아니라 영웅은 현실에서 나올 수 없거나 혹은 영웅은 나약한 존재로 그린다. 이길 수 없기에 패배적 상황은 오히려 이야기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여기에 대한 관객의 반성의식을 촉구한다.

 

문제는 관객은 영화를 영화로 볼 뿐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는 부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상하게도 드라마의 가상으로 조형된 세계에 빠져들어도 불편한 이야기는 뒤로 담아두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의 입맛에 어울리는 반찬만 찾는 현실이다. 불편한 현실에서 인간들은 불편함에 대한 배타의식이 잠재적으로 숨어있다. 배타적 반발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한 것만 추구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이타적인 정신은 이런 모순적 관계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의 부조리, 자신이 느끼는 인식의 부조리, 이것들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의무인 것 같다. 현대미술과 현대만화는 이미지로서 수용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미술의 예술성에서 한계는 표현과 사유의 확장이지만 서사의 확장은 없다. 미술이 대중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바로 서사가 없고, 서사는 없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다. 공감대의 형성에서 만화는 그 힘이 강력한 정도가 아니라 전환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전환점을 불러도 다 바꾸는 행운까지 이어지지 않지만, 적어도 뭔가를 말하여 소통의 세계로 인도하는 노크까지 발전한다.

 

<두 개의 문>과 <소수의견>의 시나리오는 바로 기존 철거민들이 농성하는 상태에서 들이닥친 경찰병력과 대치하다 큰 변을 당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철거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대치하던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각종 협박과 폭행을 시행하던 철거용역 깡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업무상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돌면서 철거업체 관계자와 만난 적은 있어도 그렇게 난폭하거나 위험한 사람들은 없었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서 등장한 철거업체는 조금 달랐다.

 

조직폭력배는 아니지만,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신속하게 주민들을 내쫓는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이 원인은 무엇인가? 예전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물가가 상승하는 이유가 부동산 지대의 상승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여 임대받은 상가가 자신의 기존의 이윤과 임대료를 해결하기 위해 상품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자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거나, 혹은 다른 친구와 전화통화하면서 물가의 상승이 그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가 아니냐고 들었다. 물론 물가의 상승은 복합적이지만, 갑자기 임금이 상승하지 않고, 자재도 갑자기 올라가는 일도 드물다.

 

원자재조차도 처음에 가격이 상당히 오르다가 갑자기 등락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는 추세에 신도시단지 계획이나 주택재건축사업이 발표되면 갑자기 그 지역의 부동산이 폭등한다. 1년 사이에 그 부동산의 가치가 30% 이상 증가한다는 점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부유한 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자산가치가 늘어나고 투자의 기회가 증대되지만, 중산층에게 부동산 시세 따라 자신의 집을 팔고 이사하는 부류가 아닌 이상 독이 된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다고 이사를 늘 갈 수 있는 상황조차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계는 부동산업으로 통해 주택매매가 아닌 임금을 받거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역으로 손해다. 재산세의 증가와 취득세의 증가는 역으로 세금납부가 부담된다. 그러나 제일 걱정인 부류는 세를 들어오거나 집을 구해야 하는 입주자들이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부담은 주택매매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호주머니 속에 돈이 오르면 오를수록 심각해진다. 갑자기 증폭된 부동산가격 이전투구처럼 달려드는 투기바람, 한국의 헌법은 인간의 재산권과 생존권에서 안타깝게도 재산권에 손을 들어준다. 예전에 생존권을 찾아 떠난 사람이 어느 순간 재산을 가지게 되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이들을 차갑게 외면한다.

 

세입 들어간 사람이나 혹은 그 집을 소유해도 반강제로 철거당할 입장에 놓인 주민에게 이런 사업들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입장에 놓인 사람에 대해 만화작가가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지켜본 작품이다. 르포르타주의 장르인 이 만화책, 한국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상하게도 나쁜 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운 좋게도 르포르타주의 장르의 만화책들은 도서관에 배치되거나 시민단체의 애용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아니라면 웹툰으로 제작된 콘텐츠이다.

 

