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걸 마호로 1
디타마 보우, 나카야마 번즈로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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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매틱은 만화책 사이버걸 마호로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만화가가 그림을 입혀 만든 하나의 만화책이 된 게 사이버걸 마호로이다. 그런 다음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하여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에 한 획을 이은 가이낙스가 차기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물론 가이낙스가 마호로매틱을 만들기 전에 다른 작품을 만들었으나, 이 마호로매틱이야 말로 가이낙스적인 코드와 흐름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마호로매틱 1기와 마호로매틱 2기인 더 아름다운 것에서는 인조인간 안드로이드인 마호로로 통해 새롭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마호로매틱과 만화책인 사이버걸 마호로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많이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그것은 마호로매틱을 감독한 가이낙스 대표이사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과의 관점 차이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이낙스 대표감독 중의 하나인 야마가 히로유키는 원작에 충실하기 보다는 그 작품 내에 자신이 반영하고자 하는 담론에 충실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어째든 만화책 사이버걸 마호로은 애니메이션 마호로매틱과 동일한 가치관은 인간에 대해서이다. 물론 그 많고 많은 만화책 중에서 인간이 등장하지 않거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도서는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이버걸 마호로는 그런 부분과 조금 다른 관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면서 오히려 인간보다 인간다운 마호로로 통해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호로는 기계인간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이 겨우 1년 이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투에서 물러나서 여생을 마무리해야한다. 물론 기계로 된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그녀에겐 인간이 가진 이성과 감성을 지녔다. 그리고 마호로의 이성은 그 어떤 인간보다 옳았으며, 그런 행동으로 자신의 기관인 베스퍼에도 인정받는다.

하지만 모든 세상일은 이성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기분과 양심을 외면해가면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자신의 고뇌와 그런 고뇌 아래서 산화된 미사토 사령관의 기억은 마호로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모두라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한 상관을 죽여야 했던 마호로,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그 여생을 자신이 작전 중에 죽일 수밖에 없던 미사토 사령관 아들인 스구루에게 찾아가 스구루의 메이드로서 살아가려 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죄책감을 속죄하지만 그 속죄하면 할수록 자신이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 되어감을 느낀다. 분명히 그녀는 인간의 유전자가 아닌 기계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정말 인간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간성이나 윤리적인 부분보다는 선입관이나 혹은 자신의 입장만 앞세워 볼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자기 개인에게 충실하고 그 충실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 되돌아 보면 그런 개인이란 존재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란 존재도 있다. 그 타인이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인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소한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이버걸 마호로이지만, 막상 다시 생각하면 조금 면이 보인다. 한번 이 사이버걸 마호로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마호로매틱 1, 2기를 보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다고 마호로매틱은 너무 어렵거나 난해한 작품이 아니다. 작품 전개상으로 재미도 있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재미와 슬픔 속에 담긴 담론은 조금 깊이 파고보는 것도 하나의 작품 감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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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다나카 유코 외 목소리 / 대원DVD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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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히메는 기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보여주던 여성캐릭터와 상당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미야자키 감독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 키워드는 하늘, 자연, 그리고 여성이다. 단지 미야자키 감독이 만들어낸 여성은 대부분 상당히 이성적이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강한 사람이란 게 특징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대부분 강인하고 아름다움을 내세운다. 이런 점은 미야자키 감독이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의 비판대상이 되기도 한 요소로도 보였다.




그런 점에서 모노노케히메 즉 원령공주에서 등장하는 산의 모습은 상당히 도발적이고 기존 미야자키 감독 작품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에 큰 변화를 준 건 사실이다. 그래도 미야자키 감독은 이성적인 여성을 배제하고 감성적인 존재인 산을 대신하여 반대되는 캐릭터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산과 같이 여성이나 그 마을사회에서 하나의 지도자인 에보시를 보면 여전히 미야자키가 이성적이고 육체적으로나 혹은 정신적으로 강한 여성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2명의 여성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자연의 세계인 산과 인간문명사회의 에보시로 통해 자연과 문명사회의 비극적인 소통불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나우시카 공주로 통해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의 구심점으로 작용하여 오염된 그 세계에서 인간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모노노케히메는 반대였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은 소통이 불가한 채 그대로 서로 배제해 버렸다.




