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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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 로드>를 읽는 순간, 전에도 지금도 <에반게리온>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생각했다. 물론 소설에서 박종현이란 인물은 현실에 존재하던 에바 로드 완수자 2명을 합친 가상의 존재이나, 기본적으로 그 현실의 2사람을 토대로 만든 인물이다. 에바로서 가는 세계와 그리고 나의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한 파일럿 이카리 신지군을 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보게 된다.

 

언제나 로봇이 나오는 전쟁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항상 강한 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적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우리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강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벽이란 보이지 않은 투명한 유리 앞에 부딪힌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건물의 유리창이 막힌 곳도 모른 채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선택은 정해져 있다. 그런 벽에 부딪혀서 몸이 박살나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벽을 피해 영원히 그 사선을 넘지 못할 것인가.

 

우리에게 벽을 둘러갈 수 없는 현실이다. 사실 벽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유리 너머의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유리의 장갑수준도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라도 어느 정도 각오를 다지고, 준비성을 갖춘 채 한 발씩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판단조차 잴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길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바로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의 또 다른 이야기다. 최근 한국 소설계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작가 장강명 씨의 소설에서 그런 현실을 다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전에 읽은 <한국이 싫어서>는 평균 정도의 학교를 나온 20대 중반여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모습이 없는 자신에게 지쳐, 결국 호주로 유학가고 거기서 정착하는 일대기를 보여준다. 호주라고 하여도 별 수 없는 낯선 곳이오,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단지 그 정도가 한국보다 덜한 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유학 간 남학생은 요리 실력이 좋아도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호주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요리사로 된다.

 

자신에게 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꿈이란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란 책은 자신의 성공이 가로막힌 한국을 떠난다면,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자신의 성공을 출세로 여기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취미생활이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할 게 없다. 가령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내가 어느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대부분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음악을 좋아해요.”, 혹은 “TV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해요.” 등등 식상한 말만 나온다.

 

영화라도 장르가 매우 세분화되어 나누어지고, 영화감독에 따라 관람해보는 감독주의 혹은 작가주의적인 요소도 찾을 수 있다. 음악이라면 재즈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저 댄스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뮤지션에서 누구를 좋아하고, 어떤 부분에서 와 닿는지가 없다. 즉 타인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과 표현성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느낌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옳은 것인가? 가족 안의 행복, 사회생활에서의 안정 등이란 너무 속보이는 답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삶에 아무런 목표의식이 없는가? 주변에서 들으면 집이 어느 동네 35평 내외, 차는 2000CC 이상, 돈은 얼마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만 들린다. 물론 부의 재력이 있으면 좋다. 자본주의시장경제구조에서 돈의 이동이 없다면 무역이나 교역, 심지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고착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매기고, 자신의 존재는 돈에 의해서만 말할 밖에 없는 인간이 된다.

 

자신이 그렇게 되는 순간, 그는 평생 외적인 삶이 아니라 내적인 인생에서도 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열심히 뛰고 뛰어 마지막에 그의 삶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바로 그런 시대에 젊은 청춘이 과연 자신의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단지 그 여정은 <한국이 싫어서>와 다르게 진행된다. 벽이 높고 높지만, 그 벽이라도 여러 가지 벽이 있다. 자신이 둘러싼 벽 사이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이란 말도 안 되는 벽을 선택할 것이다. 단지 벽을 넘어갈 수 있는 기회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책제목만 보듯이 에바, 즉 EVA라는 <신세가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때까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다, 어느 순간 일본애니메이션을 접하고, 그때 에반게리온을 만났다. 에바에서 보는 주인공은 처음에 못났고 겁쟁이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만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 주인공 파일럿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가 늘 외면해오던 익숙한 자신이었다. 너무 익숙하기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점도 많았다. 늘 도망치고 싶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은 가혹했다. 거기에 맞선다고 뭔가 새로운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늘 우리는 강요받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 인생을 강요하던 어른들 역시 과거에 그런 부조리에 굴복했다.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에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결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박종현처럼 전혀 있지 않을 벽을 찾아서 그 벽을 넘어 가는 것이다. 박종현은 어릴 때부터 불우한 삶을 산다. 가난한 집안, 무능한 아버지, 가출하는 어머니, 형과의 불화, 학교생활의 마찰, 어느 곳이든 그가 벗어날 구멍이란 없다. 사람에게 가끔 미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이 사는 세계는 언제나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박종현은 버림받은 인생처럼 살다, 시장에서 일하고, 학교에 다녀보고, 컴퓨터를 배워 늘 야근과 잔업에 시달렸다. 그리고 섬광처럼 드러난 에바 로드, 일본과 미국, 중국과 프랑스를 경유하여 마지막에 일본에서 가이낙스(카라)의 선물을 받는 것, 어찌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박종현이나 혹은 실제 현실 속의 2명의 남자들이 보여준 결실은 일반인에게 본다면 정말 무단한 일일 것이다. 왜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지, 그 먼 곳까지 시간과 돈은 얼마나 걸리는가? 게다가 말은 어째 할지 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 나 같이 제대로 일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간단한 회화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 한자도 조금 읽으면 혼자 간신히 목적지까지 찾을 수 있다. 불어와 중국어의 경우 조금 다르다. 중국어는 우리가 아는 한자와 다르다. 한국, 일본, 중국 모두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맞으나 한자의 표기와 사용방식이 조금씩은 다른 것이다. 낯선 땅에 아무런 지식이나 도움 없이 꿈을 향하여 달려간 젊은 친구들의 무모함에 분명 모두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녕 비웃는 자들은 이때까지 자신이 어떤 허황된 꿈일지라도 거기에 목숨까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하게 설 수 있을 때까지 그 길을 찾아갔는가?

