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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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히 한국에서는 기나긴 왕족과 양반들이 권력을 갖고 통치하던 봉건주의 국가사회이었다. 그리고 그 조선이라는 마지막 봉건국가가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그 역사는 머나먼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억압된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의 양쪽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625전쟁, 그리고 수많은 독재와 봉기 등등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너무나도 빠르고 숨 쉴 사이 없이 지나가기 바쁜 고속철도와 같았다. 너무 빨리 지나가기만 하니 앞만 바라보고 뒤와 옆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난항들은 근현대가 아니라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 많고 많은 시련과 수난 속에서 조금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과연 누가 역대 정치지도자에서 가장 탁월했는가? 나는 우선적으로 추천하는 정치지도자는 학자임금인 정조이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나 여러 사업을 했지만, 결국 그것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덕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어려운 정국은 헤쳐 가며 나라를 위해 붕당정치의 폐단과 관료들의 비리, 제도의 불안정 등을 척결하여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면서 탕평정책은 깨져 버리고 다음해인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인해 많은 실학자들이 유배와 처형은 당한다.

 



역사에서는 이런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더라면” 라고 말이다. 과거가 지나간 이상 되돌아 갈수도 만들어 놓을 수도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단지 과거를 이해함으로 현재를 알고 미래를 준비할 뿐이다. 지금 조선시대 봉건사회도 끝이 나고 냉전시대 산물인 625전쟁도 다 지나갔다. 세월은 그렇게 변화를 거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긴 여정을 마친 한국이 왕권국가에서 국민국가로 변화되면서 나보고 누가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노무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라 해서 모두 잘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참고로 나는 나이가 20살 이전에 정치에 전혀 관심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업열등생이 대학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말년 3학년은 그저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런 다음 수험에 대한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예전부터 좋아한 락을 즐기기 위해 언더그라운드 세계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기타 치는 형들에게 기타도 조금 배우고, 합주도 구경하고 공연도 가고 같이 술마시고 그저 그게 나는 좋았다.

그것이 나의 고등학교 이후 대학입학전의 생활이다. 내가 정치에 대해 눈을 뜬 건 대학교 1학년 시절이다. 우리학과는 환경공학이라 환경부에서 주관하는 전국 폐기물 통계조사에 참여할 때이다. 때는 1999년 겨울, 나는 지정된 구역에서 주택, 상가 등 다양한 거주 및 건물형태에 따라 폐기물 수집을 하고 있었다. 



마친 사무실 부분이 있길래 개인사업장에 들어가서 폐기물조사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워서 인근에 국회의원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환경부 통계조사한다고 말하는데, 순간 그 국회의원 밑의 보좌한다는 인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이 쌔끼들아! 여기가 어딘줄 들어와! 어서 안꺼져!”라는 심한 욕설과 비인간적인 행동이었다. 



이때 이후로 이 사무실의 주인과 그 주인이 몸담은 정당은 일체 뽑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어린시절이라 그렇게 흥분했지만, 지금 역시 생각해보면 열받는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시민이 찾아와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욕한다는 사실에 사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후에 부산에서 계속 지내면서 부산에 살면 부산권 정치인인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당시 부산은 경상권이라 전라도지역과 지역감정이 매우 심했다는 점과 그런 상태에서 노무현 장관은 신기하게 보였다. 나 역시 부산에 살다보니 노무현이란 3자는 금방 알게 된다. 정치적 당색이라던가 신념이 아닌 어떤 인물인가에서 말이다. 



그런 애기를 들은 직후에 2002년 나에게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할 수 있던 기회가 왔다. 그리고 노무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당선되고 나는 2003년 군입대를 하게되었다. 나는 군복무를 공군으로 갔는데, 당시 배치부대가 김해공항으로 갔다. 2004년에 들어오고 2005년에 부서가 공사설계시공파트로 갔는데, 때마친 그 해는 APEC이 열렸다. 의전실 공사의 설계, 시공, 관리를 맡은 부서에서 기술행정을 맡았던 나로서 이 APEC은 사실 악몽이었다. 