작품 서사 내의 발단이 되던 아시타카는 그런 자연과 문명사회의 비소통에서 발생된 왜곡현상으로 팔에 큰 병을 얻었다. 그 병은 신적인 영력을 가진 멧돼지가 재앙신으로 변해 아이타카의 손에 죽으면서 그에게 저주를 걸은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재앙신은 재앙신이 아니었다. 그 재앙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의 손으로 탄생된 문명의 철탄총알이었다.




결론은 아무런 죄도 없는 자연부락인 아시타카 마을이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사회에서 희생된 자연에 의해 재앙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반드시 이 작품세계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일어난다. 가령 우리 한국의 경우 봄철 황사현상으로 고생하는데, 예전의 황사는 단지 황하강의 모래와 분진으로 이루어진 입자였다면 최근에는 중국의 공업화로 인해 황사모래 안에 다양한 환경오염물질이 함유된 점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 한국에서 일어나서 생긴 폐해라기 보단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우리가 피해보는 것이다. 자연이란 것은 아주 작은 소규모로 오염되어 어느 정도 정화되어 그 환경오염에 대한 위해성을 비켜갈 수 있으나, 어느 일정 수준이 누적이 되기 시작하면 소규모이던 환경오염이 대규모적인 현상으로 바뀌어 그 지역만이 아닌 다른 지역까지 죽음의 손길을 뻗친다.




그런 점에서 모노노케히메는 에보시의 철광산업으로 통한 자연파괴가 당연히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여자, 병자, 어디로부터 쫓겨 온 사람 등등,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에보시의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고 살았다. 작품 내에서 야마토 왕조에게 버려진 자들이 유일하게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곳이 에보시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무력이라는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총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고, 철을 생산하여 경제력을 키웠다. 그런 에보시와 마을주민의 협력으로 그 마을은 무사히 지켜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한 희생과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자연에 대한 농락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신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종교사상 역시 애니미즘(Animism)으로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무형의 존재라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봤다. 자연의 위대함은 동양국가에서는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에보시는 그런 전통적인 사상과 달리 자연을 파괴하고 짐승들을 멀리 보내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짐승들은 총탄으로 숨을 끊게 하였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희생을 합리화한 것이다. 그것은 환경윤리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문명의 행동이었다. 그런 내용을 이 모노노케히메에서 다룬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작품 마지막까지 자연과 문명사회는 조화로이 살 수 없었다. 오히려 인간이 지나친 자연정복욕구로 인해 문명 스스로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의해 먹힐뻔 했던 것이다.




지나친 인간의 욕구 거기에 대한 문명사회와 기술발전, 그것은 인간에게 풍요와 안락함을 제공하나 한편으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하는 자살행위와 같다. 자연은 공생이 가능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은 그저 대답만 해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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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배달부 키키 (2disc)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사쿠마 레이 목소리 /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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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거장 애니메이터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마치 흘러가는 동화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동화를 보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무렇지 않게 보이던 인물과 사건들이 엄청난 담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원령공주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조금 격렬하면서 심각한 주제를 담아내어 다소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적는 필자는 환경공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보여주려는 환경과 인간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가치관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 담론들이야 말로 현대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철학적인 사고를 이끌어내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철학적인 원천이 반드시 인간과 자연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인간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한번 되돌아 보기 위해 마녀배달부 키키 한번 보기로 했다. 이 마녀배달부 키키는 13살 소녀인 키키가 마녀수행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떠나 낯선 마을에 가서 거기에서 자신이 마녀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 초반에 보면 키키는 자신이 13살이 되어 다른 마을에 가서 마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신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었으나, 키키의 어머니는 자신의 마법빗자루를 건네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다른 마을에 가라고 한다. 키키 어머니가 주신 이 빗자루는 그녀가 마녀이지만 그녀의 딸인 키키가 자신의 뒤를 이은 마녀임을 승인하게 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래서 키키는 자신의 어머니의 상징인 마법빗자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큰 도시로 간다. 평소 작은 시골에서 자라나 아버지의 라디오로 통해 밖의 세상을 동경하던 키키에겐 큰 도시의 인상은 매우 흥미롭고 밝은 미래가 가득한 곳으로 생각했다.

그 미래가 가득한 곳에는 자신 이외에는 마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키키는 매우 만족한다. 하지만 그 만족감의 근본은 왠지 모르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다른 마녀가 오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모든 마녀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녀라는 존재보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비행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녀는 그저 이 시대의 구시대적인 산물로 떨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키키가 마녀배달부로서 이 마을에서 일을 할 때 어떤 할머니 집에 가서 파이를 만들 때에 그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키키에게 "나의 증조할머니가 마녀이셨지"라는 내용이 나온다.