 

아마 대부분 없을 것이다. 그 열정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한 길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과의 외로움 싸움이다. 그 외로움 싸움에서 얻은 것은 물질적으로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돈은 많이 들어갔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황금보다 더한 보물을 얻었다. 우리에게 황금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은 있는가? 88만원 세대가 나오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청춘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그 공간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

 

성공의 꿈이란 이룰 수도 없이 너무 머나먼 곳에서 나를 비웃고, 그 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걸어가야 하는가? 성공의 꿈은 현실세계에 있어도 비현실적 영역이고, 에바 로드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해 현실의 인간이 그 꿈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진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에서만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에바를 향한 그 머나먼 로드가 끝이 났다면 또 다른 여정이 박종현을 아니 현실의 2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허무하고도 엉뚱한 에바 로드를 완주한 그들에게 현실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은 언제나 스스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과연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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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종속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4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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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군복무시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건물 다른 사무실의 사병 하나가 간질 발작으로 새벽에 죽은 일이었다. 원래 지병이 있었지만, 자대에서 안타깝게도 젊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부대에 사망한 사병의 어머니가 오시고, 듣기론 화장까지 해서 장례를 마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상한 숙제가 있었다. 그 사병이 죽고 난 후 그의 앞으로 택배가 왔다. 사병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 물건을 보냈던 것이다. 수취인은 분명 이름이 적혀 있지만, 그 수취인은 영원히 그 택배를 받을 수 없었다. 주임원사가 나를 부르더니, 나보고 그 택배를 다시 집으로 보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수취인의 이름 대신 발송인의 이름은 나로 하여 그의 집으로 다시 택배를 보낸 기억이 난다. 진중권의 <레퀴엄>이란 책을 보면, 군대에서 자살한 사병이 차가운 군병원 영안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사병의 어머니가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몸을 보자 오열을 하기 시작한다. 진중권 교수가 사병 시절과 그는 옆에 있던 사병들과 같이 욕을 했다고 한다. 왜 자살 하냐고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간 문제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여자는 임신, 남자는 군대다. 남녀사이에 갈등에서 내가 가장 불만을 느끼는 것은 남녀갈등의 사회적인 영역에서 갈등을 겪는 부류는 미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10년 전인가? 어느 유명 명문여대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군대에서 복무 중인 남성들은 여성들을 언제라도 성폭행할 수 있는 잠재적 예비범죄인이라 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 여대에 다니는 분들이니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군대에서 남자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누가 가장 힘들어하는가? 그의 학교친구나 군대 안의 동료들일까? 아니다. 그의 가족들이다. 특히 그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가장 괴로워하신다. 한국에서 남녀문제는 기혼여성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기혼여성과 미혼여성에서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인간이다. 기혼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등장하면 남녀문제보단 오히려 가정문제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 남녀문제 해결을 보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가정에 속한 기혼여성, 그리고 그녀와 같이 사는 기혼남성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배제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화성에 사는 남자 금성에 사는 여자라는 방식으로 남녀문제를 보는 한국사회의 감정적 방식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갈등만 증폭시킨다. 작년 가을, 서울과 부산에서 어느 한 여성과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가진 책으로 매릴린 옐롬(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인문학자로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다)의 <유방의 역사>와 그 뒤에 <아내의 역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한국 사회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회적 입장에서 그분은 나에게 한국의 여성은 참 불리하고 불쌍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불리한 남성이 불쌍하고, 불리한 여성이 불쌍하다고 말이다. 즉 불리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물론 여성이 불리한 것은 많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대상은 미혼의 여성이 아니라 기혼의 여성이다. 예전에 <4천원 인생>이란 비정규직과 식당식모 아줌마들의 생활을 보여준 책이 있었다. 한국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1시간당 몇 천원도 안 되는 일당으로 10~12시간 정도 일하는 수백만 기혼여성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남녀문제에서 미혼여성의 입장에서 남녀문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답답하게 여긴다. 남녀가 사회생활하기에 필요한 것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과 지원이다. 만약 가정에서 어머니보고 자식이 남자가 좋냐 여자가 좋냐?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어머니에게 모든 자신의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다.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에서 대립되는 미혼남녀의 입장은 첨예하게 다르다. 서로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찾기 위해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라이벌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속한 가정의 조건에서 달라진다. 가정이 부유하고 여유가 있다면 학업을 유지할 수 있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생계수단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물론 그런 와중에 우등생은 존재하나, 그것은 확률적으로 아주 낮고, 그것이 될 가능지수는 아주 낮다. 로또복권을 샀으니깐 1등에 당첨될 기회가 있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막연한 가능성에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만큼 오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인 성공에서 남녀는 서로간이 적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속해져 있는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어째 보면 이런 말은 당연할지도 혹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하나, 이번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는 이런 내 생각에 상당히 닿아있는 맥락이었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은 한창 영국의 공업화시대였고,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의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때 19세기 때 영국의 통치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고, 영국에서 가장 통치를 오래한 왕이었다. 그 앞에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이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옹립된 시기다.

