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준의 어머니는 그들이 강제로 먹이는 약에 정신을 잃다가 깨어 났다가를 반복했다.

이젠 몰래 들어오던 먹을거리도, 링겔도 주어지지 않았다.

계속 약뿐이었다. 일어서는 게 가능할런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길준모는 도망치는 것을 생각했다.

지리를 알진 못했지만 계속 있다가는 죽는 길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짓을 계속하다간 우린 정말 지옥에 쳐박힐거에요.”

 

그녀에게 동정적이었던 남자가 다시 상사에게 반발했다.

 

“지옥에 처박히기 전에 돈다발에 처박히겠지.”

 

상대가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약간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몽사몽간이긴 했지만 도망갈 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나가고, 그녀는 그녀에게 동정적인 남자와 한 방에 있게 되었다.

그녀는 억지로 목소리를 내보았다.

 

“어...어어어어커걱.”

 

“정신이 들어요? 대단한 할머니시네. 그 약을 먹고...잠깐만요. 묶인 거 풀어줄게요.”

 

그는 얼른 그녀를 묶은 구속복을 풀어주었다.

시야가 확보되고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길...준...아?”

 

순간적으로 아들로 착각했지만 그 남자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아...아니."

 

"도대체 할머니는 뭔일을 해서 여기 잡혀온 거에요? 이 약 계속 먹다가는 죽어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투여량이 적으니까...“

 

“나는...나가야...”

 

“...나가야...”

 

남자가 시무룩해졌다.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데 취직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거거든요. 그런데 몰래 할머니를 풀어주면...나는...”

 

“...나한텐 아들이 있어.”

 

길준의 어머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꼭 만나야 해. 꼭.”

 

남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한테도 할머니같은 엄마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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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널부러진 지윤을 보던 형은 혀를 찼다.

 

“겨우 이것밖에 안되면서 허세냐? 어이, 신부님.”

 

“......”

 

폭탄주를 마시고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하면서 억지로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형을 업고 몇걸음 떼다가 그만 넘어져버렸다.

 

“쯔쯔.”

 

형은 그를 가볍게 들어서 업었다.

 

“형량을 좀 줄여줄까? 업는게 안되면 걸어가는 걸로라도 봐줄게. 어차피 안되겠지만.”

 

“......”

 

지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현재의 그는 그 독주를 이겨내고 형을 업고 다닐 수 없었다. 그들을 그가 바로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맞는 말이었다. 그 조건으로는 안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어쩔 수 없지. 로빈 후드도 신부님을 업었다니까. 나도 업지 뭐..”

 

“형...”

 

모기소리만한 목소리에 털보는 깜짝 놀랬다.

 

“응? 기절 안 했나? 그래. 그 조건으로다가 다시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어차피 안되겠지만.”

 

그는 형의 어깨에서 내려와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오체투지하다시피 기어가는 모습을 보던 털보는 투덜거렸다.

 

“그렇게 해서 대학로를 기어봤자 다 기어가는 데 1년이 넘게 걸리겠다. 그래가지고 네가 말하는 정의니, 진리가 잘도 찾아오겠다. 으이구.”

 

“늦어도 시도할 수 있다면...”

 

“응?”

 

“지지 않는 겁니다. 병률 형에게 꼭 형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똥고집은. 알았다. 1년이 걸리건 2년이 걸리건 네 맘대로 해. 난 들어가서 잠이나 자련다."

 

그렇게 털보가 동생에게서 돌아서서 자기 가게로 돌아가려고 한 순간.

 

“어? 벌써 저기까지 갔나? 아니...”

 

그는 기어오고 있는 한 동물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달려갔을 때 지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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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다가 무심해져버리는 우리들.

 

 

뒤늦게 옛날에 읽다 만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었다. 예전에는 여기저기로 튀어오르는 박민규의 문장이 즐거웠다면, 이번에는 그 행간행간에 숨겨진 절망이 읽혀졌다.

비터스윗...

옛날에 초콜릿에 정통한 한 여인이 했다는 말이다. 박민규의 글은 스윗비터...한 게 아닌가 싶은데.

 

초기 단편작 카스테라 이후로 더블, (제목이 기억이 잘 안나지만)황녀를 위한 파반 등을 썼다는데 난 사실 카스테라도 아직 다 완독을 못해서...

서재턴데이니만큼 완독을 하고나서 쓰면 좋겠지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보니 안 쓸 수가 없었다.

