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률은 느긋한 표정으로 와인 한 병을 땄다.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와는 달리, 양심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나니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총으로 비서를 죽일 때와, 그 이전에 아내 이상으로 사랑했던 그녀를 죽이던 그때와는 달랐다. 물론 그녀의 유령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유령조차도 그의 사랑에 보답해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보이나?”

 

그는 유령을 상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네 남편이, 다른 여자 때문에 무릎을 꿇은 채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잘 보이지? 날 잡겠다고, 날 죽이겠다고 길길이 뛰던 놈이 복수한다고 제 정체마저 감춘채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내 덫에 걸렸지...하하, 이젠 죽고 나면 내 머리에 유령이 두 개겠군.”

 

“.....”

 

그는 비싸다고 소문난 와인을 물 들이키듯 들이켰다. 병째로.

만약 섬세한 소믈리에라도 한 명 있었다면 아까운 짓 한다면서 병을 빼앗을 정도의 난폭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화면이 꺼져버렸다.

 

“총?”

 

그럴 리가. 싶었다.

민간인에게 총소지 허가가 내려진다고는 해도...

아니,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복수에 눈이 멀었다면 총기소지도 가능하지...젠장.”

 

방심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총은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치이이익.

소리와 동시에 화면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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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란 눈앞의 찻잔

찻잔속에 차를 부어

잔안에 폭풍이 부네.

차라는 이름에

폭풍이 부니

그 어떤 정취란 말인가.

 

 

 

금으로 찻잔을 삼든

흙으로 찻잔을 삼든

폭풍이 빙글빙글 도는 것은

항상 있어온 일.

 

 

 

내 맘에 폭풍 하나

내 앞에 선 사람 앞에 폭풍 하나.

차조차도 마음을 잡지 못하니

다도속에 정숙을 가지기 이리 어렵구나.

 

 

 

다두여.

이제야 다도가 어렵다는 그 말을

알겠네.

 

 

-----------------------------------------------------------------------------------

고등학생 시절, 다도에 매력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한때 차에 취미를 가지려고 한 적도 있었죠.(라지만, 실제적으로는 차는 대충 우려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적도 많습니다.) 국내다도를 익히는 게 더 나았을테지만, 정작 저는 어린 시절에 읽은 센노 리큐에 대한 일화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센노 리큐는 한동안 제 위인 서열 중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죠.(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대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얼마 전에 온 에어에 올렸던 다도를 다룬 글만 한권이 된 모 저자에게 푹 빠져, 나중에는 위작이라는 설이 도는 남방록도 전자책으로 구입하기도 했었구요.

왜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저 시에 나오는 다두가 바로 센노 리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한국 사람이지만, 소설이나 영화 등등에서 나온 리큐의 일화는 그가 한국은 몰라도 일본에서는 정말 다두라고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는 사실 독후감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대망 7권에 들어갔는데,하필 리큐가 죽기 직전이군요...리큐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시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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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회를 기점으로 2부로 들어갈까 합니다.

사실은 2부고 뭐고 없었습니다. 제목 자체를 바꿀려고 했었거든요.

그림자의 햄릿으로 제목을 다 바꾸려고 했는데 수정하려니 손이 너무 많이 가서...

그냥 울새를 누가 죽였나로 하고, 1부, 2부 제목만 달리하는 걸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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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준은 밤중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옛 상처를 들춰서 어떻게 될까...싶었다.

복수라면 복수이리라. 자신에게도 상해를 입히는 복수. 아니, 그 이전의 사건의 복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안 주무십니까?”

 

비서로 들인 청년이 그에게 물었다.

 

 

“아직, 안 가고 있었나?”

 

 

“은미씨가 가보라고 해서...”

 

 

“은미씨도 아직 안 가고 있었나?”

 

 

“예. 이준구 사장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아...”

 

 

“안 주무신다면 더운데 에어컨이라도...”

 

 

“아니. 됐어.”

