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루이 알튀세르 자서전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이매진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추후에 읽을 예정인 <알튀세르 효과>는 최근 출판된 도서이다. 아주 묵직한(870페이지 분량) 서적으로,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제시한 연구내용에 대해 후세 학자들(프랑스 철학자들이 작성 한국 철학자가 번역 및 추가 작업)이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한 도서이다. 루이 알튀세르라는 학자를 내가 알게 된 동기는 이른바 사상관련 도서를 찾아보면서이다. 구조주의 4인방인 푸코, 레비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외에 추가적으로 구조주의에 들어 갈만한 인물이 바로 루이 알튀세르인 것이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루이 알튀세르와 저 위의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푸코는 알튀세르의 지도받는 학생이었고, 라캉은 알튀세르 초빙으로 프랑스 최고의 교육기관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외에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 20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최고의 사상가들과 교류한 알튀세르는 프랑스 지성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사실 20세기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에 세계적으로 철학과 사상의 조류는 프랑스 구조주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간 것 같다.

 

20세기 나치만 아니라면 독일의 관념철학과 분석철학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된 마르크스주의까지가 독일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전쟁이 바로 알튀세르의 인생을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알튀세르로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읽은 알튀세르의 저서는 <재생산에 대하여>와 <철학에 관하여>이다. 재생산이란 자본주의사회구조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사회적 토대를 유지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군중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1990년 알튀세르가 죽을 해가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시기다. 그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가톨릭신자였으며,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중심으로 홉스, 로크, 몽키스키외, 루소, 헤겔 등의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을 가게 된 동기 역시 전쟁이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내가 <철학에 관하여>란 책을 읽을 때 그는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어 관념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현상이 부딪혀 새로운 현상을 보여준다는 충돌이론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런 이론을 제시했는가? 철학은 사실 철학이란 도서로 존재하여 교과서처럼 사람에게 오는 게 아니라 철학이란 하나의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철학이 된다. 실천하지 않은 철학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게 아니라 그저 관념 안에서 흩어지는 안개일 뿐이다. 행동을 위한 사유, 사유로서 보여주는 철학적 가치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려운 말일 수 있고, 간단한 논리일 수 있다. 그가 왜 마키아벨리를 생각하는가? <군주론>이란 서적에서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공포의 대상이 되더라도 증오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국민과 혹은 국민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국가를 보는 관점이 현실적 조건 경제적 상황 등을 제대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토대와 상황적 조건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관념론적인 요소는 어떤 운동을 위한 하나의 지표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는 운동이 될 수 없다. 운동을 하기 위해 관념론적인 요소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만은 없다. 현실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그 현실을 타파해 가야하는 주체들의 요건들이 바로 새로운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래 말하지 않았나? “철학자 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만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석을 한 후에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스피노자적인 가치관이란 자신의 틀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사상을 파고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나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은 연구라고 본다.

 

루이 알튀세르의 서적인 <철학에 관하여>는 1980년 알튀세르의 아내 엘렌느를 정산착란 상태에서 살해 후 후견인 보호 아래서 저술했던 도서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 교수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을까? 그런 자신이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하는 것일까? 상당히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보통 자서전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성장기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적고, 거기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인물을 정리해간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이상을 제시하나, 알튀세르는 그런 식의 책은 아니다. 보통 나도 그렇지만, 대다수 지성인들은 자서전을 좋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서전에 들어가는 내용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도 살며시 보여주나, 마지막은 자화자찬으로 종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알튀세르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과 다른 책이라고 밝힌다. 루소의 <고백>은 인류 학문에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다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자신과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 책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에서 <고백>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하다. 인간의 심리는 모순적이면서도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루소의 <고백>과 같은 자서전이 아닌 다른 식의 자서전으로 발간한다.

 