곧 그 의미는 마녀라는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의 구시대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구시대적인 마녀는 곧 근대의 도래에 따라 사라져 가고 있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줄 파이를 구울 때 화로가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최신식으로 만든 화로였고, 하나는 나무를 태워 음식을 만드는 화로였다.



이 화로에서 할머니들은 기존 화로가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고 하나, 막상 신식 화로를 사용하는데 그 신식화로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파이를 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키키는 자신이 구식화로를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옆에 할머니들이랑 힘을 합쳐 파이를 구울 수가 있었다.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무리 새로운 문명이 좋다고 하나 과거에 사용되던 전통도 같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내보였다.

그러나 그런 전통과 근대화에 대한 조화는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사람들에겐 그다지 필요 없었다. 키키가 파이를 만든 후에 궂은 날씨에 비를 맞고 할머니의 손녀를 찾아 갔으나 할머니의 손녀는 할머니가 해주신 파이를 보며 아무 필요없다고 키키에게 이야기한다. 즉 과거에 살았던 인간들의 풍속이나 문화에 대해 더 이상 필요없음을 키키에게 전달한 것이다.



키키는 여기서부터 큰 충격을 받는다. 또한 키키의 충격는 이런 과거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다시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키키가 마을에 와서 키키에게 관심을 가진 톰보라는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 톰보라는 소년은 하늘을 나는 것을 소원이었다. 그래서인지 톰보는 마법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키키가 매우 부러웠다.

키키는 원래 처음부터 날 수 있었던 특별한 마녀이나 자신은 날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보가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자신의 자전거에 달린 프로펠러에 모든 것었고, 톰보는 자신이 만든 기계가 하늘을 날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시험비행에 탑승하기로 한다.



그런 톰보의 행위에 키키는 갑자기 망설이게 되고,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키키는 톰보와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관계마져 낯설어하게 되고 결국 피하려고 한다. 키키가 가진 전통적 가치가 인간기술발달로 무너지려 할때 키키는 자신의 마녀능력까지 소실하게 된다.

마법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거나 아니면 자신의 검은고양이인 지지와 말조차도 통하지 않는다. 키키는 마녀라는 존재가 더 이상 근현대 인간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절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절망은 다시 그녀에게 하나의 배움이 되었다. 키키는 자신의 가치는 남에게 의지하는 것도 아니라 또는 자신만이 가지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마녀가 그것도 자신의 마법빗자루까지 잃는 순간에 키키는 절망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인 톰보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다 불의의 사고로 큰 위기에 처해진 것을 무사하게 구출한 것이다.



이때 키키는 자신이 가진 마법빗자루를 잃게 되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마법빗자루의 겉모스빙 아니라 그 빗자루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다. 마을의 어느 한 중년의 남자가 근대식 청소용 빗자루를 들고 있자 키키는 그 평범한 빗자루를 빌리기로 한다. 마녀가 만들지도 않았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은 그냥 빗자루다. 그러나 그 빗자루는 키키의 의지에 따라 하늘을 날아간다.

그건 과거의 상징인 마녀와 그 마녀 옆에 존재하던 빗자루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에 같이 맞추어가서 전통과 근현대의 조화로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이다. 비록 키키는 과거 전통적인 마녀의 힘을 잃어 자신의 친구인 고양이 지지와 대화할 수 없었으나 대신 톰보라는 도시남자애와 톰보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작품 마지막에 키키가 근대식 빗자루를 타고 옆에 톰보의 비행와 같이 초원을 달리는 모습은 키키가 가진 전통과 톰보가 가진 근현대가 서로 어울리며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키키는 자신의 어머니 품에 떠나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마녀로 인정받는다.

키키가 마녀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부모님 밑을 떠나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가고 있다는 점과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과거의 이야기가 앞으로만 나가는 도시와 같이 나가 모든 인간이 가진 가치관이 소중하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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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 -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
수잔 J. 네피어 지음, 임경희.김진용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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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술한 분은 미국 인문학자로서 미국이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문화보단 동양국가 중의 하나인 일본문화를 잘 아는 교수다. 이 교수가 바라본 일본문화라는 것은 일본인들이 가진 무의식적인 요소를 비롯해 역사, 사상, 사건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매체로 통해 일본을 알아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메라는 책 이름 어두에 인문학으로 읽는 저패니메이션이 아닌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동기는 도서관에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도서를 찾다가 우연히 가이낙스 불멸의 명적인 안노 히데아키 감독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이 나와서이다.