코믹스와 같은 재미가 아니라 사실성을 보여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화폭에 담겨진 철거민들의 아픔은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림체는 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일지 몰라도 이야기의 흐름과 상황적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 현실 앞에서 무력한 약자,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변신해 고소장을 날리는 현실, 용역깡패에게 폭행당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당하는 부조리,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만화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우리 생활 주변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은 TV, 라디오, 인터넷 매체 같은 매체로 전달된다. 그러나 그 매체가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외면한다. 오히려 자그마한 소식지로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주민으로 몰고 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를 임신한 임산부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는 70대 노인에게 다수의 용역직원이 폭행하는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히 인심이 흉흉하게 변했다. 계속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은데 그 근본적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계속 빨리 흘러간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의문을 제기하면 다른 호기심거리와 분쟁거리를 내세워 문제의 안건을 물 타기 식으로 흘러 보낸다. 오늘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현실의 벽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당장 도울 수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잘못된 현실에서 미끄러지는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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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세트 - 전5권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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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적어보는 것도 문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문학이 대가들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게 해주었다. 18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루소의 <신(新) 엘로이즈>는 생 프뢰와 줠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역시 담겨 있었다. 어떤 주제와 인물에 대해서는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는 거기에 관련된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문학의 세계는 반드시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서 우리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번 주 주중과 주말, 나는 도서관 문학 장서판에 꽂혀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았다. 조영래 변호사란 이름을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에서 성폭행당한 권인숙이란 여성을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그녀가 성고문을 당한 이유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불법으로 자행된 고문과 구금이 그녀를 악몽의 시간을 주었다. 성폭행이 지금이야 죄를 저지른 자에게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그러나 막상 재판 결과를 보면 어이가 없다), 그 당시에는 성폭행당하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피해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성들이 많이 몰려있던 피복 공장에서 그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전후였다. 거기에 중고등학교에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가난이란 이름에 의해 어린 시절 꿈도 희망도 없이 공장에 나가 고된 노동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는 비극적 운명에 울부짖었다. <전태일 평전>에서도 외국에 어느 유명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구혼을 받거나 혹은 다치는 일만 발생해도 신문에 나는데,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다 병으로 쓰러지는 소녀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이 나와 흥행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유가 바로 당시 사회에 대해 감독과 제작진이 너무 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생해서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어느 소수의 입장이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는 말이 안 된다. 영화 자체는 대중문화이고, 대중문화는 문화콘텐츠사업으로서 불특정 대다수 군중에게 문화적으로 소비된다. 소비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한다. 좋은 모습만 보려하지 불편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그 불편한 것을 찾아봐야 한다.

 

불편한 그 이야기가 사실적 관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 남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이야기를 주구절절 듣는 것도 일이다. 웃기게도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왠지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 수기나 일기를 토대로 만든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태일이란 인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아주 무거운 이름이다. 책 제목을 전태일이란 이름에 다른 호칭을 집어넣지 않고, 단순히 <태일이>라고 했다.

 

<태일이>, 왠지 듣기에 이름이 뭔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시장 앞 도로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 그가 40년 정도 지난 오늘 날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현재와 지난 과거와 계속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전태일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역사라는 매개체 아래 계속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태일이>는 그런 무거운 전태일의 일대기를 만화라는 매체로 통해 쉽게 접근하려 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총 5편으로 구분되어 있고, 만화책 역시 총 5권으로 이루어졌다.

 

각 책마다 전태일의 모습이 담겨있다. 글로 보는 전태일의 모습과 다르게 만화책으로 읽는 전태일의 모습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글로 읽는 것을 이미지로 연상하더라도, 시각적으로 만화로 보는 이미지의 흡수는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게다가 마지막에 와서는 만화가 아닌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소극적인 이소선 여사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아들이 죽자, 노동당국과 공장업주들이 와서 큰돈을 내밀면서 보상금을 줄 테니 그만 하자라고 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도덕성에 한숨이 나온다. 자신의 아들이 여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분신하여 몸을 날리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묵살하려고 한다.

 

만약 거기서 돈만 받고 없던 일로 하면 평생 그 짐은 이어 후회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줄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산다. 단지 아들에게 들은 한 마디가 가슴에 화살을 날리는 기분이다. 전태일의 동생은 오빠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학비가 밀렸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매우 슬픈 후회를 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공장에 가면 막내 동생보다 어린 소녀들이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나올 정도고, 공장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폐암으로 죽고, 게다가 죽어 가는데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로 때리고 욕설을 하는 모습을 참으로 괴롭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지역에 규모가 큰 공단이 몇 군데가 있었기에 그 공장에 일하던 여공들의 비참한 삶을 말이다. 재봉기계에서 바느질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말이다. 잠이 오지 않게 하려고 커피나 박카스 정도 먹이는 것은 그야말로 신사적인 행동이다. 강제로 혈관주사를 놓아 밤과 새벽에도 인간을 기계와 같이 돌렸다. 그 어린 소녀들에게 말이다. 배고프다는 것은 엄청 슬픈 일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다고 배고픔과 가난 그 자체가 죄가 아닌데, 왜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전태일이 날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내가 고생하여 형제와 자식이 성공할 수 있다면 희생하는 것은 우리는 줄곧 보아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되어도 자신의 몸이 병들고 정신적으로 죽어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성공한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족쇄로 안겨준다. 성공도 아주 일부분이 나머지는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 되는 비극에 처해진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운명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는다. 오직 자신을 괴롭히는 쇠사슬은 죽음의 순간에 올 때 비로소 풀린다. 죽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도 그 자신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이 있다고 해도 남은 후예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면 그들은 살아갔다고 해도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채 그저 사라진다면 너무 슬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일이>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일이가 몸을 던진 것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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