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에서 기다리겠어요. 대협.>

 

 

그것은 안개였다. 자무홍의 꽃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었을 때 그녀는 뒷모습만으로 그를 만났다.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뒷모습뿐이었다. 말에 앉아서 타는 금을 들고 그녀는 그를 떠났다. 언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황산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황산에서...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강호의 옛 법이 그를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원수로 쌓아온 생활이 언제던가. 그는 그녀의 금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적을 연주했다.

 

채미홍.”

 

그러다가 독주를 마시기도 하고, 원수를 맺기도 했다. 원수의 검에 찔린 적도 있고, 원수를 죽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발을 더욱 강호에 붙들어매었다.

하지만 그가 강호인이 아닐 때가 있었다. 패설사관 채미홍을 만날 때만큼은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채미홍은 처음부터 끝까지 땅을 밟고 서 있는 자였다.

강호와는 달리 황제의 명을 받드는 자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그건 어쨌든 좋았다.

 

수린의 금은 여전합니까?”

 

자무홍꽃밭을 떠났던 하수린은 금을 켜는 가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는 악기 하나 못 다루던 그였기에, 그녀를 다시 만나면 적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채미홍은 말을 아꼈다. 그는 말 대신 미축에게 적을 연주하도록 권했다.

미축은 적을 입술에 갖다댔다. 채미홍이 갖고 온 남쪽 봄날씨는 하수린의 옷깃의 향기같았다.

 

“.....”

 

연주는 처음에 평탄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휘몰아치듯 감아올렸고, 그러다가 애조를 띄었으며 마지막에는 울음으로 끝났다.

미축은 울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채미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와 자네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가 수린에게 독을 먹였다네...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지.”

 

그니는 황산에 있었습니까?”

 

그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황산 자무홍꽃 밑에 잠들었다네.”

 

미축은 다시 적을 들었다. 자무홍꽃 냄새를 기억하려고 했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역시 그곳에 갔군요...이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테니...곧 만날 수 있겠군요.”

 

떨리는 손으로 미축은 적을 잡았다.

 

미홍.”

 

? 왜 그러는가?”

 

긴 거리를 다니시느라 항상 힘드시겠습니다. 위협도 항상 받으실테고...”

 

별로 힘들지 않으이. 자네같은 검객이 내 뒷배를 봐주지 않는가. 다만 항상 아쉬운 것은...”

 

미홍이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동네 동네 돌다보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많이 듣는데, 나같은 사람이 많아야 그걸 다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지. 얼마 안되는 한줌이 모여서 이 대륙의 이야기를 다 엮지는 못할 것 아닌가...”

 

“......”

 

미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속에서 미홍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참 뒤에야 미축은 이런 말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듣겠군요.”

 

미축은 2년 뒤 왕의 표식을 전해받고 패설사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대륙의 최남단 황산에서 잠든 그니의 묘지를 찾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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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남자가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다거나.

나는 자전거 안장을 풀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동거생활을 시작한지가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째서 계속 이런 불협화음이 생기는지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한 건 안장을 다 뜯어낸 후의 일로, 나는 그 순간 그 남자의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흐뭇한 생각을 지우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앞으로 내가 타던 이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집을 떠나온 후로 나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기도 하고, 대형 이자카야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봉제인형에 눈을 붙이는 고전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서 단순작업인 아르바이트에는 큰 돈을 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월세값을 내기도 힘들었다.

비오는 날에 공동화장실이 달린 다세대 주택에서 달팽이를 발견하고 힘겨운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그렇게 집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때 그 남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미건아.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쫀쫀한 성격의 그라면 처음부터 내 안장 내놔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굽히는 전략으로 시작했다.

 

“.....”

 

힘들거라고 생각해. 네가 일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잖아.”

 

“.....”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어. 어린애를 꼬여낸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내가 물론 너한테 멋대로 한 건 사실일지만 너도 알잖아. 넌 어린애같은 사람이라고, 이런 생활 오래 못 견딜거야.”

 

여러분이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마 이 남자가 생각하는 모습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난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자전거 안장 일은 다 용서할게 네가 뭘 알아서 그랬겠어?”

 

“......”

 

“......”

 

잠시 공백이 있었고, 난 다시 유혹에 빠졌다. 인간취급을 안 하면 어떤가. 이 남자에게는 집이 있었다. 적어도 떠들지만 않으면, 입을 열지만 않으면 집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딸칵.

