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자기 몫을 되찾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야망 에세이
김진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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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쿨쿨 자는 시간인데 눈이 번쩍 뜨였다. '출퇴근'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한지도 이제 1년이 넘었고 달리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라 뻑뻑한 눈을 게슴츠레 꿈벅거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늘은 얼마나 또 늦잠을 잤을까 스스로 한심한 기분에 시간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내려놓은 블라인드 틈새로 하얗게 아침 햇살이 비춰들어오는 것을 흘끔 쳐다보고 휴대폰을 들어 확인한 시간이 5시 즈음이었다.

에세이를 좋아하지만 의미 그대로 에세이가 범람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이따금 글의 장르가 에세이라는 사실에 조금 시시한 기분이 든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아무렇게나 끄적인 글도 관점에 따라서는 에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탓이다. 내 손에 닿는다는 이유로 다소 하찮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 '하수'다운 마음가짐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가끔은 내가 하수인 걸 어쩌겠어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물 마시는 기분으로 에세이를 읽는다. 가끔은 성의없게, 또 가끔은 마음에 닿는 문장에 공명하며 달게 삼키기도 한다. 어쨌든 '에세이'란 내게 감정적 공명을 일으키는 장르다.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는 그에 비하면 '맥주' 같은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거의 30여년 간을 술 안 마시는 사람(being sober?)으로 살다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맥주롤 좋아하게 되었다. 주량은 딱 한 파인트 즈음인데, 술에 잘 취하고(얼굴을 시작으로 온몸이 삽시간에 '수학귀신'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취하기 위해 마신다기 보다는 맥주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안주 없이 아껴 마시는 방식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그러나 탄산이 죄 날아갈 정도로 너무 느린 속도는 아니게, 아껴가며 이 책을 읽었다.

물과 맥주의 다른 점은 '목넘김'에 있을 것이다(알맹이 대신 거품 같은 비유가 줄줄 흘러 지저분하게 손을 적시는 감상이 되어가는 중…). 나는 능동적인 독서의 방식으로 책에 직접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타입은 아니기도 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유하면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도 고작해야 '나도 그랬어', '마음에 들어요' 정도가 다라서 에세이는 정말 물을 마시듯 읽는다.

이 책을 맥주 같았다 말한 건, 읽는 중간 여러 번 멈춰서 책장 모퉁이에 뭐라도 끄적이고 싶은 순간을 선명한 감각으로 꿀렁대며 만났기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휴대폰으로 침대에 누워 읽느라 메모들은 전부 휘발성 메모리에 저장되었다가 이젠 반 이상이 날아갔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 찰나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을 비슷한 결의 언어로 나누는 것은 한결 더 어렵다. 그런데 삶의 물리적 접점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저자(와 편집자)가 정갈하게 늘어 놓은 문장들이 독자인 내게 별다른 단어나 어조의 2차 해석 없이 그대로 전해지는 경험은 자주 겪어보진 못한 것이라 아주 재밌었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산만하게 북적일 정도였는데 한김 식히고 감상을 글로 적으려니 전부 책 속의 문장을 한 번 더 베껴쓰는 수준이라 그냥 이불 속에서 피식피식 웃으며 표시해둔 문장 몇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 같다.

안전한 나라 한국이 여자에게는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미국 남자처럼 놀랐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중

저자가 여자들의 남자 형제와의 차별담을 접하고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특수한 것이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고 아주 화들짝! 놀랐음(ㅋㅋㅋ)을 표현한 문장이다. 베테랑 카피라이터로서의 저자의 만렙(?) 경험치를 실감하게 되는 비유다.

"아웃풋이 쌓일 수 없는 노동이

날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반복된다.

집안일도 그렇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중

- 빌 머레이의 <사랑의 블랙홀>은 타임루프 레퍼런스로 자주 소환하는 영화인데

이젠 나타샤 리온의 <러시아 인형처럼>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때가 되었다(?)

