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이외에는. 아니 나조차도.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만약에 신이 묻는다 해도 신은 내 소망을 알겠지만 난 아마 모르리라.
빛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한 지 정말 오래되었다. 말을 밖으로 꺼낸 지 오래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 없다.
먹을 것이 가끔 위로부터 내려온다. 토굴의 한 구석에는 쓰레기통과 화장실이 빈약하게나마 있어서 외로움을 제외하면 사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가끔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복...수라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다만 자주 들려온다는 것만 알 뿐이다.
철썩 철썩 쏴아아아아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것이 무엇의 소리일까. 말만 할 수 있을 뿐, 나가면 바깥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나 있을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어려운 단어를 배우는 건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 배운 지식을 탐욕스럽게 소화시킨 덕분에 보통의 언어수준은 되리라 생각한다.


"도련님."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문이 열렸다. 빛이 들어오고, 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는 나의 토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어느 다른 토굴 앞이었다.
그것을 토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것은 하얀 빛깔의 높은 토굴에 불과했다.

"드디어 아버님께서 분노를 푸셨어요. 도련님을 해코지하려던 자가 죽으면서 도련님의 위치를 가르켜주었답니다."


아아, 누군가의 분노로 내가 갇혀 있었구나.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가 생각이 났다.
복수.

유모라는 사람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충 정리가 갔다. 내 어머니라는 사람은 아버지 몰래 다른 정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 전 이야기라 상관없었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분노해 그 정인이라는 자를 추방시켰다.
그리고 어머니를 차지해 결혼했는데, 어머니의 순결을 의심한 아버지는 첫아들인 나를 멀리했다.
정인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나를 납치해서 어머니에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어디, 시각은 괜찮은지 봅시다."

의사가 내 눈을 만졌다. 살짝 어지러운 냄새가 나는 손가락이 내 눈꺼풀을 톡톡 두들기고 눈앞에서 움직였다.

"괜찮군요. 오랜 감금생활에도 영양이 충분히 공급되었었나봅니다. 토굴에 오래 갇혀 있어서 시각이 좋지 않을까 했지만 눈도 괜찮구요."


그래서 어머니는 그에게서 떠나 아버지에게 정착했다. 아들을 버리고.


"그 다음은 발육 상태. 흐음. 이것도 정상이군요. 좀 마르긴 했지만 뼈가 약하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작자도 복수를 그렇게 할 정도로 나쁜 인간은 아니었군요."


돌아오고 나서 이틀 째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왔다.

"아, 네가 아합이구나."

"......"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한번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가보군. 의사선생."

"말을 알기는 아는 모양입니다. 가끔 끄덕거리거나 하거든요."

"하지만 내가 제 아비인 것은 모르나 보지?"

"토굴에서 나온 이후부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사내는 글을 가르쳤다고 하니까요."

"....어차피 일평생을 토굴에서 지낼 것, 뭐하러 그런 건 가르쳤는지..."

"다 듣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그 여자 자식이니, 뭐 오죽하겠나만은...한 며칠 정도는 이렇게 해도 되겠지."


아합. 내 이름.
아버지가 내게 불러 준 이름.
그제서야 내가 원하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니?"

아버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똑똑히 들렸다.

"내가 네 아버지인것을 아느냐?"

대답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이내 내 손을 옷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좀 당황했는지 황황한 걸음으로 의사선생과 자리를 떠났다.
어머니를 만난 건 한참 뒤였다. 여기 사람들 말에 의하면 하루가 지나서였다고 한다.

"불쌍한 것."

어머니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포근한 품이 날 감싸안았다.

"널 찾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단다. 그 자가 그토록 흉폭한 자인줄 누가 알았겠나."

유모가 들어와서 어머니와 날 떼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손을 들어서 유모의 간섭을 막았다.
그리고 하녀에게 부탁해 칼과 둥그런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사각사각.
둥그런 것의 껍질을 벗기고 어머니는 내게 그것들을 조각내어서 먹게 해주었다.
달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유모를 불러 날 밖에 산책을 시켜주라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모가 칼을 들어서 어머니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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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토굴에 갇혔다. 어머니를 죽였다는 혐의를 씌우지 않기 위해서. 라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증거는 명백했다. 어머니를 찌른 것은 유모였고, 그 이외에 혐의를 가질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옛날 토굴에 다시 돌아오니 소망을 다시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건 일시적인 소란에 불과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더냐. 바깥 세상은."

