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이 그립소. 당신의 팔이 그립소. 그리고 당신의 손가락이 매만지던 당신의 목이 그립소. 왜 당신은...

 

복고당과 혁명당의 로맨스라고나 할까. 처음 이 편지를 읽고서 지오는 할 말을 잃었다.

복고당의 그 깐깐하기 그지 없던 남자가 이렇게 무드 있는 편지를 남길 줄 이야.

 

 

“저보고 설마 이걸 다 읽으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녀는 당수를 향해서 편지를 흔들어보였다.

 

 

“저자는 반동이라고요. 미쳤어요!”

 

 

“...반동이긴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네. 동지. 그런 발언은 삼가게.”

 

 

“몸 반이 날아갔는데 위대한 예술가는 얼어죽었답니까? 위대한 예술가니까 어쩌구저쩌구해서 살아남은 반동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건 당수인 나에 대한 도전으로 봐도 되겠나? 부관?”

 

 

그제서야 부관 지오는 입을 다물었다. 혁명당의 당수인 로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격분하는 건 이해하네. 자넨 여성 동지 중 최초로 내 부관까지 오른 인물이지. 그러니 여성성에 대해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의 하반신을 잘라낸 테러가 바로 당수에 의해서라는 것을.

 

 

“스스로의 행동에 반성이라도 하시는건가요. 당수님?”

 

 

“반성은 안 하네. 나도 이 나이가 되다보니 조금은 편안한 임종을 맞게 해주고 싶어서.”

 

 

지오는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인텔리라는 이유로 하방을 지시받은 그녀의 부모들은 연줄이 있어서 살아난 다른 인텔리들과는 달리 운이 없었다.

결국 돼지감자만 캐어먹다가 죽고 말았는데, 그 이후 그녀는 이중인격적으로 무사히 살아난 인텔리를 반동이라고 규정했다. 지금 당수가 편지를 읽으라고 건네준 편지의 주인공인 인텔리 루카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아니, 다른 인텔리들의 우두머리로 혁명당과 한판 붙기도 했다.

 

그 전쟁은 숫적으로 적은 복고당의 대실패로 끝났고 우두머리인 루카는 폭탄과 총탄에 누더기가 되었지만 놀라운 과학기술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어째서 혁명당이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 그녀는 늘 생각해보곤 했지만 아무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복고당의 또 다른 반동 피라 모욥을 찾아내서 이어주자는 건가요? 저 백발이 성성하고 몸뚱이 절반만 남은 저 반동한테! 그 아줌마도 테러당했다면서요? 그리고 피라가 다른 일도 아니고 복고당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지원군을 찾아다녔다는 것도 뻔히 아시면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에요? 미치셨어요? 당수?”

 

 

루카 치온 그는 전세기의 유명한 예술가였다. 디자인과 글의 영역을 넘어선 거장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까지 강성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핀들래인 왕국이 멸망하자, 그 자리에는 핀들래인 총리의 편을 드는 복고당과 그 반대편인 혁명당이 들어섰다. 벌써 실패한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어디서나 정치는 비슷한 법인 모양이었다. 서로간의 격돌이 심해졌고, 그 와중에 문화부 장관자리를 차지한 루카는 혁명당을 쫓아내기 위해서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혁명당의 당수인 로인은 한가지 꾀를 냈다.

바로 예술가인 루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방법은?

세상이 몇백번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던 한가지 방법. 미인계.

 

“그러니까 가서 그 편지를 읽게나. 지오 동지.”

 

 

“...왜 꼭 저죠?”

 

 

지오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피라 모욥은 애초에 루카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임종이 며칠 뒤라더군. 임종학 박사가 그렇게 말한 걸 보니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어차피 죽을텐데 희망은 남겨둬야지.”

 

 

지온은 툴툴거리면서 편지를 당수앞에서 예습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랑하는 루카.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오렉 산맥을 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겠습니다. 구원군 모집은 실패했습니다.

복고당은 남부와 서부에서 궤멸당했고, 조만간 동부도 함락될 것 같습니다. 나는 혁명당의 온건파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붉은 방>으로 날 데려갈 생각인 듯 합니다.]

 

 

그 중간에 지온이 로인에게 눈을 돌렸다.

 

 

“당수. 붉은 방이 뭐죠?”

 

 

“그냥 예습할 필요도 없겠군. 그렇게 곤란한 질문을 하면 질문할 때마다 대답해줘야 할테니. 자넨 몰라도 돼. 어서 루카한테 가서 읽어줘.”

