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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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개념을 어디에 두고 말해야 좋은가에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정의라는 개념이 그 사회와 시대적 특성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도덕적 관념즉 사회적 통념이란 의미에 치중한다과거 조선시대 군왕과 사대부가 통치하던 때와 지금 민주주의 국가와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변화해도 인간의 근본에서 계속 유지되고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윤리적 가치관이다살인을 해서는 안 되고폭력을 휘두르면 아니 되며더욱이 사리분별이 있는 자라면 약자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그러나 약자를 괴롭혀도 용납되는 것은 윤리적 가치관보단 그 사회적 권력 혹은 프레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또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 헤게모니로 볼 수 있다.

 

정의라는 개념에서 무서운 실행방법에서 응징이란 수단이 있다응징은 하나의 서사이고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기존 사회에 적이 혼란시킬 경우적의 위기에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 자체는 섬멸하는 서사로 흐른다역사적인 기록에서 전쟁이나 각종 사변들을 보면 이런 서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우리는 너희들에게 피해를 보았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보복을 실행하여 보상 내지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정의라는 이름 아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폭력과 광기에 의해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읽은 박가분 작가의 <혐오의 미러링>, 프로이트 “id”라는 집단적 폭력적 기질이 ego 내지 super-ego로 대체될 경우 상당한 무서운 작용을 보여준다그 폭력적 광기에 정의를 내려줄 하나의 이름만 내걸면 뭐든지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가령 조선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왜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이에 중국 명나라가 지원 왔다명나라가 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많은 불편함을 주었다상국(上國)의 천병(天兵)이 오니이에 대한 대접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상심리가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입장과 여기에 반대되어 밑에 있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상심리에 의해 폭력을 휘둘리는 순간그 누구라도 같은 존재가 된다이스라엘 민족이 나치에 의해 희생당했지만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한다보상심리에 의해 작동된 광기는 그 모든 폭력과 비인간적 행위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덮는다거기에 신이라는 관념적 존재와 이데올로기적 사상을 더하면 완벽한 은폐가 일어난다물론 피해자가 계속 피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사회고그들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그 부분을 치료할 수 있게 금 처방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본인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형태고상처를 말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단지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 내지 폭력적 행동을 틀려먹었다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다현재 그 당시의 지도자의 후예들은 당시 시대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한다우리가 이에 대해 일본 권력자 내지 정부에게 항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옳을 수 있지만일본인 관광객에게 그런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군위안부에서 강제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여성들의 원한을 생각하여 이번에 우리가 피해의식으로 인해 일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인간에게 어느 정도 폭력이란 수단이 허용되는 범주가 있고그 이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더구나 그 행동에 대한 하나의 가치관 내지 이데올로기의 신성화는 단순히 정의라는 이데올로기 가치관을 넘어 윤리적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어느 사회이든 불평등은 존재하고모순과 부조리로 넘쳤다그런 부당한 일이 존재해서 당연한 것은 아니나 늘 있었다는 점은 당연한 사실이었다그런 당연해서 안 될 일들을 당연한 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한 사회의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고모든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다모든 게 완벽한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지만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다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철학이란 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고민주주의 가치관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인권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지금 현실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하다못해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현실에 없는 것이고오히려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원래의 사상적 시초는 철학적 사유와 고찰에서 시작되나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 범주의 근원에 가는 것보다 단순한 답과 쉬운 길을 찾는 것을 원한다.

 

쉬운 길과 단순한 답을 찾으면 눈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매우 쉽다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은 것만 믿고 계속 행동만 하면 된다하지만 신념과 광기는 다르다신념에는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명제와 더불어 이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요구한다광기는 대안과 해결책은 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두고 정의집행이란 이름만 거론한다정의집행이 광기와 조우하면 폭력은 그저 자위행위에 불과하고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갈등만 조장한다갈등을 빚으면 갈등의 당사자가 가해자 내지 피해자로 될 수 있다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을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언제 피해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광기를 표출한다.

 

박가분 씨의 <혐오의 미러링>은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서 메갈리아 혹은 워마드란 여성우월주의 집단 태생 및 근원을 밝히고 있다솔직하게 말하면 작가 분은 조금 더 연구해볼 필요한 분야가 있었다그것은 중세시대부터 지금도 이어져 오는 마녀사냥이다책을 읽으면 마녀사냥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알고 있다군사정권시절 용공조작 사건을 거론한 점에서 분명하다또한 마녀사냥은 피지배계층현대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계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부유한 계층이나 혹은 지배계층이 마녀사냥을 당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해야 하나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일반 사람들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요소에서 바라보고 서로 해결하는 수단보단 더 간단한 길을 선택한다그리고 그것이 먹히면 하나의 이슈가 된다세월호 사건을 보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혹은 분노하게 만든 일이 있다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호소하고어느 분들은 단식투쟁을 하는데극우사이트 회원들이 찾아와서 그 앞에서 피자와 통닭을 먹고 있던 것이다세월호 침몰된 어린 학생들을 두고 어묵이라며 비하하는 인간도 있었다.

