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나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애인을 사귀자마자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애인과 고양이 이후로 개도 키우기 시작했다. 애인과는 3번까지 헤어져봤으며 4번째 헤어졌다 만났을 때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3년만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큰 아이가 태어난 후 2년째 되던 해에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쌍둥이가 태어난 뒤 고양이가 새끼를 5마리 낳았고, 늙은 개가 죽었으며, 죽은 개를 이어서 유기견 3마리가 입양되어 왔다. 새끼 고양이 2마리는 다른 집으로 입양되었고, 1마리는 죽었다.

그렇게 우리집의 생태계는 변화무쌍하게 변화했다.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 정도일까. 나는 이름이 크게 나지는 않았지만 프로 목수였기 때문에 가족이 늘어날 때마다 캣타워니, 요람이니 같은 것들을 만들어 아내를 소소하게 기쁘게 했다.

어제 오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들이 내 다리에 매달렸다. 나는 아이가 묵직하다는 걸 알았다. 몇 개월 되지 않은 생명체인데도 이렇게 무게가 많이 나가다니...

그제서야 진짜 생명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내가 목공품을 만드는 진짜 이유도.

나는 나무를 사랑하듯,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입양견들과 고양이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무가 묵직한 따뜻함을 지녔듯이 생명체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나는 아들의 묵직함을 느낌과 동시에 또 다른 존재를 내 집에서 발견했다.

그건...

 

[절 베지 말아주세요.]

 

집 뒤에 30년된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가 태어난 뒤에 심으신 것인데, 아마도 내 결혼식때 태우려고 준비하신 나무인 듯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들려주신 말이 있었다.

 

지우야. 자작나무의 어원이 뭔지 아니?”

 

아니오...”

 

그때 나는 대를 이어 목수가 되라는 아버지에게 반항 중이어서 나무와 관련한 말은 듣기도 싫어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부드러운 말이라도 듣기 싫었다.

 

저건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단다. 원체 기름기가 많아서... 결혼식 때 태우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지.”

 

결혼식때 태우면 좋은 소리가 난다...그렇게 아들의 결혼을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남겼던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기 3년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자작나무가 캣타워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런 존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무에 손을 갖다대면, 나무가 말을 했다.

그건 처음 아들이 돌을 지났을 때 장난감을 만들어주려고 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절 베지 마세요.]

 

?”

 

처음에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밀려오는 일거리때문인 줄 알고 말 그대로 전기톱으로 베어버리려고했지만 날카로운 음향이 귀를 파고들었다. 귀에 고통이 밀려왔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 나무 말하는 건가?”

 

[. 제가 말했어요. 절 살려주세요.]

 

자작나무는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저는 당신이랑 나이가 같아요. 그러니까 당신의 형제이기도 한거죠. 베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형제를 베진 않을 거잖아요.]

 

형제고 뭐고를 떠나서 실수로 긁기만 해도 엄청난 소리를 내는 탓에 나는 그 자작나무를 내버려두었다. 싫어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등등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자작나무가 어째서 희생적인 나무라고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목수 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 이틀, 135년이 흘렀다.

자작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다 베어져가는 동안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가끔 내가 다른 나무들을 베러가거나 숲에서 산책을 하고 있으면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우산을 준비하세요. 비가 오려고 해요.]

 

알았다.”

 

아들의 묵직함을 발견한 순간, 또 발견한 하나의 이상한 생명체. 처음에는 귀가 시끄럽고 귀찮고, 열받았지만...그래도 썩 나쁘진 않았다.

 

[옆동네 물푸레나무는 베지 마세요. 많이 아프다고 해요.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거에요. 가구로 썩 좋지 않아요.]

 

자신이 베이는 건 싫어하면서 다른 나무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이걸 가르켜서 여우같다고 하는 건지 어쩐 건지...

 

비가 좀 온 날이 있었다. 오전이 맑았기에 오후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딱 자작나무 밑에 올때쯤 되자 비가 똑똑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가방은 내가 들고 있었는데, 그 가방 안에는 미술수업 과제물이 들어 있었다. 물이 배이면 안된다고 징징대는 아이 때문에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근데 갑자기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점점 줄어들었다.

