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만화규장각지식총서 4
김성훈 지음 / 부천만화정보센터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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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재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그렇게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시점과 관점에서 보자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도 영화, 연극, 문학소설과 동일하게 작품적인 가치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에 만화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은 마치 봐서는 안될 것을 본다는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라도 얼마든지 그 텍스트를 분석하면 명작 영화나 소설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부분을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놀라우면서 감격하게 되었다. 한국 만화 100년사에서 만화라는 것은 그저 애들이나 청소년들에게 공부방해하거나 혹은 어른들의 킬링타임용으로 사용되는 저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평공부를 하면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한창완교수님에 대한 존재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만화평론가 박인하 교수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현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일부만 알고 있었지 그 시초와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부청만화정보센터에서 구입한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에서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많은 만화비평가분들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가?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으로 필두로 하여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창완 교수님과 여성주의 만화비평가이신 백정숙 선생까지 존재하였다. 만화비평가들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며 그분들이 얼마나 꾸준히 열심히 노력하고 활동하는지도 몰랐던 점에서 새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본인이 중학교 시절에 "반갑다 논리야(1992), 논리야 고맙다(1993), 논리야 놀자(1994)" 연속 3편 시리즈를 내시던 위기철 선생님도 만화비평가라는 사실이다. 이제야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만화애니메이션은 결코 유치하거나 저속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단지 그 유치하고 저속하게 만든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사람들과 사회적인식이라는 점이다. 특히 제일 기억나는 대목은 한국 최초 만화비평의 창을 여신 김현 선생님의 명언이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란 것이다. 만화는 일반 글에 비해 정보전달력이 빠르고 쉬우며 모두가 이해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만화는 미술이나 회화쪽으로 많은 연관이 깊은데, 본래 근현대에 도래하기 전에 많은 대중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글을 읽을지도 쓸수도 없으니 그들이 남길 수 있는 언어적 수단은 오로지 그림이었다.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은 기록될 수 있는 녹음장치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쉽게 대중들에게 보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적인 기법이 많이 들어간 만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하기 좋은 하나의 매체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이야 문맹의 해결이 잘 되어 있지만, 당시 자기 이름 석자조차도 쓰기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만화의 가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화는 그 표현력의 한계성이 없으므로 우리가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이나 욕구를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대중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독재정권과 언론탄압, 문화정책들은 만화산업에 부정적인 여파를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절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암울한 만화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만화를 제대로 보고 살피고 이해함으로서 우리가 갖는 값어치를 얻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바로 만화와 만화처럼 인식되는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예술문화 범주로 넣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예술과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고 영화(애니메이션은)는 제7의 예술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멸시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철학과 예술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그 안에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분을 인지할 만큼의 비평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을 많이 본다고 해서 그런 문화적인 부분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만화애니메이션을 올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성장하게 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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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
이시구로 마사카즈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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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개인적으로 영웅적인 소재보다는 비영웅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웅적인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극적인 플롯이나 웅대한 스케일도 좋은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막연한 이야기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공감도 불러오겠지만, 적어도 우리 일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보다는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리뷰할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라는 만화는 우리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지금 리뷰적는 입장에서는 만화책보다는 shift사의 신보 아키유키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보고 적지만, 적어도 기본 인물과 공간, 흐름은 같다는 전제 아래 적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라시야마 호토리는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는 평범한 여학생으로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엉뚱한 소녀이다. 수학은 정말 싫어하고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는 바람에 탐정놀이나 하는 소녀이다.

게다가 공부도 잘 못하고 체육도 잘 못하고 눈치도 느리며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아라시야마 호토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일들 속에 함께하는 가족, 친구, 이웃에 대해서는 매우 훈훈하고 공감대가 느껴진다.

이야기의 발단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라시야마 호토리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친하게 지낸 마을 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할머니 가게에서 일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할머니는 어린 호토리를 계속 챙겨주던 사람으로 호토리가 어느정도 성장하자 자신의 가게를 메이드찻집으로 바꾸고 호토리를 가게 종업원으로 고용한다.

그리고 호토리는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일들을 아주 잔잔하게 그냥 지나가지만 한번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주게 한다. 호토리가 일하는 메이드찻집이라도 사실 마을 주민이나 아저씨들이 들락달락 거리는 마을회관 같은 장소이다.

