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7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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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란 작품은 아주 유명한 소설이다. 이번에 처음 읽었던 나라도, 그 소설에서 나오는 줄거리는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어느 사람이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고, 대신 그의 나이를 초상화가 대신 늙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영원성을 가질 수 없기에 그 자신의 아름다움을 계속 원하는 것이다. 흔히들 나이 먹은 어르신 혹은 어르신이 아니라도 주변에 보이는 아직까지 늙지 않은 어른들도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말이야, 옛날에 내가 좀 이랬는데 말이야.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을 그들은 왜 하는 것인가? 가끔 내가 종종 이해하기 싫은 부류가 70년대 이야기를 하는 부류다. 그 당시의 현실적 조건과 상황은 분명 지금과 다르다. 그런데 그 상황적 배경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을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만일 그들에게 70년대 딱 마치 나이가 80 정도의 어르신이 조선왕조 시대의 사대부로서의 자질을 이야기하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

 

인간이란 늘 자기가 보고 듣고 자라온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어차피 개인이 세계일주를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경제적, 시간적, 문화적 조건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을 한 것이지 그 자신 자체가 하나의 기준점은 아니다. 기준점의 가치에서 보편성을 말하기란 어렵다. 단지 보편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어가는 점이고, 어느 일정 시간이 되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의 세계는 어쩔 수 없더라도, 늙어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간은 지금 당장 죽는다는 생각보단 지금 당장 내 모습에 신경을 기울인다. 내 외모가 어떻게 되는지 내 의상이 어떻게 되는지, 오늘 가방을 무엇을 들고 가고, 구두는 무엇을 신을지 말이다. 인간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결국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드는 자신에게 무한한 아쉬움을 느낀다.

 

TV를 잘 보지 않은 내가 어느 날 저녁시간에 어느 방송을 보았다. 화장품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말하긴 모든 여성의 이상적인 나이는 24세라고 했다. 여성의 화장은 항상 24살처럼 보이려 하는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녀들은 성인여성의 성숙함을 추구하고, 25살 이후의 여성은 젊고 예쁜 모습을 찾기 위해 화장을 한다. 24세라는 기준은 여자가 아마 가장 외모가 절정에 이르고, 신체적으로 성숙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을 하는 나이다.

 

화장의 목적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에서도 완벽한 시점을 노릴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얼굴의 윤기가 사라지고 주름살이 늘어가며 예전에 늘 바라보던 미모는 사라진다. 인간의 죽음보다 무서운 게 늙어가는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늘 거울로 통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 흔히들 청춘이란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만든 오스카 와일드는 그런 유미주의적인 요소를 작품에 반영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유미주의적 요소가 잘 보이는 게 일본의 공예품들이 종종 등장하는 점이다. 일본의 유미주의적 요소는 가장 아름다울 때 사라지는 것이다. 일본에서 자주 등장하는 행사에서 불꽃놀이가 매우 중요하다. 불꽃이 공중으로 올라 일정높이에 다다르면, 불꽃의 화약이 터지면서 아름다운 불꽃을 연출한다. 하지만 불꽃이 보이는 것은 불꽃이 사라지면서부터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꽃, 흔히 사쿠라라고 불리는 이 꽃잎들은 일본의 입학시절이 다가오는 4월부터 흩날리기 시작한다.

 

벚꽃이 상쾌하고 시원한 봄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벚나무 꽃잎들은 마치 하양 눈처럼 퍼져 흩날린다. 일본인들은 벚나무 아래 벚꽃이 떨어져 흩날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정취를 맛을 본다. 가장 아름다울 때가 바로 사라지는 것,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청춘이 머무는 자리다. 10대 후반에 20대 초반은 인간에게 가장 열정이 넘치고 아름다운 시기다. 세상의 때도 아직까지 묻지 않았음에도 어른의 매력까지 담고 있다. 육체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기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성인남성들은 아름다운 소년들을 자신의 애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중에 하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흠모하였으며, 그의 애인이 되기를 자청했다. 알키비아데스가 가장 아름다움을 뽐낼 때가 바로 20대 청년이었던 시기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화가 바질이 가장 좋아했던 도리언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이다. 도리언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빛이 났으며 세상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아함이 숨어 있었다.

 

도리언은 바질의 친구 헨리 경을 만나고, 헨리 경의 댄디한 모습과 재치는 넘치는 비관적인 말투를 듣고, 그에게 빠진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인생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듣는다. 지금은 젊고 아름다워도 언젠가는 주름지고 늙으며 머리숱도 빠져 흉측한 모습이 될 것이란 공포감으로 괴로워한다. 이때 바질의 초상화를 두고, 자신의 모습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결국 그것은 현실화되었으며, 도리언은 늙지 않은 영원한 꽃미남이 되었다.

 

도리언의 고민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나,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자신의 아름다움 모습에 자신의 미적 감각에 어울리지 않으면 거부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연극인 소녀 시빌에게 사랑을 처음 느꼈지만, 어느새 그녀를 거부하게 된다. 그녀는 여태까지 연극인으로 살아왔다.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이지 못한 그녀는 오로지 연극 안에서만 비극의 히로인이 되었다. 그러나 도리언의 만날 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도리언에게 모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그녀가 죽기 전날 연극을 망쳐버린다.

 

도리언은 그런 시빌에게 실망하여 시빌에게 이별을 고한다. 시빌의 자살로 도리언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오히려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도리언의 죄를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대신 받아들인다. 얼굴 입가 주변에 교모하고 잔인한 미소는 그의 오만과 죄를 그대로 담아내었다. 초상화의 변신과 도리언의 부동은 도리언 스스로에게 쾌락과 지적인 열망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어느 주제에 대해 세상 모든 것을 입수하고, 어떤 학문에 대해 깊이 파며,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을 만난다.