 

[저한테서 비를 피하세요.]

 

자작나무가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굉장히 귀엽네요. 당신도 작은 시절에는 꼭 저랬어요.]

 

자작나무의 친절에 당황해서 하늘 쪽을 쳐다보니 자작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모아서 비를 막고 있었다.

 

고맙다.”

 

[별 말씀을]

 

아빠.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에요?”

 

자작나무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끔 나와 자작나무의 비밀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작나무에 기어오르기도 했고, 가지를 말 타는 것처럼 타고 흔들어대다가 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작나무는 소리내지 않고 꾹 참았다가 내가 자신을 만나러 가면 이야기했다.

 

[이쪽 가지는 남자 쌍둥이가 말을 타던 가지고...]

 

상처투성이였지만 자작나무는 행복해보였다. 내가 발견하기 전 자작나무는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였을 것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작나무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쌍둥이도 큰 아이를 이어 학교에 들어가던 날, 자작나무는 소리없이 자신의 가지로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쌍둥이는 자작나무를 끌어안으며 좋아했지만, 이내 학교에 적응하느라 자신들의 자작나무를 조금씩 잊어갔다.

 

큰아이와는 달리 쌍둥이는 자작나무를 그렇게 길게 기억하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이내 나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게 되었다. 내가 자작나무를 만나게 된 이후 거의 10년만에 자작나무는 처음으로 전기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도 그 전기톱 갖고 계신가요?]

 

? 그건 왜? 전기톱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왼쪽 가지가 근지러워요. 잘라서 쌍둥이 그네를 만들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저쪽 늙은 소나무 밑에 매어두면...]

 

하지만 난 차마 그 가지를 베어낼 수가 없었다. 대신 조그만 나무를 하나 구해 가공해서 자작나무 밑에 달아주었다. 그네를 아이들이 좋아하면서 타자 자작나무도 기뻐했다.

 

당신 아버지 말야.”

 

아내가 어느 날 내게 지나가듯 말했다.

 

내가 당신이랑 결혼할 수 있었던 건 다 아버님 덕분이야. 당신 그거 알아?”

 

“...?”

 

몇 번의 헤어짐 끝에 결혼한 것은 모두 다 나의 지극한 사랑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찔끔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사라진 오전에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내 아버지가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오동나무를 심었던 이야기와, 내 나이에 맞춰서 키운 자작나무를 보여준 이야기 등등.

 

아버님이 그러셨지. 미숙한 자작나무지만 잘 부탁한다고.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면서 밝은 빛을 내는 나무라고. 내 아들은...희생적인 아이라고. 그런 의미로 저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말이야.”

 

사업에 큰 불운이 닥치지만 않았어도 나는 죽 이렇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공사업은 항상 그렇듯이 큰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더더군다나 공방에는 시골이라 사람들도 잘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내 중학교에 들어갔고, 더 이상 그네를 타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교육이 필요했고, 사업이 쪼들리면서 한군데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양이들이 입양처를 향해서 떠났고, 그 뒤에는 그동안 불어난 개8마리가 각자의 입양처로 떠났다. 그 다음은 우리가 될거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나무들을 팔았다. 처음에는 오래되고 좋은 적송을 팔았고, 그 다음에는 조경용 물푸레나무를 팔았으며 수령 64년 되는 산수유나무 밤나무 등을 팔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작나무가 남았다.

 

[오래간만이네요.]

 

나의 자작나무는 늙었다. 내가 늙어가는 것보다 더 사람같이 치매에 걸린 것 같았다. 하긴 동료들의 비명소리를 하루하루마다 들으니 그렇게 변해버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그래요...이제 떠나는 거군요. 부탁이 하나 있어요.]

 

?”

 

[혼자 있기 싫어요.]

 

그래도 어쩌겠어. 이젠 헤어져야 해. 너도 알잖아. 벌목꾼들이 오면서 하는 말 다 들었을거잖아.”

 

[베어가주세요.]

 

? 너 그렇게나 베지 말아달라고 했었잖아.”