 

윤리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게다가 그들은 방송에서 나온 것처럼 국가정보원 및 국가기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교묘히 넘어가서 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세월호부터 시작하여 518광주시민의 죽음을 두고 조롱하던 일베그리고 박가분 씨가 이번에 적은 책은 일베의 미러링이라고 하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책을 내었다나는 솔직히 일베도 문제지만메갈리아는 더 심각하게 여긴다일베는 사회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고어디 가서 일베라고 들키는 순간사회적 단절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다르다이들은 일베(국가기관의 첩보에 의해 돌아가나 국가기관은 은밀히 은폐했지만)처럼 자신들을 스스로 병신이라 하지 않고오히려 피해자란 입장에서 정의를 외친다박가분 씨가 잘 지적한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난 피해자이니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식이다결국 일베와 다르게 메갈리아는 피해자란 입장에서 일베를 미러링하고잠재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이 보상심리와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 것이다결국 여자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동원하고내가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 개념과 전혀 다른 양상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나는 메갈리아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기보단 메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내보내고 있는 여성학자들이다오히려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여성운동가라면 이들에게서 이질감을 보일 것이다현장의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의 인권을 넘어 장애인노인어린이(고아같은 약자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그러나 메갈리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노인이란 한국남자로 살아왔으니 비난해야 하고어린 남자아이는 앞으로 한국남자로 살아야 하기에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다이들에게 어떤 논리도 필요 없고 단지 자기 말만 내세운다.

 

그들의 입장그들의 정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작가의 글에서 아쉬운 감정이 드는 부분이 바로 지식인들 혹은 엘리트들이 보는 어설픈 짝사랑이다일베나 메갈을 알기 전에 먼저 디시인사이드 내지 인터넷문화를 알아야 하는데이들이 그런 문화에 깊이 들어갈 일도 없다디시인사이드가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일부 극소수 회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그런 사이트에서 남자연애인갤러리에 활동하던 회원들이 기존 남성들이 사용하던 비속어 내지 욕설을 따라하면서 같이 오염되고메갈리아는 그런 공간에서 더 진화하여 새롭게 나온 것이다.

 

메갈리아 존재는 올해 처음 들어본 것 같고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봐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메갈리아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단순히 한국남자만 욕하면 그렇다고 넘어가겠지만어린이 성추행넥슨사에서 펼친 민폐강남지하철 사건 뒤 행동산업재해로 죽은 청년에 대한 조롱세월호 희생학생에 대한 조롱독립운동가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비하시위 중 물대포의 충격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초에 대한 조롱 등이다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 점에서 인륜의 가치를 물어보는 것도 어려우나이런 이들을 이때까지 지지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의 착각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만일 일베가 스스로 정화능력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일반 사회에서 인간 네트워크 속으로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페미니즘이란 탈을 쓰게 되면 인간 네트워크 속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낼 것이다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자신이 느낀 피해의식 내지 공감대가 조금이라도 닿게 되면 그 대열에 참여하기 쉽다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안과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은 참으로 안타깝다아직 젊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구성원이었다.

 

그런 가족들이 딸동생을 잃었다오빠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동생시체 팔아 보상비를 노리냐는 말을 하거나심지어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다어느 이는 이들에게 찾아와 자신들만의 페미니스트 가치관을 강조한다메갈리아가 이때 여동생을 잃은 오빠를 두고 진심의 위로보단 한국남자이니 여성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메갈리아 전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나그런 식의 글이 호응이 높고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이다이런 문제를 두고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이상한 덧글들이 달린다.

 

메갈리아는 아니나메갈리아에 동조한다는 지식인들의 착각으로 가득 찬 믿음이 두려울 뿐이다그런다고 해서 한국사회가 문제없는 것도 아니고한국 사회 내 남성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단지 한국사회에서 남성도 힘들게 살고무조건적으로 적은 아닌 점이다왜 이런 피해의식들에 의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그 근원은 무엇인가작가 분이 조금 더 마녀사냥에 치중하면 좋겠다는 점이 바로 마녀사냥은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유가 없을 경우 그 책임을 구조적으로 판단하기보단 눈에 보이는 만만한 존재로 전이되는 점이다.