 

 

자리에서 일어난 길준은 건물의 유리창 너머로 반짝이는 뭔가를 보았다.

 

 

“자네.”

 

 

그는 천천히 비서에게 물었다.

 

 

“경비한테 바깥 불 켜라고 했었나?”

 

 

“아니오? 경비하시는 분들이 오늘부터 휴가라고...사장님이 휴가 주셨다고 하던...아."

 

 

"휴가?“

 

 

길준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세콤 걸어둔 거 돌려.”

 

 

“예. 알겠습니다.”

 

 

일시적으로 해제가 되어 있었던 듯, 비서가 원격으로 세콤을 조정하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길준은 그와 동시에 박차고 들어온 심부름 센터 직원의 칼을 피하고 돌려차기로 그 칼을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그만 움직여. 이 새끼야. 네 여자 목숨을 받아놨다.”

 

 

하지만 그 동작은 이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은미가 그 중 한 놈에게 목이 졸린 채 버둥거리는 모습이 화상 시스템을 통해서 보였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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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꿈꾸었다. 앨리스는 내 꿈에 항상 나타났고, 나는 그녀의 빨간 볼에 입맞춤을 하면서 몇만번이나 더 했을 찬사를 읊조렸다.

 

 

“여보, 일어나요. 늦었어요.”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로 요염함마저 감도는 아내가 날 깨웠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새벽 5시밖에 안되었는데?”

 

 

내 말에 아내가 손끝으로 만보계를 가리켰다.

 

 

“의사 선생님이 하루에 4km는 걸어야 된다고 했다면서요. 당신 산보하고 돌아오면 시간이 딱 맞을걸요. 이해가 안간다니까, 정말. 당신같이 마른 사람이 왜 4km씩을 걸어다녀야 하는지...”

 

 

그건 거짓말이다. 내 주치의는 내게 아직 140까지 살 정도로 건강하다고 했으니.

하지만 적어도...나의 앨리스를 보는 은밀한 즐거움은 누려도 될 것 같다.

 

 

루트위지 도지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내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얻기를 원하는 자리. 다른 말로 루이스 캐럴.

그의 본을 따서 나는 모 대학에서 수학과 교수를 하고 있다. 물론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달라 그가 가지지 못한 교수직을 나는 좀 더 젊은 나이에 얻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아내가 없었고, 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 집어쳐!”

 

 

그녀와 결혼할 때 나는 모든 세상의 비난에 부딪혀야 했다. 그녀가 단순히 내 제자라서가 아니라...

이크, 그녀가 지나간다. 나는 산책로 한쪽에 숨었다. 하지만 워낙 큰 키이고 꺼부정하다보니 쉽게 들키기 딱 맞았다.

 

 

“교수님.”

 

 

그녀와 그녀의 조카가 내게 다가왔다. 그 조카는 아직 어리지만, 새벽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다. 덕분에 적당하게 마른 몸에 생기가 넘친다.

 

 

“오, 민화씨. 여전히 새벽운동 중이군. 조카도 여전히...”

 

 

나는 눈가에 뭐가 들어간 척 위장하면서 조카의 옷 매무시를 꼼꼼히 살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새벽운동에 적합한 운동복을 입혀 놓았다. 너무 꾸미지도 않고, 새벽에 일어나 오는 차림다웠다.

 

 

“교수님, 저번에 내신 <앨리스 연구>라는 사진집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던데요?”

 

 

“으음...그런가. 정아 생각은 어떻지?”

 

 

“예뻐요.”

 

 

나의 앨리스는 말 수가 적다. 아이다운 빨간볼에 귀염성은 잃지 않고 있지만.

 

앨리스 연구는 내가 오랜 세월동안 취미로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전시한 후 자가출판한 것이다. 양장은 꽤 고풍스러웠지만, 적어도 조금은 고급스러워보였다.

거기에 이 아이의 사진은 빠져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은밀한 즐거움을 남들에게 빼앗기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안다. 내가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뤘는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앨리스 연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아침 먹어야지.”