맨날 잦은 공사내용 변경, 주요 지휘관, 정부기관, 심지어는 국무총리와 대통령까지 들어와서 이 현장을 보고 갔다. 시공부서에 있던 사람으로 VIP가 오는 것은 상당히 싫다. 아니 짜증난다. 공기는 다가오는데, 이 사람들로 인해 공사가 제대로 될 수 없다보니 잦은 야근과 주말잔업이 있었다. 남들은 군복무 하면 초소근무가 주된 추억이나 나는 사무실에서 야근과 잔업이 추억이다. 



솔직히 이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웠다. 개인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었다. 이라크 전쟁과 더불어 정부에서 파병안을 내고 어느 순간 파병안이 결정되자 그 여세는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 내가 속한 부대가 수송기가 있던 곳이라 많은 장병들이 머나먼 이라크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내 동기도 있었고, 같은 대대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게 한없이 고맙고 친근하기도 한 사람이 한국을 떠나 몇 개월 동안 모래폭풍으로 이루어진 이라크로 간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 무사히 귀국하여 내가 전역 전에 서로 잘 지냈지만, 그들이 느낀 이라크 파병은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전투가 바로 일어나는 위험지대가 아니나 언제 전투가 날지 언제 폭격이 날지 언제 테러가 날지 모르는 비상시기이니 말이다. 



그런 곳을 내 옆에 있던 사람이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부대에 가서 장병들과 만났다는 것이다. 누구는 인기몰이라거나 혹은 정치적인 수단이라 하지만, 나는 역으로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지공간에 들어갈 자신이 있냐고 말이다. 



사실 이라크 지역에 이착륙하던 항공기는 대부분 보잉이나 에어버스에서 만든 제트엔진으로 된 항공기가 아니라 C-130H이라는 군작전수송기였다. 이 항공기 직접 타지는 않으나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들으면 안다. 대단히 시끄럽고 불편하다고, 그런데 그 수송기에 몇 시간을 앉아 사지로 갔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나는 노무현이 좋아한 것이다. 물론 공군이라는 이름아래 좋아하게 되었으나 차후 전역 전까지 지켜보면서 그가 한국군사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다고 모두 이런 군인으로 지내면서 생각한 노무현이 나에게 전부는 아니다. 그가 100% 옳은 것은 아니나 그가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 나는 좋았다. 



권력의 최고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솔직히 군인으로 있었던 당시 나로서는 놀라움이었다. 그런 사람인듯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참 말이 많고 많았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보고 아이러니한 내용은 진보세력에서는 보수적이라고 비난받고, 보수세력에서는 너무 진보적이라고 비난받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진보와 보수가 양극화되어 으르렁되는데, 그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곳에서 비난당하고 있었다. 



그런 이것이 무엇인가? 한국 진보세력의 가장 문제점은 이책에서 보여준 “쉬운데로 안주거리처럼”이란 것이다. 반대에 대한 반대로 하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주의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선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역사의 사실을 존중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법칙을 배우고 그 법칙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 아닙니까. 진보주의자들이 주로 개방 문제와 관련해서 그동안 주장했던 것이 그 이후에 사실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에 진보든 보수든 어느 것이든 버릴 수만은 없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진보에서는 현실을 보고 국제사회를 보자는 것이었다. 진보가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불만으로 반대만 한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로 끝나면 모르나 한국은 한국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아닌 다른 나라가 있기에 존재한다. 한국이 국제정세에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자재수입과 제품수출 무역으로 생존하는 국가로서 치명적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이런 현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 자세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과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객관적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줄 알고, 그래야 오늘을 바로 해석할 수 있고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과학적 논리를 지니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오히려 “그러니까 공허하고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되어서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지 마라. 이겁니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스러운 사람들을 선동해서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급진지식인들은 뭉쳐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에서 현실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뭐든지 극단적 행위보단 과학적인 사고로 판단하라고 했다.