 

잘 놀던 학생이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걸 [산수]라고 부르는 그는 자신 나름의 [산수]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는 물론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한다. 그래도 그의 [산수]는 시간당 천원에서 삼천원을 넘지 못한다. 푸쉬맨이라는 좋은 아르바이트를 구한 후로 그는 아버지의 [산수]를 단순히 [산수]가 아니라 [생활의 절망]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산수]를 하기 위해서 지하철에서 아들을 만나고 그때마다 둘은 서로의 [산수]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낀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폭을 좁히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말을 걸지만 아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지를 푸쉬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실종. 어머니의 병마.

 

삶은 주인공에게 [산수]만을 강요할 뿐이다. 어머니의 병이 낫고 난 다음, 아들은 아버지인 것으로 추정되는 [기린]에게 말을 걸지만.

기린은 아버지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린이 아버지였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처절한 비극이었을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그 희망없었던 잿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든 아니든 개인의 [산수]하는 시간에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는 시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린의 대답은 박민규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난 표제작 카스테라도 좋아했지만, 사실 가슴이 저리고 공감이 되는 건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였다. 여기에는 허무맹랑한 캐릭터들이 나와서 허무맹랑하게 끝내는 그런 작품들은 이 작품선에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 밖에서 해결될 수 있는 해답을 줄 뿐이다.

비터스윗, 혹은 스윗 비터. 우리의 삶은 결국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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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은 은미에게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앞이 막막하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계획하고 있는 건 있었지만 과연 가능할런지 의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설득할 수나 있을 런지.

대학로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음침한 민속 술집 안에서 털보 한명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너무 잘 아는 한 남자와 세상을 모르지만 정리된 세계에서 살았던 남자와의 대화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나갔다.

 

“신부님, 그래서 나한테 그걸 시켜볼 작정이슈? 신부답지 않게스리.”

 

오랜만에 만난 형제는 그에게 반농담조로 시비를 걸었다.

 

“형. 제발 부탁입니다.”

 

“나는 그 시팔 친척모임에 끼어들 생각 없으니. 가슈.”

 

“형.”

 

“형님이란 소린 듣기도 싫다.”

 

민속술집이라는 곳에서 대통술을 자작하던 그가 충혈된 눈을 그에게 돌렸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맛없는 술을 술에 취해서 항상 자작하니 항상 그 모양이지...라는 다른 형제들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형은 여기저기 맺어둔 인맥이 많잖아요.”

 

“그걸 가리켜서 우리나라 말로는 건달, 내지는 깡패라고 한다지. 네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그 집단도 같은 집단 아니면 뭐냐. 또 정의파 신부답게 말도 안된다며 뛰쳐나온 건 어쩌고. 한편을 먹었으면 계속 끝까지 한 편 먹어야 하는 거야. 그게 의리지.”

 

“형.”

 

충혈된 눈동자의 그가 동생을 힐끗 위아래로 내려보았다.

 

“로만 칼라라. 하! 우리 아버지 집안에서 설마하니 신부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형.”

 

“그럼 이렇게 하지.”

 

형은 커다란 대통술을 그 앞에 내밀었다.

 

“이거 다 마시고 쓰러지지 않고 대학로를 쭉 다 걸으면 들어주지. 참고로 이거 대통술 아니다. 이름은 들어봤나? 폭탄주라고? 소주,보드카, 압생트, 종류별로 다 고루 섞어서 장난 아니지.나는 이걸 매일 마셔. 아, 이걸로는 너무 쉽군. 그럼 이렇게 하자. 대학로를 날 업고 걸어다녀야 해. 3바퀴.”

 

“...잠깐만...”

 

“못해? 못하면 징징 울면서 돌아가. 실행 못하는 정의는 정의가 아냐. 너하고 입씨름할 생각은 더

더욱 없으니 할거면 하고, 말거면 말아.”

 

지윤의 이마에 골이 깊게 졌다. 어처구니 없는 시험이었다.

지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술 한번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형제의 요구는 그가 형제에게 요구한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었다.

 

“좋아요. 대신 약속 지키는 겁니다.”

 

“물론이지.”

 

그 시간 은미는 당회의가 끝난 후 병률의 전화를 받았다.

 

“나야.”

 

그 말 한마디에 은미의 얼굴에 수심이 끼었다.

 

“잘 되었나요?”

 

“당회의는 무사히 끝났어.”

 

“아니. 내가 그걸 묻는 건 아니고요...”

 

“유산했다더군.”

 

은미는 너무 건조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에는 비탄도, 어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계적으로 울리는 목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와 친분이 있는 보좌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는 너무 달랐다.

 

“언니는 괜찮대요?”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정말 괜찮아요?”

 

은미의 말에 그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괜찮아. 유령같은게 씌인 것 말고는...”

 

“유령?”

 

“유령.”

 

은미는 길준이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내 눈앞에 그녀가 보여요.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보여주죠. 진실과 어둠을.]