 

기회를 줄게. 3시간 뒤에 전화줘.”

 

왜 그 남자가 끊을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는지 속상했지만 적어도 집은 생기는 것이다. 집이 생기는 것이다. . . . . . . ,

나는 다세대 주택 화단에서 발견한 달팽이를 생각했다.

난 왜 달팽이가 아닐까.

왜 난 집을 안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달팽이의 집이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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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날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창문은 늘 그랬듯이 먼지로 더러웠다. 그건 그의 게으름 탓이었지만 방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는 새가 싫었다. 특히나 그것들의 배설물은 더욱이나!

그는 새가 싫었다. 특히나 그것들의 배설물은 더욱이나!

하지만 정부에서는 언제부턴가 특정 해초류를 먹고 싸는 그것들을 유망자원으로 분류했다. 당연하게도 그 전에는 면허라도 받아서 잡을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새들에 대한 살인면허가 있었다. 빌어먹을 정부

인권과 조권의 힘중에서 정부는 조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게 무슨 인간을 위한 정부인가.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정부에 항의서한을 작성했지만 답변은 불가였다. 별 다른 설명도 없었다.

하여간 그 이후부터 그는 세상에 절망해서 방안에 틀어박혔다.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사들이고, 전화번호부로 수리공을 호출했다.

청소하는 것만은 직접 했는데 그나마도 창에 새똥을 싸는 그 새들이 건물에 새로운 거주자로 등장하자, 그는 청소하는 것도 어느 정도 포기하기 시작했다.

찌르레기가 지저귀고, 뻐꾸기가 슬프게 우는 계절이 순서대로 왔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그는 봄의 상쾌한 바람과 여름의 미칠 듯이 푸른 신록을 거부했다.

그에게는 모든 새가 적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쏘지 못하는 그 격렬한 감정은 그를 침대에서 못 일어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쏘고 싶어도 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빌어먹을 조권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결국 창문청소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너무 더러워서 건물의 미관을 해친다는 항의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넷으로 세제와 수세미를 여러개 구입한 후 어정쩡한 자세로 창문을 한 개 두 개 닦기 시작했다.

한 손은 방쪽에 두고 발을 창턱에 가로 두고 세제를 미지근한 물에 풀어서 수세미에 적셨다.

그 자세는 결국 자신이 거부했던 세상에 대한 항의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창문에 잔뜩 눌어붙어 있는 새똥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잠시 기력을 잃은 사이에 그 적들은 엄청난 양의 배설물을 그의 닫힌 창문으로 투척했던 것이다. 그는 분노했지만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천천히 그것들을 닦기 시작했다.

천천히 닦아나가면서 그는 일말의 선의 경지에 도달했다.

왼손으로 다섯 번, 오른손으로 다섯 번, 연인의 등을 쓰다듬는 심정으로 그는 천천히 고동색 격자무늬 나무틀을 닦았다. 엄청난 양의 먼지와 함께 수세미에 뭔가가 묻어 나왔다.

반짝거리는 어떤 것이.

반짝?

그의 신경회로가 잠시 밝은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황금과 닮아 있었다.

포수로 일했을 당시에 박제취미로 인해서 그와 긴 고객 관계를 유지했던 보석상이 그에게 황금을 식별하는 법을 가르쳐줬던 기억이 잠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는 결국 오래된 연락처를 뒤져 보석상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쉽게도 황금은 아니네.”

 

그는 낙담했다.

 

하지만.”

 

보석상은 오랫동안의 노련한 장사꾼이었다. 그는 잠시 혀를 말면서 어떡하면 이 불쌍한 남자를 자극하지 않고 보석을 손에 넣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오랫동안의 우정을 위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금보다 더 좋은 물건이지.”

 

?”

 

자네도 알잖는가. 특정 해초류를 먹은 특정 부류의 새들은 순수한 에너지 자원으로 쓸 수 있는...”

 

“......”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있어서 새란 증오해 마지 않을 종들이었다. 특히나 그 배설물들은.

 

창문을 새로 달아줄테니 저 창을 내게 통째로 넘기게. 어떻게 하다가 저 물건들이 이 창문에만 가득 붙어 있는지 알 수가 없군.”

 

“.....”