 

문제는 도리언이 만난 자들은 모두 인생이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이다. 누구는 파산하고 누구는 자살하고, 어떤 여자는 부두가의 창녀로 살아간다. 도리언의 피할 수 없는 매력은 쾌락과 아름다운 감각을 주지만,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치명타가 된 것이다. 도리언이 저지른 탐욕과 향락의 죄악은 처음에 자신과 세상의 분리되었다는 오만에 빠지나, 점차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두려움과 죄책감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누가 자신의 초상을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다락방, 그곳의 열쇠는 도리언만 가지고 있다. 그 방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방이나, 외할아버지는 도리언의 아버지를 미워했고, 도리언의 아버지를 어느 청부인의 고용하여 대결시켜 죽게 만든 인물이다. 도리언에게 외할아버지란 잊고 싶은 과거이고, 그 과거를 만든 외할아버지는 거부의 귀족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혈손인 자신에게 유산과 명예가 돌아갔다. 도리언의 외모는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어머니의 조상에게 이어받은 유산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가졌지만, 외적인 미가 변하지 않을수록 초상화의 표정은 마치 괴물처럼 변해갔다. 손 주변에 묻은 자주색, 마치 피가 스며든 것처럼 도리언의 어두운 모습을 내비추었다. 도리언의 초상화가 도리언의 어린 시절에 머문 방에 있는 이유는 그곳은 도리언이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자신의 어두운 기억, 슬픈 과거, 감추고 싶은 비밀이 바로 옥상방에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화려하고 빛나 보이나, 가려진 모습 뒤에는 잔인하고 어두운 악취가 숨겨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도리언은 점차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으로 마지막 장면에는 최악의 선택을 결정한다. 마지막 모습은 추하게 변해버린 도리언의 시체와 아름다운 도리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만이 남았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인간적인 타락에 다른 자의 눈을 속여도 자신의 불안은 속일 수 없다. 아름다운 모습은 한 때이나, 아름다운 삶은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설사 지금 당장 사라져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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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외 - 사회계약론.코르시카 헌법 구상.정치경제론.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발췌.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비판 루소전집 8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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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책을 항상 읽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그는 철학자, 문학가, 극작가,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점을 치는 예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루소의 책을 읽으면 그가 제시하는 의견과 예견이 그대로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에밀>은 1762년에 제작된 도서이나, 거기서 말하기는 조만간 유럽은 혁명의 시기로 빠져든다고 하고,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상이 혁명가의 복음서가 되었다. 19세기 유럽은 에립 홉스봄의 서적 책제목인 <혁명의 시대>였다. 프랑스대혁명과 자본주의 시장 발달, 그리고 지나친 환경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따른 반계몽주의 내지 낭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투쟁이 있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유럽은 18세기말부터 20세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전쟁과 혁명, 쿠데타와 사건의 연속이었다. 변화의 시기에 루소의 말이 소름 끼치는 것은 “러시아 제곡은 유럽을 정복하고 싶겠지만, 자기가 정복당할 것이다. 러시아의 신민 혹은 러시아의 이웃인 타타르인이 러시아와 우리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내게는 이런 혁명이 불가피해 보인다. 유럽의 모든 왕들이 힘을 합쳐 이런 혁명을 재촉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혁명은 1905년 러일전쟁에 따른 문제에서 시작했고, 1917년 2월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0월 혁명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어났다.

 

러시아황제가 차르가 통치할 때 그의 무능함과 관료집단의 어리석음으로 러시아의 재정(財政) 상태는 파탄하고, 수많은 러시아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황제의 소속된 장교 백위군들은 유럽의 열강들의 지원 아래 소비에트연방과 내전을 벌였다. 러시아내전 역시 인류의 비극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 비극조차 사실 볼셰비키와 유럽 제국주의 이해관계에서 얽힌 전쟁이다. 왜 이런 이해관계에 인간이 얽매이는 것인가? 장 자크 루소가 러시아에 대하여 지적한 말이 나온 도서는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이미 국내에서 발간되어 몇 십 년 동안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전 중에 고전이다. 하지만 그 고전은 낡은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도 살아있는 서적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가 만든 프랑스공화국 헌법의 토대가 되었고, 루소가 제시한 정치사회적인 관찰은 지금 헌법이나 법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은 토대가 되는 책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불평등을 어디서 시작하는지 찾기 위한 하나의 길라잡이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 신체적인 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인 불평등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사회계약론>에서 과거 귀족정에 대한 원로들의 정치행위에서, 원로들은 그 지역에서 나이가 있는 노인 중에 학문과 덕성이 탁월한 자로 뽑다가 어느 순간 투표로 이어지고, 마지막 최악은 세습제로 가는 것이다. 세습제로 가면 나이가 스물도 안 된 자가 원로원에 참석한다. 나이가 젊어서 정치적인 참여를 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나, 원로원이라는 것은 경험과 덕성이 있어야 한다. 세습제 정치와 사회적 권력은 그 사회에 불안한 요소만 안겨준다.