 

 

내 말에 아내가 뭔가가 목구멍을 막은 듯한 소리를 냈다. 뭔가 할말은 있는데 뱉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

 

 

“응?”

 

 

“또 시작했어요?”

 

 

그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판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내 아내가 10대일때 내 앞에서 찍은 유일한 누드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내가 비밀히 지켜왔던 -아마 나보코프라면 님펫이라고 부를-요정의 누드 사진이 겹쳐져 있었다.

 

 

“그건 또 어디서 꺼낸거야?”

 

 

“유미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그 사진집 있던 자리도 알던데요? 왜 그애 사진을 찍은 거에요?”

 

 

“...여보. 그건 그냥 작품일 뿐이야.”

 

 

“당신, 이제 난 당신기준에 안 맞아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건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골치 아파진다.

나는 그녀가 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녀는 근 15년이 넘는 결혼생활동안 내게 충실했다. 늙은 남편, (그 당시에)출세도 못하는 늙은 남편을 왜 대학의 총장의 딸이 어린 나이에 고른 것일까.

그때는 나는 그녀가 나의 [앨리스]인줄 알았다.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난 루트위지 도지슨, 아니 루이스 캐럴이 되고 싶었다.

그녀와 만난 후 내 논문은 비약적인 성과를 보이며 승승장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아동용 동화를 몇권 써서 꾸준히 들어오는 인세도 받게 되었다.

 

 

“여보.”

 

 

“그년이 전화해서 그 사진 도로 내놓지 않으면 변태 교수로 몰아버리겠데요.”

 

 

“...미안해. 걱정하지마.”

 

 

걱정하지 않을 일은 아니었다. 유미를 건드리진 않았지만 나도 켕기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신적인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미에게 가장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주었었다.

 

 

“걱정안하게 생겼어요? 당신은 교수라고요.”

 

 

아내는 그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 나를.

 

 

“내 잘못이니까...너무 걱정하지 마.”

 

 

유미를 어떻게 달랠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7시.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에 태워다주면 딱 맞을 시간이었다.

 

 

 

 

“요즘 뭐하니?”

 

 

공강시간에 나는 미술대학에서 유미를 만났다.

근처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다고 했다. 여기까지 온 건 미술대학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잠시 들린 것이라고는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앨리스 짓 하고 있죠 뭐.”

 

 

그 말에 잠시 마음이 덜컹거렸다. 나는 [앨리스]라는 명칭이 여기저기 사용되는 게 너무 싫다.

 

 

“뭐라고?”

 

 

그럴 때 나는 잘 안 들리는 귀를 핑계대며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한다.

 

 

“누드모델을 하고 있다고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서 대꾸했다.

 

 

“당신 누드 모델 했던 것처럼.”

 

 

“오.”

 

 

그제서야 나는 미국인이나 할 법한 과장된 제스추어를 보여주었다.

 

 

“아내에게는 왜 그런 전화를...”

 

 

“...교수님이 내게 관심이 없으니까.”

 

 

유미는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당신 어린애 상대가 아니면 안 돌아가죠?”

 

 

“유미!”

 

 

“왜. 솔직히 말하지 그래요. 조사해보니까 나오던데? 지금 부인도 나하고 9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

 

 

“총장에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맘대로 해라.”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사진 유출의 심각성을 몰랐던 게 내 한계였다. 본인 사진까지 제출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협박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러고 그냥 갈거에요?”

 

 

내가 그녀를 뒤로 하고 걷기 시작하자, 유미는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정말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한때 무척 요정같았고, 지금도 아름답지만 전혀 앨리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뒤에서 부르는 건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리배를 타는 건 어떠니...”

 

 

민희를 어떻게든 끌어들여서 정아를 만나고 싶었던 나는 유미의 일은 뒤로 했다.

유미가 뭐라고 하건 유출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테니 그녀가 움직이진 않을 터였다.