 

위에서 나온 나의 의견, 그리고 밀이 살던 시절, 빅토리아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등장에서 연계성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에서 여성도 역시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면 남성 이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밀이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노예제도 흔적이 있었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다. 20세기에 도래해서 서구사회에도 여성에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게 강요된 인생만 있었고, 그런 시대에 밀은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보여준 게 <여성의 종속>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단지 그에게 공평하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생리적인 구별은 필요하다. 가령 여성들이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데, 남자도 인간이니 남자보고 착용하라는 논리도 이상하고, 남자들이 전쟁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니, 여자들도 인간이니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라는 논리도 이상하다. 인간의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분명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밀의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빅토리아나 엘리자베스나 훌륭히 통치할 수 있는 것은 그녀들이 여자이든 혹은 남자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태어난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글자를 배울 수 있던 중세 내지 근대 초기 시대의 여성은 거의 드물었고, 일반 평민 남성들도 드물었다. 단지 여성에게 열린 길이 더 적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여왕이라 가능했지 평민여성뿐만 아니라 평민남성도 역시 어렵다.

 

밀의 자유주의적 관점은 <자유론>에서 드러난다. <자유론>에서 자유란 자신의 이성으로서 선택하는 것이고, 이성의 의지로서 타인과 조우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모든 권리를 누리는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누리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자 벤담과 친분이 깊었다. 밀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 큰 공헌을 한다. 밀의 자유주의는 만일 타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도와주고, 누가 잘못했다면 그 자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변에서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철저히 이성과 논리로서 대했기 때문에 만일 이성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었다. 단지 이성적 능력이 없는 자가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성적 영역에서 윤리적 가치관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 가치관에 여자 역시 동참이 가능한 점에서 <여성의 종속> 번역자는 밀의 대표작인 <자유론>보단 오히려 <여성의 종속>을 우위에 두는 것 같았다. 사실 밀은 자신의 아내 헤리엇 테일러를 만난 후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천재적인 지식인이던 밀에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헤리엇의 만남은 운명 같을 것이다. 밀은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자유주의 가치관을 보여주었으나 현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대학의 문을 가는 것은 극히 일부 부잣집 영애만 가능했고, 일반 남성조차 가난에 의해 대학은커녕 중고등학교 문도 못 가신 분도 많았다. 지금에 와서 여성보고 대학에 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정신병원에 먼저 가라고 할 것이다. 밀도 역시 그런 시대를 겪었다. 밀이 죽고 난 뒤 몇 십 년이 지난 후 영국에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참여에서 문화인류학 영역에서는 전쟁이 원인이라 한다. 국가기관에서 경찰, 소방, 의무 같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에서 남성이 주도했지만, 전쟁이 일어난 남성들이 참전하여 그 체계들이 무너지거나 손실되었다. 과거 구식무기를 사용하던 시대는 농민들이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어느 순간 징집되어 칼과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하지만 산업사회 도래 후 농민들은 대거 축소되어 도시로 가게 되었고, 공업화와 서비스 직업에 몰리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남성이 있다면 그 옆에 같이 살던 가족에서 여성도 있다. 그 남성의 빈자리를 여성이 대체하는 방식이 20세기에서 여성의 권리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는 유지되었고, 여성의 능력은 결코 남성에 못지않고, 어떤 분야에서는 더 탁월한 성과를 보인다. 여태까지 보일 수 없던 이유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점, 그런 기회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활동할 수 없었다. 기껏 해보았자 옆에 있던 남성이 그럴 기회가 주었다면 가능했다. 남성의 힘으로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면 그 수준의 정도는 한계점이 다다른다.

 