 

한국에서 이런 것을 보면 정치적인 조건보단 정치적 입장을 좌우하는 경제적인 조건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루소가 정치철학자라고 하나, 그의 사유에서 경제적 요건을 제외하지 않았다. 루소는 부(富)라는 것은 매우 경계했다. 부자와 거지가 많은 세상은 결코 제대로 되지 않은 세상이고, 그곳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몸부림치는 곳이라 했다. 인간은 자신을 팔 만큼 가난해서 안 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정해져 버리고, 그 돈으로 매겨진 만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목숨은 어느 순간 돈으로 변질되었다.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거기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애도보다는 처음부터 보상이나 배상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 그런 관심을 보인자의 어리석음은 결국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면 자신과 그 가족조차 돈의 가치로 전락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마치 그리스신화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 동굴에 갇히는 일화가 생각난다. 키클롭스는 하루에 사람 1명을 잡아먹는다. 눈이 1개인 이 괴물과 눈이 2개인 인간에서 누가 더 관찰을 잘하고 생각의 폭이 넓은가? 눈이 2개라는 점은 인간이 사물을 보고 판단을 훨씬 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인간들은 괴물에게 잡혀먹을 때까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 생활의 맛에 빠져 결국 괴물의 먹이가 되는 순간까지 그것을 간과한다. 마지막에 잡혀먹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자기 차례가 아닌 남의 차례가 될 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해 내지 못한 점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내가 바보인지 남이 바보인지 그것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것인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에서 도덕이란 윤리적 가치와 멀다. 가령 조선시대 신분의 차이로 평민들이 착취당해야 했던 것이나, 유럽의 중세시대 여성들이 성적인 불평등을 겪는 것은 그 시대 자체에는 큰 모순이라 해도 그 자체가 당연한 시대인 것이다.

 

바로 현실에서 말하는 도덕적 가치가 때에 따라 얼마나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들이란 점을 우리는 가끔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시대에 하나의 법칙, 제도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善, goods)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억압과 핍박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이 말이 나오지 않은가?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들보다 더한 노예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노예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흙수저,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사회적인 영역에서 매우 취약하다. 사회적 취약하므로 정치적인 입지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그 위에 누가 있는 것인가?

 

<사회계약론>에서 정말 놀란 말이 나온다. “외국의 지원과 귀화와 이민 없이 시민이 많이 거주하고 증가하는 정부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최선의 정부다. 인민의 수가 줄어들어 없어지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다.” 통계적으로 한 나라의 강력함이란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총 생산력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생산력은 전체의 합이 아니라 균등적인 질에 의해서다. 한국의 노령화와 신생아 출산율의 저하는 여러 가지 단서를 보여준다. 한때는 인구가 너무 많아 문제여서 인구정책을 펼쳤으나, 그런 시대의 조건은 있었다. 바로 식량의 공급이다. 식량의 공급이 농촌에서 이루어진 점, 자급자족이 어느 가능했던 20세 중반 이후는 그렇다.

 

하지만 공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가 발달하여 기술력과 상거래의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농업사회는 퇴화할 수밖에 없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한국전쟁 이후 90% 이상이라면 지금은 10% 이하로 밑돌 것이다. 식량생산력이 증가하여 식량의 공급은 충분하다 해도, 그 외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음식이나,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이다. 절망하는 청춘에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고, 그 능력조차 발휘할 수 없는 사회다. 최근 일본의 취업률이 증가했는데, 그것은 단카이 세대들의 장년들이 은퇴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속 순환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는 빈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진 점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사건들은 항상 어떤 이슈가 몰려있다. 누구의 이익이 되는가? 누구에게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가이다. 정치사회적인 관점이 결국 경제적 이익이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이란 단순히 화폐의 수입, 땅의 양도만이 아니라 어느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권력을 누리거나 지역적으로 전반적인 혜택을 볼 수 있는 것도 말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개별적인 의지, 단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전체의지를 제외하고 마지막에 남은 최우의 공공선을 추구한다. 일반의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덕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의 사상을 20세기 미국 최고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롤즈의 사상이 토대가 된다. 존 롤즈의 <만민법>을 읽으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세계시민이란 사람은 어떤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peoples이란 단어는 사람들이란 말도 있으나, 사실은 시민, 인민, 만민 등의 의미로 불린다.

 

루소의 peoples이란 의미는 남들을 지배하지도 지배받지 않은 국가의 주권자를 의미한다. 문제는 루소가 잘 지적하다시피 모든 국민은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으로 지적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적인 수준만 아니라 지성에 걸맞은 덕성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월급으로 그 어떤 투자를 하지 않는다. 친구가 허무맹랑한 일확천금을 꿈꾸며 외국 로또복권을 살 때, 혼자하기 그래서 나보고 같이 하자 해서 한 달에 1~2만 원 정도만 지원한다. 물론 높은 금액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끽해야 9등 1달러 수준만 계속 될 것이란 점도 안다.

 

주변에서 보면 매일 로또 복권 당첨, 아파트 분양권을 위하여 총을 쏘는 이야기던가, 혹은 주식 등을 보면 조금 아연해진다. 사실 복권이야 지나치지 않을 정도라면 삶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주식시장은 어느 돈이 시장에 모이면 그 화폐의 총액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그 화폐의 모인 돈을 누가 가져가는가이다. 주식에서 모인 화폐가 상승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화폐가 모인 업체에 화폐가 들어와도 그 화폐는 그대로다. 결국 화폐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노동을 하여 생산력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투자업체가 만약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고, 경영의 부실이 따라온다면 자신이 투자한 주식은 한 장의 메모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청약통장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다. 나보고 300만원을 6개월 동안 입금하여 분양권이 나오면 응모하란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보통 천 만 원이고, 아마 서울경기 지역은 P가 붙으면 억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엄청 많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모두 한입으로 총 잘 쏴야 하는데 하면서 요새 먹기 살기 힘들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다. 최근 홍대 주변에 상권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홍대에서 작은 점포 하나의 임대료가 천 만 원에 이르니 상인이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임대료만 가게의 수입을 차지하는 돈을 차감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과 재료비, 그리고 인건비 등이 있다.