 

“특별한 일이네요.”

 

은미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답지 않네요. 설마하니 아기가 벌써 유령이 되었다는 건 아니겠죠.”

 

“......”

 

“그 이야길 하려고 나한테 전화한 건 아니죠?”

 

병률은 잠시 시간을 뒀다가 천천히 이야길 꺼냈다.

 

“동영상 전화로 전화할 걸 잘못했군.”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이었다.

 

“네 얼굴이 보고 싶어. 은미야.”

 

은미는 숨을 잠깐 멈췄다.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

그렇게 꿈꿔 왔던 순간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럼 만날까요?”

 

그녀가 그의 부름에 응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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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한 병률은 먼저 윤희부터 찾았다.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초조한 마음은 엉뚱한 곳을 계속 찾았다.

 

“후보자님 좀 천천히...”

 

새로 뽑은 보좌관이 그에게 말했다.

 

“체통이 있으시잖습니까. 그렇게 마구...”

 

“마구?”

 

다급하게 윤희를 찾던 병률은 순간적으로 보좌관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마구지.”

 

“......”

 

새파랗게 질린 보좌관의 얼굴에 대고 병률이 천천히 말했다.

 

“마구가 뭔지 가르쳐줄까요? 언제 플래시 터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좌관의 멱살을 잡는게 마구입니다. 그리고 유산 위기에 처한 아내를 찾는 건 마구가 아니에요. 진심으로 걱정되는 거지. 알겠습니까?”

 

병률의 얼굴을 알아본 간호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병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좌관의 멱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병률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유산됐군요...아내는, 아내는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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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않으십니까?”

 

지윤이 떠나갔다는 말을 은미에게서 전해듣고 길준은 잠시 울증 상태에 빠졌다.

이준구가 보아왔던 길준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찾은들 뭐하겠습니까.”

 

안락의자에 몸을 거의 눕히다시피한 길준이 대꾸했다.

 

“제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지윤씨는.”

 

“...뜻 모를 이야기군요.”

 

준구는 반대편 의자에 편히 앉았다. 거실은 봄인데도 난로가 김을 내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추운 봄이었다.

 

“제 복수의 첫 시작이죠.”

 

“...지윤씨가 도움이 되었다거나, 아니면 무고한 사람이 다쳤기 때문에 구한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네.”

 

생각보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준구는 길준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하려는 게 복수라면 상대편도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윤씨를 데리고 왔다면 아마 상대편도 알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제일 위험한 상태에 처해있는 사람은 당신 어머니일겁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길준이 천천히 말했다.

 

“난 봤습니다. 모든 걸 알게 되었어요.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겁니다. 단지 복수심만 더 커지겠죠.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복수할 의욕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지윤씨가 한 말이 맞기는 맞는 거죠...내 마음속에는 선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안 할 순 없죠. 그 놈도 내가 자기에게 복수하려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순간적으로 따끔한 아픔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뒤이어 소리가 들렸다. 짜악!

 

“실망입니다.”

 

준구가 길준에게 말했다.

 

“적어도 상대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도 인간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군요.”

 

“...나는 압니다. 당신이 믿지 않아도...”

 

“적어도 노력이라도 해야죠.”

 

준구가 차갑게 잘랐다.

 

“선의가 없더라도 노력하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믿습니다. 내가 노숙자였던 시절에 그걸 잘 알게 되었죠. 그들에게는 십원만한 선의가 있었을지라도 내게는 100원같이 느껴졌었으니까요. 그 사람들도 그걸 압니다. 당신의 적도 그걸 두려워하고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군요. 더더군다나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당신 어머니 이야길 하는 겁니다. 그 실체 없는 유령보다도요!”

 

“.....”

 

길준은 손만 흔들어보였을 뿐이었다. 준구는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모를 분노를 안고 자리를 떴다.

 

-------------------------------------------------------------------

“어서 와.”

 

윤희는 창백한 얼굴로 남편을 맞았다. 병률은 초조한 얼굴로 병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1인실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는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죽은 애가 남자애래.”

 

병률이 입을 열자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당신만 괜찮으면 돼.”

 

“...섭섭하지 않아?”

 

윤희는 남편에게 눈을 맞췄다.

 

“당신 애야.”

 

[당신의 두 번째 아이야.]라고 옆에서 유령이 속삭였다.

[살아남지 못한 두 번째 아이야.] 라고 유령이 다시 속삭였다.

 

“응. 난 당신만 괜찮으면...”

 

[거짓말이지.]라고 유령이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의사가 뭐래?”

 

“별로 특별한 이야긴 없었어. 여기서 한 며칠 더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려고. 아 참.”