 

 

지오는 툴툴거리면서도 당수의 방을 나와 침대에 누워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루카에게 그 편지를 읽어주었다. 루카는 눈만 살짝 떴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방이 도대체 뭐야. 늙은 동지?”

 

 

지오가 빈정거리듯 루카에게 말을 걸었다. 루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이내 돌아누웠다.

 

 

“붉은 방이라...”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루카의 희미한 이 반응은 지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고문과 테러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심지어 마취없이 다리를 잘라낼 때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던 인물이 아니던가?

 

 

“피라가 성공했군.”

 

 

뭔놈의 일이 이리 복잡해? 라고 생각한 지오는 당수에게 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붉은 방이 뭔진 모르겠지만, 반동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게 당수가 하는 일인가요? 다음 즉결재판때 당수를 피고로 세워도 아무도 말 안 할걸요?”

 

 

로인에게 딸처럼 키워진 지온이기에 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기뻐하더란 말이지?”

 

 

“네.”

 

 

“그럼 잘됐군. 피라의 행방이 중요해졌군. 계속해서 편지를 읽도록 해.”

 

 

지온은 인텔리의 자식이었지만 사회적 지식이 일천했다. 그래서 종종 인텔리들을 비하하면서도 그들이 남긴 유산을 읽어보곤 했는데, 그날의 당첨은 세계사와 과학사였다.

커리큘럼은 항상 로인이 짜주곤 했는데, 당수의 딸처럼 크다보니 지온은 모든 지침을 로인에 맞춰서 따라갔다.

 

 

[오렉지방에서 피라 모옙은 당과 모든 연결이 끊어진 채로 붉은 방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의 연락을 받은 지원군이 갑자기 실종되는 일이 일어났다. 동부 지구에서 가장 최극단에 있던...]

 

 

“지오동지?”

 

 

그녀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이재민이 그녀를 부르러 왔다.

 

 

“왜 그러시죠? 재민 동지?”

 

 

그녀의 말에 갈색 머리카락의 훤칠한 청년인 그가 얼굴을 붉혔다.

 

 

“루카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변태 노친네 같으니!”

 

 

낯뜨거운 피라와 루카의 편지를 읽느라 짜증난 지오는 그렇게 내뱉고는 루카의 호출에 응했다. 물론 당수가 감시하지 않으니 그 와중에 루카에게 욕설섞인 폭언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늘 그렇듯 눈을 반쯤 감은 루카는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다음 편지를 읽을 것을 주문했다. 로인이 준비해준 편지는 약 몇 십통은 남아있었다. 언제까지 그에게 편지를 읽어줘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막막한 일정을 마치고 나가려는 지오에게 루카가 말했다.

 

 

 

“이름이 뭔가? 신병.”

 

 

“...난 신병이 아냐. 당수님 부관이라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반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루카가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랬겠지. 하긴 그녀도 처음엔 부관이라고 하더군.”

 

 

<그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오는 더 이상 들척치근한 편지를 읽는게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2통 읽었는데!

 

 

“개미 좋아하나? 혁명당의 모토가 그거지? 개미를 닮아라.”

 

 

“그래서 뭐.”

 

 

“개미는 개미다워야 해. 개미는 2차원밖에 모르지. 그 개미를 성층권에서 떨어뜨린다고 개미가 3차원을 이해하겠나? 하지만 이럴 수는 있겠지. 2차원의 자신도 잊어버릴 수도..."

 

 

지오는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개미타령까지 하는 그에게 진력이 나버린 탓이었다.

피라도 처음에 그랬다는 것을 지오는 알 수 없었다.

 

 

“땡감 씹어먹은 표정 하지 말고 악수나 합시다.”

 

 

루카는 자신의 비서로 온 피라 모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모욥은 그의 악수를 피했다.

피라는 가볍게 목례를 함으로서 우선 곤란함을 지나쳤다.

 

 

“아쉽군.”

 

루카는 혀를 끌끌차면서 모욥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주었다. 모욥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잡았고, 그것이 반지라는 것도 이내 알아차렸다.

 

 

"장관님!“

 

 

의아함과 경멸의 반응에 루카는 고개만 저었다.