 

높은 임대료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품의 가치는 올라가고, 상품의 가치가 오르는 것은 결국 소비 물가를 상승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기만성을 깨닫는 일이라 생각했다. 모든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때로는 추악하고 어리석게 살아갈 수 있지만, 적어도 기만적인 삶은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한 장 차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사람을 살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더라도 그 죽음 직전까지의 인생의 즐거움이나 이익을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마지막 순간을 언제 닥칠지 모른다.

 

기만적인 삶을 살아온 자에게 인생의 마지막을 말해도 대충 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인간은 미련을 갖더라도 후회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 미련이란 더 하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회는 다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오점을 정리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안고 살아온 점이다. 반성과 성찰 대신 이기심으로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면 마지막 순간 후회한다. 하지만 그런 후회를 반성하기보단 마지막까지 은폐하고 조작하려는 자의 말로는 더욱 비참하다. 역사적으로 독재자의 최후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이 가진 것들은 더 빼앗으려고 했다. 결국 독재자의 최종목표는 부에 대한 집착이다.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재물로 대체하는 것이 재물이 있는 이유는 그 재물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나, 현실은 오히려 재물은 타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노예와 주인에서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자야말로 정신적으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에 의해 노예의 삶을 사는 자는 비참하고, 가난한 자를 부리는 부자는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루소의 <정치경제론> 부분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왠지 우리 한국사회의 직장이야기가 생각나는 것 같다. 아니라 최근에 논란되는 갑질행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노동계약이나 업체 간의 업무는 정당한 계약에 의해 실시된다. 물론 서류의 외부로서는 그렇다. 하디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자는 비굴해지고, 강자는 비굴해진다. 그런 삶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올바른 정치사회가 된다고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강자나 약자나 모두 한국에서 투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영국 잉글랜드 사람들은 투표하기 전에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했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은 국가의 일에 관심이 없고, 국민이 국가에 무슨 일(문제)이 있는지 모르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폭군은 전제군주가 될 수 없더라도, 전제군주는 언제나 폭군이다. 그런 전제군주와 그 군주의 아래에서 개별의지와 전체의지를 발휘하는 자들이 있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나라의 국민은 노예일 때가 가자 자유롭다고 한다.

 

“길게 보면 인민은 정부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정부가 원한다면 전사, 시민, 인간 가운데 어느 것도 가능하며, 천민과 불량배가 좋다면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신민을 멸시하는 모든 군주는 자신이 그 신민을 존경받는 존재로 만들 줄 몰랐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만든다.”

 

루소의 정치사상을 본다면 그는 인간의 불평을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봤으나, 경제적 조건을 상당히 많이 보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빈곤함과 가난함이 그 사회의 악을 만드는 것이란 점을 알았다. 가난한 자가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 차압이 들어와 그의 옷과 이불, 그리고 식기류까지 앗아간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 있는가? 루소가 지적한 불평등은 사회적 도덕적인 관계라고 하나, 그 사실의 근본에는 경제적 빈곤이 담겨있다. 루소의 경제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재화가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당시 절대주의 왕정시대의 중상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발매되었다면, 루소가 제시한 <정치경제론>은 1755년에 발행된 책이다. 무려 20년 앞서서 루소는 스미스가 원하는 경제적인 목적을 제시한 것이다. 루소의 책을 농촌지역에 대한 찬미가 가득하다. 도시의 과다성장에 반발하여 농촌과 도시의 균등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조금 더 상공업을 중시했지만, 그도 역시 농촌경제가 도시의 이익으로 황폐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방법론적이나 기술적인 요소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미 경제학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가 주장한 도덕 그 자체에 대한 경제적인 가치에서는 이미 루소는 20년 이전에 주장한 셈이다.

 

그 근본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다. <국부론> 역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해 서적을 작성했다. 권력층과 부유층만이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고, 물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나쁘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여전히 큰 문제다. 인간의 목숨과 인권을 돈으로 주고 사는 것을 반대했던 루소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인간은 돈에 의해 죽고 사는 기로에 놓여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루소가 제기한 문제는 250년 전이나, 그가 의문을 품은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지혜와 등불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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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23 14:51   좋아요 0 | URL
이런 말하긴 그러나 그냥 그런 사람 죽으면 좋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23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소 전문 알라디너는 만애비 님이시죠. 알라딘 루소의 80%는 만애비 님이 장악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23 14:51   좋아요 0 | URL
오덕게리온 출동!
 
국부론 -상 - 경제학고전선 애덤 스미스, 개역판 국부론 시리즈
아담 스미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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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經濟學)과 경영학(經營學)은 서로 다르다. 경제학은 사실 앞에 단어가 생략된 말이다. 우선 소개한 도서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있다. 하지만 루소의 서적은 그것만이 있는 게 아니라 <정치경제론>이란 서적이 있다. 루소를 떠오르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근대민주주의 이론을 만들고, 세계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자이다. 그런 루소가 경제론에 대해 논했다는 것은 의아한 내용이다. 18세기는 이른바 17세기를 지나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다. 16세기부터 유럽에서 아시아와 신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은 새로운 시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각 국가에서는 식민지 개척에 따른 금과 은의 수확을 원했다.

 

이른바 중상주의(重商主義)로써 상대방 나라에게 금과 은을 주지 않고, 국가정부가 직접 수출입을 통제하여, 국가재고에 금과 은으로 넘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입장에서 군주들과 많은 봉건영주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금과 은의 비축은 전쟁 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자금으로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상주의를 본다면 한계점은 금과 은의 사용처는 금화와 은화 같이 화폐로 통용되지 못하면, 귀금속이나 혹은 식기류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사치품들을 이용할 수 있는 범주는 한계가 있다.

