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의 응답 - 우리가 궁금했던 여성 성기의 모든 것
니나 브로크만.엘렌 스퇴켄 달 지음, 김명남 옮김, 윤정원 감수 / 열린책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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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지역이 별세계이리라는 환상이 내 안에 심어진 건 10년 전 즈음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북유럽으로 유학을 간 어느 여성의 블로그 글을 구독해 읽었고 핀란드 같은 국가의 남자들이 한국인과 성향이 비슷해서 연애하기 좋다더라 하는 얘기도 본 적이 있으며, 스웨덴 브랜드 이케아의 인기란 한국은 물론이고 여기 런던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런던도 오래된 집들을 심심찮게 리모델링(또는 리퍼니싱)하는데 내가 지금 지내는 집도 집주인이 이케아에서 한꺼번에 사온 가구와 장식으로 집안을 새로 꾸며 놓았다.

개인적으로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서구권 대중문화에 빠져들게 되면서 미국도 별 거 없다, 유럽도 별 거 없다와 같은 허구의 환상 깨부수기가 여러 차례 이어지기는 했지만, 이유를 모르게 그래도 북유럽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그들이 말하는 인권이라는 게 자국의 백인을 뜻하는 다른 말이라는 암묵적 은유를 감안한다고 해도) 늘 '그래도'가 입구를 막아서고는 길을 비켜주지 않아 우연히 유지되었다. 지난 해 부국제에서 <우먼 앳 워> 같은 아이슬란드 영화를 본 탓도 있을 것 같다(엄청 재밌음).


그리고 『질의 응답』 을 통해 마침내(?) 지구의 남성 인류(혹은 그들을 둘러싼 시스템)에 관한 대부분의 개인적 환상이 차라라 무너져 잔재를 흩뿌리며 사라졌다(Frozen 같은 분위기로 무너뜨리는 것이 어울리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우선은 그것이 아주 예상 밖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국 여성들이 노르웨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아주 손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솔직히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책 『질의 응답』 을 나는 이성애-유성애자 여성을 위한 A/S 목적의 도움말 모음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 조심하면 돼" 하고 호호 약을 발라주는 그런 사후 매뉴얼이라고 할까.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우선순위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사례를 죽 읽고 나면 나같은 탈이성애 지향-무성애자 여성은 읽는 중에 하품은 조금 했다손 쳐도, 다소 안도의 감정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했어도 괜찮아" 만큼이나, 내가 살면서 듣고 싶던 말 "그렇지 않았어도 괜찮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무색의 양초로 꾹꾹 눌러 새긴 그 말을 불빛으로 그을려 가며 읽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책은 (심지어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해 언급조차 하지 못하는, 비교적 가시화 되지 못한 모든 성적 분류로 세분화된) 여성 모두를 위한 매뉴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성인(혹은 그 언저리)이 되어 하는 독서가 재밌는 점 하나는, 이러한 텍스트를 읽을 때 '--하는 듯 하다'와 같은 결론 내려지지 않은 말투를 통해 저자가 묶어낸 이 결과물이 할 수 있는 한 온갖 노력을 다 짜내어 최전선에서 쓰인,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 중일 이야기라는 점을 알아채고 입맛을 다시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남작가 이상이 이야기하는 '박제된 천재' 같은 표현의 의미 따위야 알 게 뭐냐 지나치더라도, 『질의 응답』 이라는 이름을 통해 박제된 2010년대 후반까지 여성들의 삶을 포착한 이 스냅샷만은 많은 여성들이 기꺼이 유쾌한 기분으로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면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이고, 이 이야기는 틀림 없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과거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발목 정도까진 이미 굳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무리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제목이다. 반쪽짜리 사대주의를 품고 영국으로 와 매일 한국어로 트위터나 끄적이면서 밖에 나가선 고작해야 영어로 '알겠어'를 어떻게 해야 더 잘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지내는 나로서는, 이런 오롯이 한국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위트(외래어 죄송…)를 발견할 때면 그 희열감에 소름이 훅 끼쳐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모두가 쉬쉬하던 의문에 속시원히 답해주는 Q&A 세션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해리포터 세계관 속 볼드모트처럼 오랜 시간 이름조차 언급되지 못하고 살아온 존재인 질이 마침내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서서 우리의 물음에 응답해온다는 느낌이 들어 재밌다. 역시 응답의 민족(?)과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그러고 보니 대표적인 사대주의 로망의 대상 국가 미국 방송에서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도 무려 2017년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3 (및 이를 언급하는 CBS The Late Late Show)가 최초임을 감안하면 이 '사대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사어가 되는 일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드나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가장 빨리 많이 듣고 배우게 되는 게 penis [소싯적 팬픽에서는 페니스라고 많이들 썼지만 실제 발음은 피너스에 가까워서 늘 스펠링을 헷갈리게 된다], sperm 같은 단어인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편중된 시차라고 볼멘소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만 그렇게 느낀 거라면 죄송(2)….