 

황금보다 더 나은 물건이라지만 그는 굉장히 낙담했다.

적에게 동정받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일생에 새는 증오해마지 않을 존재였고, 박제당해야 마땅할 생물이었다.

그것들이 새끼를 까고, 날아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그와는 상관없는 일들을 마구마구 자신의 창문 밑에서 벌이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잘못하면 건물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산을 거의 다 써가고 있었던) 남자를 구제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자네도 창문 청소하기 싫을 거 아닌가.”

 

남자의 마음의 빈틈을 예리하게 읽은 보석상의 말에 그는 항복하고 말았다.

3일 뒤 인력공사에서 그의 창문 8개를 떼어가고 새 창문을 달아주었다.

남자는 다시 방안에 틀어박혀서 창문 닦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인터넷으로 의식을 해결하고, 증오스러운 새들을 언젠가 쏴버리기 위해서 총을 품에 안고 기름칠을 했다.

물론 그건 꿈에서만 가능할 일이었다. 조권이 신성하게 수호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가능할 턱이 있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밥을 갖다 차려주시는 저 짐승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도 어려울 듯 싶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1년이 지났다.

보석상은 또 그의 보석을 채취하기 위해서 직접 납셨고, 전에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뜯어가고 새창문으로 갈아끼워주었다.

보석상은 남자가 한 곳에 곱게 세워둔 공기총을 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포수시절부터 집요하기 짝이 없었던 그 증오심을 아는 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들은 그와 보석상에게 한재산을 불려주었다.

이제 남자는 새들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장례비조차 그 새들이 마련해준다고 생각하니 죽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남자는 한가지만을 원했다. 어느 순간, 죽기 직전이라도 좋으니까 저 똥덩어리들을 다 쏴버리고 싶다고. 그게 남자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그가 세상에 나가지 않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으로도 세상은 알 수 있지만, 그것 외에도 사람들과의 접촉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료들도 있었다.

그런 모든 것에서 남자는 멀어져 있었다.

어느샌가 남자의 창문은 보물의 집합지로 알려져서 그가 모르는 사이에 어린아이들과 도둑들이 몰래 새똥을 긁어가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거의 대부분을 창문을 닫은 채로 생활했고, 새들과 도둑들은 주로 새벽이나 밤을 이용해서 실례를 했기 때문에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날 통장계좌에 문제가 있어서 직접 와야 한다는 말을 은행직원에게서 들었다.

그는 인간이 싫어서 은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새똥을 피하기 위해서 킬힐을 신고, 모자를 꾹 눌러쓴 채 거의 3년만의 외출을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은행직원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녀의 스타킹아래쪽에 든 푸른 멍이 그걸 증명했다.

하여간, 은행에서의 에피소드야 나열해서 더 좋을 것도 없겠지만 남자로서는 그 배설물에 닿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사소한 오류가 있었고, 남자는 계좌의 문제점을 해결한 후 집으로 돌아가 그 빌어먹을 신발을 집어던지고, 모자를 제 자리에 걸었다.

그리고 창문을 무심히 응시하다가 <도둑님>과 눈이 마주쳤다.

도둑은 후다다닥 급하게 창문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딱히 기분 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 손으로 그 똥을 만지지만 않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미묘했다.

그건 그의 <재산>이기도 했던 탓이었다. 만지고 즐길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건 그의 재산이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지키기로 했다,

그는 총을 잡고 총구를 밖으로 향하게 한 후 창문안쪽에(굉장히 더러웠다.)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었다.

 

<새똥을 긁어가지 마시오. 긁어가면 발포하겠음.>

 

그리고 그는 잠자리로 돌아가 꿈을 꿨다.

기관단총으로 창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대는 자신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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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해안도시라 그런가 단청색깔도 밝고 화려했다. 진중한 맛을 살리는 궁과는 달랐다.

거리에서는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사신에게 올리는 다과도 다담맞은 것이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들지는 않았다. 독살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패설사관이었다. 패설사관은 젊은 시절부터 궁을 떠나 이곳저곳을 다니기 때문에 수많은 위험에 처해진다.수많은 패설사관들은 30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해서 내 나이인 40대에 이르면 숫자가 적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의 얼굴이 굳어지고,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왕의 명을 받고 민간과 접촉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인간을 못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 또한 인간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적오를 대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 적의 손아귀에 있을 때는 노력이라도 하는 편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산조인차를 안드시더근요.”