이 장면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 nerv  파일럿인 아야나미 레이가 아담과 리리스와 결합하여 최종적인 진화로 이어져 지구의 모든 생명을 최고 진화단계로 가는 과정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런데 사실 이 최종진화라고 보는 인류보완계획은 인간을 영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종진화 단계라는 점에서 마지막 그 순간 바로 죽음이란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리리스로 되어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을 흡수할 때 나온 노래가 바로 달콤한 죽음이여 어서오라이다. 그런 내용인 만큼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와 극장판이 나온 20세기 말의 일본과 세계는 그렇게 밝지 못함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작품 상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 장면이 비참하거나 절망적이며 혹은 현실에 대해 비관적일까? 그것은 바로 그 사회가 지닌 어떤 특수한 상황이나 배경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보고 판단하고 연구하여 정리한 서적이 바로 아니메라는 서적이다.

이 서적을 읽다보면 기존 서구 합리주의 시선으로 동양을 바라보기 보다는 일본 그 자체에 대해 들어가서 거기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서구문화가 우월하다는 것보단 서구문화와 달리 일본문화가 어떻게 성립되어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가 현성된다는 것은 그 시대적인 인간과 사건들이 일련된 연속적 사건을 지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 될것이라 본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매체와 장르 중에 왜 하필 애니메이션일까?

흔히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는 나라다. 게다가 저패니메이션이란 japan + animation = japanimaion이라는 이른바 정식 명칭이기 보다는 다소 낮게 바라보는 속칭이 하나의 언어로써 되버린 것이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만화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대중적이란 점과 일본 경제산업적인 부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미디어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점과 애니메이션은 인간이 생각하는 이른바 이성적인 부분보다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요소도 잘 반영할 수 있어 그런 무의식적인 면까지 읽음으로써 그 민족의 정체성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애니메이션 안에는 인간이 현실세계에 표출할 수 없는 거대한 일들이나 혹은 어느 개인이 가질 수 없는 욕구와 욕망을 그대로 서슴없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딪불의 묘"와 같은 경우에는 반전 애니메이션이라는 속성도 붙어 있지만 그 표면 위에 보이는 내면 속에는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피해의식부터 시작하여 각종 애니메이션 설정, 배경, 인물은 한 시대의 인간을 반영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며, 그런 왜곡성이 왜 나오는지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저 오타쿠라고 밀어 붙이기 바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왜곡성이나 혹은 어긋난 가치관이 그대로 우리에게 유입될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는 일본과 일본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바라봐야할 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단지 단순히 보고 웃고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나 인간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단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다소 위험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좀 더 일본에 대해 이해하여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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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에덴 극장판 1
카미야마 켄지 감독 / 버즈픽쳐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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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보던 애니메이션 중에서 공각기동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아키라와 같이 20C 사이버펑크 저패니메이션 3대 명작으로 뽑힌다. 그리고 이 공각기동대는 극장판으로 만든 오시이 마모루 감독 버전이 있는 반면 TV에서 2002년부터 방영한 카미야마 켄지 감독 버전이 존재한다.  

TVA에서 제작된 공각기동대는 극장판과 달리 여성사이보그에 대한 고찰로 통한 여성이 기계와 합일되어 기존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작품이 전개된다면 TVA에서는 기존 정치, 사회, 경제 등 다양한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작품이다. 



주: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를 줄이면 SF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어인 공상과학영화(science fiction film)가 아니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이다. 사이버네틱스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고, 펑크는 1970년대 락뮤직 흐름에서 이른바 펑크락이 등장했는데, 이 펑크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이버로 통한 인간 및 생물과 기계의 조합에서 반항의식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가 나오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펑크라는 저항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작품들을 이른바 사이비펑크라고 명명한다.




극장판 공각기동대에서 주요 문제원인 발단자가 인형사라면 TVA에서는 웃는남자 즉 스마일맨이다. 그렇게 스마일맨 중심으로 하여 파시즘에 대한 문제, 정치의 부패, 대중사회의 군중심리에 대한 문제를 공안9과로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카미야마 겐지 감독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공각기동대에 더불어 그런 문제점을 이번에는 동쪽의 에덴에서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역시 공각기동대를 만든 감독의 작품인지 음악담당자가 카와이 겐지라는 것을 보면 공각기동대의 작품배경, 인물설정, 상황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쪽의 에덴에서 그가 다루고 싶은 문제는 무엇일까? 우선 이 문제를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우리는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관료화, 체계화, 획일화라는 기준과 틀에 맞추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문제는 그런 틀과 기준에 조금이라도 못미치거나 혹은 부적격자로 판단된다면 현실에 보이는 현상들을 어떻게 보일까? 