이 책의 노르웨이어 원제는 Gleden Med Skjeden 인데 영어 단어로 바꿔 보자면 The Joy with the Vagina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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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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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룬 기사를 링크한 트윗은 이런 논조였다. '전자책은 머리에 남지 않는 걸 알고 포기했다.' 이런 걸 발견하면 나같은 사람은 화들짝 놀라 링크를 클릭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난 (반올림해서) 1년 동안 읽은 99%의 텍스트가 트위터와 전자책이었으니까. 커피 세 잔을 단숨에 들이킨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국에서야 종이책 vs. 전자책 중 선택이라도 할 수 있지(심지어 이런 선택의 자유도 그나마 시각으로 책을 읽는 독자에 국한된다), 그러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어쩌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내가 읽은 그 트윗이 고도의 바이럴 마케팅이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가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 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심지어는 이 책을 소개한 해당 링크의 기사글도 전혀 핵심을 짚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다시, 책으로』 를 읽고 난 감상 혹은 내용을 요약하는 일은 살짝 망설여지게 된다. 내가 해당 트윗과 책의 소개 기사를 두고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꼬집었듯 누군가 내 감상을 읽고 나면 '딴 얘기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지적받을까 좀 두렵기 때문이다. 그건 이 책이 '깊이 읽기'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탓이다.

저자가 전면으로 내세운 주제는 디지털이냐 피지컬(종이책)이냐하는 '옳은' 플랫폼을 선택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대신 매리언 울프는, 인간이 지금에 오기까지 습득한 읽기라는 능력(혹은 기술)은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 아니므로 언제든 도로 퇴화 및 초기화 될 수 있고,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 읽는가와 별개로 제대로, 깊이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주 찬찬히 공들여 한다(심지어 읽는 이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려는 목적으로 편지글 형식을 택했다). '디지털 읽기'라는 게 어떤 점에선 대단한 태세의 전환이 아니며 요즘 흔한, 종이책에서 멀어지는 세대를 향한 우려는 완전히 새로운 고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 처음 '글과 쓰기'가 보편화 되었을 때도 비슷하게 퍼져나간 바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만약 인간이 이것(글)을 배우면,

이것이 그들의 영혼에 망각을 심을 것이다.

사람들은 더는 기억력을 쓰지 않을 것이다.

문자에 의존하게 되면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자기 내부에서 가져오는 대신,

외부에 표시해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중 소크라테스의 말 인용

다른 그 어떤 책보다도 『다시, 책으로』 는 독자 모두가 다른 사람이나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찬찬히 읽어봐야 하는, 다시 말해 저자를 통해 직접 들어야 하는 이야기로 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나를 비롯해 모두가 곰곰이 '왜 읽어야 하는가'를 곱씹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단순히 독서의 효용 가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함께 사는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읽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여정에는 다른 누구의 손길도 거치지 않은(편집자 및 역자는 제외하기로 하자) 온전한 매리언 울프의 단어와 문장이 필요하다.