여자의 무급 노동 착취에 관해 이야기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나는 갓 서른이 되어서야 인생 첫 자취를 시작해서인지 비교적 이 '살림을 꾸려 나간다'는 개념을 선명하게 재정립하게 되어 좀 더 복잡한 마음으로 읽었다. 사실 모든 노동이 그러하지만 특히 가사 노동은 임금(혹은 재화적 가치)이 결부되지 않는 한 언제고 마이너스에서 0으로 달려가는 일이다. 훌쩍 런던으로 와서 맨땅에 헤딩하며 지내다 보니 더욱 그렇다. 6개월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 '0'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고, 그래봤자 '0'인 탓으로 허탈한 기분도 자주 느꼈다. 두터운 먼지로 가려져 있던 것들, 눈 앞에 있었지만 보지 않던 것들이 실재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지난하지만 옳은 방향임을 이제라도 얕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 믿는다.

지금껏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업적과 성취들 또한 그렇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손'의 돌봄을 받고?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중

이 책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타이밍이다.



"한마디로 돈 되는 건 남자들의 몫이다. 어떤 업종이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수의 여자가 그 일에 종사할 땐 임금도, 전문성도 얻지 못하다

남자들이 진입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중

나는 대학 때부터 거의 10년 즈음을 IT 분야를 배회한 탓인지 좀 더 다른 의미로 위 대목이 와닿았다. 우리가 흔하게 쓰는 '컴퓨터'라는 단어도 초기에는 '시시한 단순 계산을 하는 여성 직원' 자체를 이르는 말이었음을 어디 책에선가 읽은 일이 있다. 우리가 <이미테이션 게임> 같은 영화를 보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엘런 튜링'에 감정을 이입하는 동안, 그 배경에는 사실 <블렛츨리 서클>이나 <히든 피겨스> 속 주인공들이 [대화하는 소리, indistinct chatter] 같은 자막으로 덧입혀진 채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었던 코딩이 현재 한국 및 세계 각지에서 갖는 위상을 생각하면 웃기고도 씁쓸한 역사다.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타이틀을 뒤늦게야 얻게 된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그린 그래픽 노블도 떠오르는데, 실제 그의 삶을 다룬 분량은 남아있는 기록만큼이나 아주 짧다. 그래픽 아티스트 '시드니 파두아'는 대신 에이다를 그가 자유롭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다른 평행 우주로 보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나는 작가의 상상력이 서글프면서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아주 태연한 방식.

굴욕적인 것은 바로 이 태연함이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중

한국에서 나고 평생을 살면서 내가 부정할 수 없게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 중 하나는, 이 '태연함'을 자각한 때였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혼자 되묻게 되는 순간들. 온갖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게 언론에 까발려진 후에도 자신의 '작품'으로 잘못을 빌겠다며 버젓이 활동하는 남자 연예인들(초반에야 경악했지 이젠 손으로 꼽을 수도 없는 규모가 되었다)과 그를 넓은 마음으로 감싸 사회로 내보내주는 업계. 영화나 음악 같은 건 소비자의 선택이라 백 번 양보한다손 쳐도(물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아무 때고 TV 채널을 들 때마다 나오는 광고 속 누군가의 얼굴들은 매번 말을 잃게 되는 것이다. 보고도 모른 체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라도 내는 것이 어른이 해야 할 도리임을 배워가는 중이다. 법적 성인이 된지는 이제 벌써 10년도 더 넘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이나마 제대로 된 어른의 역할을 배우고 수행하며 살자는 것이 삼십대가 된 내가 견지해야 할 마음가짐임을 종종 되새기게 된다.

새해가 돌아오면 유행처럼 한 번씩 해보는 것 중 하나가, 알파벳이 나열된 이미지 속에서 가장 먼저 찾은 세 개 단어 배열이 자신이 신년에 얻게 될 것이라는 게임(?)인데, 벌써 여름을 바라보는 5월 중순 나는 다늦게 이 책에서 앞으로 내가 삶에서 얻고 싶은 것이자, 처음 영국행을 결심하면서 마음에 새겼던 다짐의 말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고독하지만 고립되고 싶지 않은 개인

내 존엄

그리고 나와 다른 여성들 모두의 '파이 '.