 

은과 금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정작 부국을 위한 방법은 금과 은으로 넘치는 왕실의 창고가 아니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바로 나라의 부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지, 그런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때까지 화폐의 가치와 물가, 무역, 세금 등 다양한 경제적인 관점을 서술하는 서적이다. 전에 EBS 자본주의에 대한 5부작 다큐멘터리에서 맨 처음 나온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에서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창시자로 등장한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는 사실 한자로 본다면 별로 우리에게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영어로 economics, 경영학은 business management이다. 영문 단어를 보더라도 둘은 분명하게 다르다. 그리고 18세기의 경제학은 단순히 economics이 아니라 political economy로 시작했다. 그런 단어의 의미는 루소의 <정치경제론>에 등장하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도 그러하다. 오늘날 현실에서 내가 바보인지 주변 사람들이 바보인지 나도 혼돈되는 경우가 많다. 논점은 틀리지 않으나, 어쩔 내 나의 명제가 틀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논점에서 경제학의 시초가 애덤 스미스고, 애덤 스미스가 18세기 영국 사람이나, 그의 경제학의 연구내용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 연구도서고, 그가 제시한 내용은 현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돌아가는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사실 몇 세기 이전의 정치, 경제, 행정 등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차이난다고 생각하나, 막상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한국에서 행정구역에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행정구역이었고, 하다못해 경상남도와 충청북도 등과 같은 행정구역 역시 조선시대부터 존재한 지역명이다.

 

우리는 21세기에 살아가도 14세기부터 존재한 행정구역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그 당시에 만들어진 도로를 기반으로 주요한 철도와 도로, 항만 등의 교통시설을 만들었다. 과거와의 시간은 단절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것은 누적되어 하나의 기반으로 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보통의 진흙이나 자갈, 바위 혹은 암석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도로 밑에 콘크리트나 나무목재 보도 아래, 모래 및 자갈 기층이 있고, 그 기층 아래 보조기층과 암반지역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았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도 많은 경제학보단 경영학을 추구하는 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은 손”을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만능처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은 손”은 단 1번만 등장하고, 전후맥락을 보면 모든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돈의 순환을 계속 돌고 돌아 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상품과 재화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절은 프랑스혁명도 있었지만, 산업혁명 도래의 시대다. 기계의 발전은 다양한 진보와 문제를 일으켰다.

 

기계화의 단점은 가내수공업자들의 상품경제력을 저하시킨 점이고, 장점은 많은 물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관계에서 상품이 필요한 사람들이 넘치나 물품이 부족할 경우, 항상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한 무역의 자유화와 시장경제의 발전은 독점과 화폐의 고정화가 아니다. 화폐는 계속 이동되어 상품이 존재하지 않은 국가에게 필요한 재화를 공급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농부가 농기구를 제대로 구할 수 없거나, 도시의 사람들이 밀을 구하지 못하거나,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석탄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다면 엄청난 생활고를 겪게 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국부의 조건은 국가의 창고에 금과 은으로 가득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프랑스 의사 케네를 만나, 그의 중농주의(重農主義)에서 국부론을 시작했다. 농사를 짓게 되면 당연히 농작물이 나오고, 그것은 농부의 잉여물들이 도시로 유입되어 식량문제를 해결된다. 거기서 나아가 충분히 잉여량이 생산되면 타국에 수출하여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영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밀의 농사가 흉년일 경우, 식량을 들이야 하는데, 중금주의 요소로 정책을 펼치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식량문제에 허덕일 것이다.

 

단지 중농주의 한계점은 농사, 즉 1차 산업이 중심으로 보기에 18세기 자본주의 시장체계와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스미스의 관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분업이다. 매뉴펙쳐, manufacture라고 불리는 시스템이다. 가령 공사현장과 기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물품에서 쇠못이 있다. 쇠못은 한 사람의 대장장이가 만들면 하루에 대략 100개를 만들 수 있지만, 각 과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10~20명이 있으면, 그 생산량의 100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다. 대장장이의 손에서 나온 쇠못은 하루에 제작되는 개수가 한계가 있고, 대장장이의 인원에 한도가 있다면, 공급의 부족으로 제대로 현장을 움직일 수 없다.

 

가끔 국내에서 금속의 부족으로 건설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금속이 없다는 것보단 금속의 자재 가격이 너무 올라 자신들이 도급받은 내역과 일치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는 공급의 문제다. 금속가격이 오른 것은 재화의 공급이 부족하나, 수요량은 일정하다. 그렇다면 상품은 오른다. 한 해 배추농사가 흉작이면, 배추가격이 1포기당 가끔 만원에 육박하는 경우가 있다. 작년 겨울 어머니와 같이 마트에 가면서 1망에 3포기의 배추 가격이 6,000원 정도 했다. 결국 지난 김장철에 내가 사는 동네의 배추는 1포기당 2,000원인 것이다.

 

배추 같은 자연적인 토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기상과 환경 등과 같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쇠못의 경우는 자연적인 조건보다 생산라인의 공정에서 그 차이를 보여준다. 20명의 노동자가 1명의 대장장이에 비해 만들 수 있는 쇠못은 20배가 아니라 사실 200배 이상이다. 일의 효율이나 생산성을 본다면 쇠못이 필요한 사업체는 분명히 원활한 자재유입으로 집을 세우는데 유리하거나, 기계를 제작하는데도 막힘이 없다. 그러나 생각할 점은 스미스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서 생산되는 양의 차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스미스의 시대는 항상 모든 사회는 진보하는 시대, 즉 각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늘어나고, 그 물품은 외국에 교역되며, 국내에 부족한 물품은 수입이 원활하게 진행되려는 시기다.