 

 

“내가 그토록 바보로 보이오? 피라 모욥? 당신네 당수도 마찬가지지. 당신은 내 취향에 너무 잘 맞는 여자야. 그래서 유혹 좀 해보라고 밀어넣었겠지. 당신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억지로 온 거고. 나는 솔직합니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소. 처음 부터.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마음에 들면 그 반지를 껴주면 좋겠소. 자세한 사이즈를 알고 싶었는데 그렇게 거부를 하니 알 수가 없군. 사이즈가 안 맞

아도 억지로 껴주길 바라오. 날 좋아한다면.”

 

 

그 이후부터 피라 모욥은 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그 반지의 사이즈를 고쳐서 끼고 다니는 것을 본 당인 혁명당에서도 알게 되었다.

 

 

“출당하겠습니다. 로인.”

 

 

혁명당은 과격파의 집단이었다. 군주가 지배하던 시절, 비행기를 납치해 극동지역까지 끌고 간 자들이 있던 집단인 만큼 출당은 반역이며 사형집행까지 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날 이해못합니다. 루카 치온. 내가 근 20년을 몸담아온 곳이 혁명당입니다. 거길 버리고 당신의 부관이 된다는 것은 내게 사랑과 일을 함께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은 항상 당신 곁에 있겠지만, 과연 출당이 옳은 행동인지 의문입니다.

루카. 당신은 문화 혁명당원을 모조리 현직에서 쫓아냈는데 그들은 당신의 원수이기 이전에 당신이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입니다.>

 

 

이 편지가 실제로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아, 그랬지. 피라가 그렇게 말했었지.”

 

 

반신불수의 노인 치고는 입성이 깔끔한 루카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루카...”

 

 

지온의 말에 루카는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게. 부관.”

 

 

<당신은 내게 늘 말했죠.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겠소? 하고. 혁명당을 제거하는 일만 빼면 당신이 하는 일에서 내가 불만을 가지는 일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당신은 내게 완벽한 사람이었답니다. 당신은 항상 내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고, 인민들을 위해서도 그랬어요. 단지 방법이 글렀을 뿐.>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시죠. 부관님.”

 

 

장난스럽게 루카가 말하자 피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아까전에도 머리를 만져줬잖아요. 루카. 계속 그러면 습관된다고요.”

 

 

“붉은 방으로 당신이 떠나면 만져줄 사람도 없다오. 붉은 방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했었나?”

 

 

“아니오. 루카.”

 

 

거기까지 듣고 지오는 돌아왔다. 로인은 그날따라 일이 안 풀렸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상황이 안 좋네. 지오.”

 

 

“...뭐가요? 저 노인네한테 로맨스 소설 읽어주는 것 말인가요? 나름 재미있긴 하던데요. 단지 저 노인이 자기 감상에서 못 빠져나와서 그렇지,”

 

 

“단순한 감상이 아냐.”

 

 

로인이 천천히 말했다.

 

 

“붉은 방은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탈출구네. 인민들이 반동을 일으키기 전에 알아내야 해. 피라의 생존도 확인해야 하고. 저 친구가 죽기 전에 말이야. 자백제까지 써봤는데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온화한 로인의 얼굴에서 자백제 이야기가 나오자 지온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임종을 맞이하는 노인에게 기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니...

 

 

“당수님. 그럼 그 편지들은?”

 

 

“전부 진본이네. 문제는 저게 <붉은 방>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야. <붉은 방>은...”

 

 

그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통신 병사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고당으로 추정되는 집단 접근! 비상사태입니다!”

 

 

그리고 메인 태블릿에 한 여자로 보이는 인물의 영상이 잡혔다.

그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지오와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피라 모욥이었다.

 

 

“복고당은 이미 20년전에 슬로인에서 얼어죽었어. 나타날 리가 없는데! 지오!”

 

 

그말 그대로였다. 화면에 잡힌 피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설의 괴물인 스켈레톤이나 골렘을 닮아보였으니까.

 

 

“네. 당수님!”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지오가 빠르게 대답했다.

 

 

“루카에게 가봐!”

 

 

<당신과 헤어지기 전 나는 당신의 목을 깨물어서 피를 맛봤소. 피맛은 어느 누구나 비슷하지. 당신의 피는 좀 더 달줄 알았던 내가 잘못이었소. 사랑하는 , 나의 사랑하는 피라.