여러분 중에 속으로 저를 정체를 감춘

러다이트(신기술에 반대하는 사람)로 여기는 분들은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이제 안전벨트를 매시기 바랍니다.

곧 우리는 거친 주행에 나설 테니까요.

『다시, 책으로』 중

잠정적으로 저자를 종이책 옹호론자로 가정하며 읽어 내려간

나같은 독자들이 허를 찔린 순간

내가 SF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먼지 같은 나의 존재가 우주로 산산히 흩어지고 난 뒤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 묘하게도 아주 재밌기 때문이다. 대부분 내가 살아서 지켜볼 수 없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사실이 전하는 거리감과 더불어, 현재의 인류가 그 미래에 불가피하게 미치게 될 나비의 날갯짓같은 영향력이 미묘하게 뒤엉켜 기묘한 관계성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는 다음 세대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넘어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들의 인생은 우리보다 훨씬 더 확장될 테지요.

그들은 우리와는 아주 다르게 사고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습득한 능력들을 최대한 정교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엄청나게 공을 들인 깊이 읽기 과정은

코딩과 설계, 프로그래밍 기술을 통해 공유되고 확장될 것입니다.

(중력)

우리 종의 가장 어린 구성원들에게 다능한 뇌 회로를 구축해주는 것이

그들의 후견자인 우리가 그들과 지구에 함께 머무는

짧은 기간에 집중해야 할 임무입니다.

『다시, 책으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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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인 블루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 1
케리 그린우드 지음, 한지원 옮김 / 딜라일라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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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드라마 버전(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추천은 예전부터 봤는데 왜인지 잘 보게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책을 읽다 생각이 나서 '코카인 블루스'가 커버하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찾아보려고 한 번 더 틀어봤는데 도중에 관두었다. 시즌1의 첫 에피소드 이름이 같은 걸로 짐작하건데, 한 권 분량을 1시간 길이 에피소드 한 편으로 만든 것 같다.

'프라이니 피셔'는 이런 추리 소설 장르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다소 뻔한 치트키 설정들을 차곡차곡 잘 걸쳐입은 인물이다. 돈이 많지만 가난을 모르지 않으며, 품위 있고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차림새 등에도 적절히 드러난다. 사랑에 목매지 않지만 아름다운 남자와 보내는 시간을 마다하지 않는 이성애자라는 점마저도 그렇다.

'홈즈와 왓슨'까지는 아니더라도(<엘리멘트리> 얘기 맞음) 프라이니 역시, 유능하고 충실한 어시스트 '도로시'를 만나게 된다. 시리즈를 여는 이야기인 『코카인 블루스』 에서는 다소 미약했으나 이후 활약이 기대되는 조합이다.

"저는 이제 아가씨 사람이에요."

도로시가 선언하듯 말했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첫 회사 그만두고 한참 놀다가, 억지로 프론트엔드 코딩 배우러 국비 지원 학원 다니던 시절(취업성공패키지로 지원비 40만원 받아 근근이 살고 학원 교통비로 거의 전부 썼다)에 인천 집에서 사당동까지 아침 9시에 맞춰 가느라, 거의 출퇴근에 가까운 시간표로 움직일 때 아침 일찍 TV를 켜면 정말 볼 게 없었다. 그 때 폭스였나 어디 채널에서 <명탐정 몽크> 해주는 걸 종종 봤는데, 이 '프라이니 피셔' 시리즈의 포지션이 약간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겪어본 적 없는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어딘지 아득하게 블러 처리된 옛스럽고 옛스럽게 재밌는 이야기. 달리 말하면 지금 보기에 이야기 자체로의 재미는 좀 덜하다. <명탐정 몽크>처럼(오프닝 음악만 이상하게 좋아함).