 

그런 시대에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물품들이 부족하고, 때에 따라서 흉년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단지 적어도 경제공황은 당시에는 없었다. 물품이 부족한 것은 계속 생산되면 거의 다 팔린다는 의미다. 스미스의 경제학의 시간적 공백은 경제공황의 현실을 맞이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공황은 카를 마르크스와 케인즈의 시대로 오면서 연구된다. 즉 지나친 생산물이 시장에 나와도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문제다. 시장에 물품은 넘치는데, 구매자가 없다면, 기업은 자금압박을 받게 되어 결국 도산한다. 기업의 도산이 문제되는 것은 EBS 방송에서 보여준 사례를 보고 확연히 알았다.

 

은행에 만일 1억을 예금하면, 은행은 그 1억을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보관하고 나머지는 대출한다는 점이다. 만일 한국은행에서 일반 시중은행에 5,000억원을 제공하여 그 돈의 3.5%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계속 대여해주고, 대여자는 그 돈을 다시 다른 은행에 입금하여 사용하고, 그 은행에 다른 대여자를 찾아가서 최종에 이르러, 시중에 들어간 5,000억원은 6조를 넘는다는 점이다. 물론 60조에 도달하지 않으나, 적어도 조 단위로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갚을 능력이 없다면 그 돈을 빌려준 은행도 갚지 못해 부채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큰 문제를 일으킨다.

 

유럽에서 은행에서 현금보유량을 전체 입금비율의 10%라고 하는데, 한국은 3.5%라고 한다. 만일 은행에서 큰 문제를 일으켜서 고객이 현금을 인출하러 가는데, 막상 자신이 예금한 돈을 다 찾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연유다. 스미스의 생각대로 본다면 필요한 곳에 자본이 돌아야 하나, 우리는 불필요한 곳에 자본이 돌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친구와 한국경제상황에서 물가가 왜 오르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두 말하지 않고 부동산이라 했다. 지대가 상승하면 점포 임대료가 상승하고, 임대료의 상승이 된다는 것은 부동산세를 납부하는 사람에게 추가적인 세금부담을 안겨준다(물론 임대료의 상승이 부동산세에 비해 더 높은 수익을 주지만).

 

만원에 팔던 통닭에 닭의 원자재 가격, 인건비, 그리고 각종 세금과 경비, 마지막으로 임대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임대료가 가령 100%가 오르면 그 임대료 상승만큼 상품가격으로 투하된다는 것을 말했다. 사실 마르크스의 <자본>도 그렇지만, <국부론>에서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위에서 계속 입금과 대출관계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돈은 우리의 현금보관소에 보관하는 게 아니라 은행의 계좌에 보관된다. 물론 5만원권이 발행한지 얼마 되지 않은데도 벌써 많은 화폐가 은행으로 입금되지 않고, 어딘가에 가만히 있다고 들었다. 17세기 왕실의 중금주의가 21세기 개인의 욕심에 의해 새로운 중금주의로 된 모양이다.

 

돈의 발행이 된 후 만일 회수가 되지 않으면, 계속 화폐를 시중으로 들어갈 수 없고, 시중에 화폐가 유입되면 입금과 대출, 그리고 기타 상거래로 인해 화폐 총량이 확장되어, 인플레이션이 닥친다. 돈은 시중에 없는데, 물가는 오르는 이상한 현상이 발현된다. 그런데 여기에 이익의 3대 요소인 임금, 이윤, 지대에서 부동산의 상승은 지대를 올린다. 아파트 가격이 10년 전만 해도 3억만 하면 좋은 집이나, 지금은 3억이라면 서울에서도 조금 낮은 수준의 집이 되었다. 아파트 구매, 전세대란으로 화폐의 시중에 유입이 확장되면서 부동산가격이 증가하고, 지대의 상승은 물가에도 반영된 것이다.

 

내 친구는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 하나, 지금 임금의 상승폭이 10년 전과 비교하여 얼마나 올랐는지? 원자재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세금이나 경비가 얼마나 올랐는지? 하다못해 달러와 외국환의 환율이 얼마나 변동되었는지 생각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변동된 것은 없다. 오히려 2015년 말에는 계속 올라가던 석유가격이 내려가고, 지금은 오히려 10년 전보다 휘발유 가격이 저렴하게 되었다. 휘발유 가격은 국가정책의 혜택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지의 배럴당 석유가격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물가는 오르는가?

 

사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점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경제학을 원래의 학문적으로 본다면 거시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요소로 보고, 경영학은 개인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시야로 보는 것이 옳다. 경영의 영문처럼 management란 관리라는 것이다. 관리라는 것은 사업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경제라는 political economy로 보는 게 정당하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결국 사적인 이익이 공공의 이익에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을 넘어 다른 개인의 이익까지 침해하는 경우가 현실사회에서 다분히 일어난다.