오렉 산맥 너머, 내가 복고당을 창당하게 되었던 원인인 곳이 하나 있소. 사람들은 때에 맞춘 정치를 하는 천리안이라고도 하지만, 잔혹한 술수를 쓰는 마키아벨리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오. 그래서 복고당의 상징물은 독수리지. 멀리 보니까. 개미가 아닌 독수리는 3차원을 바라보니까...그래서 난 당신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당신의 눈을 항상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소...>

 

 

지오가 루카에게 도착했을 때 루카는 소형 태블릿으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루카!”

 

 

반신불수로 항상 눈만 깜박거리던 그 루카가 아닌 듯 했다.

 

 

“오, 지오...라고 했나. 웬일인가?”

 

 

“피라가...”

 

 

“아. 그거.”

 

 

루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묶어놓았던 장치들은 다 벗겨진 상태였다.

 

 

“임종학 박사가 예측한 임종일은 이제 하루 남았어. 로인이 알고 싶은 것도 더 많았을 텐데. 초조해했겠군.”

 

 

“복고당이!”

 

 

“유령이야.”

 

 

루카는 자신의 힘으로 자동 휠체어에 타 움직였다.

 

 

“그래도 죽기 전에 피라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게 되는군.”

 

 

그리고 지오는 그때 보았다. 휠체어에 탄 루카의 머리위로 한 여자의 손길이 머무르는 것을. 그리고 루카의 몸이 공중에서 뜬 채로 다시 침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피라의 손가락이 지오의 손가락안으로 마치 물이 스며들듯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악!”

 

 

고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열도 아니었다. 그것은...과거였다.

 

 

[루카는 뻥쟁이래요!뻥쟁이래요~!엄마도 가짜래요~!]

 

 

루카 치온은 유치원에서 튀는 아이였다.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외롭고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었다. 보모들도 그에게는 애정이 없었다. 어느날 루카는 소풍을 갔다가 아이들과 싸웠다는 이유로 창고에 갖혔다.

그리고 루카는 그 방에 갇힌 지 3시간만에 풀려났지만, 기실은 2시간반동안 행방불명이었다고 했다.

보모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저절로 입을 다물었고, 루카는 그날부터 무언가에게 계시를 받은 것처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카는 그방에서 한 여자천사를 보았다고 했다. 그 천사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그 이후부터 루카는 신들린듯이 출세를 해나갔다.

그날 루카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피라. 시간의 흐름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군. 당신을 괜히 그 방으로 보낸 것이었을까.”

 

 

루카에게 언젠가부터 진짜 다리가 생겼다. 루카는 지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렇군. 항상 옆에 있었군. 20년을 거슬러서. 로인은 알고 있었어.”

 

 

“붉은 방은...”

 

 

“그 방은 미래와 연결된 구멍이지. 그 구멍을 통해서 미래를 알게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걸세. 부관. 아니. 피라. 난 구원군보다도 당신이 미래를 봄으로써 날 이해하게 되길 바랬지. 물론 구원군도 그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오면 강력해지리라 믿었지. 하지만 그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게 아니었어. 나도 통제할 수 없고, 로인도 마찬가지고. 난 순진하게도 로인이 꺼낸 미인계에 빠져든 것 같아.”

 

 

헛헛한 웃음을 지으면서 루카가 선반위의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탕!

 

 

그리고 그 소리와 동시에 피라와 구원군도 대형 태블릿 화면에서 사라졌다.

지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혁명당원부대 대부분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지오는 들었다.

루카의 마지막 말소리를.

 

 

“피라. 마지막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어줘.”

 

 

지오는 루카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시원한 기운이 그녀에게서 그에게로 빠져들었고, 루카는 그렇게 임종학 박사가 정해준 시간에 맞춰 숨을 거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개인사정으로 좀 길게 쉬게 되었습니다. 보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12월까지 휴재, 조금 더 길게 쉬면 내년 2월이나 3월쯤 복귀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드는 부분도 있었고-제 자신의 역량에 대해서.-이모저모 건강도 안 따라주고 해서 그 기간동안은 그냥 열심히 책을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운동 중요하더군요. 다들 건강 조심하시길.

글쓰는 사람한테 그 분야가 맞나 안 맞나는 중요한 문제인것 같더라고요.

막상 뛰어들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 뒤부터가 중요한 듯.

쉬는 기간동안 잠시 서평블로그로 바뀝니다.