루소는 자신의 죄와 과오를 보여주고 성찰한다고 하겠지만, 알튀세르는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단순히 자서전으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자신이 어릴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제3자의 관찰을 집어넣고, 자신을 어떻게 주변에서 대응이 이루어졌는지까지 나온다. 하지만 모든 시작점은 역시 전쟁이 문제인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점이나, 한국에서 정신병이나 우울증, 과대망상증 같은 심리적 혹은 정신적 증세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바라본다. 한 마디로 무슨 정신과에 다니는 순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 많이 줄어든 편이나, 솔직히 대규모 전쟁을 거친 국가로 본다면 한국인에 가해진 트라우마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가 만일 다시 사회에 나가더라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더 이상 일상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1960년대 알튀세르가 정신병원에 입원할 때를 말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전쟁이 중요하다고 한 점은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은 수많은 유럽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 넣었다. 기존의 전쟁의 백병전 중심으로 총과 칼, 그리고 대포로 이루어진 공격이나, 20세기부터는 폭격과 화학전이 도입되던 시기다. 총과 칼은 눈에 보이는 적만을 놀리지만, 폭격과 화학전은 눈에 보이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준다. 전쟁의 판도에 따라 달라진 전쟁에서 알튀세르의 아버지 샤를르는 자신의 동생 루이와 같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샤를르는 전쟁 중 잠시 휴가를 받아 돌아오나, 자신의 하나밖에 없던 동생 루이는 비행작전 중 공중에서 산화하고 만다. 문제는 루이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촌 루이는 죽고, 샤를르만 돌아와 어머니와 혼약하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루이의 죽음에 충격 받고, 그 와중에 샤를르와 결혼, 결혼식 후 첫날밤이 사랑이 아닌 강간처럼 이루어진 점, 자신이 이때까지 모은 재산을 그가 탕진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뒤틀어져 버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는 루이 알튀세르이고, 아버지 이름은 샤를르 알튀세르,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이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죽은 삼촌의 이름 루이를 받아들인 어머니의 환상이 되어야 했던 아이다. 어머니가 바라본 알튀세르는 아들이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예전 연인이던 루이의 대체용으로 취급당해야 했다. 살아있는 2명과 죽은 1명의 계약 아래 알튀세르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은 결국 그의 우울증을 야기했다. 삼촌의 영향은 컸다.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삼촌 루이는 학자 같은 인물이었고, 매우 감수성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그런 요소를 조카에게 물려준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튀세르에게 우울증이 되었고, 청년과 장년 그리고 노년까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평생의 굴레였다. 아내 엘렌느의 교살은 참으로 끔찍하기 보단 아련했다. 아내 역시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기 전 보름 넘게 집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누가 와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었다. 아내는 나치가 프랑스 점령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그녀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병으로 둘 다 돌아갔다. 우울증에 걸린 부부, 게다가 자살할 충동을 느껴도 자살할 용기가 없던 엘렌느는 알튀세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내의 목과 어깨를 마사지를 하는 도중, 알튀세르는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가 아니라, 안마 도중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의 동공은 풀어지고, 맥박이 없었다. 미친 듯이 당직의사실에 가서 이 사실을 고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병원에 수용될 때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때 알튀세르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몰랐다. 노년의 찾아온 불행, 그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세였다. 어머니에게서 시작한 과오, 어머니를 벗어난 수용소 생활과 혹은 외할아버지와 함께한 농촌생활이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알튀세르, 물론 그 후로 활동하지만,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어떤 사회적으로나 신분에 대한 꼬리표가 달려 다녀야했다. 그의 자서전은 그런 기존의 자신이 마치 도처에 존재하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인간이 아니라 본인 그 자신이고자 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거기서 자신을 분석하여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22장을 보면 마지막 문단 쪽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한다. 그는 1918년생, 1980년대에 저술했다면 60이 넘은 노년이란 점에서 그의 새로운 시작은 나이보다는 그가 자신이란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점에 스스로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상당히 겁이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매력에 집착하면서도 한편으로 거기서 얽매이는 것을 싫다는 것도 나온다. 한 인간이 가족에서 시작된 편력이 이렇게도 지독한 것인가? 아내의 죽음에서 결국 아내를 죽이게 된 원인은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자살적 충동을 아내에게 이어진 것이다. 아내 역시 죽음을 생각했고, 그녀 역시 죽음으로 얼룩진 인생이다.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의 죽음, 그리고 엘렌느 역시 레지스탕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조직의 오해로 추방된 사건 등등, 인간의 상처란 쉽게 아물지 못하는 것 같다.

 

알튀세르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의 탄생, 가족이 움직이는 형태, 그리고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아픔들, 자신은 살아있는 인간이나 죽은 인간을 대신해야 했던 존재, 처음부터 살아있던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자신,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분석했기에 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은 계속되어 그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거서 2016-02-14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하겠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2-15 08:44   좋아요 1 | URL
아~! 그렇습니까~~

보빠 2016-02-24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이신데 후기는 인물비평이시네요 저도 알튀세르 좋아하지만 저렇게 못느꼈는데 대단하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24 09:25   좋아요 2 | URL
알튀세르를 읽기 전에 장 자크 루소의 <고백>을 읽었던 게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알튀세르와 루소의 글에서 역시 알튀세르의 의도처럼 그렇더군요.
알튀세르의 정신착란과 우울증에서 생각해보면 저도 엉뚱한 점이 많은(아마 이게 정신분석에서 과대망상이라 하겠죠) 사람인지라, 그런 점에서 염두하여 글을 적었죠.
일단 오타쿠인 이상 망상은 기본을 가지고 있다보니..
이번에 이책을 보면서 번역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철학을 자주 읽는 편인데, 번역이 친절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 나보고 천재가 있냐고 혹은 상당히 재능이 있는 인간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인간의 불평등에서 현재 사회구조는 사회적도덕적 혹은 더 넘어 경제적문화적교육적인 불평등이 심각하지만,그래도 인간의 선천적인 신체적자연적 불평등은 존재한다물론 천재들이 태어나 이제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세계 명문대학을 입학하는 것에서 우리하고 별천지 세상처럼 보인다하지만 나에게 천재는 반드시 그런 자만 있는 게 아니다그들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지만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다.

 

인간이 어느 상황을 보고 판단하여 선택하는 기준은 이성과 지성이어야 한다그러나 실제 현실을 살아가면 인간이 선택하는 기준은 이지적인 요소가 아니다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욕구와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자신이 아주 현명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사고가 마치 아주 뛰어난 경제관념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보면 누가 과연 멍청한지 혼돈되는 경우도 많다내가 왜 천재의 기준은 단순히 두뇌의 능력도 중요하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가 있어서 그가 우주선을 설계하거나 과학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풀어내더라도 일반인에게 미지의 세계일뿐이다왜냐하면 그것이 인간들의 실제생활에 막연한 관계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감정적으로 혹은 감동으로 오는 것들은 다르다영역의 깊이와 넓이에서 다소 부족해 보일지라도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에서 그런 감정적인 요소를 자극하거나 혹은 감동을 주는 작가 중에 나는 최규석 만화가를 추천해주고 싶다막상 최규석 작가를 어떤 강연회에서 보거나연회 내지 회식자리에서 본다면 무척 특이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실제 최규석 작가를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주변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봤다상당히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뭔가 하나에 집착할 것 같은 성향이었다.