 

스미스는 남에게 해를 주지 않을 정도이고, 그 남이란 대다수의 국민이고, Nations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처럼 영국(그의 지역은 스코틀랜드지만)만이 아니라 세계에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야 한다고 국부론에 제기한다. 그러나 막상 그런 경제적인 관점은 보이지 않고, 시장경제의 낙수효과를 주장한다. 사실 경제학자 소개도서에서 자유 시장경제를 철저히 주장한 하이에크나 밀턴도 지나친 사적인 이익추구 및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임금에 문제가 생기면, 상품의 소비자가 자신의 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의 노동자인 것처럼, 결국 경제적 순환이 멈추게 되어 문제가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국부론>을 읽은 후 스미스와 하이에크에 대한 차이점은 위에서 언급하나, 스미스의 시대는 많은 물품들이 부족한 사람들이 넘치던 시대고, 지금은 넘치는 시대다. 당시는 사고 싶어도 물품이 없어서 못사는 시대라면, 지금은 물품이 넘쳐도 구매할 화폐가 없어서 못사는 시대다. 사회적 재생산, 그리고 사회 전체적인 생산에서 기계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은 상품의 공급에 큰 혁신을 주었으나, 문제는 상품이 팔리지 않는 것이 문제다. 뉴스에서 서민지갑이 꽁꽁 얼어 경기가 좋지 못하여 정책을 새롭게 펼치나, 근본은 해결되지 않는다.

 

18세기의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중상주의를 비판했다면, 지금은 기업의 독점적인 중상주의가 문제가 되었다. 사실 국가의 창고에 보물이 넘쳐도 그것은 왕실의 물건이지 국민의 물건이 아니고,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면 기업의 이익이지, 그 나라의 국민의 이윤이 아니다. 사람들의 착각은 바로 이윤의 창출에서 기업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그대로 국내로 재순환되는가 마는가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이다. 그 기업에 고용된 자가 있더라도, 그들이 사용하는 금액은 우리나라 전체 경제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율에서 과연 %일까?

 

국가의 경제학과 기업의 경영학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시작하나, 솔직히 어느 부분에서 서로 유사한 부분이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결국 사회활동의 일환이고, 사회활동에서 기업의 생산품은 수요자에게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소비자로부터 이윤을 창출한다. 스미스가 제기한 것처럼 식빵가게 주인이 빵을 파는 것은 결코 자애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심이고, 식빵을 구매하는 사람은 식빵가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다. 그런 서로의 이해심이 일치하고, 식빵의 소비는 식빵가게의 주인과 노동자, 밀을 생산하는 농부와 운반하는 상인에게 큰 이익을 준다.

 

적어도 스미스의 경제이론은 다다익선이고, 서로의 이기심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는 사회적 도덕관념을 강조한다. 사실 스미스의 <국부론> 이전에 <도덕감정론>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스미스가 경제학의 창시자이나, 본래 윤리도덕학을 가르치던 학자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자세를 통해 경제성을 발견하여 필요한 재화들을 계속 융통될 수 있기를 추구했다. 오늘날 “보이지 않은 손”을 주장한 사람에게 도덕과 감정에게 무슨 의미로 전달될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주장보단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물론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청약통장에 300만원을 넣고, 아파트분양을 원한다. 물론 분양권을 받아 돈을 벌면 좋겠지만, 그들은 항상 불평을 한다. 마트에 가면 물가가 너무 비싸서 살 게 별로 없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은 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보이지 않은 손”이란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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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1-13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학과 경제학이 분리되는 순간 경제학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고 하던데요. 저도 깊이 동감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13 09:24   좋아요 0 | URL
분리되어 현재 이 꼴이죠. 경영학 마인드로 경제학을 다룬다는 게 참..

2016-01-13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13 11:00   좋아요 1 | URL
어허허허... 오덕오덕하게...
 
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시게마츠 기요시의 <십자가>란 작품은 모두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생각들을 만들게 하던 작품이었다. 책을 읽으면 난이가 높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제의 관건은 우리는 항상 주변에 있는 문제들이 익숙해지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된다. 즉, 사람의 감수성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능력이 저하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의 문제와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지나치려는 기만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남의 일은 엄청난 사고라도 그냥 별반 의미 없이 지나가겠지만, 그 남의 남인 내가 그 상황에 닥칠 경우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이번에 읽어봤던 <십자가>란 소설 역시 그렇다. 무너진 교권이 최근 뉴스로 접하게 되었다. 학교 교사들이 예전에는 정규직이 되다가 비정규직 내지 임시직으로 되면서 반영구적으로 근무하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들은 언제라도 학부모의 클레임에 의해 자리에서 나가야 할 사태가 올 수 있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뭔가를 희생시키는 대상이 이제는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된 것이다.

 

그런 학교 교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왜 교권이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도구화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음 시작은 후지슌이라는 중학생이 자살하면서부터다. 유서에는 4명의 이름, 2명은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청소년, 1명은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고, 또 다른 1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다. 자신을 괴롭힌 2명은 원래 불만이 있었다고 하나, 친한 친구와 좋아하던 여학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도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들은 자살한 중학생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죽은 학생의 부모, 그리고 후지슌의 남동생은 달랐다. 왜 도와주지 못했나? 왜 알아주지 못했나?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위로했었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가 없지 않았는가? 라고 말이다. 솔직히 어떤 문제를 두고 그런 엄청난 일들을 중학생에게 책임여부 자체를 묻는 게 잘못된 일이고, 그런다고 그들을 방치하거나 억지로 잡아두는 것도 문제다. 결국 어느 중학생의 자살은 그 학교와 사회, 더 나아가 일본이란 나라조차 넘어선다.

 

학교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후지슌을 괴롭히던 2인방 중에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던 중에 사고로 죽었다. 살아남은 학생의 부모는 죽은 아들의 어머니에게 심한 불평과 원망을 듣는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아이가 저지른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아이는 문제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이중성이 사회적으로 하나의 의식이 되고, 그 의식이 공동체들의 하나의 가치가 되는 순간, 그 세상은 점점 망해가는 징조인 것이다. 후지슌의 편지에 적힌 친구와 소녀에게 끊임없이 따라는 신문기자, 그는 계속 그 사건들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려 한다.

