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는 옷을 단정히 차려입었다. [그 남자]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서였다.
노숙자의 삶을 청산하게 해 준 은인, 그리고 자신의 명의를 빌려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람.그 사람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항상 변호사의 뒤에서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도움을 원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운전사는 준구의 눈을 가리고 차에 태웠다. 몇 번의 빙글빙글 돌기, 꺾기를 거쳐서 그는 한 웅장한 저택 앞에서 내려졌다.
“여기가 어딘지 묻지 마십시오. 저도 모릅니다.”
애초에 연습을 충실히했는지 책읽는 듯한 목소리로 운전사는 말했다.
“...아. 예.”
어쩌면 이 사람도 그 사람에 의해서 노숙자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준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발을 디뎠다. 서양식으로 웅장하게 꾸며진 대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준구님 되십니까?”
“네. 제가 이준굽니다.”
“따라오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타고온 자동차는 어느새 후진해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저 먼 정원에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저 남자가...
“무슨 일로 주인님이 부르셨는지 궁금하실겝니다.”
집사인듯한 남자가 웃음기를 섞어서 이준구에게 말을 붙였다.
“제가 미리 말씀드릴 문제는 아니지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랍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아마 저 남자가 자신의 명의를 사용하고 있는 남자...
하지만 아니었다.
“어서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이준구님.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원에서 가까이 본 서양식 건물은 정말 거대해 보였다. 뜨문뜨문 일본식 건축양식도 섞인 이 주택은 위치를 알아보려고 하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국내에서는 튀는 건물이었다.
그렇게 그를 기다렸다가 안내하는 사람들을 몇 명 정도 지나쳐서 그 저택에서 가장 높은 4층의 어느 화려한 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등을 보인 한 남자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그 사람]입니다.”
머리를 가볍게 바람에 날린 듯한 머리모양을 한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에서 서른 다섯 정도로 보이고, 태권도와 유도와 합기도를 어느 정도 익힌 듯 품세도 만만찮았다.
자세 하나하나에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약간 숨기는 듯한 눈매 어딘가에서는 음모가의 모습도 조금 비쳤다.
정장을 했지만 원래 몸동작이나 그런 것을 보면 정장보다는 캐주얼을 즐겨 입었으리라 생각되는 모습.
“저는 이준구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은 제가 해야 할 말이죠.”
그 사람은 거리를 둔 채 이준구를 관찰했다.
“제가 선생님을 여기까지 모셔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필요한 일이 하나 더 있군요. 명의외에도.”
이준구는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만 절제력이 부족했을 뿐.
“잘 아시는군요. 그리고...”
“어쩌면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제일수도 있구요?”
“......”
“이미 명의만으로도 그럴 수 있죠.”
이준구는 우호적이지만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눈을 가리고, 사용인들을 여러번 바꿔서 당신을 만나게 한 것은 누가누군지 모르게 꾸미려고 한 것일테지만. 아마 사용인들도 일일 아르바이트일테니 당신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
“조금 실망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절 필요로 할때는 어깨를 빌려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
그 사람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에게 이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저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두 번이나 배신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당신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절 믿으실게 아니라면 다시 절 노숙자로 돌려보내도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제 자기소개부터 다시 하죠. 제 이름은 함길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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