 

[외로워요.]

 

자작나무는 잎을 떨구었다. 아마도 나무들 세상에서는 그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일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자신의 형제를 해치는 사람은 없어. 자작나무야.”

 

[하지만 당신이 가고 나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절 베려고 할걸요.그건 당신도 알잖아요.]

 

자작나무는 내게 노래를 하나 들려주었다. 나무의 음성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숲들이 나를 지켜보고 키워왔던 이야기...

나는 노래를 뒤로 하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자작나무를...벨 수 없었다. 이미 내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래전부터 자작나무는 물건이 아니라 내 형제였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빠른 시간내로 돌아와 자작나무와 함께 하리라.

그것이 나의 생태계이므로. 나의 숲. 나의 형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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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하시겠어요?”

 

그들이 만난 건 [태인]이라는 카페였었다. 그는 그날따라 자주 애용하던 스타벅스에 자리가 없어서 [태인]에 와 있었다. 태인은 운이 없는 카페 중 하나였다. 원래도 그렇게 손님이 많은 카페는 아니었는데 운이 나쁘게 [스타벅스]가 옆에 생기면서 손님들이 거의 다 떨어뎠던 것이다. 그렇다고 슈퍼 바리스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스타벅스에서 밀려나오지 않는 한은 항상 한적했다.

 

그가 주문한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 노트북을 켜서 작업을 증간정도 했을 때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서 그는 우선 노트북에 꽂아놓았던 눈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렸다. 눈만.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아니, 눈보다는 목소리가 먼저 대답했다. 그 다음 눈이 그 상대방을 응시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차 한잔 저랑 같이...”

 

그는 깜짝 놀랐다. 그건 토끼였다. 그것도 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토끼.

소설 속에서 주인공 토끼는 보름달이 뜨는 밤, 차를 마시고 컵에 남은 차무늬를 보고 운명의 상대를 결정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토끼는 고향을 떠나 같이 차를 마실 사람을...

 

아니, 왜 하필 나를...”

 

“...소설가시잖아요. 제 운명을 결정짓는...”

 

그가 적은 부분은 운명을 찾아 떠나온 토끼가 한 남자에게 차를 같이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토끼가 맹랑하게도 페이지를 탈출한 것이었다.

 

“......”

 

전 이대로 사라질 수 없어요.”

 

뭔 뜬금 없는 소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알았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토끼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 후 갑자기 사라지는 결말을 정해놓았다.

 

“......”

 

사라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차를 같이 마실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였다.

 

왜 하필 나를...그런다고 내가 네 결말을 바꿀거라고 생각해?”

 

그럼 왜 하필 제가 사라져야 하죠?”

 

태인의 무심한 주인장은 토끼가 말을 하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카페에 따로 찻잔과 차를 들고온 토끼가 있는데도.

 

잠깐만. 어째서 네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결말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거짓말이지만, 사실 비슷한 이야기기도 했다.

결말은 정해놨지만 결말까지 가는 중간 내용은 구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결말을 읽고 왔으니까요.”

 

“...?”

 

위대한 토끼는 응차~ 라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앞의 빈 공간을 향해서 앞발을 내밀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의 앞발에 어울리는 작은 책이 떨어져내렸다.

이걸 읽었죠. 2014611쇄 찍은 책이에요. 제목은 위대한 토끼에 대해서 말하다.”

 

“....잠깐만 그거 이리...”

 

 

줄거리 변비와 아이디어 고갈로 숨이 목에 찬 그가 토끼가 꺼낸 책을 뺏으려고 한 순간.

토끼는 잽싸게 또 빈공간을 향해서 그 책을 던져넣었다.

 

안돼요. 이걸 보면 그대로 쓰실 거잖아요.“

 

!”

 

저랑 차 마셔주시면 보여드릴게요.”

 

토끼는 우아한 자세로 티포트와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저랑 같이 차 마셔요.”

 

좋아.”

 

스토리 변비와 우울증에 가까운 아이디어 고갈증상을 보이던 그는 결국 승낙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감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이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 계열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차는 무슨 차야? 기왕 마시는 거 복숭아차로 줘.”