익숙한 목소리가 토굴 문 밖에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내 아버지의 목소리이며, 내게 옛날에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수라고 읊조리던 사람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나보구나."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토굴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지. 네 어머니의 남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살인자."

나는 말끝을 이었다.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건조한 진실만이 있었을 뿐이다.

"아니, 네 어머니는 네 칼에 찔려..."

"아냐. 당신이 그 남자를 죽였어. 그리고 어머니는 유모손에 찔렸고..."

"벙어리인줄 알았는데 말을 곧잘 하는구나."

아버지는 껄껄 웃으면서 토굴의 희미한 달빛아래 손을 들어보였다. 어두컴컴한 토굴의 붉은 빛이 비쳐 그의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았다.

"왜 하필 그때였지?"

내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그때가 가장 네 모친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으니 말이다. 너에게 그 죄를 씌우면 더욱 좋았을 테고. 넌 정말 불쌍한 아이다. 낭랑한 목소리를 지녔으니 음유시인을 해도 잘 어울렸을테고. 정치인이 되었어도 연설을 잘 했을텐데. 어쩌자고 그런 여자의 아이로 태어나서..."

"......"

"그 여자의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그날 그놈을 죽이면서 같이 죽여버렸..."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내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내게 글씨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버지였던 것이다.
날 키우던 그 나쁜 자는 이미 없는 존재였다.

"...왜 날 토굴에서 꺼냈..."

"그 여자가 그 놈이 죽었다는 말에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이야기하면서도 난 미련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슬퍼했기 때문에...
복수를...

나는 토굴앞에 슬픈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시 자문했다.
신에게 내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나까지 죽이러 왔군. 수고스럽게도."

내 말에 이번에는 그가 침묵했다.

"불을 가져왔다."

"....."

토굴을 태울 불을 가져왔다는 말에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랬던 것이니까.
여기는 흙으로 만든 굴이고, 나는 십몇년간을 매미처럼 여기에서 내려오는 영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살아왔으니까.

"아합."

불에 타 죽던지 아니면 이 흙을 먹으며 살던지.
어차피 어느 누구에게나 비슷한 삶일터.

"...죽지마."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죽이지 말고, 죽지마."

"이때껏 토굴에 갇혀 있던 짐승 주제에 할 말이!"

그가 분노했다.

"내가 말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먹을 것을 갖다주지 않았다면 살지 못했을 이 버러지가!"

"옷도 당신이 가져다주었지. 아버지."

내가 대답했다.

"당신이 구해주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고 해. 내게 복수라는 말을 가르쳐준 당신에게 또 다른 복수를 가르쳐주려고..."

"!"''

나는 화장실 한켠에 있던 날카롭게 갈린 칼을 그에게 건넸다.

"당신에게 선택권을 줄게. 날 찔러...그리고.."

말이 끝날 새도 없이 남자의 칼이 내 가슴팍으로 꽂혀 들어왔다...
나는 흘린 피를 남자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복수를...자신에게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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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붉은 신의 문장(쿠와바라 미즈나 작, 적의 신문에 등장하는 희곡-매듀사-입니다.)
거기서는 토굴에 갇힌채 살다가, 가족에게 복수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뤘죠.
여기서는 토굴까지는 같습니다만, 복수를 하지는 않는 걸로...확실히 비교해보면 원작쪽이 파괴력이 있죠.
읽어보신 분만이 아시겠지만 약간의 향수도 담아서...;;;;,ㄲ.ㄲ
한국어판이 빨리 나와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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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를 막고 서 있었다. 모든 일은 이미 다 봐버린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내버리고 있었다.
앙상한 뼈가 부서지는 소리, 흉포한 으르렁거림, 그리고...더 이상 말할 필요 없는 침묵.
그래. 그 침묵이 무서웠던 것이다.

"왜 귀를 막고 있어?"

그 질문이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 귀를 막고 있었다. 어떨 때는 손으로, 어떨 때는 내 자의로, 내 마음으로.

"응? 들려?"

나는 잠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 소녀를 쳐다보았다.

"무엇떄문에 들리지 않는 척 하고 있었어?"

"......"

내가 있는 곳은 농아 학교다.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그런.
그런데 내 앞에 말을 하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아..."