 

메갈리아들이 한국남자들을 욕을 하지만특히 제일 심하게 조롱하는 것은 가난한 남자이다지하철역 스크린 도어 수리 중 사망한 청년은 비정규직에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다그의 죽음을 왜 욕되게 하는 것인가이에 반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그런 욕을 날리지 않는다과거 집권여당 시초들은 군사정권 시절권력가와 결탁하고이중에는 과거 검사나 경찰국군장성도 많았다이들이 국민을 감금하고 고문할 때 남자들은 과도한 폭행여자는 성폭행을 자행했다남자가 결혼하면그의 장모와 아내를 눈앞에서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하여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런 자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은 비판하지 않은 것인가현재 재벌들은 한국 산업화시절 어린 여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장했다여공들에게 좁은 공간에서 환기도 되지 않아 폐병 내지 위염으로 고생해도 계속 일을 시켰고잔업과 야근임금체불 등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병을 앓아 혼자 외롭게 자취방에서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바라본 전태일의 마음을 보자참으로 한숨만 나왔다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추모의식은 없을까하다못해 위안부에서 슬프고 아픈 기억만 가진 할머니들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졌을까?

 

내가 지식인들이나 혹은 주변에 본 지식인 내지 예술계에 몸담은 분들이 이런 문제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점이다예술인들이 노동인권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데메갈리아가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를 조롱한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하여 메갈리아 비판하니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왜 여성인권을 왜 무시 하냐는 식으로 나온다그들의 주제와 대상이 어긋나게 되는 현상으로 일어난다전에 읽은 책으로 <섹스와 돈>이란 책이 있다백인중심의 미국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의 예속화를 미디어로 통해 자본으로 합리화 시킨다.

 

남성에게 주어진 경제적정치적 특권이 여성을 예속화했다면여성이 정치적경제적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면 남성과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가야 한다하지만 수평의 관계성에선 책임성이 따른다메갈리아 분석글에 혐오로 가득하나그 속에서 돈 없는 남자에 대한 혐오는 더 심각하다돈 많은 남자에게 얻어먹으면 행운이고돈 없는 남자를 만나면 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여기에 대한 비판이나 고찰은 없다가 사안에 대한 일부 문제를 전체적으로 일반화는 위험한 발상이나그 일부의 문제 중에서 어느 사안에 대해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하다.

 

반남성주의자라면 남성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만나서 막상 그들의 주머니를 탐색하는 점에서 메갈리아는 단순히 남성혐오로 이루어진 집단만이 아니다그들의 집단성에는 부익부 빈익빈에서 등장하는 청년 혹은 젊은 세대들의 실업빈곤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불똥을 튄 것이다물론 한국남성 중 기성세대의 꼰대의식은 참 문제가 많다청년세대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하지 않는다이미 나온 서적 중에 <88만원 새대>, <사천원 인생>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거울은 상이 반사되어 비추어진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 해도상이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란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또는 누군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미러링이란 말만 하고미러링이란 상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광기만 넘치는 현상에서 답은 없어 보인다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혐오만 내세울 경우 그 최후는 허무함이다메갈리아를 운동권에서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실패했다그들을 두고 이란 지칭하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기존 페미니즘 진영에서 메갈리아에 대해 세력권을 확장하려 했지만적어도 최소한의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말아야 했다.

 

현재 2016년 11월 말국가기관의 비리와 부패무능한 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의 민낯이 드러나고국민들은 분노한다여기 주모자가 여성대통령과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 옹호하고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자칭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현재 대통령은 정치적 역량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 시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저번 대선 때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 상급자와 말다툼이 있었다대통령이 되는 이유에서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여자가 대통령을 하지 마란 법은 없다.

 

단지 그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간파하여 선택해야 한다그 상급자는 여성이라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아버지 딸이란 사실에서 선택한 것이다페미니즘은 원래 진보적인 가치관이고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 여자가 대통령을 해야 되라는 말에서 상당한 논리부조리가 있다그런 말을 이제는 메갈리아 워마드 진영에서 나온다국가를 문란하게 만든 자들을 두고 대단한 여자라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식적인 일반여성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폭력적인 남성성을 토대로 이루어진 대통령이 무슨 여성을 위한 대통령인가 말이다이성적 논리와 판단 없이 그저 광기와 독설로만 되돌아 올 뿐이다그리고 내가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오류다자신이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면 맨 처음 생각해야 인권이다타인의 인권(그것도 어린이노인장애인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나 강남역 살인사건 유가족 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세력에 대해 단지 페미니즘이란 이데올로기만 내세운 것에 동조했다면지식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버린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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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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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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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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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09: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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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변호인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양우석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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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TV에서 방영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 영화를 상영 후 CJ 부사장에게 엄청난 압력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짐작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아픈 장면은 경찰에 끌려간 끌려간 아들을 보고 온 순애가 송변을 만나 변호를 애원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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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 고산자의 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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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때 남자끼리 영화를 본 안쓰러운 기억이 든다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까지 이어온 옛날 친구와 극장가를 찾아가니 보고 싶은 작품이 매진이 되었다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영화를 찾아보니 차승원 배우가 출현한 <고산자대동여지도>를 보았다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이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과 영화촬영 당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란 점이다영화촬영 시 무대 세트 외에 현장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는 배를 타야 한다만일 진짜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촬영했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우리나라의 해양 특성상 서해가 아닌 남해 측의 대한해협 그리고 독도가 있는 동해는 수심이 깊고수심이 깊기에 파도의 높이가 매우 높다.