 

그가 느낀 세상이란 무엇일까최규석 작가를 보면 뭔가 일반인들과 달리 모호하게 존재하는 것 같이 보여도 그의 그림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잔혹하다최규석 작가의 작품이 왜 감정을 자극하고 감동적인가억지로 꾸겨 넣은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매우 우화적으로 혹은 아이러니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생각하지 못했던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상상력이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읽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 마치 동화책을 보듯이 책과 안의 그림들은 무척이나 아기자기하다최규석 작품들은 나름 리얼리티가 살아있기에 한국의 리얼리즘(사실주의만화작가로도 평가되기도 한다그의 리얼리즘 요소는 단순히 사실주의적인 그림체와 배경만이 아니라 동화적인 그림체로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교훈을 알려주기에 너무 교훈적이지 못한 이야기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란 곧 하나의 서사 Narrative라고 볼 수 있다내러티브가 성립되는 이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즉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은 규칙과 패턴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란 바로 그 규칙과 패턴에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우화적인 요소로 인간보단 동물들이 등장한다마지막에 보여주는 동화의 잔혹한 이야기 말로들은 그 가해자들이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닌 불특정 다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눈은 언제나 뜨고 있고그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눈으로 현실의 문제나 모순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방식은 인간의 기만성에서 비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기만성으로 얼룩진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입장을 저울질할 때 전혀 공정한 태도로 임할 수 없다인간은 공정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자신의 입장에만 고수할 뿐이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보면 참으로 씁쓸하고 마음이 시리다.

 

동물들의 형태로 보여준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참으로 기가 막힌다물론 인간의 형상을 한 등장인물이 나온다늘 천사가 와서 참아야 해요라고 하나막상 마지막에 그에게 온 임종의 순간은 허무함으로 가득한 분노이다천사의 외침은 나에게만 강조하고외부에서 닥치는 폭력과 강요를 왜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참아야 할지 아니면 참지 말아야 할지를 잘 찾지 못하는 것 같다물론 <지금은 없는 이야기>이니 앞으로 없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대학교 교수나 혹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지식인 내지 엘리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주장하거나 말하는 내용의 공정성이다. 어떤 사안을 토대로 일방적인 요소만 보여주고, 전후맥락적인 상황을 누락하여 오류로서 혹은 일부로 왜곡시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짓이다. 특히 학자가 그런 전후맥락을 무시하거나 일부로 적시하지 않으면 정보가 이상하게 엮이는 상황이 이르게 된다. 한국에 그런 학자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미국 자유주의 철학 사상가로 가장 유명한 학자로 존 롤즈가 있다.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덜은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샌델의 정치철학 강의, 그런데 샌덜의 이론은 결국 존 롤즈로부터 나온 것이고, 롤즈는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칸트주의자였다. 독일 관념론 철학의 거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선험적 이성에 의해 사물을 판단하여 그 어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이성의 영역을 침범해서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순수이성비판>을 읽다보면 인간의 관념적 이성에 대해 칸트는 인간의 의식과 논리에 대한 이성의 영역을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의 인간은 순수하게 이성적 영역을 논리로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입장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논리에서 논리가 논리로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익은 개인적인 영역이나 혹은 집단적인 이익을 노릴 수 있기에 윤리적인 도덕성과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의 차이는 분명히 다르다. 만약 병이 들고 가난한 노인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거주하고 있다. 노인은 더 이상 병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고, 아들과 며느리는 사고로 인해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면 남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추구하는 정의적 가치는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등 사회 전반적으로 입장이 불리한 약자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른바 최소수혜자들에 대한 지원이다.

 

자유주의의 진정한 시작은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자들도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배려라고 한 것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시작된 롤즈의 철학은 위로 가면서 루소와 로크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정의론>이란 서적을 롤즈가 제작하더라도, 국내에서는 누가 번역하는가가 중요하다. 이 책을 번역한 분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에서 철학과 교수를 맡았다. 국내 최고의 서울대에서 철학과라면 엄청난 인물이다. 그런데 사실 서울대가 대단한 것은 인정하겠지만, 롤즈의 도서를 번역한 교수의 행적과 <정의론> 및 다른 도서의 머리말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롤즈에게 배웠다는 사람이 사실은 롤즈가 제시한 가르침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권력에 아부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자유주의철학을 강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기만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 비단 이런 문제만은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중우정치를 비판하는 철학 교수가 그 중우정치의 해당하는 자는 누군가? 라는 점이다. 시민사회인가? 아니면 어느 정당에 지지하는 사람인가? 군사독재 시절에도 편안히 교수자리에 앉아있던 철학과 교수가 정치철학에서 어떤 사회적 명제를 두고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읽고 내가 부끄러워진다.

 

최근 그런 비슷한 인물을 인터넷에서 본 것 같다.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인류학적 영역에서는 정치사회의 역사적인 요소에서 민주주의 정체라면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어느 정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체에서 프랑스대혁명만이 아니라 사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역사적 비극 역시 귀족적 민주주의를 실행한 아테네 역시 그렇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를 배신하여 아테네가 큰 위기에 빠진다.

 