이왕이면 언젠가 '울프 소셜클럽' 에서 맛 본 '키라임 파이'처럼 달콤하고 새큼하고 따뜻한 맛이 나는 파이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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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3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옥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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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산만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아예 책 읽는 법을 잊어버린 느낌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책 읽기를 시도해야 할지 영 모르겠는 두어 달이었다. 친구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버지니아 울프 책을 몇 번 시도해보기도 했고, 전에 참여했던 과학책 스터디에서 정한 모임용 도서를 전자책으로 구매해 두어 번 머리말을 깨작깨작 읽기도 했지만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책을 읽고 있다고 말하려고 책 읽는 시늉으로 애쓰며 보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내가 한국어로 쓰인 종이책을 넘겨가며 읽기에 그다지 수월한 환경에 놓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내 조그만 휴대폰으로 전자책을 읽을 때에도 하나쯤 좋은 점이 있다. 한 손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데, 물론 기기가 작아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제부터 저녁 때 씻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릴 때 책 읽기를 일과에 추가했다. 독서나 운동의 좋은 점은, 시작하기가 무진장 어렵지만 일단 집중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면 그럭저럭이나마 꾸준히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는, 안 하던 짓을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센트럴 런던에서 열리는 여성 독서 모임(아마 4월 초 즈음이었을 것 같다)에 약간 충동적으로 참여 버튼을 누른 덕분에 알게된 책이다. 물론 바로 전날 갑자기 들어온 번역일을 핑계로 '가지 않음'으로 결정을 바꾸기는 했지만 결제해둔 전자책은 구매목록에 계속 남아있는 거니까.

여태껏 내가 읽은 그의 유일한 장편은 『아메리카나』 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책 읽는 집중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작가가 어쩌면 가장 공들여 썼을지 모를 이야기의 마무리를 앞두고, 늘 헥헥대며 억지로 달리는 사람처럼 아주 정신 없는 상태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때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일면은 사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보다는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주는 조금은 기만적인 성취감에 더 초점을 두니까. 『아메리카나』 가 내게 각별한 기억을 남긴 것은, 지치지 않고 재밌게 읽은 당시의 기분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 없이 책을 담았고, 한참 뒤 읽기를 '재개'할 때도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는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고 (전자)책장을 넘겨 간 소설이다. '치마만다'라는 작가 이름만으로 책을 사고 읽는 건, 나같이 독서가 명백한 지적 허영의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얄팍한 인간에게 퍽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그 여자가 보잘것없는 쓰레기란 사실이야.

두 남자 사이에서 두 아이를 낳은 원시인 같은 요루바 쓰레기야.

늙고 못생긴 여자라고 들었어."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내가 치마만다를 좋아하는 건 위와 같은 제 어머니의 말에 아래와 같은 기분을 의식적으로 느끼는 올란나같은 인물을 그려내기 때문인 것 같다.

올란나는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그렇게 생긴 게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늙고 못생긴"이라는 말이 아버지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게 싫었다.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건 아버지에게 정부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정부에게 라고스 상류층이 사는 동네에다 집을 사 주었다는 사실임을 올란나는 알았다.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77년생인 작가는 자신이 태어나기 한참 전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비아프라'라는 국가가 잠시나마 존재했음을 배웠다. 영국이 제 입맛대로 조종한 탓에 나이지리아는 식민지배를 명목상으로나마 벗어난 후에도 몇 년 간 끔찍한 시간을 보낸다. 소설 속 올란나와 오데니그보는 비아프라 공화국이 나이지리아에게 완전히 항복한 후에야 다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 나이지리아 군인들의 약탈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걸핏하면 총구를 문에 대고 나이지리아에의 충성을 빌미로 수탈을 일삼으며 그들은 남아있는 시민들에게서 '비아프라'의 흔적을 지워낸다. 집안 사람들을 모두 집 앞에 엎드리게 한 뒤 군인들은 숨겨놨을지 모를 '비아프라' 지폐를 찾아 샅샅이 뒤진다. 올란나는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군인을 대비해 비아프라 지폐를 전부 태워버리는데 이 때 부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오데니그보는 비아프라 국기를 접어서 바지 주머니 안쪽에 계속 보관하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추억을 태우고 있어."