 

잠이 까무룩히 들었을 때 나는 적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

 

나는 얼른 일어나 들고 있던 검으로 그녀를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독은 차에만 탈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의원이 하나만 가르쳐주고 다른 하나는 안 가르쳐준 건가 보군요. 무색무취무미의 독은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어요. 인간들이 게을러서 그 과일을 맛보지 못할 뿐이지.”

 

“.....”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내가 대답했다.

 

[...도대체 뭐냐. 이번 일에는 왜 개입한 것이냐. 이 패설사관 대리의 죽음도 네가 계획한 것이냐?]

 

제 정체에 대해서 너무 쉽게 알려고 하시는군요. 패설사관 나으리.”

 

그녀가 빙긋이 웃었다.

 

당신네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각박할까요.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인간사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까요...천사요곡에 대해서 쉬운 답안을 알려드리려 했는데...어렵겠네요. 하긴 답을 알려드려도 또 전서구를 날리는 방식으로 해결하실 모양이지요?”

 

[전서구는 황제폐하께 올라가는 가장 정당한 길이다. 넌 오적에게 못할 짓을 했어. 오적같은 정당한 상속자에게 요마가 깃들게 해서 병을 앓게 했으니...]

 

오적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은 모르시겠죠. 사랑의 방법이 항상 똑같은 건 아니랍니다. 나는 인간들을 사랑해요. 그래서 이번 일도 당신에게 알려드렸지요, 말씀은 전에 안 드렸지만 전 당신도 흠모한답니다.”

 

[요망한 것!]

 

그제서야 내 몸이 움직였다. 내가 검을 들어 후려치자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나가버렸다.

일어났을 때는 거울만 깨져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에 거울이 깨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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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시지요.”

 

성주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나도 예를 표한 후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왕의 패설사관 대리가 참살당했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패설사관 대리가 왔다는 말도 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공문을 못 받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참요를 다 들으시는 건 아니시겠지만 요즘 희한한 노래가 돌고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천사요곡이란 노래입니다만. 그 노래는 왕도 부하도 없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지요. 요망한 노래입니다.”

 

저는 공문의 수신여부에 대해서 여쭤본 것입니다만.”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적오의 건과 내용이 동일하였다.

혹시 적오가 다시 끼어든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적오는 전서구로 중앙의 압박이 심해지자 사라졌다. 물론 죽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이 정도 일을 기획하기에는 그녀의 힘이 약했다.

그녀는 물론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종교열을 자극하기에는 그녀의 권력욕이 강했다.

 

그럼 그 천사요곡을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그 노래에 마법의 기운이 스며들어 가만히 있는자도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저도 소문만 들었고, 일부분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패설사관님께 알려드릴 수가...”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온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전하의 명을 필부의 명으로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그는 읍했다.

적어도 행동에 실행력은 있어 보였다.

 

좋습니다. 배후에 있는 자를 잡으면 그때는 확인이 되겠지요. 다만...”

 

“...다만?”

 

그 천사요곡을 듣고 미친 자들을 한번 보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여러갈래로 땋아서 윗머리에 붙인 모양이 오랑캐의 머리장식을 보는 듯 했다. 그녀는 성주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다구를 내려놓았다.

 

차를 권한다는 것이 늦었습니다. 한잔 드시지요.”

 

. 저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차는 마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이라면 독을 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무색무취한 독이 있다면 당하기 쉽겠지만, 그런 독은 아직까지 의원들도 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차는 다르다. 그 향기와 맛이 독이 섞여도 알 수가 없거니와, 각 지역별로 향미를 가하는 곳도 있어서 독살당할 위험이 있었다. 특히나 이미 적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을 받들고 간 패설사관이 참살당한 곳이 아니던가.

 

산조인차입니다만, 소화를 돕고 잠이 잘 오게 해주는 약입니다. 여독을 푸시기에 좋은 것 같아서 내어오라했는데...”

 

섭섭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걸 보니 호인 중의 호인이라는 인사평이 크게 틀리지는 않은 듯 했다.

걱정마십시오. 여행에는 익숙한 몸입니다. 늙었지만 아직까지 왕의 패설사관으로 일하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투였다.

하여간 그와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사신들이 묵는다는 저탞에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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