물론 기회가 있다면 능력을 충분히 보일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남자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귀부인과 애인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수많은 귀부인이 젊은 남성을 이끌고 있는 것이 파리의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귀부인 귀족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란 점이다. 18~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책 1권이면 어느 평범한 식구가 2주 동안 생계비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는 것에 엄청난 재원이 필요한 점에서 결국 밀의 서적을 다시 생각해도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란 점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때까지 지구역사상 가장 용맹한 남자는 스파르타의 전사라고 한다. 그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는 불굴의 전사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부인에게만 복종한다고 했다고 한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남성인지 아니면 그들이 진정 복종시키는 부인인지는 보는 관점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밀도 남성이 가지는 미개한 이성적 수준이 인류의 진보와 문화를 파괴하고 퇴보시킨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심한 착취행위다. 제도적으로 재산은 여성에게 주지 못하고, 여성이 가진 모든 것은 남성이 갈취한다. 어느 순간 아내를 버린 남자가 어느 날 다시 와서 그 여자가 혼자 힘으로 얻은 성과품을 갈취하던 게 과거의 산물이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밀은 자유주의자이나 페미니즘은 밀과 동시에 살던 마르크스에 의해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후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과격하고 급변적인 사이보그 페미니즘도 등장한다. 밀의 시대적 환경과 후대의 상황의 변화는 다양한 의견과 사상으로 발전했으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지 그렇게 태어난 이유로 노예 같은 삶을 강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자에겐 그 삶에서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본래 페미니즘은 소외된 계층에 대한 해방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만 인간이고, 이방인과 외국인, 노예와 아이들에겐 인간적인 권리가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논하는 게 아니라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조건은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의 도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 사회가 경제적인 빈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해야지 남녀문제가 해결되는데, 그 문제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서로간의 입장만 내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끔 이상한 나라에 왔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페이스 북에서 나를 아껴주시는 영화학 여교수님이 올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글은 여자가 남자들에게 알려둘 점으로, 여자를 그냥 단순히 즐기기 위해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성과 이성을 존중하고 서로 뜻을 나누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좀 더 자신을 향하여 성찰을 하고, 상대 여자를 위해 남자가 되라고 하는 내용이다. 딱히 덧글을 남기지 않았으나, 내가 하고픈 말은 그것이 만일 거대사회의 남녀라면 그럴 수 있으나, 남녀관계가 그런 거대한 사회에서 거대한 틀로 만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서 만난다. 남자 역시 자신을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나, 처음부터 그런 남자를 선택했던 것은 여자란 점이다.

 

만일 상대 남자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인줄 모르고 계속 만난 것이라면 그 여자가 남자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대한 점이고, 설사 알았다면 그것은 엄청난 기만이다. 누가 누구보고 노력하란 점이 아니라 둘 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여성의 종속>처럼 남성이 억지로 만든 야만적인 사회체계도 문제지만, 그런 문제적 사회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남성에게 억지로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도 문제다. 하지만 생각해본다면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지만, 이성보단 오히려 감성과 무의식에 의해 더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을 서로 감수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분쟁만 일어날 뿐이다.

 

밀은 연애관보단 결혼관에서 밝히나 남녀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었다. 여성이 처음에 젊고 예쁠 때는 남성은 정력을 당하여 그녀를 위해 행동하나, 그것이 다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성이 사치와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허황된 망상만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밀의 조건은 여성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전제를 둔 것이다. 솔직히 생각하여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말처럼 쉬운 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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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게 있는데 간질 정도면 군 면제가 아닐까요 ? 이상하네.....
그나저나 멜클스마스입니다.. 아 지났구나...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12-29 23:30   좋아요 0 | URL
아 고옴발님도 새해복많이요. 간질기질이 있어도 자원입대해었다군요. 전역후 거기 사병이 죽은자리에ㅡ 자며는 심령현상이 일어나는 전설이...
 
빌헬름 텔.간계와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7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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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다면, 19세기는 독일이라고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19세기를 풍미하고, 철학자 중에 헤겔과 니체, 사회경제학자로는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등장했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토크빌이 등장하고, 영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벤담이 존재했다. 그러나 문학, 철학, 경제학 전반의 인문학에서 19세기는 분명 독일이 강력했다. 이때 독일의 문화사조는 다소 프랑스보다 늦게 시작한 감이 들지만, 그 효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번에 읽은 도서는 괴테와 더불어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이다.

 

실러라는 이름은 솔직히 처음 들으면 낯설다. 실러라는 이름은 미학 관련 도서를 볼 때 종종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사실 이번에 처음 봤다. 하지만 실러의 작품은 낯설지 않고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빌헬름 텔>은 매우 유명한 작품이며, 빌헬름 텔이 자신의 아들인 발터와 보여준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빌헬름 텔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영주가 벌인 악독한 함정에 빠진다. 광장에 걸린 영주의 모자에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경죄에 걸린 셈이다. 한국이라면 예전에 오후 5시가 되면 음악이 나오면 모든 사람이 길에서 멈추어 차렷 자체를 취해야 했던 것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던지 혹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이익이 있었다. 그런 불이익은 빌헬름에게도 닥친 것이다. 영주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빌헬름을 함정에 빠지도록 했으며, 그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만약 빌헬름이 사과를 맞추지 못할 경우 부자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만약 성공 하면 풀어준다는 것이다. 거리는 100걸음 정도 떨어진 곳이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런 장면은 수 없이 패러디와 페스티쉬 되어 광고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종종 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 작품을 읽으면 희곡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고, 연극과 영화로 만들기 좋은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에서 권력에 집착하는 영주와 예전에 거기를 다스리는 영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괴테와 더불어 실러가 루소의 낭만주의 문학관을 이어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데, 루소는 <에밀>로 통해 인간은 도시로 가면 타락하게 되고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시의 타락에서 현대사회의 도시는 환경오염과 경제적 갈등, 공적 인프라(교통, 상하수도, 병원, 교육시설 등) 분배에서 님비현상과 핌비현상이 오고간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변의 영향에 의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계속 표류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밀>은 바로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자연성을 찾으라는 것이다.