과두정 이후 민주정이 쿠데타를 성공시켜서 독재를 막을 내린가 싶으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아테네는 그 잠재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는 무력으로 아무 힘도 없는 늙은 노인을 정치적 이익에 의해 희생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를 제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수된 많은 아테네 시민은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중우정치의 한계는 아마 권력과 재산에 의해 매수된 시민, 그리고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의 도서를 번역한 그 교수님은 아주 높은 지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런 윤리적 의식에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대부분 철학책이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지식의 보고이나, 항상 현대인들에게 혹은 미래의 인간에게 읽혀진다. 생각하자면 지나간 시대의 책이 무슨 현대에 들어맞는지 모르나.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수많은 지성인들과 교육기관에서 고전을 추천하는 이유도 그러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발견한 웃긴 사례는 바로 프랑스대혁명과의 전체주의 기원, 그리고 히틀러의 파시즘이 루소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점이다. 경제학이 아닌 경영학 교수였다. 다른 글까지 읽지 않았으나, 경제학자가 철학을 할 수 있어도 경영학은 철학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일단 히틀러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전혀 이행하지 않은 점이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국가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별의지와 전체의지를 제외한 순수한 의지다. 히틀러의 독재국가가 일반의지라고 말한다면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몽키스키외와 루소의 이론을 토대로 헌법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루소의 사상이 기반으로 했는데, 한국의 헌법이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사실 히틀러가 추구한 사상은 초인사상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에게 달라는 자들을 싫어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인간의 길을 찾아갈 것을 외치나, 자신을 따라 오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전체주의 나치즘이 과연 니체가 말한 사상인가? 히틀러는 니체의 책을 읽어도 니체를 오용했고, 루소의 사상에서 일반의지로 들먹인다면,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폭력으로 행해진 정치는 결코 정당할 수 없다고 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그리고 독일국민들의 정치적 감시를 소홀히 한 덕분에 나치가 정권을 잡았다. 루소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하는지를 시민이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하다못해 영국인들은 투표를 하기 전에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라 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는 아마 경영학과 경제학이 다르면서 비슷한 점이 돈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business management, 즉 경영하기 위해 관리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관리를 하는 학문이 아니다. 자본을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경제에서는 기업이나, 사회적 국가적인 영역에서 국가정부다. 정부는 국민을 관리하는 초점이 상급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이므로, 정부가 국민을 지배하는 관리대상이 아니라 국민이 역으로 정부를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루소의 그런 부정적 견해는 루소의 사상을 어느 누가 이어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은 자연주의 교육학,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근대민주주의 정치사상, 음악과 연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루소의 후예, 즉 루소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 로베스피에르 같은 프랑스대혁명의 선구자, 체 게바라와 같이 활동했던 피델 카스트로, 남미해방의 아버지인 시몬 볼리바르, 문학의 톨스토이, 실러, 괴테 등이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일 것이다. 우연히 유네스코 사이트에 가보니 카를 마르크스가 유네스코에 지정한 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저작들은 세계문화유산 중에 소중한 것으로 등록되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허망하게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21세기 금융위기와 전 세계적인 경제적 문제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게 그대로 드러났다. 문제의 경영학 교수가 루소를 경계한 이유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경제학에선 애덤 스미스이겠지만, 그의 선동적인 팸플릿과 구호문은 루소의 서적과 매우 흡사하다. 엥겔스의 서적을 읽다보면 <인간불평등기원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 1권에 보면 루소의 <정치경제론>에서 제기한 신랄한 풍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루소의 정치사상은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보단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을 주장했다. 경제적인 빈곤도 있지만 계급사회가 존재한 왕정시대인 점을 고려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더 세세하게 나아가 경제적인 빈곤을 토대로 사회를 비판한다. 어찌 되었건 루소와 마르크스는 18세기와 19세기에서 가장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가장 위험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이 없으면 왕정은 계속 유지되었고, 루소 그 자체를 부정하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사상 그 자체를 부정하게 모순에 이르게 된다. 그런 모순조차 사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갈 일이다. 그렇지만 학자라면 제대로 전후맥락을 보고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영학 교수가 만약 칸트와, 롤즈가 주장한 이성적 자유를 추구한 자유주의를 제대로 숙지하고, 괴테와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제대로 생각했다면 조금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글이 된 이유는 <인간을 위한 약속>이란 책을 보면서다. 저자는 내가 방금 전 내가 비판했던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자다. 다행히 철학과가 아니라 그 교수와 만났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루소에 대해 깊이 연구한 것 같다. 엘리트인 점은 분명하겠지만, 엘리트 안에서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그 엘리트의 지성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같이 바꾸어갈지를 아는 분이었다. 루소는 백과사전학파나 볼테르가 무시한 농촌의 농부를 매우 존경하고 그들의 자연성과 도덕심을 존중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런 농촌도 없고, 농촌 역시 그때의 농촌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 모두 인간이 살고 있고, 그 인간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는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정치철학의 이론서보단 하나의 제안서에 가깝다. 현대철학이나 정치학 도서와 비교하면 그렇게 분량도 많은 편도 아니고, 심각하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내용은 매우 강렬하다. 국가기반인 헌법의 토대가 되면서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공자의 <논어>조차 군왕이 군왕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군왕으로서의 자질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군신간의 관계는 신하가 받드는 게 아니라 신하의 받듦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왕은 군주의 자격이 없는 것과 같다. 밑에 신하가 없으면 정사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역시 그렇다. 정부행정기관보다 중요한 것은 입법권자의 올바른 의지다. 입법은 심장이고, 행정은 두뇌다. 두뇌가 죽더라도 심장을 움직여서 살아있지만, 심장이 죽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이런 말을 하는 루소가 과연 히틀러의 인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인진지 망상력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인간을 위한 약속>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상을 매우 알기 쉽게 적은 책이다. 처음 루소를 입문하는 사람에게 루소가 제시한 사상을 어느 정도 쉽게 접근하고, 루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준 책이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장에서 조금 내가 말한 부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루소가 아니라 마르크스다.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마르크스는 루소의 진정한 후계자란 점을 이 책에서 보여준다. 루소의 연표에서 루소의 사망 이후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루소는 좌우 사상가에게 찬사와 비판을 받는 사상가다. 자유주의 철학자 롤즈의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이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빠 2016-02-2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본 리뷰중에 제일 멋있습니다. 철학이나 인문계통 일하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02-24 22:45   좋아요 0 | URL
아니오. 그냥 엔지니어 업체 다녀요. 오덕질 하다가 이래 되었지요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는 군사전략을 생각하면 이미 항공기의 우수성에 따라 달려있다. 항공기의 우수성에 의존한다는 것은 현대전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던 백병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병전ㅇ의 양상은 20세기 걸프전에서 보듯이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사례는 이라크 오사마 빈 라덴 제거작전이다. 항공기로 이용한 적의 기지 타격, 지하기지의 붕괴, 무인 전술기를 이용한 암살, 공중정찰을 위한 조기경보통제기 등, 현대사회 공군력은 전쟁의 우위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전쟁에서 항공작전은 비단 전투기의 성능만이 아니라 조종사, 정비사, 군사시설을 관리하는 시설인, 공중작전을 지원하는 관제사 등의 역량으로 이어졌다. 공군이 차지하는 전체 군사력에서 인원은 적으나, 공군 장병 및 장비에 들어가는 예산은 엄청나다. 전투기 1대의 가격은 수 백 억에 호가하며, 전투기 조종사 1명 양성하는데 수 십 억이 소요된다. 전투기에 들어가는 각종 무기하고, 전투기를 공중에 보내기 위한 활주로공사는 많은 예산과 공사기간을 요구된다. 서평을 쓰는 본인 역시 공군출신 예비역이고, 활주로를 비롯한 항공작전시설을 유지보수 및 시공을 맡은 건설기술자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징병제를 추진하고 있기에 일반 남성들은 육군에 자동적으로 입영하게 된다. 그러나 공군의 경우 지원으로 입대하고, 공군에 많은 부대 및 특기가 있으나, 항공기에 대한 로망 때문에 공군 지원자들이 제법 많다. 물론 항공기를 운영하는 점에서 기지시설이 평지에 위치하고, 지원시설이 타 군에 비해 좋은 편이며, 교통이용도 편리하기에 여러모로 공군에 입대한 장병들은 그런 혜택을 받는다. 공군비행장에 배속 받으면 가장 눈에 보이는 게 역시 비행기다. 한국의 군사공항은 민간공항에 입주하여 활주로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민간항공기 전용 공항은 군사공항 수보다 적다.