그렇기에 국민들이 이런 지나친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국민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권력은 위임하되 지배를 거부하라” 모든 국가조직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을 위해 공적인 업무에서 공권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공권력이 국민이 위임한 사람들의 사욕에 이용되는 것을 국민 스스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과연 내가 아는 노무현, 당신이 아는 노무현, 아니면 내가 모른 사람들의 노무현, 그것은 각각마다 다르다. 사람들이 살아온 환경과 조건, 그리고 가치관은 뭐든지 다르게 보일 뿐이다. 단지 타인에 의한 노무현이 아니라 노무현에 의한 노무현은 무엇인가에서 그는 기존에 내가 생각하던 것이랑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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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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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처음 좌파와 우파에 대해 안 것은 중학교이었다. 당시 정인화 선생이 만든 영원한 제국에서 제시된 성호학파의 갈래에서 알았다. 성호학파는 조선시대 최고 학자 겸 사상가인 성호 이익 선생이 만든 도서로 다양한 학문과 사상 그리고 문화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중국에 선교온 마테오 리치 신부가 만든 천주실의에 대해 최초로 연구한 서적이라 한다.

이 천주실의라는 학문은 가톨릭신앙을 포교하기 위해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서적이나 그 내용은 동양의 사상과 문화에 맞추어서 적었으므로 당시 천주실의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교황청의 정치적인 체계가 바뀌면서 당시 제사를 지내야 마느냐에서 기존 천주실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연하나 바뀐 가톨릭 포교에선 제사는 불가하다고 했다.

그런 갈등과 천주교라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성호학파가 2가지 갈래로 나눤다. 하나는 순암 안정복과 이삼환의 필두로 하는 성호우파, 또 하나는 만천 이승훈, 광암 이벽,  아우구스티노 장약종, 다산 정약용과 같은 남인 계통의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받아들인 좌파와 우파는 어느 일정한 사상과 철학에 관련하여 급진적인가 혹은 보수적인 태도인가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사상이나 철학, 학문 등이 좌우 관계없이 인간을 근본으로 하여 단지 그것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이런 관점이 무의미하게 사라져가는 추세인듯 하다. 정말 좌파와 우파의 차이는 그런 관점과 시선의 차이라기 보다는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당위성 내지 편가르기식으로 머물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우파와 좌파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인 노선이 문제가 근본 자체가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잘 지내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기본 중에 기본은 어디로 사라져 갔는지 이제는 상대방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게 되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 보다는 그 옳고 그름에 따라 정치적인 표명하기가 바쁜 것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 아직 민주주의라는 근현대적인 정치체계가 들어온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600년간의 사대부국가에서 약 50년동안의 일제 강점과 625전쟁으로 나라가 많이 혼돈되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전쟁으로 얼룩진 만큼 그 당시에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북한과 대치로 인한 이데올로기적인 군사외교 적대는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흔히 한국에서 좌파라고 하면 다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수이다. 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빨갱이 불온서적으로 마르크스 도서를 읽으면 안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되어 집근처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마르크스 서적이 주변에 넘치고 넘친다. 당시 내가 받아들인 시대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좌파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기존 한국사회를 혼돈하게 하는 존재, 아니면 빨갱이? 사실 알고 보면 마르크스는 그런 유령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냉철하게 바라보아 그 체계와 흐름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르크스라고 하면 모든 국가체계를 무너뜨릴 귀신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인문학이란 세계에 발을 들인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신입생급이다. 하지만 외국도서를 읽다보면 놀란다.

소련과 대치하던 미국,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학문적인 업적을 여실하게 맺고 있던 것이다. 세계 학문체계에서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유명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들은 소비에트연방과 북한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해 연구하고 정치에 활용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렇게 말하면 모두 좌빨 종북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옭아내지만, 막상 그렇게 했다면 서구사회는 모두 한통속이라는 인식 오류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좌파의 시초인 마르크스에 대한 내용으로부터 근현대 좌파지식인에 대한 내용과 간단한 소개로 통해 인문좌파이론이 뭐가 있는지 알려준다.