 

그런 곳에서 촬영했다면 많은 배우와 스텝 분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그러나 영화는 영상미도 중요하나영상서사에 드러나는 스토리텔링즉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영화 <고산자대동여지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았다김정호 선생이 고생하여 전국을 돌고권력자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많은 백성이 신음하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다시대적 흐름에 대해 잘 반영한 것은 알겠지만김정호란 인물이 영화에서 권력자들의 입김에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심했고영화초반 차승원이 보여준 다소 개그적인 요소에 치중한 느낌이었다.

 

영화초반부터 재미를 주려다 후반에 갈수록 진지한 고통이 다가올수록 영화내용이 약간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김정호를 다룬 영화가 있다면 소설도 있을 것이다영화와 소설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영화에서 김정호의 가족은 어린 딸 하나이고소설에서 가족은 망나니 아들 하나와 늙을 때까지 옆에서 보필해주던 딸이 있었다영화의 딸은 천주교 박해 때 고문으로 죽었지만소설은 그저 늙어가는 모습만 보여준다어느 모습이 김정호에 더 가까운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김정호의 기록은 여전히 미상이고그의 행적 역시 뚜렷하지 못하다단지 그의 기록만은 기록물로 우리나라 문화재에 큰 빛을 안겨주었다.

 

영화에서 김정호는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것 같았지만이에 반해 소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는 외적인 모습보다 그의 내적 심경주변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소년 김정호는 어느 날 빛을 본다지도에 새겨진 많은 지리적 정보양반출신이 아닌 김정호가 한자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한자를 안다는 것그것은 책을 읽고 책을 쓸 수 있으며책으로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당시 민란이 발생하고 정국은 어지러워도 그래도 민란을 막을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알아야 병법을 알고전략과 책략을 짤 수 있다또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지도를 안다는 것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하다글을 안다면 또한 조선의 정치통치술인 유교를 알 수 있다조선의 유학은 공자와 맹자보단 오히려 주자의 성리학에 가까웠다다산 정약용 선생이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보고 잘못된 생각을 고칠 의지가 없는 당대 현실을 비판했다글자 하나를 다르게 해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던 조선이었다문자를 안다는 것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권력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년 김정호는 한자를 보통 사대부양반보다 더 잘 알지만그의 신분이 한계였다조선의 후기는 그야말로 위기였고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조선은 민중의 비명과 신음으로 넘치는 세상이다소년 김정호의 아버지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한양으로 이사 온다그의 아버지는 얼음을 지고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돈 대신 매를 받는다얼음을 이미 다 녹아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만일 정확히 길만 제대로 보고 간다면아무런 고생이 없는데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나는 인간이 공간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한다공간은 한편으로 문화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분리가 이루어진 최초의 영역이라 본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의 작가 임나경 소설 중에 <곡마>에서 북촌과 남촌이란 단어가 나온다북촌은 부유한 양반이 사는 곳이고남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곡마>의 남자주인공 종사관은 가난한 무관이라면세도가들은 북촌의 권력자들이다.

 

지금 서울에 북촌 한옥마을이 있다고 한다공간적인 영역에서 과거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피를 이어가고 있을까과거의 죄를 후손이 책임지는 것은 부당하나그 죄에 의해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공간이란 영역은 인간에게 벗어날 수 없는 주박을 걸어준 것이다주박은 과학적으로도 얽혀있지만오히려 비과학적인 논리에 얽매여 있다김정호가 지도에 목숨 거는 이유그것은 지도를 보고 살아야 할 인간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점이다보부상들이나 상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다추운 겨울 산에서 길을 잃으면 추위와 배고픔에 죽거나맹수와 산적에 의해 습격 받는다.