2019년을 사는 내가 보기에, 프라이니 피셔는 물론 멋진 사람이지만, 그의 차림새나 외적 요소를 묘사하는 대목들은 솔직히 읽으면서 좀 피곤스러웠다. 아름다운 탐정이라기 보다는, 여자라서 아름다워야 하는 탐정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게다가 우리는 수사물을 통해 튀는 외모나 차림새를 한 인물은 신분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며 자란 세대가 아닌가(?). 트레버 노아가 자신의 넷플릭스 스탠드업 쇼에서 '이드리스 앨바가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된다면?' 하는 가정으로 펼친 상황극이 떠오르는 시점이다(여기선 백인 천지라서 비백인이 아무리 도망쳐도 금방 눈에 띄고 만다는 게 요지였다).

셔츠 하나와 미소만 걸친 채,

프라이니는 멜버른 최고급 호텔로 향했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후반부에 들어서야 내가 이 이야기를 마냥 재밌게 읽을 수 없었던 게 내 개인적--현시대적인 피로감 탓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프라이니의 차림을 묘사한 부분이나, 번역에서 살린 '여의사', '여순경' 같은 단어들이 달리 보이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대단한 여자예요. 형사로 모셔 올 수 없어 유감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의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던 세상인걸요."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1989년 출간된 이 『코카인 블루스』 는 분명하게, 최선을 다해 여성의 '임파워링'을 말한 이야기다. EMPOWERING이나 BAD ASS같은 단어는 매번 볼 때마다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영 모르겠다. 어쨌건 프라이니 피셔는 궁극적으로는 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여성'이라는 정체성이자 수식이 그의 이름 앞이 아니라 뒤에 가 있단 느낌이 들어 좋았다.

심장이 눈에 띄게 빨리 뛰었고

숨도 한층 가빠졌지만,

프라이니는 자신이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음을 알았다.

모험가는 타고나는 법이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스포주의!

작가는 프라이니 주변의 여성들도 매력적으로 그렸다. 도로시와 '여의사' 맥밀란 박사, 빠뜨릴 수 없는 악당 캐릭터 '리디아'까지.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삶과 일에 몰두하는 인물들인데(이야기 내내 거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나온다), 특히 이야기 후반부에 프라이니가 리디아를 묘사하는 대목이 재밌다.

"아뇨. 리디아가 사랑하는 건 권력일 거예요.

우리를 죽이겠다고 할 때 그 눈빛 봤어요?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반짝이더군요.

그는 권력을 사랑하는 거예요."

스포주의!-->

제임스 본드에게 매료되는 여성 캐릭터처럼, 프라이니 피셔 곁에도 '사샤'라는 (진짜) 키링남이 등장한다. 웬만해선 다음 이야기에 다시 나올 것 같지 않은 이 아름답고 이렇다 할 임펙트 없는 남자에게는 이런 귀여운 대사도 주어진다.

아 이런, 누가 내 돈을 상속받으려나?

유언장도 작성 안 해뒀는데.

유기묘 보호소에 기부하는 걸로 해뒀으면 좋았을걸.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작가가 '노동자 계급'을 두고, 기득권층 인물의 입을 빌려 이런 이야길 한 것도 좀 재밌다.

"하지만 그걸로 술이나 사 마실 게 뻔해요! 노동자 계급이 어떤지 아시면서!"

"물론 그러겠죠, 부인. 하지만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면 안 될 건 또 뭐랍니까?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들고 괴롭고 낙도 없는데, 뼈에 사무치는 가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위안거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루하고 무기력한 기분 전환일진 모르지만, 그런 즐거움마저 빼앗는다면

너무 무정한 것 아닐까요? 부인의 후한 대접 덕분에 지금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마음껏 즐기고 있는데 말입니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뒷쪽에 실린 『코카인 블루스』 를 번역 출간한 출판사 딜라일라북스의 소개글도 좋았다.

딜라일라북스는 '딜라일라'라는 이름에 내포된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거두고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자는 의미에서

여성 작가와 여성주의 책들을 전문적으로 출판하고자 합니다.