인문좌파는 정치적인 좌파가 아니다. 그런다고 우파도 아니다. 지금 뭐가 잘못된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논하는 것이 인문좌파이다. 그래서 인문좌파에 거론되는 철학자는 대부분 근현대철학자들이 아주 많았다.

먼저 마르크스로 필두로 하여 마르크스 이전의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 뒤를 이은 엥겔스와 발터 벤야민, 알튀세르, 사르트르. 데리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들뢰즈, 슬라보에 지젝 등, 솔직히 내가 여기서 거론된 학자들은 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다. 단지 이름은 듣고 간단한 소개만 알지 실제 그 사람들이 무슨 내용을 말한지는 세세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좌파지식인이란 점에서 우리가 근현대를 지나온 점에서 새로운 철학이나 사상은 대부분 좌파적인 부분에서 많이 나온 점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생각한 점은 인문좌파는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보고 생각하여 지적하여 원인을 규명하자는 것이다.

예전에 한창 관심있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에서 이른바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해체주의에서 거론하는 남녀차별, 인종차별 등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는 해체하는 것이 옳으나 그런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라는 모더니즘의 틀을 반대로 보기보단 추가와 보완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추가와 보완으로 통해서 얼마든지 기존 사회 기반을 부정하기 보단 그것에 대한 기능을 좀 더 올린다면 그것이 진정한 인문좌파로서의 소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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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공각기동대 "S.S.S" - 한정판 (컨셉 아트북 + 양면자켓2종 + 해설집포함)
카미야마 켄지 감독 / 미라지엔터테인먼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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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의 고령화 문제는 1990년대부터 이미 그 현상이 큰 사회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노인인구의 증가로 인해 실버사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등장했지만, 그 사업의 발전을 보자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인인구의 비율증가는 곧 그 나라에서 재화와 상품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청장년층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인 것이다. 한국은 1970년대 경제성장에 따라 산업구조와 정보기술력은 상당한 진보를 거친 것은 사실이나, 국민복지와 사회적인 인프라구축에서는 소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장애인, 고아, 결식아동,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정책은 그다지 큰 발전하지 못한 실정이다. 게다가 경제활동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노동자의 근무조건, 급여, 보건환경, 안전 및 복지에 문제로 여전히 나라에서는 집회운동이나 사회적인 시위가 발생하고 실정이다.



전혀 관계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노인들은 경제활동 자체가 가능한 분이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 연극영화배우로 큰 역할을 맡은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이순재 교수님이나 삼성 이건희 회장처럼 국내 교육, 정치, 경제, 문화재 등 그 분야 및 사회적 위치에서 정점을 지키고 있지 않은 이상 노인들에게 경제적인 능력과 사회적인 위치는 상당히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전쟁, 군사독재정권, IMF 등 한국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위기를 맞으면서 이겨낸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늙어서 소용없으니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다고 이런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재 한국이나 일본이나 기타 선진국들의 크나큰 숙제이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조금 생각하면서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그건 공각기동대 TV 시리즈 3기이다. 공각기동대는 극장판과 TV드라마로 2가지가 나누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유명하다고 인정된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만든 극장판 공각기동대로 2000년을 맞이하기 전에 아키라.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함께 3대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 명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를 줄이면 SF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상과학영화(science fiction film)가 아니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이다.

사이버네틱스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고, 펑크는 1970년대 락뮤직 흐름에서 이른바 펑크락이 등장했는데, 이 펑크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이버로 통한 인간 및 생물과 기계의 조합에서 반항의식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아키라를 보면 주인공인 생체연구소의 실험으로 괴물로 변화는 것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의 구성이 원래 아담과 인간의 유전조합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연상될지도 모른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애초부터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의 경우 전신이 기계화로 되어있고 두개골속의 뇌는 일반인의 뇌가 아닌 전뇌로 되어 있어서 전신 사이보그로 되어있다.