 

중학생들이 무슨 깊은 생각이 있겠는가? 그때는 오로지 무섭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오면 현실에서 눈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더 심한 문제가 있었다. 눈을 돌려도 그 문제는 자신이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앞에 언제나 마주하고 있고, 길을 떠나 도망쳐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는 흘러간 시간이지만, 인간에게 지나간 역사와 시간은 결국 자신이란 존재를 형성하게 해준 하나의 토대다. 그 토대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정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소설 제목처럼 <십자가>란 자신의 등에 평생 업고 다녀야 하는 숙명의 속죄의식이다. 칼은 상처를 내고 끝나고, 찔리면 아프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되어 상대방에 대해 원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나, 십자가란 그런 선택지는 없다. 단지 자신의 마음에 담고 살아갈지 아니면 눈을 돌리는 것이다. 눈을 돌려도 왜 다시 그것은 자신을 돌아오는 것일까? 후지슌은 매우 어린 나이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옛 친구로 둔 유군의 경우 어릴 때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우리 형의 말이 생각난다. 만약 결혼에 대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이 단순히 연애의 의미로 둔다면 그 순간 결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혼에서 가치관이 없어지는 경우 그 가치관을 유일하게 맺어주는 것은 자신의 자녀다. 결혼하면 처음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다가, 어느 순간 눈을 돌리게 된다. 인간은 간사하게도 지루함과 한가한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집안의 모든 관심사는 아이에게 간다. 아이가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말이다.

 

유군의 아이가 어린이집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좋고 누군가는 싫다고 한다. 유군은 왜냐고 묻자, 유군의 아이는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유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때까지 마음속에서 억지로 잡아둔 눈물이 이제야 터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왜 친구가 좋은지 물어보면 그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이나 이익의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친구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후지슌의 죽음에서 그가 남긴 이름에서 유군은 상처를 받고, 원망을 했지만, 그런 자신에 대한 후회와 원망이 따라오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조차 자신이 나온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아이도 과거의 자신처럼 혹은 후지슌처럼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소설은 죽은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유군의 눈을 통해 가족들을 바라본다. 관계는 있지만, 마치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은 삶처럼 말이다. 유군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비겁할까? 아니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나,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얼굴과 생각을 한 인간이다.

 

너무 특별하거나 잘난 것도 아니라, 그저 그런 인간 중에 하나이다. 현실에 무력한 인간이었고, 그저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다. 학교도 자신이 사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왜 도쿄로 가는 것인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무게는 벗어날수록 그 공백 기간을 채웠다. 신문기자가 그렇게 자신들을 향하여 비난을 했지만, 사실 그 비난조차도 하나의 위로였다. 그런 비난조차 듣지 못하고 성장하면 더 심한 죄의식이 자신을 눌러버린다는 점이다. 뭐든지 처음에 맞는 매가 편하다고 한다. 처음에 맞는 매는 때리는 사람의 완력이 있기에 맞는 사람에게 불편하나, 저 뒤에서 자신의 차례가 늦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눈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속이 편할 것이다.

 

단지 속죄해야 하는 깊이가 너무 깊으면 생각을 할 수 없다. 죽음이란 단어는 너무 무겁고, 입에 내놓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만약 십자가란 죄의식이 없고, 그 고통의 무게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움직이는 인형이다. 자신의 양심과 의지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살아가는 존재에게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편한 게 좋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나는 게 있다.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 "Memento mori"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에게 “죽음을 기억해라!”란 의미를 담은 말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Memento mori를 구시대적인 종교관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점에서 인간의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불청객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 그 자체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점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하고, 절대적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그것보단 차라리 기만하지 말자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보단, 삶이 마지막이 도래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마지막 모습을 우리가 경험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면서 깊은 후회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후회조차 하지 않을 단순한 인간들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인간과 후회하는 것조차 모르는 인간, 어느 누가 행복할까? 제일 행복한 것은 마지막에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맹세할 수 있는 인간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들은 죽음 그 자체보단 죽어가는 그 순간,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렵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항상 일치한다는 실존적인 관념만큼 우리 삶이 자기 자신에게 기만적인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을 느끼는 우리는 어떻게든 십자가를 안고 가야 한다. 십자가를 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 인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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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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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친구가 저번주에 산업재해로 죽었다. 안전보호구의 미재, 안전관리자의 부재, 이 모든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내 친구를 빼앗겼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생각났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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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0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괜찮을 지란 생각도 들구요. 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해 친구들도 공사현장에서 죽은 친구도 있습니다. 노무사 공부를 하면서 판례나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지만 `낙수효과`라는 이름 아래 모든 노동자들은 희생을 강요당하더군요.

요즘 발생한 구의역 사건이나 이런 면들이 모두 젊은이의 죽음을 담보로한 자본들의 생명 연장이라는 점에서 무지하게 화가 납니다.

전 노무사가 되어 미약하게라도 자본가들 면상을 찡그리게 만들고 싶은 각오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9 08:38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 구의역 사건을 보면서 또한 지하철공사 붕괴사건을 보면서도 생각하면 참 답이 없는 나라입니다. 노동자의 삶이 비참한 사회만큼 지독한 병폐가 있다는 것이죠.

어이 없이 죽은 것도 열받지만, 마치 당사자가 아무런 조치나 예방사항은 보지 않았다고 몰아가는 식이 더 열받더군요. 그렇게 일하게 만들어 놓고 돈을 아끼려다, 보상금조차 깍자고 하는 저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친구분의 죽음 참 아프시겠습니다....

트리클다운, 사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에서 트리클다운의 만능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