 

비행기를 직접 눈앞에서 나는 장면과 이착륙하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항공기를 탑승할 때 항공기까지 이동할 때 옆에서 보겠지만, 직접 눈앞에서 커다란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은 상당히 박진감과 멋진 장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각하면 항공기는 높은 고도에서 운항하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기계이다. 이런 기계가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공군복무에서 공군의 작전은 1분 1초 먼저 항공기를 이륙시켜 적의 군사기지를 타격하는 것이다.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공군전투기이다.

 

한국에서 공군이 처음 창설되어 운영된 것은 한국전쟁에서다.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적을 무력화시키는 방도로 당연히 항공기의 운영이다. B-29 폭격기의 등장은 다량의 폭탄을 투하하여 적의 기지를 무용화 시키는 무서운 전략이다. 그러나 폭격의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처럼 레이더가 발달하거나 위성에서 실시간적으로 조종사에게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운항거리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니다. 결국 부정확한 정보와 작전수행 중의 변수는 본래 원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만든다.

 

폭격의 가장 무서운 점은 수 천, 수 만에 이르는 폭탄을 지면에 충돌하여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폭탄이 터지면 우선 열에 의해 화상을 입게 되고, 폭발에 의한 공기압으로 폭풍이 몰아치며, 폭탄에 의해 건물이 붕괴된다. 군사작전지역과 민간인거주시설은 장소와 때에 따라 같이 붙어 있기도 혹은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육군을 제외한 나머지 공군이나 해군은 도심지 및 항구, 교통이 용이한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지리적인 특성과 보급물자의 수급에서 육군과 공군은 한정된 위치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도심지 내부에 군부대가 있거나, 혹은 군부대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는 전쟁이 발발하면 공격 목표가 되는 장소는 군사기지가 아닌 민간인이 사는 장소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폭격의 역사를 본다면 폭격은 단순히 적의 전투력을 마비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민간인들을 폭격할 경우 상대국의 사기가 저하되고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군인들이 작전을 수행해도, 군인들이 입고 먹는 식량과 의복은 민간인의 생산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경우 많은 군사기지와 더불어 민간공장들도 폭격으로 대파되었다. 민간공장에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 기계, 화약 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군인이 아니라 군수물자를 생산하기에 공중폭격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전설적인 패배는 결국 미공군이 떨어뜨린 2개의 핵폭탄이다. 핵폭탄으로 손해본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더 많았다. 전쟁에서 민간인을 가해지는 비인도적인 살상은 국제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늘 피해보는 인간들은 군인보다 민간인이었다. 군인에게 정보가 있었고, 저항할 수 있는 무기도 있었지만, 민간인에게 가진 것이란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순박함이다. 공중폭격에서 민간에게 가해진 잔인함은 보통 윤리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해불가다.

 

그러나 전쟁에서 가해지는 군사적 이익과 전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에서 민간인을 제거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게 없었다. 일단 자원을 모울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건장한 남성은 징병할 수 있으며, 민가에서 은신하여 적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게릴라전법에서 민간인들 사이에 잠복하여 적을 불시에 공격을 가하는 방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살상, 피난민에 대한 공격은 인간의 의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윤리적인 영역으로 가버렸다.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확실히 북한국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도래하면서 당시 공군력이 없던 북한이 공군력을 가지게 되었고, 언제라도 조종간의 스위치를 누르면 강력한 미사일이 지면을 강타한다. 문제는 지면의 강타가 적의 소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의 전쟁사를 <폭격>에서 본다면 미공군의 폭격작전은 북한을 정전을 하고 싶게 만든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북한의 반미의식이 되게 만든 트라우마였다. 미군정과 미국무부의 비밀문서를 참고하면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식을 충분히 볼 수 있다.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수행하던 방식과 의식수준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폭격하던 양상과 거의 흡사했다. 인종주의적인 마인드와 공군조종사들의 자질이 일반 육군과 해군보다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공군 조종사들은 우수한 두뇌와 신체를 소유한 인재이나, 당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조종사는 학력이 매우 낮고, 인문사회적 지식이 적었으며, 위스키를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방탕했다. 체계화된 전투조직보단 개인의 출세와 이익에 치중한 나머지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민간인 폭격에 대한 부분이다.