공각기동대에서 주요착안점은 인간과 기계, 남성과 여성, 나와 상대편에 대한 이원화적인 구도보다는 그 구도를 분리하여 경계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점을 파괴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공각기동대는 애니메이션 족에서 여성학과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째든 이런 공각기동대의 주요설정을 보자면 공각기동대라는 작품은 솔직히 말해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작품이다. 이번 주제로 올릴 작품은 TV 시리즈 3기인데, 우선 TV시리즈들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작업을 맡은 것이 아니라 카미야마 켄지라는 감독이 총괄적으로 작업을 맡았다.

그리고 1기와 2기에서는 26화의 장편물이 아닌 단 1편인 105분이라는 시간 안에서 보여주어 다소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느낌도 든다. 이 3기에서 주요 핵심적인 내용은 이 노인문제와 아동문제이다. 위에서 필자가 말한 노인문제도 이 공각기동대에서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재산과 경제적인 입지를 갖춘 노인이 있는데, 문제는 이 노인들이 사망하면 뒤를 이어나갈 후손이 없다는 점이다. 후손이 없는 노인들이 사망하면 그 노인들의 재산은 국가에서 모두 몰수해간다. 거기다가 더 큰 문제는 고아나 혹은 가정상황이 어려운 집안이다.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혹은 고아들은 국가적으로 아주 큰 문제이다. 어린이들은 국가미래를 짊어져갈 큰 인재들인데, 그런 어린이들이 부모의 경제, 사회, 도덕윤리적인 문제로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요 착안점은 이런 어린이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부 고위관리자는 어린이들을 어느 기관 한 연구실에서 단체로 교육을 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그 아이들은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며 같은 것을 하고만 있다. 이번 작품의 배후인물 중의 하나인 고위인사는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이 국가미래를 발전해 나갈 인재라고 한다. 확실히 그렇게 자기네들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물론 잘 이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을 위한 교육방법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만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구도를 이어나갈 뿐이다. 집단교육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물론 경제적인 발전은 있으나 인간적인 삶은 영위할 수 없다. 버려진 아이들과 죽어가는 노인, 노인의 죽음으로 재산을 국가로 가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들인가라는 의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공각기동대 TV시리즈 1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인형사라고 불리는 웃는 남자이다. 그가 나올 때 TV애서는 그의 얼굴이 나오지 않고 스마일마크가 등장하여 이른바 스마일맨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그는 1기에서 처음에 범죄와 음모의 우두머리로 보였지만, 사실 그는 국가고위간부와 군대, 경제, 언론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죄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오히려 기존 이익을 고수하려는 고위기관인물들에 의헤 왜곡당한다.
 
그런 일들은 과거나 현재까지도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라 애니메이션 속의 가상세계에서도 실재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나오는 것은 자주 알 수 있다. 어째든 이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로 불리는 웃는 남자가 하려고 하는 것은 죽어가는 노인과 버려지거나 가난한 집안의 아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의 호적을 그 노인 밑으로 이적시키는 것이다. 물론 친자식은 아니나 그 노인은 자신이 죽어가겠지만 자신의 후계자가 있다고 생각함에 따라 죽음이라는 공포를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아이들은 가난에서 해방되어 경제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의 친자식이 아닌 애를 누군가에게 강제로 입양하는 것은 그 부모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만 아니라, 작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쪽에 가까운 토쿠사도 자신의 아이가 인형사에 의해 입양되려고 할 때, 쿠사나기 소령이 구출해주었지만, 공각기동대에서 보여주는 노인문제이야기는 애니메이터들이 만든 가상세계이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공감대가 포함된다. 1기의 국가의 정보조작, 2기의 인간의 군중심리로 자국의 국민과 타국의 이민자들(중국이라 하지만 스토리 흐름을 보면 한국영토 내의 원자폭탄으로 인한 이주자일 가능성이 높음) 사이의 갈등을 일으켜서 현재 정권을 유지하는 사람들(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자국 내에 전쟁이 없음에 따라 무사들과 영주들의 불만이 자신의 정치적인 위기로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분노의 칼날을 조선으로 돌렸다.
 