 

만일 제대로 된 길순라군이나 혹은 포졸들이 돌아다니는 길이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김정호가 원한 지도란 바로 저런 것이다언제라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지도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만 백성의 손에 있어야 하는 점이다인간이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도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김정호의 인생은 자세히 모른다영화나 소설은 실제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로 또 다른 영역으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설에 많은 공감이 가는 이유는 소설에서 김정호의 슬픔은 김정호만의 것이 아니었다옆에 신분을 초월한 오랜 친구도 있었고그를 알아주는 학자들도 있었다사랑하는 여자존경스러운 청백리 상관오랫동안 정리해온 지도와 판본 등이 무참히 잘려나갈 때 김정호는 담담하게 받아낸 게 아니다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문다김정호란 인물이 한국인 선조에서 위대한 인물이나소설에서 만난 김정호는 위대한 인간보단 미련하나 인간적이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옆집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 주면서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하지만 마음이 아프게도 그렇게 마음만 착해빠진 사람은 항상 손해보고 고통을 받는다역사에서 그때의 패자는 먼 미래에서 승자라고 한다김정호란 이름이 지금 우리 현대인에게 계속 되새기는 점에서 그는 역시 역사의 승자이다승자의 이름이 짙을수록 우리는 그에게 가해진 시대의 슬픔을 알아야 한다소설에서 청일전쟁이 등장한다정말 청일전쟁에서 대동여지도가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적어도 일본의 지리학자는 지도의 진면목을 알았다단지 그게 조선의 민중이 아니라 조선의 민중을 탄압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조선시대 후기 정조시대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였다정약용 선생이 관직에 오를 때 우리에게 찬란한 문화가 이어질 듯하다정조대왕 서거 이후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는 피로 얼룩진 비극을 만들었다유학은 본래 만민 즉 백성을 위한 학문이다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유학자란 백성이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기 위해 존재하라는 의미이다유학자는 항상 열린 사고로 토론과 대화를 주고받으며윗사람은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어 포용해야 한다공자의 유학 중 논어를 다룬 도서를 보니 그러하다.

 

하다못해 성리학의 시초인 주자가 만든 소학에서도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했다그런 점에서 소설의 실수는 성리학과 공자의 유학을 조금 잘못 배치한 것이 아닐까 하다민족의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성리학의 병폐를 항상 지적하고공자의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실학이 왜 필요한가에서 백성에게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공자는 사실 논어에서 농민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했지만정약용의 사상은 농민에게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정보를 연구했다.

 

양반출신의 정약용양민 출신인 김정호신분은 분명 차이는 있지만그들이 보고자 하는 미래와 그들이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같았다그들의 의지가 높은 이유는 그들이 원대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그 꿈에서 헤엄치는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후기 양반이 아닌 자가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던 시대가 왔다신분이 양반이고행실도 양반이던 자들은 세도가들에게 미움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고한적한 지붕 아래 책만 읽어야 했다김정호란 인물이 조선시대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그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작가 역시 현대인이고그분이 바라보는 조선시대라 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인 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집안문중 어르신들 중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나오기 150년 전 동국여지지도를 제작한 분이 계신다당파싸움에 밀려 한적한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으나그분이 바라본 것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아니라 주변에 널린 것들에 대한 탐구였다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공부하고 연구해도 그것이 제대로 백성의 삶으로 녹아들기 위해선 행정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분의 형제와 친구들은 당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그 비참한 모습을 본 후 병으로 죽었다그분과 그분의 친구에 의해 한국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유지가 넘어갔으나성호 이익 선생 역시 백발의 선비로 인생을 마감한다이런 분들이 빛을 밝히게 된 건 한국인 역사에서 다행일지 모르나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권력 앞에 남을 희생시키는 세상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사회김정호 선생은 조선의 산과 강은 나라의 것이 아닌 백성들의 것이라 했다.

 

비록 군왕이 존재하던 시대라도 군왕은 군주로서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게 목적이어야 하는 도학을 추구해야 했다군주제가 존재한 조선이면 민주제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오죽할까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시련과 실패의 통한에도 길을 찾아간 김정호 선생이나형제들의 목이 참수되고 귀양살이에서 빛을 보여준 정약용 선생 역시 만백성을 위해 살아갔다그들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나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맛은 너무나도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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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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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 <곡마>를 읽게 된 동기는 약간 사소한 이유가 있지만, 소설 <곡마> 발매 이전에 재미있는 그림을 보았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인데, 그 모습이 참으로 특이했기 때문이다. 말 위에 있는 사람이 온갖 이상한 자세로 말을 타고 가는데, 마지막 장면에 말 2마리 위에 서서 가는 것이 아닌가? 현대로 보자면 말 위에서 현란한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단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니라 서커스단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말위에서 보여주는 호기는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무관이 전장에서 펼칠 전투에서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에 위대한 성인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그가 무관시험 도중 말 위에서 낙마하여 낙방한 사례가 있다. 어릴 적에 단순히 승마를 하다 떨어진 것이라면 장군이 실수를 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무과시험을 본 순간 낙마할 정도로 고난이도 기술이란 점을 알았다. 소설 <곡마>는 여해와 월하선이 무관 지기택 종사관을 두고 서로 기 싸움을 하는 것이 간단한 소설의 이야기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관이 수행하는 마상재 행사라는 점이다.