오데니그보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 추억은 내 가슴속에 있어."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까지 이렇게 낭만에 빠져지낼 수 있는 오데니그보가 한 편으론 부러운 기분마저 든다.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를 읽으면서 이민진의 『파친코』 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파친코』 속 한수는 오데니그보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좀 있다. 두 작품이 모두 전쟁을 그린 장편 소설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인상을 준다면, 치마만다의 전쟁 소설이 갖는 거리감이나 시선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의 그것와 유사한 결이라고 느낀다. 『파친코』 를 다 읽고 난 직후에는 아쉬움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몰랐는데, 앞서 말한 두 소설에 비하면 『파친코』 는 '선자'라는 인물 한 사람에 집중해 그 주변을 좀 더 아웃포커싱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작가 이민진의 수식어가 '제인 오스틴'인 것도, 그의 소설 첫 문장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인 것도 좀 더 한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비겁하지만 '전쟁'을 그린 소설은 한 번 읽고 나면 마음이 좀 묵직해져서 당분간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책은 피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데, 이야기 마지막에 실린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면 그가 전쟁 소설의 모범이라 소개한 심머 치노댜의 『가시 수확』 이나 치누아 아체베의 『전쟁터의 소녀들』 도 지금 곧장은 아니더라도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스물스물 든다. 그가 꼬집은 이유, '작품을 읽는 동안 강의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도 인물 자신의 관점에서 당시 벌어진 사건들의 복잡한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는 믿을 수 없게도 정말 독자가 그렇게 느끼도록 쓰인 소설이다.

물론 이건 작가 치마만다가,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의 제 1 독자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삼고 써내려간 덕택일 것이다.

마무리는 이 소설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든 대사로 해야겠다.

"그 사람을 용서한다는 관점에서 보지 마세요.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보세요.

일부러 고통을 선택해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고통을 먹기라도 할 겁니까?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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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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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는 20세기 어린이들을, '독서 경험'을 두고 굳이 줄세워보자면 나는 꽤나 뒷쪽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수준이다. 양극 차를 감안한다고 해도 어찌됐든 중간 이후일 것이다. 새삼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한 번 더 보기로 결심한 시점에서였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뭔지 거의 몰랐다. 그저 어렸을 때 TV로 배운 양 귀에 나사못 같은 걸 끼고 다니며 살갗을 기운 자국으로 뒤덮여 있는, 어쩌구 박사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명체라는 것--물론 이것마저도 그 박사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점에서 전부 틀렸지만, 이 학습의 전부였다(지금도 머릿속으로는 '두치와 뿌꾸'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고 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봤던 <메리 셸리>가 그다지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은 것은. 메리 셸리가 써내려 간 이야기를 달리 알지 못해도 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쉬운 마음으로 보러 간 영화였고 그래서 보고 난 후에 그다지 마음에 담기지도 않았다.

영국에 온 뒤 넷플릭스UK에 올라와 있는 <메리 셸리>를 다시 볼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던 이유는 아마 이 영화가 '실패'로 기억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고 다시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작가 메리 셸리가 그의 이야기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를 출간한 것이 19세기 초인 만큼(딱 200년 즈음의 시차) 당시 작가가 살아간 시대 상을 대강이나마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위 영화의 맥락에 포함될 것이다. 이 책의 리뷰가 '아동 도서' 섹션으로 분류되는 것에 순간의 머쓱함(나도 어렸을 때 미리미리 이걸 읽었어야 했던 건가)을 잠시 느끼기는 하지만, 그게 두려워 피하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이라고 믿는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납작하게 보자면, 특히 21세기 인간에게는 아주 밋밋한 이야기다. 액자의 액자의 액자 같은 구성으로, 사람의 입을 빌려야 전개될 수 있는 사건의 흐름이란 아마 그 시대적 특성이리라 짐작해보지만, 그 외에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만든 존재와 자신을 단숨에 떨어뜨려 놓고 도망이나 일삼으며 쉽사리 그 존재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모습을, 이야기 바깥에서 영 찝찝한 표정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가디언의 리뷰 내용 중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을 극악무도한 악마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그 존재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우리가 그 고독을 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 합리화에 젖어 사는 인간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 대목에 공감하게 된다.