여기에는 생선가게 아저씨, 야채가게 아저씨, 호토리의 담임선생님, 호토리의 친구면서도 호토리를 좋아하는 생선가게 아저씨의 아들, 그리고 호토리의 단짝인 타츠노, 콘 선배 등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소하게 지나는 마을안에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과 그 현실 속에 같이 하는 옆사람들은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에는 호토리의 엉뚱한 일들로 마을 사람과 이웃들에게 민폐를 주겠지만, 그 민폐를 주고 받는 일들도 알고 보면 정겨운 이웃, 친구, 가족들 간의 이야기란 점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사람이 자라나고, 사람이 죽어가는 그 마을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세상에 비해 작고도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르나, 그 마을 안에서 돌아가는 이야기에서는 매우 소중한 보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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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우인장 1
미도리카와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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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츠메 우인장은 기본적으로 나츠메 타카기라는 한 소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 나간다. 나츠메 타카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영혼과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게 물리적인 힘을 전해줄 정도로 강력한 영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보다 훨씬 월등한 신체능력이 다른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게 보거나 배타적으로 대하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나츠메 타카기는 자신의 이상한 능력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남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단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남들에게 심한 배척과 따돌림을 받는다. 그의 따돌림에 가지는 상처는 타인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인간도 귀신도 피해 사는 외로움 인생을 살게 하였다.

게다가 그는 태어나기 시작하여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시어 주변 친척 손에 길러졌으나, 그의 이상한 행동에 다른 친척들까지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외면당하는 진정한 외로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의 먼 친척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 곳의 아저씨와 숙모는 슬하에 자녀들이 없었다. 아주 작고 소박한 마을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으나, 매우 평화롭고 조용하고 인간을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나츠메에겐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이며 보금자리이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자리라도 그를 괴롭히는 귀신들에게 여전히 공격당하고 있었다. 그럴 때 우연히 고양이 모습을 한 야옹선생을 만나기 시작하였고, 그 뒤로 다른 친구들도 만났으며, 어느덧 인간과 귀신, 정령까지 나츠메 타카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츠메 타카기가 계속 귀신하고 어울리면서 그는 우인장을 발견되면서 우인장에 적힌 귀신들의 이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그 귀신들과 만나면서 나츠메 타카기는 잃어버린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나츠메 레이코라는 사람은 나츠메 타카기의 친할머니다. 그녀도 타카기처럼 어린 시절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고, 게다가 영력이 강해 왠만한 귀신들은 다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너무 외롭고 불행했는지 나츠메의 아버지를 놓은 후에 일찍 세상을 하직한다. 나츠메가 우인장에 적힌 이름을 귀신들에게 돌려줄 때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할 때마다 할머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억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할머니를 이해하고 아저씨와 고모의 소중함을 느끼고 주변 친구들도 만들며 주변 귀신과 정령들과 같이 친하게 지낸다. 이렇게 외로운 한 소년과 그리고 불완전한 존재들이 어울리면서 서로 돕고 하는 모습에서 나츠메 우인장은 하나의 잔잔한 소설처럼 다가온다.

 흔히 치유계 작품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나 욕구에 맞추기만 급급한 것이 현대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의 추세이다. 그러나 나츠메 우인장은 인간의 욕구와 심리보단 그 작품 내에 함유되어 있는 그 이야기로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리고 외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항상 서로를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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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강림 1
유현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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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에게 신화, 전설, 민담은 아주 오래 전의 선조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째서 이상하게도 그 예전에 선조들이 즐기던 그 이야기들이 다시 고전으로 되풀이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도 계속 논의되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곧 신화라는 뜻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기 수백년전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 입으로나 혹은 서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고전들이 왜 아직까지도 유효할까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 속에는 인간이 간절하게 원하고 이루지 못한 많은 소원과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와 같은 전설이나 신화도 결국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오히려 옛날 이야기라는 수식어로 통해 나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돌려 말하기 쉬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고전이야기를 다시 각색한 만화들은 과거 인간과 혹은 현재 인간이 원초적인 갈등이나 이야기가 변화없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정말 좋은 사례이다.

한국 만화 중에서 이런 전설을 다시금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선녀와 나뭇꾼 전설로 토대로 만든 선녀강림이다. 본래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에서 나뭇꾼은 극심한 효자로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매우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있으니 나이가 이미 찬지가 오래이나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혼기를 맞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뭇꾼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돌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되어 결혼을 어서 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나뭇꾼은 어느날 나무하러 산에 들어가는데, 어느 사슴이 사냥꾼에게 쫓기자 이에 불쌍히 여겨 사냥꾼의 포위망에서 숨겨주게 된다. 사슴은 나뭇꾼의 자비에 감동받아 선녀가 목욕하는 곳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준 뒤에 사라진다.