 

.”

 

토끼가 앞발을 들고 찻잔을 그에게 주었다. 앙증맞은 찻잔을 보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이제는 소설속의 주인공에게 협박까지 당해야 하다니...

 

근데 이상한데?”

 

?”

 

오늘은 보름이 아닌데?”

 

“......”

 

토끼는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빙긋 웃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다 마시시면 그 책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그에게 복숭아차를 내밀었다. 그는 기분이 찜찜했지만 홀짝 한 모금 넘겼다.

 

뭔가 속는 기분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태인의 주인장은 그가 사라진 의자를 바라보다가 잠시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아까전까지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던 그가 있었다. 태인의 주인장은 토끼도 봤지만 워낙 무심한 성격이어서(아마 그래서 연쇄적으로 들어왔던 스타벅스나 핸즈커피를 당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간단하게 토끼를 향해서 말했다.

 

리필?”

 

“.....”

 

토끼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 남자가 쓰던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끼가 계속 뭔가를 칠수록 노트북 화면은 마치 지우개로 지운것처럼 내용이 사라져갔다.

 

“......”

 

토끼는 계속 내용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았다. 남자가 사라지면서 남자가 쓴 내용은 몽땅 다 사라져버렸다. 심지어는 토끼의 몸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내용을 쓰는 것이 소설가였으니 토끼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토끼는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앞발을 빈공간으로 내밀었다.

그 빈공간이 열리면서 아까전에 토끼가 소설가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그 책이 나타났다.

하지만 토끼가 앞발로 그 책을 집어들면서 책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토끼는 울면서 사라졌다.

 

리필?”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샌가 노트북을 베고 잔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북북 긁다가 무심한 [태인]의 주인장을 향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메리카노로.”

 

...”

 

그는 아까 전에 한 사분지 일 정도 두드리던 내용을 찾았지만 노트북에서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 큰일났다. 내일 모레 마감일인데. 쓴 부분도 몽땅 다 지워졌어.”

 

“......”

 

결국 그에게 남은 건 달콤한 한순간의 낮잠과 텅텅 빈 노트북 화면 뿐이었다.

그는 리필하고 남은 아메리카노를 여유있게 마시는 주인장을 흘끔흘끔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다시 내용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그 낮잠의 내용이 그에게 막힌 스토리의 맥을 잡아준 것이었다.

그는 무심한 주인장이 있는 카페에 등장한 토끼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그 소설은 본래 나오기로 한 출판사에서 진통을 겪다가 출판사를 바꾼 이후 소설에서 동화로 바뀌어서 책이 나왔다. 바로 201461일 일쇄를 찍은 바로 내 손에 들린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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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요곡의 일부분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성주는 그 음악을 들으면 미친다고 했지만, 채록하기 위해서 나서면서 들은 것은 그의 말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포교사라는 자와 접촉을 한다. 그자는 그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라는 것을 하며 [포교]라는 것을 하면서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것은 역시 기도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하늘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천사]요곡이라고 불리고 있다. 하지만 천사요곡은 단 한곡이 아니었다.

 

이것을 알려준 이는 천사요곡과는 거리가 크게 먼 귀머거리였다.

그는 손짓발짓으로 그들의 모임에 대해서 전해주었는데 귀만 먹은 것이 아니라 말까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다만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고문의 후유증인 듯 싶었다.

그것이 최근에 일어난 잔혹행위인 듯 했으므로 나는 내 업무에 이 진상파악도 끼워넣었다.

 

[잔혹하여라. 그대의 옆모습. 왜 날 외면할까.]

 

쟁쟁거리는 악기소리가 귀에 울렸다.

 

[돌아가라 말하네. 나의 당신.]

 

유랑안은 사랑의 노래를 금지한 적오와는 달랐다. 노래를 팔아 먹고 사는 가인들이 사는 곳이었고, 바다가 가까워 염전이 발달한 곳이었다.

소금은 귀한 조미료이므로, 이곳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에 이곳 사람들은 감정표현도 풍부하게 했다.