"너도 들을 수 있구나."

내 침묵에 그 소녀가 말했다.

"근데 넌."

"나도 듣고 싶지 않은게 있어서 왔어. 그러니까 너도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

듣고 싶지 않은게 뭘까.
하여간 우린 계속 같은 일을 반복했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는 수화를 배웠고, 수학을 배웠으며,국어를 배웠고, 영어를 배웠다.
우린 항상 같이 있었지만, 둘이 같이 있는다고 해서 특별히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모두에게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3년동안 따로 가고 싶은 곳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일부러 나가고 싶진 않았다.

"네 집은 어떤 곳이야?"

그녀가 묻는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풀밭에 말라빠진 나뭇가지를 들고 그림을 그렸다.
네모난 모양에 세모지붕.
그리고 지붕 위에 고양이 한마리. 고양이는 밤처럼 새카맣고 달처럼 가는 노란빛 울음을 운다.

"왜 도망쳐나왔어?"

그녀의 말에 난 되묻는다.

"넌?"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갖고 싶은 게 없거든. 하지만 넌 고양이가 있잖아. 노란색 달같은."

"......"

내게 있어서 집이란 건 고양이가 있는 집일 뿐이었다. 내가 돌아가야할 이유가 있는 건 바로  내 옆에 착 달라붙어있는 고양이 미유...그밖의 다른 것은 관심이 없다.
내 귀가 내 자의로 멀어버린다는 건 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 밖에 없어서 그래."

"...고양이나 있는 거야."

그녀가 떠다니는 구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는 구름이 고양이 구름이네..."

핥작하고 고양이가 내 다리를 핥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 내 미유가 그랬던것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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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려 문을 부숴 들어가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성문은 굳게 잠그고
창문은 살짝 열어놓았지
당신은 이미 날 본 순간
놓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순 없지.
당신이 맘에 들었으니
문고리 정돈 풀어줄게
문은 열어주진 않아.


두들기는 소리에 맘이 약해져
그래서 나도 모르게 대답하곤 했지.
하지만 거기까지.
문지기 없는 성
문 여는 건 당신의 몫이야.


가장 좋은 건 
연못의 거위에게 물어봐
열쇠를 삼킨 그 거위에게
나도 모르게 문 열어줄까 싶어
던져버린 열쇠의 행방을 아는.


사랑이란 알 수 없는 것
두드리기 전, 부수기 전
본래 잠겨 있던 걸 살짝 풀어주는 것.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새로운 위험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사랑인가
난 알던  것조차 잊었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그대를 그래서 사랑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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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2015-01-3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란도트의 공주의 맘을 이해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쓰다보니 공주의 맘을 알것같기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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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바다에서 단 한번도 꺾인 적 없는 연꽃을 꺾은 이여.
연꽃위에 발끝을 올리고, 그 파도를 넘은 이여
파도, 그 무한의 열반에서 떠나
고뇌로 가득찬 세상으로 들어온 이여.
그대에게 간구하노니.
세상은 어째서 이리 혼탁한가.
그대는 우리를 구하려 왔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영원의 얼굴을 한 억겁의 분쟁을 던지러 왔는가?
우리에겐 단 한번의 안식도 주어진 적 없나니.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기 천년이 지나도 알려진 바 없음일세.
신이 없음을 논하지 마라
다만 우리에게 신이 하나의 얼굴이 아님을 논하라.
그대는 그리 말하지만, 그것은 고통 중의 고통
발에도 못이 박히고, 손에도 못이 박혀
한모금의 액체도 넘기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해골의 골짜기로 올라가는 저 무수한 자들을 보라.
그대, 안식을 베풀라.
우리에겐 그대같은 힘이 없기에
100년이고 200년 아니, 무한의 시간을
허무한 장난질로 보내고 마지막 순간에야
신의 손가락을 잠시 만질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라.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버거우니
그저 손가락 한번 만질 수 있는 시간만.
오로지 그것만 나 기도하노라.
신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절벽의 꿀을 핥듯 그렇게 기다리고 있노라고.
부디, 그 꿀끝에 독이 묻어 있더라도
오랜 기다림에 지친 불신자.
영원의 잠을 선택하여 안식을 구하고자 할지니
우리를 구하러 온 그대여.
부디 우리를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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