 

분명 적군에 대한 살상과 타격은 군사작전에서 추구하는 제일의 목표다. 그런데 민간인들에게 퍼붓는 총격과 폭탄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단지 학살에 불과한 일들이다. 여름철 하얀 삼베옷을 입은 마을부락에 폭탄을 투하하는 사진과 군사문서 기록을 <폭격>에 접하면서 전쟁의 섬뜩한 모습을 다시금 느낀다. 폭격의 잔혹성은 철학자의 서적에서도 나온다. 20세기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철학자 선구자로 손꼽히는 존 롤즈는 2차 대전 시 장교로 출전하여 개인적 회고를 <만민법>에서 다룬 적이 있다.

 

이때 롤즈는 폭격이 가해지는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인권이 무참하게 외면된 점을 목격했으며, 제 아무리 일본이 군사적 저항이 심해도 미군에 의한 원자 폭격은 옳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권력이 없이 폭압적 조치에 의해 움직이는 신민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점이다. 물론 어떤 혜택과 지위를 보장받았다면 그 죄를 물어야 하겠으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강요로 움직이는 인간에게 과연 죄를 물어야 하는가이다. 그 인간들도 압제의 의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전쟁은 이런 인간의 기본적 원칙을 무시한다. 단지 적을 더 죽이거나 어느 순간 전쟁이란 이름 아래 인간은 전투기계로 변하고, 오늘 폭탄을 민간인이든 적에게 투하하는 것은 자동차정비소의 노동자가 차의 타이어를 교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도덕심을 무디게 만들며, 인간에게 기만적인 자세까지 만들어 버렸다. 민간인을 폭격한 조종사들은 모두 적의 스파이 내지 적의 은신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조사만이 아니라 세계피해조사단이 방문한 결과 죄 없는 민간인이 다수였고, 대부분 어린아이, 여성, 노인 등과 같이 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고 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민간인의 희생은 한국전쟁의 신화를 창조했다. 만약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면 민간인들이 그 가치의 수혜자이다.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정부는 국가의 한 부분이고, 국가의 구성이 되는 것은 국민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입장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다. 미정부나 한국정부가 보여준 행태는 국민의 국가가 아니라 단지 어느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 20세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1차 및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이 모든 전쟁의 슬픔은 가장 많이 피해본 사람은 민간인이란 점이다. 무기체계가 발달되면 전쟁의 신속하게 끝낼 수 있지만, 전쟁의 후속조치는 신속하지 못하다.

 

전쟁의 시기에 타국을 점령한 군부대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잘 생각해야 한다. 설사 그 국가의 정부가 독재자 내지 전제군주라고 할지어도 국민들의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볼 필요가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전쟁을 일으킬 경우 점령국가의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줄망정 그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칼과 방패를 두르며 싸우는 시대에는 농작물을 건들지 못하도록 했다. 어째 보면 식량의 보급에서 장거리 운송이 힘들기에 정해진 조치다. 현대전은 수송이 언제라도 가능할 정도로 교통이 발달했다.

 

생산력의 발달은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제작하여 내보낼 수 있다. 사람보다 기계에 의한 전투는 백병전이 아닌 첨단장비의 성능차이에서 판가름이 난다. 그래도 군인보다는 민간인의 피해가 심각하다. <푹격>에서 제시한 것처럼 21세기는 분단이 60년을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40년 후면 100년이 된다. 한국과 북한이 같은 민족이라 하나, 그것은 심리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기에 살아온 체제와 경제, 사회 등이 존재하므로 이미 북한과 한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책에서 1952년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북한주민이나 혹은 최근 전쟁박물관에 방문한 북한주민이 본 폭격의 참상은 모두 피해자의식을 만들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은 어느 정치적 입장에서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생성시킨다. 내러티브는 평화로운 세계에 적의 침입으로 어떤 해결사가 등장해 해결한다는 패턴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보는 전쟁 혹은 액션장르가 눈에 선한 스토리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폭력이란 이름을 마치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이 있다. 분명 북한은 독재국가이고, 북한 국민들은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어도 대부분의 북한주민들은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예비군제도가 있어서 만약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 발령되면 예비군들은 소집되어 전쟁에 투입된다. 한국의 남성에서 현역(여군, 보충역)과 예비역(민방위)을 포함하면 인구의 30% 정도 될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병력이 이 정도면 군국주의적인 정치체계를 가진 북한은 이보다 더 많은 수의 군사력을 보유한 셈이다. 결국 전쟁이 나면 북한 주민 대부분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명살상이 일어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인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폭격>이란 책을 본다면 과연 그 생각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사료를 정리한 부분에서 북한은 미국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한국 외교정책이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의 관계망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먼저 그 날카로운 증오의 칼날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리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든다. 북한과의 외교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이익만이 아니라 국내 경제까지 침체시킨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이 한국만이 아니라 타국의 자본을 오고가는 점에서 한국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사라지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강경론자이 주장하는 북한의 도발도 고려해야 하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과연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 생각하면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생활을 하면 전쟁영화나 전쟁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커맨더가 되어 지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막상 전쟁나면 커맨더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졸병이나 혹은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행인 A, B 정도만 될 뿐이다. 왜냐하면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목표물이 되는 대상이 누구냐를 가라지 않고, 있는 그 자리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거기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머저리 같은 일이라고 저승에서 외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2-05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올해의 시작은 정말 최악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에서 이런 일까지 실제로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동기친구가 우연한 사고라 하기에 너무 부조리한 비극을 맞이했다. 인간의 비극에서 최악의 상황은 살아있는 삶으로부터 박탈이다. 그 비극적인 슬픔을 내 친구에게 닥쳤다. 죽음이란 어둠, 사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매우 두려운 요소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예지는 하지 않는다. 단지 야생의 천적으로부터 잡혀 먹는 것을 두려워 순간 도망치다, 일정 안정권에 도달하면 긴장감이 풀린다. 물론 인간도 위기의 순간을 넘으면 안도의 여유를 보이나, 그런다고 죽음 그 자체를 잊지를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자기가 아닌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간도 있다. 동물에게 그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다면, 이미 야생의 모든 동물은 멸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서 죽음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혹은 환희를 느낀다.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충동적 욕망 타나토스는 우리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다고 무의식적인 죽음충동이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에서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죽는 순간, 자신이 죽는 것을 미리 예견하는 것보다 불의의 순간들이 많다.