 

루소는 분명 (볼테르가 비아냥거린 것처럼) 인간은 숲에서 곰과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자연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인생관에서 자신의 선택지점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교육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식의 전수와 사회적 인간이기보단 그 시스템에 종속되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빌헬름 텔>에서 마을주민들은 그런 수동적 삶이 아니라 능동적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왕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자신들이 자유민으로서 명예와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왕이 위험에 빠지면 언제라도 무기를 들고 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 것부터 가능했다. 빌헬름은 그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나이로 등장한다. 처음 장면부터 부패한 권력자는 남의 아내를 강제로 추행하려 했고, 그 아내의 남편은 성폭행 미수범을 도끼로 내려찍어 두개골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나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계급의 차이는 도덕과 제도의 타당성을 훼손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군주의 의무를 대리 수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군주라는 입장에서 정치적 통치는 자유민을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국가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후손을 남기고, 그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국정을 운행하는 것이 옳다.

 

이 점에서 빌헬름 텔은 낭만주의적인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고, 브루노라는 처녀가 말하듯이 민중이란 자유민들과 함께 해야 올바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에 의지하고 않고, 오로지 합당한 가치관으로 쇠사슬을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실러의 서적은 낭만주의라고 해도 군주정치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다. 군주는 분명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기에 자신들은 군주를 믿는 점이고, 군주를 대신한 영주의 문제점과 그의 죽음이 단순히 폭력이 아니라 군주의 자유민으로 존재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에 충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민족성을 중시한 낭만주의 문학인 점이다. 괴테는 루소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주의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물길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사실 루소도 애국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단지 그 애국심의 조건은 얼마나 나라가 올바르게 움직이는가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시민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나라가 어떻게 망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플라톤과 루소의 차이는 국가라는 대상이 플라톤에게 형이상학적 미를 갖춘 철인군주라면, 루소는 일반 민중에 대해 시선을 돌린 셈이다. 실러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여주는 국가적 의미에 루소가 제시하는 자유민들의 의지를 묘하게 줄 달리기를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줄 달리기는 <간계와 사랑>에서 보여준다. 실러의 소개를 보니 그는 루소 이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간계와 사랑>은 정치적 갈등과 연애갈등이 묘하게 섞인 작품이다. 영주의 아들 소령은 악사 밀러의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밀러는 평민의 집안이고, 자신은 귀족의 집안이다.

 

아버지는 시종장과 사이가 좋으며, 밀포드 부인에게 자신의 아들을 장가보내어 더 좋은 권력을 잡으려 했다. 사랑과 권력의 이중 모순에서 소령은 간계에 스스로 걸려 마지막에 모든 것이 파멸된다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대치할 만한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좋을 것이다. 단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귀족의 아들과 딸이 서로 적대하는 집안인 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령과 밀러의 딸에게 적용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집안의 원한이 아닌 권력과 계급인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반영했다.

 

계급과 권력을 틀에서 벗어나 사랑을 원하는 소령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주변인물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과 문화적 요소를 본다면 아직까지 로코코양식이 반영된 것 같았다. 밀포드 부인의 의상을 보면 가슴이 다소 강조된다는 점에서 로코코의상에서 여성의상이 가슴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 윗부분의 형태가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게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로코코시대의 귀족부인 의상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가 서로 다른 애인을 찾아 즐긴다는 점도 그렇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보면 파리에서 많은 귀부인들은 젊은 남자들의 애정을 받고 있었고, 파리의 사교계에서 귀부인을 통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출세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로코코시대 말기에 보여준 고전주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야기가 더해지고, 소령과 밀러의 딸이 사랑과 배신에게 파괴되어가는 모습에서 귀족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실러의 2작품을 보면서 실러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사회 그 자체를 바꾸자는 것(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그 사회에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개선하자는 수정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사회의 모순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런 모순과 부조리는 현명한 군주가 존재하지 않으면 실행이 어렵다.

 

책에서는 인과응보의 관계를 잘 배치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어렵다. 실러의 작품을 본다면 확실한 길을 찾아가는 것보단 은근슬쩍 비켜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추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희극작가 뷔히너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은 사실주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 <당통>의 원래 작품이던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대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대한 당통의 비극적 관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친구이며 동지인 당통을 단두대로 보내야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비극과 모순, 부르봉왕가에 대한 절대주의를 부정하던 그가 오히려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던 현실에서 <당통의 죽음>에서 보여준 사실주의적인 허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교훈을 남기게 된다.