역사를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귀족, 왕족, 정치권 등 상류계층이지만 그 억압을 받는 존재들은 국가경비대나 경호대, 국가공권력에 막혀 그 분노가 원인 발생자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한다.)의 모습에서 공각기동대가 시사하는 의미는 외교, 정치, 경제, 언론, 사회, 문화 등 다양한 현실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웃고 즐기기 위해 나온 것은 사실이나, 과연 애니메이션이 일반 사회에서 보는 편견과 고정관념처럼 그렇게 질적 수준이 낮은 가에서 필자의 대답은 완벽한 NO이다. 하지만 그 NO를 대답하는 일들은 정말 만만치 않고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보고 듣고 생각함으로 애니메이션이 과연 우리주변에서 보는 게 질적으로 낮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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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 Animation & Philosophy
이진경 외 지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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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와 국외에 애니메이션과 관련되 서적과 학술자료 및 논문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들을 필자가 접하는 경우 많은 애로사항이 나온다.
그것은 이 자료들은 애니메이션 수용자를 대상으로 적은 글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네(학회)들의 사고를 공유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자료들이 애니메이션 향유자들에게 열려 있지 않으면 애니메이션문화는 결국 퇴화해 버린다.
애니메이션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대중이라면, 이런 자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야 말로 엘리트로 볼 수 있다.
현재 필자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문화 향유대중과 애니메이션 연구하는 엘리트부류의 중간론적 역할로 통해
서로 왕래하며 정보공유 및 이해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애니메이션을 보면 과연 이것이 자기가 어떤 것들을 생각했는데, 막상 표현하거나 혹은 나타내는 경우 많은 고민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작품 내의 텍스트 해석이나 영상기법, 음향기법 등 다양한 경로를 읽어서 애니메이션 영상을 읽는 것도 일종의 영상서사 읽기 하나라는 것을 인지시켜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오덕이나 덕후, 십덕후라는 말 대신에 애니메이션 팬, 매니아라는 일종의 취미와 취향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이 필자의 목표이다.
그래서 오카다 토시오가 제시하는 진정한 애니메이션 오타쿠는 이런 팬과 매니아들을 아무런 편견과 고정관념에 시달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째든 계속되는 한국 애니메이션문화의 현실적인 문제는 단순히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생긴 문제이니, 조금씩 조금씩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즉 애니메이션 아니다는 말은 애니메이션인데 왜 아니냐는 말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나온 애니메이션들은 인문사회학자들이 보는 시점에서는 단순한 애니메이션도 영화도 아닌 그 이상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이란 것은 명작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 명작을 구분짓게 하는 것은 그 작품 내에서 의미하는 영상서사를 해석함에 따라 나온다.
그래서 다른 분들은 몰라도 필자는 인기있는 애니메이션을 명작과 별개로 보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명작이다고 하자. 그러면 그게 왜 명작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가? 단순히 캐릭터가 나오는 이야기로 누가 멋있다! 누가 대단하다! 란 식은 애니메이션 전문 평론이나 비평에서 나오지 않은 단어이다. 그 작품 내에서 인물들이 하는 말과 행동, 그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따른 연출을 해석하여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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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문화의 리더 오타쿠
이진천 지음 / 디씨에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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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리뷰를 적고 있는 필자는 만화애니메이션 오타쿠이다. 국내에서 만화애니메이션 내지 혹은 게임과 밀리터리, 코스프레를 접하는 사람들을 오타쿠라고 한다. 오타쿠란 어원은 본래 일본에서 나온 단어로 집에만 갇혀 살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여 다른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이른바 세상 속에 고립된 인간을 의미한다.