여지없이 등급을 정해버리게 됨으로써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게 아니라 인간이 기준에 의해 차별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차별 중에서는 경제력, 학력, 지역, 민족, 인종, 젠더, 사상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자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동쪽의 에덴이다.  


그렇다면 에덴이란 무엇일까? 서양 사상 중의 하나인 기독교 성서에서 에덴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살던 곳이고, 에덴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브는 뱀에게 속아 금단의 사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혼란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문명을 탄생한 이래 계속적으로 폭력과 억압 그리고 분쟁 등과 같은 갈등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동쪽의 에덴에서는 그런 에덴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나와 과연 우리가 찾아가야할 천국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천국에 이르게 하는데 문제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알려준다.  

동쪽의 에덴에서 왜 하필 방향이 동쪽일까 싶지만, 기본적으로 유럽은 서구사회, 한국과 일본, 중국은 동양이라고 한다. 동쪽은 작가나 감독이 거주하는 동쪽인 일본도 될 수 있으며, 혹은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 3명, 즉 동쪽에서 온 3명의 현인이 있어서 방향성을 준 것이 아닐까도 싶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타키자와와 모리미로 이둘의 만남은 자국인 일본이 아닌 미국 백악관 근처에서 만난다. 모리미는 미국으로 올때 분명히 무기같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자신의 가방에는 총기가 보관되어 있었고, 이때 나타나 벌거숭이 남자인 타키자와로 통해 구출받아 다시 일본으로 넘어온다.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타키자와는 모리미와 모리미 친구, 그리고 주변에 등장하는 셀레상의 만남으로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나온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이 보여주는데, 그것은 일본사회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과연 내일이란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작품의 여자주인공인 모리미는 용모단정하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보통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데 그녀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보러 가던 일화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모리미가 중년층으로 회사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남자 간부에게 모욕을 당한 점이라던가 혹은 그런 남자들이 "밑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람을 받치기 위한 것들(정확한 번역이 아닐수 있음)"이란 말처럼 이 현실사회에서는 이미 기성세대들이 모든 권력을 잡음으로써 새롭게 올라오고 있는 신세대들에 대해 따듯한 조건조차 주지 않은 비정한 세상이었다.
 

또한 비정한 세상에서는 이른바 니트족에 대해 매우 비인간적으로 대한 점이었다. 니트족들은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자신의 틀과 어두운 마음에 갖힌 사람들이다. 그런 니트들이 처음부터 니트가 되고 싶었을까라는 것이다. 니트라고 니트가 아닌 사람들처럼 웃고 즐기고 먹고 사회생활을 하고 싶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서의 니트는 어느새 사회적인 차별로 인해 낙인이 찍혀버려 더 이상 자신들이 밖으로 얼굴을 내비출 수가 없던 것이다. 타키자와의 엽기행위 중에서 니트들을 다 모아서 외국으로 갔다가 그들을 다시 해방시켜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극한 상황을 주게 되었다. 물론 그 방법이나 수단은 옳지 못하나 결과론적으로 니트 중에서는 과거 생활을 청산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타키자와가 행동한 것이 좋은 의미라 하나 인간이 인간에게 대하는 인격적인 태도는 결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타키자와가 아닌 타키자와와 반대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키자와처럼 강제적인 수정궤도를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필요를 느낄 수가 없어서 말살하려 한다. TVA 말부분에 니트들에게 공중에서 무서운 미사일이 폭격하려 하지만, 타키자와가 니트들의 아이디어를 빌려 그 위험한 미사일로 인해 희생자를 내는 것을 방지했다. 