 

[목석같이 딱딱한 남자여.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세 번째 음계에 도달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적오의 음성임을 알 수 있었다.

 

요망한 것!”

 

검을 빼어들었지만 이 노래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지를 못했다. 검만 빼들어봤자 내 행색만 우스워질 뿐.

 

[당신은 어쩜 이리 무정할까.]

 

쟁쟁거리는 음악에 귀를 막았다.

 

날 언제 봤다고 네까짓것이.”

 

“...어머나?”

 

그 노랫소리를 듣는 동안 주의를 경계하지 않고 있었던 탓일까.

어느샌가 적오가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간 채록을 하면서 주의를 흐트린 탓이었을 것이다.

 

튕길 줄도 아시는군요. 확실히 한때 강호의 풍류남이라 불릴 만 하군요. 호호.”

 

적오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래. 무정하신 분, 올해는 황산의 자무홍을 보셨나요?”

 

“.....”

 

잠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현기증이 들었다. 말하는 대신 나는 전하와 폐하께 하사받은 검을 휘둘렀다.

그저 감정적이어서 맞을리도 없었건만. 자무홍 이야기는 언제나 날 평정을 잃게 했다.

 

그래서야 어디 맞기라도 하겠나요.쯔쯔.”

적오는 세련된 동작으로 등 뒤에서 검을 빼들었다. 우선 검법을 시험이나 하는 듯이 검을 들었다가 내렸다. 쩡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흔들렸다.

 

네가 어떻게 자무홍을...”

 

적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답니다. 모르는 게 없죠.”

 

“......”

 

검끝이 내 수염 끝에 닿을락 말락했다.

나도 평정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도 검을 천천히 앞으로 두었다.

 

자무홍까지 알면 다 아는 것이겠지. 내게 그녀는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네 무엇을 알까...그런 점에서 네가 내 앞길이지만.”

 

살짝 검과 검이 부딪쳤다. 쩡하는 소리가 다시 났고 적오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내가 앞길이다.”

 

나는 부딪쳐오는 그녀의 검을 피하면서 발로 그녀의 무릎을 걷어찼다. 적오는 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검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

 

너는 내 과거만 알게 될뿐.”

 

그렇다면 이번에도 제 앞길을 막으실 건가요?”

 

무릎을 걷어차여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본체가 아니라는 뜻.

 

네 길이 올바르면 어느 누가 널 막겠냐만서도. 네 일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 지루하군요. 짧게 정리하죠.”

 

그녀가 검으로 살짝 내 뺨에 상처를 냈다.

 

내가 요물이기 때문에 안된단 말이죠.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나는 상처를 굳이 막을 생각은 없었다. 이길 생각도 없었다.

자무홍 꽃이 피던 자리에 있던 옛날 그녀의 자리.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검을 검집에 도로 넣었다.

 

재미없네요.”

 

적오도 검을 도로 넣고는 가벼운 동작으로 발을 다시 굴렀다.

 

당신같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까? 사건 추적하는 재미?”

 

“......”

 

저런 요물이라면 나라 하나 주물럭거리는 놀이를 하는 유치한 것일수도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저것을 의식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하나 더 알려드리죠. 이번 사건에 전 결백해요. 높은 사람들을 좀 더 관찰해보시죠. 그럼 답이 나올테니. 천사요곡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노래 채집에만 시간을 더 넣지 마시고. 그래야 당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전하나 폐하를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방안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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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에서 기다리겠어요. 대협.>

 

 

그것은 안개였다. 자무홍의 꽃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었을 때 그녀는 뒷모습만으로 그를 만났다.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뒷모습뿐이었다. 말에 앉아서 타는 금을 들고 그녀는 그를 떠났다. 언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황산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황산에서...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강호의 옛 법이 그를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원수로 쌓아온 생활이 언제던가. 그는 그녀의 금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적을 연주했다.

 

채미홍.”

 

그러다가 독주를 마시기도 하고, 원수를 맺기도 했다. 원수의 검에 찔린 적도 있고, 원수를 죽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발을 더욱 강호에 붙들어매었다.