 

마상재 행사를 조선의 무관이 모여 훈련하는 훈련원에서 주관한다. 훈련원과 관련하여 내 직계 할아버지 중 1분이 훈련원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업무를 수행했다. 훈련봉사는 조선시대 군사 시재(試才)와 무예 훈련 및 병서 습독을 관장하는 무관이었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손자 되는 분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았다. 기록을 찾아보니 무과시험에서 갑2위로 차석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 무예능력이 뛰어나기에 그런 마술(馬術)을 부릴 수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들의 형제나 사촌들을 보면 만호(萬戶)직을 맡은 분도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약간 촌수가 먼 친척들이 전장의 장수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신 분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하면 대부분 글만 읽고 상황이 닥치면 도망치는 거드름을 피우는 부류가 많았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무관은 참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이란 도서를 보면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무관의 반란이 두려워 결국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완전히 청나라의 말굽에 밝혔고, 조선은 아무런 힘조차 내지 못하는 약소국이 되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

 

<곡마>의 소설은 보면 조선의 악운이 시작되던 찰나의 배경인 것 같았다. 시대적으로 조선이란 점은 나오지만, 그 시대가 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여해의 어머니 기련은 지아비를 잃은 청산과부이다. 한국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각해지던 시절은 병자호란을 거친 후이다. 병자호란 이전까지 사대부 양반들의 무능함과 부패함이 극을 이루었고, 인조반정 이전 광해군이 만든 중립외교가 붕괴되면서 명·청 교체시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 후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는데, 그중에 여인들이 참 많았다. 몸값을 주고 풀려나거나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이 조선에 왔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 오니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청나라 오랑캐에게 몸을 판 더러운 여자라고 욕하고, 친가에 가니 가족들은 여자가 시집이 가면 그 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여성들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이런 여자를 환향여(還鄕女)라고 하나, 우리는 속된 말로 화냥년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비극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당한다. 전쟁 중에 성질이 포악한 군대가 마을을 접수하면 우선 남자들은 모조리 죽인다.

 

여자는 겁탈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다. 집에 남편이 죽게 되면 조선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한다. 그대로 청산과부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조선초기에는 재혼이 가능했지만, 사회적 모순은 이렇게 억울한 사람만 만들어낸다. 남편이 죽으면 시댁에서 며느리에게 강요하는 게 있다. 그것은 열녀문을 가문에 세우는 것이다. 여해의 어머니 기련(성이 기씨인지 모르나)은 그런 시대의 조류에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병자호란 이후 열녀문에 대한 집착,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담바고(담배의 옛말)가 유입되는 처음에 장죽(긴 대나무)에서 곰방대가 들어올 정도라면 17세기 후반 내지 18세기 초반으로 보이며, 더 중요한 점은 조선통신사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수교가 단절되다 광해군이 일본과 다시 수교를 놓았으며, 인조 역시 청나라와 명나라 관계에서 일본에 대한 외교 전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궁궐의 당상관들이 흥청만청 주색을 밝힌 점을 본다면 숙종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효종과 현종은 평소 검소하고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신하들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했다. 개혁의 의지를 가진 2사람은 실세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는 자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빼앗는 게 아니라 농민의 세금을 줄이거나, 사대부들의 특권을 다소 제한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구중궁궐 높으신 관료가 주색에 빠지려면 많은 재물이 필요하고, 그 재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다. 왜구의 침입도 문제지만, 주색과 재물에 미친 탐관오리들은 더욱 문제이다. <곡마>는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처해진 시대적 맥락과 상황은 반영된 점을 알 수 있다. 소설을 보면서 생각한 점은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입장이나, 작가가 여성과 남성이냐에 따라 글의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관이나 혹은 이야기풀이 방식이 다르겠지만,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점에서 뭔가 색다른 점이다.