주로 나는 작가가 남겨둔 생각의 자취를 발견하려 노력하며 읽었는데, 이게 영화에 몰입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는 메리 셸리의 삶과 그로 인해 생겨난 생각이 투영된 대목들을 찬찬히 곱씹어보게 되었다.

"I asked, it is true, for greater treasures than a little food or rest: I

required kindness and sympathy; but I did not believe myself

utterly unworthy of it."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15

"How mutable are our feelings, and how strange is that clining

love we have of life even in the excess of misery!"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20

"Of what a strange nature is knowledge! It clings to the mind,

when it has once seized on it, like lichen on the rock. I wished

sometimes to shake off all thought and feeling; but I learned that

there was but one means to overcome the sensation of pain, and

that was death--a state which I feared yet did not understand."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13

특히 세 번째 인용, 앎으로써 느끼게 되는 고통과 거기에 수반하는 여러 생각은 작가에게는 물론이고, 현재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영화 <메리 셸리>에서, 언니의 원고를 읽고난 클레어의 반응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 속에서 메리가 완성한 자신의 원고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람은 남편 퍼시인데, 그는 '이 놀라운 창조물을 아주 희망적이고 완벽한 존재, 이를 테면 천사 같은 걸로 바꾸면 어떨까?'하고 묻는다. 그에 반해 동생 클레어는 메리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어한 메시지를 단번에 알아챈다. '우리 둘 다 이게 유령 얘기 같은 게 아닌 걸 알잖아. 이렇게 버려지는 기분을 완벽하게 묘사한 건 처음 봤어.'

"그건 내 이야기였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니가 만든 괴물이 겪는 깊은 고통에

함께 아파할지 궁금해지지 않아?

Because it was my own.

I wonder, how many souls will sympathize with your creature's torments?"

- Mary Shelley, 2017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바깥의 메리 역시 견고한 거절의 장벽에 둘러싸인다. 그 이유란 맥빠지리만치 간결하다. 정식 혼인 관계도 아닌 남자와 함께 사는 열 여덟짜리 어린 여자의 이름을 걸고 출판하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회적 관념이자 핑계.

2010년대 후반 <프랑켄슈타인>을 꺼내 읽는 건 어느 때보다 그 의미가 깊다. 위의 리뷰어가 한 이야기처럼 '프랑켄슈타인' 이후 인공지능을 다룬 책들은 모두 메리 셸리에게 조금씩이나마 빚을 진 셈이다. 어떤 것을 인간(정확히는 인간의 지능)됨으로 볼 것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고차원적 기술 발전을 언제나 앞서야 함을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내는 목소리를 통해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들려준다.

아마 19세기와 현재를 아우르는 유일한 생각은 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So much has been done, exclaimed the soul of Frankenstein --

more, far more, will I achieve: treading in the steps already

marked, I will pioneer a new way, explore unknown powers, and

unfold to the world the deepest mysteries of creation."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3

번외로,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한 곰돌이 패딩턴에 이어, 혼자 불어를 마스터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말하는 걸 보니 여기 사람인 것 같은데, 프랑스 인이오?By your language, stranger, I suppose you are my countryman; are you French?'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에게 동아시아인으로서 경외와 괴리를 동시에 느끼는 바이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동화적으로 재밌었던 대사는, 프랑켄슈타인에게 그의 괴물이 '당신의 결혼식날 밤 당신을 찾아가겠다I will be with you on your wedding-night!'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내가 본 번역본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시대 상을 감안하면 아주 명백하게 man = 인간, woman = 여자로 분리되던(지금도 크게는 다르지 않은) 시기지만, 그래도 'Can any man be to me as Clerval was; or any woman another Elizabeth?' 같은 대사가, any man = 어떤 사람 / any woman = 어느 여자로 된 건 좀 아쉽다. 시대적 맥락을 살리는 건 아주 미묘한 문제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건 열심히 살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메리 셸리>는 조금 뻔하지만, 메리가 직접 읊는 소설의 마지막 구절로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메리가 고통 속에 빚어낸 이야기와 거기에 켜켜이 쌓인 감정을 더는 떠올리지 않고 깊이 묻어두겠다 말하는 대사나, 그의 괴물이 그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해보자면, 몇 번 더 곱씹어보게 되는 문장이다.