 

“응?”

 

“나...어쩌면 친정에 돌아가서 몇 달 쉴지도 몰라...”

 

윤희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떼었다.

 

“당신이 제일 바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후보자님. 시간 다 됐습니다. 당회의가 30분 뒤에 있으니 지금 가셔야 합니다.”

 

눈치 없는 보좌관을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가짜일 뿐이라고.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유령]이라고.

그가 죽인 유령이라고.

그래서 그는 복수를 시작한 길준에게 분노를 향할 수 있었다.

네가 뭐라고 하건 난 널 죽일 수 밖에 없다고.

그는 병원을 급하게 나서면서 혹시나 싶어 만들어뒀던 대포폰으로 연락했다.

 

“나다. 그 여자한테 약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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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예정대로라면 6월 이후에 올려야하겠지만, 생각보다 생활이 조용하게 돌아가서...;;;;;;;;

그래서 복귀를 말한 것하고 다르게 일찍 해버렸네요.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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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는 갑자기 통증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이었고, 옆자리는 늘 그랬듯이 비어 있었다. 경찰일 때는 옆을 지켜주던 남편이 이젠 더 이상 옆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서 배를 움켜쥐었다. 어제 뭘 잘못 먹었던가...

그러기에는 통증이 좀 더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왔다.

 

“...으...”

 

배가 쥐어뜯기는듯이 아팠다. 그리고 뱃속의 무언가가 뭉쳐지는 느낌도...

 

“안돼...유산은...”

 

그녀는 최대한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네...”

 

억지로 통화를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정신을 잃은 인물이 있었다.

 

“괜찮을까요? 이렇게 해도?”

 

길준의 어머니는 구속복을 입은 채 정신을 잃었다.

과다복용한 신경안정제가 그녀의 낮밤을 바꿔놓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죽어서는 안되기에 마약류 투여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의 누군가로부터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중독성이 강한 마약류를 투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그녀가 여기 감금된 지 2달째. 아직까지는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괜찮아. 밥값도 아까운걸.”

 

“하지만 죽이지는 말랬잖아요. 마약 투여하라는 말도 없었고.”

 

일체의 식사류를 공급받지 못한 채 링겔만 맞고 있는 터라 길준의 어머니는 점점 정신이 희미해져갔다. 눈, 귀의 감각마저 차단되어 있어서 낮과 밤의 구분도 어려워졌다.

 

“야, 밥값을 네가 내냐?”

 

“사람이잖아요. 형님. 우리 인간은 되기 힘들어도 짐승은 되지 맙시다.”

 

“젠장, 네가 내 선생이냐?”

 

구속복속에서 길준의 어머니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링겔의 효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고, 그녀에게 온정을 보이는 간병인이 가끔 먹을 것을 몰래 먹여서 그럴 수도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질문은 그것이었다.

 

‘난 분명히 길준이를 만나러 갔는데?’

 

그녀의 기억속에서 그때의 장면이 다시 나타났다. 커피숍에서 길준을 기다리고 있다가, 남자 두명이 그녀를 바깥으로 이끌어냈다. 그리고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길준이가 날 여기 감금한 건가? 내가 자기를 감금시켰다고? 아니야...’

 

그녀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단순한 감정만으로 움직인 적은 없을 정도였다. 길준의 어머니는 남편을 일찍 잃었지만 그로 인해서 경제적인 타격이 오지 않도록 주도 면밀하게 움직여 왔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직장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옮겨다닌 직장생활 속에서도 아들을 잘 키워내지 않았던가.

 

‘그 애가 그럴 리는 없고. 설마하니 이 남자들, 길준이에게 원한을 가진 건가...아니면...’

 

그녀의 사고는 길준이 처음 사고쳤을 때로 돌아갔다.

 

‘그때 그 아이가 칼을 휘둘렀지. 흥분해서 말을 잘 못했지만,그때 상황이 만약 정말이었다면? 그때 그애가 뭐라고 했었지? 병률이가...’

 

-어머닌 속고 있는 거예요. 내 아내를 죽인 건 저 놈이라고요!-

 

증거도 없었고, 이유도 없었기에 단지 경찰에 넘기는 것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아들을 보냈었다.

 

“아, 전화왔다.”

 

정신을 또렷이 차리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말도 서서히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예. 이제부터 투약하라고요?”

 

“......”

 

눈도 감은 척 했지만 흐릿하게나마 다 보였다. 흰옷을 입은 남자 2명이 억지로 그녀의 입을 벌리게 했다.

 

“정말 할거예요?”

 

하급직인 남자의 말에 상사인 듯한 남자가 말을 받았다.

 

“해야지. 우린 그래서 돈을 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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