 

전에 정유정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야기 구조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도 섬세한 내면을 작은 표정과 행동을 묘사한 점에서 매우 독특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곡마>에선 조선통신사 행렬에서 마상재를 펼치는 건 양반출신의 무관이다. 시대적 조건에 종사관이 우위에 있지만, 소설은 여해와 월하선의 라이벌로 나오는 애정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양반과 천민, 승려와 역죄인의 등장에서 시대적 한계와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관점도 보인다.

 

승려 명단과 사대부 청산과부 기련은 절대 맺어줄 수 없는 운명이다. <곡마>에선 주요 인물관계 속에서 복선과 암시를 많이 넣는다. 그래서 충분히 독자가 중간에 그 장치를 읽어내면 주인공들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확인하고, 심지어 박수무당이 중간마다 날리는 말문에서 이미 운명이 정해져도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소설이 계속 이야기를 나가자고 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이 결코 헛된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월하선이 아무리 못된 계략을 꾸미고, 주색으로 고위관료를 유혹해도 그녀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고, 여해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다. 한쪽은 권력을 이용하여 몸을 빼앗으려 했고, 한쪽은 마음으로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길 원했다. 제 아무리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좋지 못한 것만 유지하여 폐단이 심각했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여성의 관점에서 많이 서술한 점이 많았다. 여해의 친구 장포가 전지수로 활약하자 많은 아낙네들이 장포를 두고 군침을 흘린 점에서 단순히 사랑이나 성욕을 남성만이 소유물이 아니라 여성들도 가지고 있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여성 자체가 능동적으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시대적 벽을 알고 있다. 그런다고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여우로 소문난 형조판서의 아내나, 기방의 명기 월하선, 군마장의 구경꾼 여해조차 자신의 마음이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그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형조판서 아내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고, 월하선은 주색으로 권력을 움직였다. 여해는 오로지 달리는 말을 통해 종사관으로 다가간다. 앞의 2여자와 달리 인간의 본능이나 혹은 집착에 매달리지 않는다. 마상이란 재주에 감동하여 거기에 마음을 다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했는가? 종사관 옆의 판관 이두홍도 처음에 여해를 두고 놀리거나 혹은 위협했지만, 극적인 상황에 이를 때 여해를 믿어주었다. 인간에게 믿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쉽고도 간단하다. 사소한 철사 하나들이 계속 이어져 단단한 커다란 철근이 되는 것이다. 단지 철근을 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곡마>는 사실 마상재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보단 마상재를 통해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서로가 원하는 사람이 있어주면 행복해한다. 하지만 만일 서로 같이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계속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아니나 안심은 된다. 소설 <곡마>에서 이미 단추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운명의 뒤틀림은 시작된다. 그래도 적어도 세상 어딘가 내가 살아있고, 나의 정인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만큼은 살아있다는 게 삶의 흔적이다. <곡마>는 그런 삶을 살았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지금보다 먼 과거라도 지금 우리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공감이나 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전해주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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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하기 -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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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과 저번 정권을 지나오면서 한국사회는 이상한 조류로 흘러들어간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국이어야 하는데, 만주 참주국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사회적 변화와 정치권 파동에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생활력이 계속 감퇴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사회 특히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정치학 9단이다. 정치학이나 철학, 기본적인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요, 심지어 그런 책도 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만 모이면 정치이야기이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TV에서 카드라 하는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야기한다.

 