그리고 나뭇꾼은 사슴의 말대로 선녀가 목욕하는 호수를 찾아 선녀옷 하나를 훔쳐내고, 다른 선녀들은 모두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옷을 분실한 선녀는 날개옷이 없어서 결국 나뭇꾼에 의해 나뭇꾼의 집으로 가게 되고 둘은 혼인하게 된다. 그리고 선녀는 나뭇꾼이 선량하고 효자라는 점에서 아이 3명을 낳아주고, 어느날 나뭇꾼에게 자신의 고향인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한다.

나뭇꾼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날개옷을 주자 선녀는 이옷을 받고 하늘나라에 가버린다. 여기서 다른 이야기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뭇꾼이 선녀에게 날개옷을 주고 난뒤에 홀로 지상에 남는 것과 하나는 나뭇꾼이 선녀의 도움으로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온 나뭇꾼은 지상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아내인 선녀에게 부탁하여 용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오나 용마에서 내리게 되면 죽는다는 금기를 듣고 내려간다. 그러나 나뭇꾼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에서 그 반가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해 용마 아래 떨어져서 죽고, 나뭇꾼은 닭으로 환생하여 사랑하는 아내인 선녀와 아이들이 있는 하늘을 보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물론 선녀강림의 모티브는 선녀와 나뭇꾼이나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단지 차이점은 선녀인 환타가 자신이 알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거기서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동생과 어머니를 배신한 자인한 형은 환타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죄로 인해 하늘나라 어느 비밀장소에 봉인된다.

소재전개가 비슷하나 형제의 유무와 가족의 비극사는 약간 추가되었다. 하지만 선녀라는 존재가 고귀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하등하다는 기본 관념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 이 전설이 나오던 시절은 남녀가 자유연애가 가능한 한국사회에서 어느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살았으나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여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거나 거기에 좌절하여 만든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대되는 신화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있다. 고구려 바보로 소문난 온달은 극심한 효자이나 지적능력이 매우 떨어진다. 얼마나 바보냐면 도성에 있는 임금님의 귀에 들어갈 정도이다. 임금에겐 사랑하는 공주인 평강이 있었으니, 평강은 어릴적에 상당한 울보였고, 평강이 울때마다 임금인 아버지는 평강에게 자꾸 울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다. 그러면 평강은 마법처럼 울음을 멈추고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강이 나이가 차서 혼기를 맞자 평강은 아버지의 어린시절의 농담을 근거삼어 온달을 부마(임금의 사위)로 삼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임금은 온달같은 바보와 결혼한다는 평강공주의 말에 크게 노하여 평강을 도성에서 내보낸다. 그리고 평강은 온달집에 가서 온달과 결혼하여 그에게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도록 도와주고 온달은 문무를 쌓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한 사람의 장수로 인정받아 임금의 부마가 된다.

이 바보온달 전설과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은 당시 여성은 계급적으로 높으나 남성은 미천했으며, 그 남성은 여성과의 사랑으로 통해 신분 상승을 하기 원했던 욕망이 보인다. 그러나 바보온달은 좋은 결말로서 이야기를 마무리짓지만, 선녀와 나뭇꾼은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난다. 당시 여성은 결혼 후에 아이를 가져도 재혼이 가능한 시대에 나온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런 신화와 전설로 통해 오늘날에 살아가는 우리 한국사회의 많은 대중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본다. 왜냐면 신분이나 배경은 다를뿐 그런 인간은 변함없이 유지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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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가 1
사쿠라바 코하루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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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들은 영웅성을 표대로 하는 웅대한 모습보단 작고 사소하지만 누구에게 공감이 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메시아를 바라거나 혹은 광기에 빠질지도 모르는 한 영웅을 추앙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 추앙받는 영웅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 내가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찾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히 가족, 친구라고 말하겠다.

가족과 친구는 언제나 옆에 존재하므로 그 소중함을 망각하기 쉽다. 물론 글을 적는 나 역시 그럴것이다. 사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공기가 소중하나 그 공기가 오염되어 자신의 호흡기관을 괴롭히지 않을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미나미가란 만화책은 가족과 친구에 대한 소중함과 그 소중함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모두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나미가에서는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다. 큰 언니 하루카가 어린 동생인 카나와 치야키를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아주 평화롭게 때로는 시끄러운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차갑고 고집쟁이인 막내 치야키, 장난꾸러기에 사고뭉치 카나, 엄머같은 하루카 이 세자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매일같이 재미난 일상을 보여준다. 거기에 3자매의 학교친구와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친숙하다.

그렇게 어디서나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미나미가는 그런 소동과 이야기들을 아주 유머스럽게 풀어나가는 한편의 꽁트이다. 하지만 그런 유머가 넘치는 미나미가에는 다른 만화책에서 볼 수 없는 깊은 감동과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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