분명 오타쿠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매우 강한 단어이다. 하지만 이 오타쿠란 존재가 과연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코믹월드에 참가하는 부스나 거기에 상품을 사러오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아닌 2차원 세계의 인물을 흉내내는 코스프레이어들이 과연 집에만 있는 존재인가이다.

물론 일반 대중들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대중처럼 심각한 획일화에 갇혀있지 않다. 물론 오타쿠문화라는 서브컬쳐에도 주류세계와 비주류세계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 것을 무조건 버리고 새로운 것만 취하기를 바라는 대중문화와 달리 새로운 것과 아주 오래된 것까지도 공존하는 것이 오타쿠문화이다.

그래서 오타쿠문화란 상당히 폭넓고 다양하고, 그 다양함 속에 세밀하고도 깊은 세계가 존재한다. 이런 서브컬쳐를 구성하는 오타쿠문화를 알아본다는 것은 현재 획일적인 사회통념과 교육관념으로 창의력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뭔가 신선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신선한 자극제로 사용될 수 있는 이 오타쿠문화가 어떻게 하면 사회문화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전달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는 언제나 획일적인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뭔가 새롭고 참신한 내용이 필요한 세상이다. 그런 현대사회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서브컬쳐를 알아본다는 것은 다양한 문화공간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제일 필요한 게 바로 문화구성력을 만드는 인적 인프라 단계이다. 문화컨텐츠는 공장의 기계처럼 자동으로 찍어 나오는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컨텐츠는 오로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무형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욕구로 통해서만 문화컨텐츠사업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화컨텐츠를 구성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 오타쿠문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이 오타쿠문화로 통해 긍적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필자가 리뷰하려고 하는 "21세기 신문화의 리더, 오타쿠"는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오타쿠와 우리가 평소 알지못했던 오타쿠에 대해 소개한 도서이다. 물론 필자가 이 서적을 읽기 전에 이미 국내 대학원에서 오타쿠에 대해 연구한 석사학위 논문 몇부를 읽어보았으며, 거기에 더하여 일본 오타쿠 전문가 및 평론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문사회학자들의 연구서적까지 보았다.

그런데 기존에 필자가 보던 책들은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는 다소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일반 대중들은 어느 특정한 이슈와 현상에 대해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보다는 대부분 사회적통념과 편견으로 판단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은 자신들과 다르게 보이는 오타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사고로만 접근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소 학술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올바른 단어의 정의와 내용해석이 필요하면서 한편으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적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 "21세기 신문화의 리더, 오타쿠"는 상당히 좋은 도서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책를 만든 지은기가 국내에서 오타쿠에 대해 서술하기 보다는 직접 일본이란 곳에 살면서 현지에 있는 오타쿠와 만남으로 통해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내용을 전개하였다.

책을 보면 우리가 기존 생각했던 오타쿠는 대부분 만화애니메이션, 게임, 밀리터리, 코스프레 등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오타쿠는 그런 장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철도오타쿠, 공항오타쿠, 기계오타쿠, 차량오타쿠 등 매우 많은 종류가 있다. 특히 이 서적에서는 주로 다루고 있는 오타쿠는 철도오타쿠와 모에오타쿠이다. 

철도오타쿠는 교통매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존재로 기존 오타쿠 연구서적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모에오타쿠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에를 쉽게 풀이하고 모에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작용하는지 쉽게 풀이 되어있다. 그리고 모에오타쿠에 대한 내용으로 1980년대 우르세이 야츠라부터 최근에 방영된 애니메이션까지 예시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국내에서 부정적인 존재로 낙인찍힌 오타쿠문화이지만, 이 서적에서는 이 부정적인 면을 잘 이용하여 긍정적인 요소로 만들어서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문화컨텐츠강국을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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