남들이 어린 시절에 다 보던 책들을 이제사 보고 서평쓰자니 부끄럽지만(알라딘은 서평들이 하나같이 훌륭하더라고요.)그래도 독후감도 필요한 것 같아서요.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요한 신부는 고개를 떨군채로 물었다. 신부로서 할 일은, 그리고 인간으로서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자신에게 가장 심각한 부분을 들쳐내려고 하고 있었다.

 

별 거 아닙니다. 요한 신부님.”

 

총을 건네줄 때만 해도 이 정도 일이 닥칠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아버지의 부탁이니까 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태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죽었고, 그 다음으로는 자신에게 총부리가 돌아왔다.

 

고해성사실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

 

한변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윤이 아는 그 남자, 이준구는 별 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서로 솔직해지기로 하지요.”

전 신부입니다. 솔직해지고 말고 간에...”

 

신부님, 전 본래 경찰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명도 이 이름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감금당하고 이름마저 바꿀 수 밖에 없게 되었죠. 그리고,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나왔...던 건 아닙니다. 신부님 아버지가 제게 부탁했죠. 부디 복수해달라고.”

 

아버지가?”

 

요한 신부, 아니 지윤은 충격에 빠졌다. 이 남자가 어떻게 자신이 총상을 입은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데려온 것인지도 궁금했는데.

그 총을 받은 것이 아버지의 부탁때문이었다니.

 

제가 알고 싶은 건.”

 

이준구는 지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 조금의 죄책감과 우울함을 느꼈다.

 

왜 신부님의 아버지가 복수를 제게 맡겼느냐 하는 것이죠...”

 

“......”

 

한변호사를 향해서 지윤의 눈빛이 향했다. 텅 빈 공허감. 한 변호사는 지윤에게서 뭔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지윤은 머리를 내려뜨리고 손으로 감싸안았다.

 

모두 다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알고 싶어하지 말아주세요...”

 

-----------------------------------------------------------------------------

죽지 않았다고?”

 

정찬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지 않았단 말이지...”

 

.”

 

병률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총기를 닦았다. 경찰이든 아니든 그의 모습 어딘가에는 날카로운 사냥개의 모습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정찬일의 말에 병률이 대꾸했다.

 

태연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앤 제 동생입니다. 그리고 신부죠. 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발설할 애가 아닙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것은 흉계였다. 신부 이지윤은 정찬일이 계획한 정치법안에 반대하는 신부 중 하나였다. 그 신부들은 카톨릭 신부들 내에서 모임을 조직,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물론 이지윤은 그들 중 미미한 자리를 차지하는 막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정찬일은 그 점에서 이지윤을 지목했다.

병률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하고, 말석을 차지하는 신부가 피살당하면 다른 신부들이 몸을 사릴 걸 알기 때문에도 그랬다.

손대기 쉬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률은 동생에게 총을 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죽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마 약 100%의 확률로 지윤은 돌아올 것이다.

 

별 거 아니지. 별거 아니야.”

 

정찬일은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치에 뼈가 굵은 남자였다. 그 동안 자신이 다른 정치파에게 피습을 당한 적도 여러번이요, 자신이 다른 정파의 사람을 습격하라고 돈을 쥐어준 것도 여러번이었다. 그 신부가 죽는 것은 피했다 하더라도 습격을 당했던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신부들도 몸을 사릴 것이다.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좋아. 마무리가 어설프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

 

병률은 닦던 총기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마무리는 어설프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꾸짖으시는 것 같아서 신경쓰이는군요.”

 

“...아니야. 누군들 예상했겠나. 아니, 그러고보니....”

 

반대파일수도 있었다. 정찬일은 그렇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어떻게 반대파가 미리 알고 지윤을 끌고 갈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정찬일을 제거하기 위해서 꾸며진 일은 아닐까?

 

혹시 싶지만...”

정찬일이 병률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설마 누설하진 않겠지? 자네가 물론 반대파와 손을 잡진 않았겠지만.”

 

“...저는 국회의원님의 갭니다. 애초에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정찬일은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어느 누군가의 충실한 편이 되어 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찬일이 세상에서 믿는 것은 오직 하나.

정치권력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윤희는 병률이 국회의원 비서관이 되었는데도 예전과 다름없이 낮에 카페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결혼하면서 안정적인 직장은 가지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녀의 활달한 성미는 본래 안정과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직장에 도착하자마자 왕언니가 그녀에게 눈짓으로 카페 창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1시간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윤희가 그에게 커피를 가져오도록 해달라고 주문까지 했다고 했다.