 

Strum und Drang이라는 독일의 질풍노도의 문학은 괴테와 실러에게 큰 바람을 불어준다. 그래서 실러의 작품을 읽게 되면 등장인물의 대사가 부드럽지 못하다. 상당히 딱딱하게 끊어지고, 열정적인 대사를 퍼붓는다. 때로는 사랑의 노예가 된 자가 간계로 속아 배신의 충격 때문에 자신의 연인을 독약으로 죽게 만든다. 이 모든 게 간계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자신의 칼을 뽑아 이승이 아닌 무덤 속에서 영원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삶이 아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부분은 분명히 낭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서 찾기 어려울 것 같으나 은근히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자신만의 이상적 세계, 사실 프랑스혁명처럼 모든 것을 뒤집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만 제거하는 것에도 좋은 가치관이 될 수 있지만, 실러가 은근히 비켜가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쇠사슬이란 단어처럼, 쇠사슬로 타인이 묶고자하는 이는 오히려 더 강한 쇠사슬에 묶여 그 자신조차 망각하게 된다. 실러의 쇠사슬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쇠사슬에 묶였다는 것보다 단지 일정하게 어디에만 쇠사슬이 묶여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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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42
앙드레 지드 지음, 조정훈 옮김 / 더클래식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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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나 혹은 예술 관련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문학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조금 다른 도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현대소설과 달리 고전 소설들은 그 시대적 특성과 작품세계가 다소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상과 전혀 다른 그 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생활의식이 너무나 다르다. 그 시대만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작가가 자신의 시대상과 자신의 인생관 그리고 자신의 인생관을 펼치지 못한 그 작가만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내용이 문학소설에 담겨있다. 이야기의 결과론적으로 그 시대의 흐름에 부합되거나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작가의 의도는 그 시대에 부합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에 읽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작가는 19세기와 20세기를 스쳐가는 흐름에서 이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발표 시기는 1909년 아직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이다. 소설의 내용을 본다면 프랑스와 유럽에서 인상파 화가가 떠오른다.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라는 화가는 이탈리아 초상화가로 그가 그린 작품에 많은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제롬이 사랑했던 알리사에게 아름다운 어머니 뤼실 뷔콜랭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경건하고 엄숙한 청교도 집안의 여자가 아니라 자유롭고 분방함을 추구했던 여성이었다.

 

제롬의 시각에서 바라본 외숙모 뤼실은 마치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그림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여자와 같았다. 왜냐하면 이와 대비한 모습으로 제롬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게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로 하여금 상복을 입도록 했으며, 엄숙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추가되어진 상복은 인간의 생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죽음의 정적과 삶의 동력이 반대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좁은 문>에서 보이는 경건함이란 마치 위대하고 성스러움을 추구하기보단 인간에게 무단한 슬픔만을 강조하는 굴레와 같았다.

 

작품을 번역한 번역자의 후기에도 그렇지만, <좁은 문>은 인간에게 죄의식이란 과연 어디까지 통용되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리사는 어머니가 다른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린 점, 나중에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잠시 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알리사에게 어머니 뤼실과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소설 초반에서도 알리사와 뤼실은 처음에 몰랐지만, 동공의 색만 다르지 외모는 상당히 닮았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닮은 큰 딸, 그 딸은 어머니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을 갖고 산다.

 

자신의 죄가 아닌 어머니의 죄를 가족 사이에서 평생 지고 산 것이다. 그녀의 죄의식은 옳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청교도적 윤리관을 어떻게 제시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종교관에 대해 무교(無敎)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신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신은 그저 우리를 방관한다고 여긴다. 만약 신이 정말 있어서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준다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인과응보를 베풀어 주실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세상은 합리적인 이성보단 비합리적이고 오만한 힘에 의해 돌아간다. 의미를 찾아가는 신앙생활은 삶을 윤택하게 하겠지만, 의미를 찾지 않고 맹목적인 신앙생활은 폭력과 오만을 합리적으로 만든다.

 

<좁은 문>에서 후자에 속하는 부류가 아마 알리사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생, 그녀의 행복, 그녀의 주변 이 모두가 뤼실에 의한 비극이다. 비극의 운명은 자신만 파멸로 이끌지 않는다. 비극의 운명을 가진 주인공들은 주변을 말려들게 만든다. 비극이란 당사자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당사자 주변 모두를 운명을 비틀게 만든다. 알리사의 현세적 행복과 신앙적 의지는 자신의 사촌 제롬에 대한 비극적 사랑을 잉태한다. 알리사 역시 제롬이 좋으나,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죄의식이 그를 떠밀게 만들었다.

 

쥘리에트라는 여동생이 제롬을 사랑한 것을 알기에 여동생에게 그 사랑을 양보했으나, 제롬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제롬의 친구 아벨은 쥘리에트를 좋아했으나 그것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읽다가 생각한 점은 <좁은 문>에서 처음 뤼실의 모습은 인상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 낭만주의를 볼 수 있다. 중간에 12세기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이 소설에서 차용했다. 그런데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시대에 계몽주의자이면서도 반(反)계몽주의자로 등장한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란 소설이 있다.

 

<신 엘로이즈>에서 주인공은 남자는 생 프뢰, 여자는 쥘리였다. 쥘리에트와 쥘리, 아벨라르와 아벨, 소설에서 보면 연극 중에 <신 아벨라르>라는 작품이 있다. 이름의 차용과 등장하는 소설 이름은 루소의 것이 나온 것은 아니나, 루소가 기획한 의도한 게 제법 등장한다. 루소의 소설에서 특이한 점은 모든 이야기의 진행을 편지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좁은 문>에서는 편지로 대화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법 편지로 대화하는 편이 많이 나온다. 특히 알리사의 편지는 작품에서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정도로 의미가 깊다.