 

 

“그러지 말고 동강 래프팅을...”

 

 

정아는 엄마 말고는 가족이 없었다. 그리고 그 엄마도 새벽 말고는 시간이 없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모두들 소풍을 가면 갈데 없는 정아는 민희를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래프팅은 올해는 물이 줄어서 어렵다니까, 그냥 오리배로 낙착을 보자고...”

 

 

대충 그런 식의 결론이 났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민희가 내게 다가왔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정아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나는 되도록 온화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차분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응?”

 

 

그녀의 손이 내게 다가와 내 손을 꽉 쥐었다. 예전의 그 감촉이 아니었다.

폭신폭신한 솜사탕같은 손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날 버리지 말아요...”

 

 

언젠가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가 내게 잠시 앨리스가 되어주었을 때.

인천의 미로 박물관에서 서로를 찾다가 그녀를 잃어버린 일을...

겨우 만났을 때 아내는 내게 그렇게 손을 내밀었다.

 

[날 잃어버리면 안돼요...]

 

아마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난 당신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나도 그래.”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그녀의 머리를 내쪽으로 끌어당겨 힘껏 안아주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정아의 모습이 살아움직였다. 나의 유일한 마지막 앨리스.

 

 

 

 

오리배 타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묘하게 초조감을 느끼며 민희와 웃고 있는 정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로 내 [앨리스]가 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가 내 이야기에 공감해준다면 그녀는 그 페이지 속에 영원불멸로 남게되리라.

민희는 유미를 닮은 여자를 대학에서 봤다고 했다. 하지만 유미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자 교수님은 민희하고 정아랑 같이 타시는 게 낫겠죠?”

 

 

발랄한 청년들과 처녀들이 킥킥 거리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정한 후 남은 자리를 우리에게 배정해주었다.

아마 이 소풍으로 말미암아 몇 명의 짝이 정해질 것이다. 고루하네, 보기 싫네, 라는 설왕설래가 몇 번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소풍을 오니 다들 들떠 있었다.

 

 

“자, 갑시...어엉?”

 

 

막 배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저쪽 강끝에서 보트 하나가 서서히 밀려왔다.

오필리어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여인 하나가 두 손을 모은 채 떠내려왔다.

머리에는 화관을, 손에는...

 

결코 내가 유출시켜서는 안된다고 했던 그녀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참고인 조사로 불려갔지만, 막상 사진에 대해서는 별 말들이 없었다.

사진은 누드사진이 최근의 인기니, 흔히 있을 수 있는 거란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다시는...”

 

 

“......”

 

 

“사진 찍지 않겠다고 말해줘요. 그 어떤 사진이든 간에.”

 

 

“여보...”

 

 

“풍경사진이라도 안되요. 절대로. 이번 사건은 겨우 넘어가지만 다음번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음? 당신, 뭐 알고 있지?”

 

 

“뭘요.”

 

 

그녀도 한 때 [앨리스]였으므로 얼굴표정을 숨기는데는 다소 서툴렀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작가는 [앨리스]를 사랑하지만 앨리스 또한 [작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념의 직조와 논리의 거미줄 속에서 결말을 향해 달려갈 수는 없을테니까...

정아는 앨리스가 되지 않았고, 유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았다. 결국 내 곁에 남은 건 내 아내. 언제나 확고부동한 자리를 가질 처음이자 마지막 [나만의 앨리스]

 

이젠 죄의식에 시달리며 정아의 볼에 입맞춤하는 상상을, 유미의 엉덩이를 만지는 불쾌하고 유혹적인 나른함에 몸을 맡기는 일만 남았다. 죄의식속에서, 유미의 죽음을 은폐한 그 죄를영원히 말소할 것이다. 남편이 루이스 캐럴이라면 아내에게도 몫을 남겨주어야 한다.

그녀에게 내 인생의 몇군데를 끊어달라고 곧 말하리라.

일기가 말소되듯 내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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