 

내 친구의 죽음이 불의의 비극인 이유는 그 친구는 산업재해로 죽었다. 미혼이고, 애인도 없기에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했다. 결혼한 여동생과 처남은 있어도 내 친구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하다못해 이름을 어느 정도 알렸다면, 그를 기려주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 친구에게 가족과 친척, 대학교 친구 정도였다. 친구의 관을 2016년 1월 1일 오전에 운구하면서 화장터까지 따라가고, 그의 육신 하얀 재로 변하는 것까지 본 후, 마지막에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트라우마 중에 하나였다. 같이 운구행렬에 따라가던 친구와 추모공원에서 돌아와 시내로 돌아올 때 같이 소주 4병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은 내 성격이나,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이때 나에게 갑자기 생각나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라고 말이다. 책 제목에 갑자기 내 심정을 이렇게도 잘 찔렀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한 번 읽어보았다. 마르크스가 나오므로, 결론은 노동문제와 현실의 경제적 문제를 다룬 서적이었다. <자본>을 읽어봤다면, 혹은 더 앞서서 <국부론>을 읽어도 노동문제에 대한부분을 반드시 나온다. 왜 나오는가? 노동자에게 자신의 화폐를 유지할 수 없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하여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고용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 즉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약의 조건은 두 입장이 서로 공평하거나 대등해야 하나,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친구가 근무한 곳은 분명 2인 1조야 하고, 사실 밀폐된 공간이라면 환기시설의 안정성은 물론 안전보호구를 완벽하게 지참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보호구는커녕 혼자 가서 일을 보고, 게다가 자신의 회사가 아닌 그 회사의 하도 받은 업체로 파견근무를 나갔다.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의문이다. 혹자라면 운이 없거나 혹은 그 사람의 어쩔 수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했고,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기만적 사고가 바탕 되어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일이 터지면 뭔가 대안을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혹은 이런 비극으로 상처받은 가족에게 진심의 위로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친구가 평소 무슨 약을 먹는 이유로 배상비를 가지고 몇 십 %를 깎아보자는 식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리어 돈으로 해결하고, 그 돈조차 아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돈의 가치 아래 절하된 사건을 옆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소중하다면서 항상 돈을 택하는 게 이 사회다. 물론 자신과 가족이 당장 옆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런 비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인 개별의지, 그리고 회사나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의 이기심이 일치하는 전체의지,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우리에게 공공선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이성적 선택을 하는 일반의지는 증발된 게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보듯이 내가 아픈 것은 친구의 죽음도 그렇지만, 친구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병폐이기도하다. 친구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 내지 급성 종양이나 불치병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의 허술한 제도에 의해서였다. 산업재해는 기본적으로 안전사고이다. 안전이 미비하다는 점은 충분히 사전에 조치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200년 전의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과 유럽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 의해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 본연의 인식과 존재적인 사유로서 파악하는 관념적인 영역만이 아니다. 그게 되는 것은 니체와 같은 사고를 지닌 자일 것이다. 니체가 아닌 다른 자는 니체주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다고 그 타인과는 무관한 존재는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우리의 사회성이 구축된다.

 

내가 만일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혹은 아프리카에 태어난다면, 혹은 거기서 중산층인지 빈곤층인지 아니라면 노예인지 주인인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흔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다는 발언에서 실효성은 있다. 어느 마을에 폭격기가 출몰하여 폭탄을 투하하여 10만 명 인구 중에 10명 살아도 살아남은 사람은 있다. 그런다고 그게 생존에 대한 사실성에 보편적인 관계성을 가지는가? 한국에서 아마 이런 보편적이지 못한 상황에 등장한 하나의 사례를 전체적으로 확장하는 논리오류가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폭격기가 떨어지더라도 저 공격이 오는지, 와도 어디에 숨을 곳이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혹은 숨으려 해도 그곳에 물리적으로 멀리 있든지 혹은 정원이 다 차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성공신화나 누군가의 잘난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에 마치 자신들이 그 좌석에 배정받은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한국사회의 이런 착각, 그리고 노동문제 등등 우리는 언제나 좋은 자리에 앉아 편하게 갈 수 없다. 그럴 확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올 것이란 착각을 그것을 향하여 무조건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다. 게다가 자신과 무관해도 그 신화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이상한 꼰대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미신 아닌 미신에 자신의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의견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가 아니오, 망상의 약속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마치 북한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요술램프로 생각하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히려 한국전쟁에서 전쟁이라는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마법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아직도 마르크스하면 이상한 시선이 다가온다. 책에서 2011년 어느 해군 장교가 <헤겔 법철학 연구>라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군수사관으로부터 고소당한 일이 있다.

 

지금 도서관에서 유명한 서점에서 가도 <공산당 선언>이 버젓하게 팔리는 판국인데, 한국의 인식이 그런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재단인 유네스코에서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인류가 보전하고 기려야 할 문화재산으로 올렸다. 우리는 세계의 변화에 따라 움직였지만, 세계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게 오늘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항상 민생경제를 외친다. 민생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민생이 필요한 생활의 질을 올리는 것이다.