윤희는 눈치를 보면서 커피를 손님앞에 내려놓았다. 성격이 활달한 윤희가 이렇게 주눅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제수씨.”

 

첫만남인데도 이 남자는 대뜸 그녀를 제수씨라고 불렀다. 윤희는 이 모든 게 무척 불편했다.

남편의 바뀐 환경도 그랬지만 요즘 뜬금없이 그녀와 그의 집 주위를 돌고 있는 [알 수 없는 그들]의 존재도 그랬다. 도대체 남편은 어떤 일을 시작할 생각인걸까. 현명한 그녀는 그것이 무서웠다. 남편은 그녀에게는 한없이 따사로왔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녀석은 이제 필요없어. 신경쓰지마.]

 

문앞에서 커피를 들고 있을 때 들리던 나지막한 남편의 목소리가.

 

[이젠 더 이상 꼼짝도 못할 거야. 날 믿어도 좋아.]

 

전 선생님의 제수씨가 아닌데요...”

 

주눅은 들었지만 본 성격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윤희는 당돌하게 그에게 말했다.

 

하하. 병률이가 제 이야기를 안 했나보군요. 저 정찬일 국회의원한테 병률이를 소개해준 사람입니다. 정찬일 러브 팬카페 회장이기도 합니다. 이모저모로 병률이한테 도움을 받고 있었죠.”

 

“.....”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가끔 병률이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 몇 번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병률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 형이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병률은 폭음을 했다. 그 정도로 이 남자의 이미지는 윤희의 내부에서 좋지 않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요...?”

 

제수씨. 아니 이 호칭은 불편하다고 하셨던가. 혹시 정치인의 부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성격이 워낙 활발해서 좋은 이미지가 될 것 같은데 말이죠.”

 

?”

 

윤희는 그제서야 자신이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꼭 한번쯤 벌어질 일. 그리고 그 뒤가 개운치는 않을 거라는 것도.

 

그건 남편한테 물어보실 일 같은데요.”

 

그녀는 그렇게만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그 기분 나쁜 남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남편은 지금 그녀가 모르는 무슨 일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국회의원 비서관을 한다고 했을 때도 그게 무슨 일이냐며 웃었지만, 웃을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후였다.

그녀는 그 남자를 지나쳐 온 후 왕언니에게 오늘 하루는 쉬겠다고 말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몸의 후들거리는 느낌이 꼭 감기가 심하게 온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곤한 하루였다. 원로신부는 좀 쪼잔한 속세의 장사꾼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비록 성당이 크지도 않고 좁았지만 지윤은 신경쓰지 않았다.

형제들이 만든 복마전에는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지상의 천국을 꿈꿀 뿐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지옥이 이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성전은 달랐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해성사 시간이 마음이 편했다.

지윤은 고해성사실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한 남자가 두터운 안경을 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어차피 안경을 쓰건 안 쓰건 지윤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단지 안경은 위장용일 뿐이었으니까.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

 

얼마 전에 친누이가-적어도 상속권을 가진-누군가에게 커피로 얼굴을 심하게 데고, 그 상처가 덧나서 죽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아버지는 요양원을 뛰쳐나와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형제들의 모임에 참석은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는 그였다,

 

.”

 

지윤의 말에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여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또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

 

신부는 고해성사시에 했던 말을 밖으로 퍼뜨릴 수 없다.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것.

그가 한 말이 설마 지윤이 짐작하는 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 하나님께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재빠르게 말했다.

 

저는 신부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려퍼졌다. 지윤은 가슴을 손으로 막은채 쓰러졌다. 지윤을 쏜 그 남자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는 천천히 성당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둠속에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한 변호사는 그 그림자가 사라지자 마자 고해성사실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지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숨어 있던 길준과 의사는 성당밖에 준비해둔 차량에 지윤을 실었다.

 

이게 무슨...”

 

뒤늦게 총성을 듣고 달려온 원로신부에게 세 사람은 입가에 손가락을 대보였다.

 

요한신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흥분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신부에게 길준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요한 신부는 그냥 피정을 떠난 겁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하고요. 그동안 성당에 헌금을 많이 하겠습니다. 그냥 모른 척 해주십시오.뒷문은 어디 있습니까?”

 

원로신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길준은 그의 손에 서명이 된 수표를 한주먹 쥐어주었다.

그 수표에는 이준구라고 사인이 되어 있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