"You were soon borne away by the waves

and lost in darkness and distance."

- Mary Shelley, 2017

번역본은 전자책으로밖에 못 읽는 상황이라 나는 다른 버전으로 봤지만, 링크는 좋아하는 번역자의 것으로 공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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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동화 같은 걸 읽어볼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사는 친구가 다니는 대학 도서관에는 '그런' 장르의 책이 전무했고 차라리 (동화 제목)을 다룬 연구 논문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얘기를 전화로 전해 듣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친구가 이 책을 건네주었다. 혹시 몰라서 그냥 보이는 걸 하나 집어와 봤다고 덧붙이면서. 그렇게 <시녀 이야기>는 올해 1월 나의 첫 책이 되었다.

알라딘 구매목록이 알려줬듯 2017년의 언젠가 샀던 이 책의 번역본을 나는 끝내 읽지 못(?)하고 영국으로 왔다. 아마 번역본을 먼저 읽고 영어로 된 책을 읽었다면 한결 더 집중도 높은 독서 경험이 됐겠지만 생각보다 그 반대도 꽤 괜찮은 방식이었다. 이 말인 즉슨, 영어 원서를 읽다 컨디션에 따라 들쭉날쭉한 몰입도 때문에 결국 번역본 E북을 사서 다시 읽었다는 의미이다. 결핍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란 아주 지대하여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달게 읽은 한국어 텍스트가 됐다. 한국어나 영어나 분량은 비슷하게 300페이지 전후 즈음이었는데 읽는 속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시녀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 내가 대강 알고 있던 관련 배경지식은 이 책을 쓴 작가 마거릿 앳우드가 캐나다 출신 여성 작가이며, 대리모 시스템 및 여성체의 도구화가 통용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리고 있고, 드라마로 제작도 되었으며, 이 작품 외에도 이 작가가 쓴 <그레이스>란 소설 역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였다(영상화된 <그레이스>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읽으면 한국어에 비해 이해도가 반절 즈음(혹은 그 이하)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저자의 문장 솜씨나 깊은 통찰을 얕게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게다가 여성 번역자 김선형씨의 번역도 아주 유려하게 좋으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어 번역본을 읽는 것도 매우 추천한다.

아마 대부분의 E북 어플이 제공하는 기능일 것 같은데 문장을 줄긋듯 표시해두고 나중에 따로 읽어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종이책에 줄 긋는 거야 학교 다닐 때 교과서나 문제집에 말고는 거의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전자책은 언제든 깨끗하게 지울 수 있으니 죽죽 마음에 드는 대목을 신나게 표시하며 읽었다. 그 중에서도 몇 개를 골라 공유해본다.

"You young people don't appreciate things, she'd say. You don't know what we had to go through, just to get you where you are. (…) Once upon a time you wouldn't have been allowed to have such such a hobby, they'd have called you queer."

- P.131, '나'의 어머니가 '나'의 배우자 루크를 두고, 젊은 애들이란 감사할 줄을 모른다며 옛날 같았으면 남자가 요리를 했다간 취미는 커녕 게이 취급했을 거라 말하는 장면.

"Mother, I think. Wherever you may be. Can you hear me? You wanted a women's culture.

Well, now there is one. It isn't you meant, but it exists. Be thankful for small mercies."

- P. 137

마무리 인용은 헤나 개즈비의 넷플릭스 스탠드업 실황 <Nanntte>에서 그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만 내 무거운 짐을 좀 나눠 내려놓고 싶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달리 설명할 것도 없이 <시녀 이야기>의 대부분은 화자 혼자 속으로만 겨우 뱉는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이다. 생각을 허락받지도, 곁에 그걸 나눌 누군가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By telling you anything at all I'm at least believing in you, I believe you're there, I believe you into being. Because I'm telling you this story I will your existance. I tell, therefore you are."

-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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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우 잘 아는 세계를 이전까지는 전혀 바라본 적이 없었던 각도에서 바라보면 언제나 은근히 흥분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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