 

작품에서도 독일작가 괴테의 작품을 인용한 점에서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하여, 종교적 가치관을 두고 고민을 한다. 사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본다면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슬픈 사랑은 현실적 도덕관에서 용납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신 엘로이즈>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좌절된 사랑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약간 위치가 아래에 있었고, 그 여성은 주인공 남성을 사랑하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남성과 결혼한다. 결혼 후에도 남성은 그 여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기 위해 멀리가거나 아니면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부에 어느 누구 하나의 죽음으로 비극적 사랑은 막이 내린다. <좁은 문>은 루소와 괴테의 소설과는 달리 현실적 벽이 아니라 그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서 벽을 만든다. 알리사가 만들어내는 벽은 자기 자신조차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보고 싶은 제롬이나, 막상 만나도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할지 난감해하는 알리사만이 나온다. 이야기의 결론부에도 역시 비극적 사랑으로 끝이 난다. 알리사가 병으로 죽는다. <신 엘로이즈>에서 쥘리 역시 병으로 죽는다. 병으로 죽은 히로인을 두고 남자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독신의 길로 걸어간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어디가 옳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단지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어느 길만이 정답이라 말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지난 과거의 축척에 의해 존재되는 생명이며, 과거의 축척은 기억에 의해 남는다. 지난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그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알리사가 보여준 삶과 알리사 죽음 이후 보여준 제롬의 삶은 책 제목처럼 <좁은 문>이란 선택을 한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그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 <좁은 문>은 진실적인 삶을 찾기보단 그저 자신을 속박하는 삶을 억지로 붙들어대는 망령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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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영화와 만나다
김윤아.이종승.문현선 지음 / 아모르문디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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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에 감상한 애니메이션 중에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이란 작품을 보았다. 물론 한국에서 아가씨란 단어가 들어간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질리 없으니 당연히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아가씨가 있다는 점에서 한 명의 남성에 수많은 여성이 그에게 구애를 구한다. 보통 일본 애니메이션은 남성중심으로 시장을 개척했기에 남성이 주인공이 되어 수많은 여성들 품에 안기는 것은 흔한 장르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다르다. 작품은 남성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으로 서포터 하는 역할로 나온다. 중요한 활약상을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몬스터 아가씨들인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반인반수, 반인반신 식으로 되어 있는 존재들, 상반신은 인간의 여성으로 나온다. 대부분 미인에다가 스타일도 참으로 좋다. 그러나 허리 아래를 보면 뱀의 꼬리, 말의 다리, 새의 다리, 물고기의 지느러미, 거리 다리 등등으로 나온다. 상반신은 인간형이나 하반신은 인간이 아니다. 다른 세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존재가 인간 세상에 찾아와 그녀들은 자신들이 머물 장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거기서 인간 보호자를 구하여 홈스테이를 해야만 체류가 가능하다. 이른바 가족이란 형태로 인간과 같이 생활을 해야 하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그녀들은 물론 생식기능을 가졌기에 인간과 교미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 중간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이다.

 

사자와 호랑이와 교배한 라이거나, 말과 당나귀를 교배한 노새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종들은 종을 남기기 어렵고, 수컷은 거의 불능에 가깝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종이 합하면 어찌 되는가? 그런 의문의 요소는 SF재앙영화 <더 플라이>를 보여주었으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과 교미하는 암컷 몬스터는 그대로 자신의 유전자를 담은 아이가 나오는 것이다. 라미라, 인간형 뱀 족 아가씨도 그렇고, 하피도 그렇다. 생각하면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혹은 아닌지를 떠나서, 인간에서도 황인종과 백인종, 흑인종 등이 DNA를 후손에게 남겨둘 때 각각의 특징을 타고 태어난다.

 

그러나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에서는 인간의 요소는 없다. 이 안에는 엄청난 사회적 함의가 숨어있다. 제작국은 일본이고, 일본도 세계적으로 강대국이다. 그 나라에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본사회가 바로 그 작품에서 숨어있는 의미다. 이래저래 소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남자주인공의 시선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그들도 생명이 있다는 것이고, 몬스터일지라도 그들도 레이디란 점이다. 종족과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몬스터 아가씨에게 모두 레이디로서 대우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적인 교류가 활발한 점에서 작품은 그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셈이다.

 

애니메이션의 신화인 디즈니메이션에선 그런 것을 교묘하게 헤게모니적으로 이용했다. 예전에 <알라딘>에서나 <라이온킹>에서 백인식 영어나 흑인식 영어가 다른 점을 이용하여 흑인식 영어는 나쁜 것으로 몰고 가거나 인종차별적인 이념을 작품에 반영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이나 그동안 해온 짓을 본다면 모든 것을 잘했다고 본 것은 아니나, 대중매체로 통한 영상물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기존에 존재하지 않은 이미지 세계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의 현실성으로 바꾸어 버리는 스펙타클이 존재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첫 장부터 이미지로 만들어진 세계는 이미지로 통해 모든 것을 만들고 파괴한다. 스펙타클의 전복은 곧 새로운 스펙타클의 옹립이기 때문이다.