한국 정치사회적 이슈에서 다룰 것들이 너무 많으나, 최근 가장 위험요소가 된 것은 지진이다. 지진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경주에서 6.0 밑까지 흔들리는 다소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이 원인을 찾아 나선다.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 은 우선 지구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주술사들이 피지배계층에게 충성심이나 신앙심의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 지구 기상이변에 대한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구 지표면 아래 맨틀이란 마그마가 움직이는 곳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진이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강한 폭탄이 폭발할 때이다. 그러나 화산활동에 의한 지진보다 위력이 약하다. 아는 동생이 추석 때 친척집에 가니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을 두고 북한 핵실험이라고 말하던 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과학 전공자까지는 아니나, 지구과학을 고교시절 이과전공으로 선택하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본다면 웃음만 흘러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적 이슈에서 과학적 근거를 두고, 정확한 사실성을 두고 이야기할 게 오히려 반대로 감정적으로 혹은 의구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일반 국민들이 이런 이야기를 믿고, 혹은 이런 이야기를 믿도록 뒤에서 부채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문제의 해결보단 오히려 문제의 회피를 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우선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부처의 정보를 기대한다. 일반 국민들이 기상을 관측하거나 지진정보를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기술적 도구가 없다. 공공성으로써 기술력과 장비를 보유한 정부기관의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정부부처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또는 대응하지 못하면 국민들은 불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 기관을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정부수장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는가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국가는 정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국회, 정부, 법원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대통령이다. 정부기관 수장이 각 정부부처를 관리하지 국회에서 정부부처를 운영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행정으로 이어지고, 특히 재난의 경우는 생명과 직결된다. 대통령의 판단력이 많은 것들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력이란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의 사고세계에 존재하지 타인의 관점에서 알 수 없다. 이때 판단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다. 글은 적는데 시간이 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정보를 주고받기에 적정하지 못하다. 결국 실시간적으로 대응하려면 글이 아닌 말로써 사람들과 대화해야 하고, 그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보조차 말로 들어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인간에게 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 한 마디가 진짜 여러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게 옳은 것인가? 정치사회적으로 대통령은 늘 많은 일들을 마주친다. 오랜 검토 후 판단을 내리는 사무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처리할 일도 많다. 급박한 재난이나 혹은 갑자기 조성된 회의나 만남, 상대편이 날리는 예측불허의 질문 역시 그렇다. 여기에 얼마나 잘 대응을 하는가? 여기에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는가에서 발언자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대통령의 말하기>, 참여정부시절 청와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던 그가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 대화, 회의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정권에 따라 대통령 및 정부기관의 국무위원들이 잘 한 업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때는 좋아도 뒤에 가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당시에는 문제라고 여긴 것이 뒤에 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일들이 허다하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어떻게 볼지는 관찰한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단지 그가 비교할 부분은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여 대화와 토론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대화와 토론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꺾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토대로 상대방의 의견을 들은 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한국은 토론문화가 엉망이다. 평소 자신보다 어리거나 직급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이 더 좋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이 답을 틀리거나 몰라도 그냥 그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대화는 결국 소통이고, 소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면 상대방에게 잘 이해되거나 공감되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문제점은 아마 이런 부분일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논리와 이성이 없지만 감수성과 감정을 내세우고, 진보는 논리와 이성만 내세우는 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은 논리와 이성조차 상실(아니 왜곡)하고, 감수성만 잔득 내세우는 산파 극이 되어버렸다. 자칭 엘리트나 지식인들의 글에서 보이는 내용은 잘난 문구나 용어만 들어가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대중을 호응을 얻지 못하면 정치적 기반이 붕괴된다. 평소 나처럼 그냥 자신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사회에 살아가는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말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은 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때와 집무할 때, 그리고 퇴임 후의 모습을 담았다. 대화에서 나오는 말이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가지고 있는 인생철학에서 나온다. 대화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입장이 필요하다. 단지 말의 방식에서 거창하기보단 담백하고 소박하게, 어려운 문구보단 쉬운 단어, 강렬한 의미를 전달할 때는 반복적인 배치가 인상적이다. 이런 대화법은 반드시 대통령만이 아니다. 2015년 가을 나는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신화와 문화콘텐츠 관계성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발표를 듣는 청중들이 만일 국내 교수나 연구자, 혹은 학생들이면 몰라도 외국인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고, 그 국가나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인 신화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 신화는 더욱 낯선 존재다. 그때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대본을 만들지도 않았고, 내가 작성한 논문조차 보지 않았다. 오로지 화면에 올라간 자료를 보았으며, 대사는 머릿속으로 암기하여 발표했다. 이때 착안점은 외국인이다 점이고,한국문화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의해 가려진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탈근대 내지 탈서구화를 거치면서 한국 역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했다는 점을 밝혔다.

 

공통적인 영역에서 한 부분으로 선택하여, 문화적 가치와 형태, 그리고 흐름전개 과정으로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계속 이런 것들에 대한 지적연구와 관련 문화콘텐츠 작품에 대한 리뷰와 글쓰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나 역시 제대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문화권 학자들이 동양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신화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세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식 문화에 적응되지 않기에, 내가 발제를 하고, 질의를 받을 때 한국의 지식이 아닌 서구의 지식으로 응대해야 했다. 물론 영어까지 소화할 수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이 보는 시각은 분명 다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나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대화는 타인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가? 위트와 유머, 그것을 만들어가는 재치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란 오랫동안 정제된 시간의 축척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그의 얼굴에도 그의 표정에도 그의 말과 글에도 드러난다.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비서관 윤태영은 노무현의 말을 정리할 수 있고 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도,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모두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할 수 없더라도 말 그 자체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거짓 없이 솔직한 맛이 필요하다. ()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 인()과 말씀언()자가 결합되어 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이 믿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말은 달콤할 수만은 없으며, 때로는 잔혹할 수도 있다. 상대에게 말을 할 때 그 어느 것보다 진실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진실이 담긴 말을 어떻게 상대에게 접근할지는 그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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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26 14:45   좋아요 1 | URL
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