그렇다면 타키자와에 대한 윤리적인 부분이 강압적이라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의의는 상당히 깊고 올바를 수밖에 없는 극단적 현실이었다. 왜 타키자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세상을 구하는 것은 어느 개인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려면 거기에 대한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사소한 것까지 포함된다. 남녀, 경제, 정치, 지역, 학력 등등에서 말이다. 타키자와가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 권력을 어떻게 제대로 사용하고 보여주는 것인가이다. 셀레상이라는 사람들이 특수한 휴대폰 쥬이스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만능적인 능력을 보이는 휴대폰 쥬이스를 가지고 좋은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좋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쥬이스에는 엄청난 금액이 입금되어 있는데, 만약 그 금액잔고가 0으로 되는 순간 셀레상은 게임오버가 되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실제 그것이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 모르나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형사는 쥬이스로 통해 금액을 다 소모하여 결국 게임오버가 되었다. 그런데 약간 의문사항으로 그의 죽음은 쥬이스 운영체계에서 보낸 암살자라기보단 원망에 가득찬 아내의 칼부림이었다. 단순히 돈이 다 되어 게임이 다 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 양심적인 의사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받쳤음에도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 점으로 보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다 비명에 죽은 형사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타인을 택한 의사의 최후는 인간의 윤리적인 선택에 따라 그 희비가 갈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셀레상들의 자신을 위한 투쟁과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투쟁에서 주인공 타키자와는 동료를 만나게 된다. 그의 동료는 미국에서 우연히 만난 모리미의 대학친구들이다. 그들은 모리미와 같은 대학 동아리로 이름은 동쪽의 에덴이다.

동쪽의 에덴 회원들을 보면 다소 뛰어난 인물은 보이지 않으나, 히라사와 카즈오미라는 참모는 다른 학생과 달리 매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사회상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작품 내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난다. "자신은 니트족을 원해서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확실히 인물도 준수하고 매우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여 일반회사에 취업하여 관료조직에 뛰어들기 보단 그저 니트족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즉, 니트족이라고 해서 모두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아니라 충분한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 니트족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살 때 어느 일정기준으로 통해 인간을 구분짓어 그 사람을 마치 세상의 쓰레기인양 취급하는 슬픈 인간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히라사와는 그 슬픈 니트족이 자신에게 슬픈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그리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으로 대처한다.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맞춰가는 톱니바퀴로 살아가긴 보단 자기 자신이 하나의 톱니바퀴로 사회 속에서 독자적으로 굴러가길 원한 것이다.  

히라사와 친구 중에 매우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머 니트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타즈 유타카로 분명히 유타카는 매우 비상한 머리로 컴퓨터와 인터넷 프로그램을 상당히 잘 다룬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대한 트렌드에 너무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그는 집에만 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는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폐인이 되버린다. 어떻게 보면 유카타의 행위는 기성세대로 본다면 조금 뒤쳐진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그의 인간성에 대한 비하와 무시로 연결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를 쓸모없는 폐인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그가 비록 좋은 머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동쪽의 에덴에서 카미야마 켄지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존의 기성세대로 채워진 이 세계는 젊음이에 대한 꿈과 열정을 살려주긴 보다 그저 자신들의 틀과 기준에 맞추어 가야하는 것과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니트족처럼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야 하는 점이다. 그런 부당함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니트족에게 대하는 행위는 하나의 당연성을 뛰는 헤게모니(어느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지배하는 형태)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키자와는 무엇을 원한 것인가? 그는 자신이 악당으로 되는 것을 각오하면서 니트족들을 억지로 구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간 것은 비난과 원망이었다. 현대사회에서 누군가 어느 조직이나 행위의 정점이 되면 그 모든 책임과 영향은 그 정점에 있는 사람에게 갈 수 밖에 없다. 타키자와의 셀레상으로써의 역할은 그런 정점을 두고 자신을 희생했는가 혹은 안했는가로 그의 가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셀레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만 채우는 인간들은 대중들을 위해 사용하는 권력이 아닌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용도였다. 권력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 알맞은 능력과 권한이 따르지만 그 권한에 따라서는 하나의 책임과 처벌이 따른다는 점에서 다른 셀레상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그저 방관하기만 한다. 어떻게 하면 방관하면 낳을지도 모른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 셀레상이나 아무 죄없는 일반인들에게 피해주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다.



이 넒고 넓은 세상에서 손을 잡고 있는 타키자와와 모리미, 그리고 옆에 수많은 동료들은 이 세상에서 저절로 생긴 비틀림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전해주고 싶은가? 동쪽의 에덴이란 그저 우리에게 허망하고 멀기만 한 꿈일까? 아니면 타키자와가 혼자만의 세상에서 왕자가 되어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일까? 세상은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모두에게 전해 줄 수는 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젊은 사람들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야할까? 현재 사회의 톱니바퀴로 굴러가고 있는 내 생활에서 우리는 어떻게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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