 

스펙타클로 넘치는 영상세계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보단 감성의 세계 내지 무의식을 자극한다. 문자는 우리가 읽고 생각해야 하나, 영상물은 이미지의 재현과 소멸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므로 환상적인 공간이 된다. 물론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미지로 남아 우리의 인식 안에 각인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강조하기도 하고, 각종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서 영상의 존재는 큰 힘을 발휘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시대적 분위기가 영상 안으로 스며들며,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가 하나의 신화로서 영화로 태어난다.

 

우리의 문화를 알려면 영상을 배제하고서는 떨어질 수 없다. 비단 이번에 읽은 책 제목이 <신화, 영화를 만나다>이나, 영화에서 반드시 극장의 영화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영상서사물도 포함된다. 신화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고, 신화하면 우리가 아는 단군신화나 주몽신화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사에 녹아있는 다반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우리의 이야기보단 헤게모니적인 형태로 신화 속의 주인공에 열광하거나 그 신화적인 욕망을 분출한다.

 

신화가 과거의 이야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존재로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다르다고 하나, 인간의 근본적인 영역에서는 크게 변한 게 없다. 인간의 뇌가 약 만 년 전의 크로마뇽인들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 발달된 것은 기술문명과 제도 등이 있지만, 인간 그 자체로서 진화는 하지 않았다. 문명적 진화와 신체적 진화는 다르다. 오히려 신체적으로 과거의 인간보다 퇴화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적인 조건에서 지구는 생물이 살기에 점점 좋은 곳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간은 문명과 자연, 근대와 전 근대 등 이항적인 조건에 의해 갈등을 빚게 된다. 지난날의 삶과 앞으로 삶에서 현재 우리 모습은 가운데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과거는 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만 다가오는 것인가? 항상 현실의 자신에게서 인간은 정체성이란 영역에서 고민을 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는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으면 좋겠는가? 나는 무엇에 흔들리는가? 라는 다양한 주제의식을 던진다. 신화는 바로 그런 의미를 찾아가거나 찾아주는 의식적 역할을 수행한다.

 

책에서도 잘 지적했지만, 평소 한국역사나 신화에 관심이 없는 자들도 한국이 월드컵에서 상대국가하고 경기를 하면 월드컵주제가를 부른다. 그런데 가사 중에 단군의 자손이란 말을 사용한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같이 대륙을 호령한 역사의식은 다른 국가와 경기에서 한국은 강력한 민족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2002 월드컵에서 Red Devils란 모습도 치우라는 전설적 무신을 현실에서 다시 등장하게 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때만 민족을 찾는 행위는 조금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신화적 존재가 역사적 존재로서 남을 때도 있고, 현재의 역사성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신화라는 것은 현실의 영역에서 언제나 우리 삶을 향유하고 있는 현재성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신화의 세계를 재현 내지 그 법칙을 따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신화를 그냥 수동적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신화, 영화를 만나다>는 그런 점에서 처음 접하기엔 조금 어려운 점은 없지 않으나, 영화와 신화 그리고 대중매체로 통해 보는 사회적 관계에 흥미가 있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하다. 각 파트별로 신화와 주제를 분리하여 설정하고, 각 파트 마지막 부분에서 읽을 만한 도서를 추천한다. 영화나 신화의 세계는 너무 광대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화 이야기와 문학이론, 영상이론, 문화사회학 도서들을 탐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알아가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삶이 어떤지, 내가 누군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위에서 언급한 <몬스터 아가씨가 있는 일상>에서 몬스터와 교미하면 암컷 몬스터는 인간을 낳지 않고, 인간과 몬스터 중간도 낳지 않고 바로 몬스터로 나온다. 일본사회가 나름 열린 것은 인정하나, 아직까지 몬스터라는 존재로 통해 외국인과 내국인하고 결혼하여 후세가 나오면 내국인이라는 것보다 외국인으로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는 배타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호의적이나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많으며, 몬스터에 대한 혐오의식을 가진 자들도 있다.

 

<신화, 영화를 만나다>에서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검토하면서 1920~30년대 미국대공황, 베트남전쟁, 각 정권에 따른 시대적 조건에 따라 영화장르 내용을 다룬다. 거기서도 사회적 흐름과 국제정세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탄생하고, 성공하는 사례도 보여준다. 이른바 영화에서 트렌드가 나타나고, 그 트렌드는 현실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읽게 해주는 것이다. 대중의 욕망이 매체로 통해 드러나고, 영화가 현대적인 신화로 재탄생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추천할 만하다.

 

영화를 감상하다면 다른 제작국이나 제작사 시기가 다르지만 같은 소재와 같은 주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아더왕의 이야기가 나올 때 최근 <페이트 제로>라는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신화 속의 주인공은 언제나 이야기의 단골메뉴이고, 제작사나 대중의 기호에 따라 새롭게 탄생한다. 그 작품들의 원류를 알고 다시 보고, 재조합한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이쪽 분야의 전공자나 관계가 전혀 없는 분들이라면 다소 짜증이 날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책이 아닌 게 다행이다. 인문학자들이 학술적인 시선이 담겨있지만, 어디까지나 책에서 다루는 것들은 대중매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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