 

이미 트리클다운이란 낙수효과는 지나가버린 낡은 시대다. 유럽에서 경제공황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경제공황에 휘말린 이유는 생산은 언제나 과잉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없다. 한국경제에서 시장소비 감축을 보면 알 수 있다. 늘 주머니의 지갑이 닫혀있다 혹은 잠겨있다고 한다. 돈의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산층 아래에 위치한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최소한의 소비만 할뿐이다. 소비의 대상과 범주가 너무 단순하고 광범위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이미 충분히 시중에 나와 있고, 단순히 자본력이나 노동력의 단위로 승부하는 과거 유럽의 19세기 자본주의는 한계라는 점이다. 어떤 상품을 소비하려면 다른 상품이 소비해야 하나, 어느 지정된 상품만 있다면 다른 상품이 팔려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전혀 다른 색다른 분야로 물꼬를 트는 것이다. 레드 오션에 치중한 한국 경제구조로서 기계의 발달, 기술의 발전은 10명의 노동자를 1명으로 대체가능한 시대가. 나머지 9명이 취업을 하지 않거나, 임금이 적으면 결국 인구 재생산이란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에서 차후 경제적 총생산량이 축소 때문에 문제화 되고 있다. 인구의 감소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결혼비율이 줄어든 것도 있으나, 결혼 후 출산이 1명 내외인 점이다. 한국의 재생산력을 유지하려면 부부마다 2명을 가져야 한다. 물론 모든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녀들이 태어나도 불운의 사고로 죽어도 수명의 연장으로 충분히 노동력이 유지된다. 하지만 생각하면 국가의 최고로 중요한 정책 중에 하나가 국방력에선 심각한 타격이 온다는 점이다. 징병제를 시행하는 한국에서 남성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전체 인구가 줄어드는 영향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인구감소속도, 노령화에 따라 한국은 2100년이 되면 과연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고 한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가 아니라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을 내세우는 국가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이용되기도 하나, 그만큼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존속조차 위협이 되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말만으로 아이를 3명을 낳는 게 도리라 하나, 막상 중산층 이하의 많은 국민입장에서 결혼 자체가 부담스럽고, 출산조차 어렵다.

 

결혼의 조건은 경제적 기반이어야 하나, 그 경제적 기반이 무산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 젊은 사람들은 오직 좌절과 현실도피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국가의 문제에 대해 다들 “문제네, 문제야”라고 말하지 실제로 현실에서는 그런 젊은이들을 궁지로 몰아간다. 마르크스가 목표인 세상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한 것을 좀 더 확장한 것이다. 루소는 모든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을 판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 그 사람의 인권과 삶의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 문제를 노동이란 것을 본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이 비참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문제점으로 모두가 대기업이나 판검사, 혹은 좋은 직장을 원하지만, 그런 자리는 솔직히 15% 내외이다. 그 외는 자영업, 중소기업 등과 같은 서민이다. 본인이 서민이고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료비가 올라 병원에서 진료 받은 분들이 병원비가 오른 것은 병원 원무과 직원에게 항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쉬어야 한다. 현실의 고통이 아프게 만들었지만, 현실은 그 아픔조차도 고통을 가하여 통증을 잊게 만든다. 어째보면 그것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싶다. 아픈데도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이제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일 때 말이다. 누구나 태어날 때 사랑을 받기 위해라고 말하나, 왠지 그 사랑이란 이름은 가식과 허울 좋은 변명에 지나친 거짓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다시 내게 물어본다. 아프냐고 말이다. 마음이 아파도 현실은 늘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다.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사회계약론>에서 10만 명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가는 막강한 힘을 가지나,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국민 1명의 존재는 겨우 1/100,000에 해당된다.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이 세상을 바꾸기란 어렵다. 단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거름이나 하나의 동기는 될 수 있다. 세상의 덕목에 대해 생각하자면, 겉으로는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부조리 앞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마 홉스가 주장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삶의 지침을 여기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내 일상생활에서도 직장동료나 옛날 친구들도 그렇다. 나보고 미련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여기는 전체의지에서 그들조차도 그 안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뒤쳐진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기 아이는 좋은 학교를 가서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제로섬 게임이다. 앞으로 더 심한 경쟁으로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를 조우할 것이다. 그때 가서도 과연 지금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오만스러운 존재이다. 나 역시 가끔 내가 오만스럽다고 생각한 점이 많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다시 돌아보고 거기서 또 시작하는 점에서 또 다른 나로서 성장할 수 있다.

 

현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누구나 알아주거나 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옆 사람은 그들만의 논리를 제시한다. 어느 부분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정확히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 다들 그 현실적 문제를 부정하는 게 보인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척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기심을 남들도 같다고 말하는 전체의지적인 발언에서 이 사회의 누군가는 희생되고 소외되어 간다. 문제는 본인 자신도 그런 희생과 소외의 대상이란 사실조차 각인하지 못하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본 후 내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편이 행복할 줄 모르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6-02-0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 명복을 빕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1 22:05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2주 뒤면 49제이니 묘에나 가봐야겠네요

2016-02-01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1 22:05   좋아요 0 | URL
철수를 철수시켜야 합니다!!!

2016-02-01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2 09:08   좋아요 0 | URL
발인식 다음날 눈물이 계속 나오더군요....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허무하게 갔으니...
남은 건 분노더군요

2016-02-03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3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03 12:19   좋아요 0 | URL
님의 위로 감사합니다. 설연휴 지나 15일이 49제입니다. 영혼을 천도하는 날이라 하나, 사실 그게 쉽지만은 않죠.
그저 현실을 보면 이질감만 몰려옵니다.
설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