하지만 그가 강호인이 아닐 때가 있었다. 패설사관 채미홍을 만날 때만큼은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채미홍은 처음부터 끝까지 땅을 밟고 서 있는 자였다.

강호와는 달리 황제의 명을 받드는 자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그건 어쨌든 좋았다.

 

수린의 금은 여전합니까?”

 

자무홍꽃밭을 떠났던 하수린은 금을 켜는 가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는 악기 하나 못 다루던 그였기에, 그녀를 다시 만나면 적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채미홍은 말을 아꼈다. 그는 말 대신 미축에게 적을 연주하도록 권했다.

미축은 적을 입술에 갖다댔다. 채미홍이 갖고 온 남쪽 봄날씨는 하수린의 옷깃의 향기같았다.

 

“.....”

 

연주는 처음에 평탄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휘몰아치듯 감아올렸고, 그러다가 애조를 띄었으며 마지막에는 울음으로 끝났다.

미축은 울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채미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와 자네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가 수린에게 독을 먹였다네...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지.”

 

그니는 황산에 있었습니까?”

 

그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황산 자무홍꽃 밑에 잠들었다네.”

 

미축은 다시 적을 들었다. 자무홍꽃 냄새를 기억하려고 했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역시 그곳에 갔군요...이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테니...곧 만날 수 있겠군요.”

 

떨리는 손으로 미축은 적을 잡았다.

 

미홍.”

 

? 왜 그러는가?”

 

긴 거리를 다니시느라 항상 힘드시겠습니다. 위협도 항상 받으실테고...”

 

별로 힘들지 않으이. 자네같은 검객이 내 뒷배를 봐주지 않는가. 다만 항상 아쉬운 것은...”

 

미홍이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동네 동네 돌다보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많이 듣는데, 나같은 사람이 많아야 그걸 다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지. 얼마 안되는 한줌이 모여서 이 대륙의 이야기를 다 엮지는 못할 것 아닌가...”

 

“......”

 

미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속에서 미홍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참 뒤에야 미축은 이런 말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듣겠군요.”

 

미축은 2년 뒤 왕의 표식을 전해받고 패설사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대륙의 최남단 황산에서 잠든 그니의 묘지를 찾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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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남자가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다거나.

나는 자전거 안장을 풀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동거생활을 시작한지가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째서 계속 이런 불협화음이 생기는지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한 건 안장을 다 뜯어낸 후의 일로, 나는 그 순간 그 남자의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흐뭇한 생각을 지우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앞으로 내가 타던 이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집을 떠나온 후로 나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기도 하고, 대형 이자카야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봉제인형에 눈을 붙이는 고전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서 단순작업인 아르바이트에는 큰 돈을 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월세값을 내기도 힘들었다.

비오는 날에 공동화장실이 달린 다세대 주택에서 달팽이를 발견하고 힘겨운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그렇게 집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때 그 남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미건아.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쫀쫀한 성격의 그라면 처음부터 내 안장 내놔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굽히는 전략으로 시작했다.

 

“.....”

 

힘들거라고 생각해. 네가 일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잖아.”

 

“.....”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어. 어린애를 꼬여낸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내가 물론 너한테 멋대로 한 건 사실일지만 너도 알잖아. 넌 어린애같은 사람이라고, 이런 생활 오래 못 견딜거야.”

 

여러분이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마 이 남자가 생각하는 모습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난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자전거 안장 일은 다 용서할게 네가 뭘 알아서 그랬겠어?”

 

“......”

 

“......”

 

잠시 공백이 있었고, 난 다시 유혹에 빠졌다. 인간취급을 안 하면 어떤가. 이 남자에게는 집이 있었다. 적어도 떠들지만 않으면, 입을 열지만 않으면 집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딸칵.

 

기회를 줄게. 3시간 뒤에 전화줘.”

 

왜 그 남자가 끊을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는지 속상했지만 적어도 집은 생기는 것이다. 집이 생기는 것이다. . . . . . . ,

나는 다세대 주택 화단에서 발견한 달팽이를 생각했다.

난 왜 달팽이가 아닐까.

왜 난 집을 안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달팽이의 집이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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