2010년대 중후반 번역 출간된 이 책의 작가 소개에 '비혼'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에는 이 단어가 통용될 수 있게 여럿이 힘을 모은 사회적 분위기 영향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 시리즈는 2020년을 바라보는 현시점에 읽기에 어떤 점에선 분명히 낡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낡고 재밌는 이야기를 '고전' 혹은 '동화'라고 부른다. 언젠가 '코르셋'이란 개념이 성별과의 결부를 영영 끊어내는 시점이 온다면, 그 때 이 책을 읽게 될 어린이와 청소년 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재밌게 이 '머나 먼' 옛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내가 이런 꼴로 나가진 않지.

저기 커다란 검정 망토를 줘봐.

모자는 들고 가면 되고. 어디 보자, 다 챙겼나?

돈, 총, 담배, 라이터…… 됐어.

안녕, 도트. 내일 보자고.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안녕, 도트.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라고 인사하며 작별을 고하는 이 근사한 영웅 얘기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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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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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에 실린 역자 해설을 읽고 나서야, 무작정 영어 원문으로 『댈러웨이 부인』 을 읽으려던 시도가 현재 내 수준에서는 다소 무리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문장을 더듬거리며 짚어보는 재미는 분명 있었다. 특히 내가 거의 써본 적 없는 접속사 FOR를 이용한 문장이 많았다. 단어의 맛을 또렷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것들의 배치를 통해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정립해둔 말과 질서의 세계를 흘끔이나마 들여다봤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꽃을 사러 나가기로 마음 먹으며 아침을 연 하루는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수요일이다. 요일 정보와 '중순'이라는 시기에 근거해 대체로 6월 13일과 20일이 꼽히는데 검색해보다 '그 수요일'이 실제가 아닌 어느 가상의 하루임--13일도 20일도 될 수 없음을 여러 근거를 들어 정리한 자료가 있는 것도 알게 되어 재밌었다(솔직히 나는 도입부만 읽어봤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시선과 초점은 끊임없이 한 사람에서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겨간다. 그래서 그게 누구였다고? 지금 누가 이야길 하고 있는 중이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었다. 『댈러웨이 부인』 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끌린 이는 '미스 킬먼'이었다. 그는 이 댈러웨이 집안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그가 속으로 클라리사 댈러웨이를 평가하는 대목이 재밌다. 그는 '(특히 여성에게) 정당한 노동이 덕목이 아니던' 그 시대에도 일찍이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착실하게 꾸려온 인물이다.

미스 킬먼은 부인에게 잘 보일 뜻이 전혀 없었다.

평생 자기 밥벌이는 해오지 않았나.

근대사 지식은 극히 완벽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나마 얼마간을 떼어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쓰고 있었다.

반면 이 여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제 딸을 키웠을 뿐이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미스 킬먼은 자신이 돌보고 가르치는 클라리사의 딸 '엘리자베스'를 자식처럼 생각하며 어떻게든 현재의 여성들이 밟아가는 삶의 양상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바라고, 엘리자베스 역시 체제에 고분고분 순응하며 사는 성정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다.

법학, 의학, 정치, 당신 세대 여성들에게는

어떤 직업이든 열려 있어요, 미스 킬먼은 말했다.

킬먼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망쳐버렸으나,

그게 그의 잘못이었겠는가?

그럴 리가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우스갯 농담 식의, 옛 인류가 살던 동굴에 새겨져 있던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같은 말처럼, 근대 이후 이 세계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저주처럼 들리기도 하는 마법의 주문, '너는(너만은),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말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꾸역꾸역 전해져 내려왔단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이 말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세계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그 계기가 '정말로' 여성이 뭐든 할 수 있게 되면서일지 아니면, 마침내 그 말에 질려버린 여성들이 입을 다물면서일지. 전자이길 소망해본다.

작가가 '말줄임표'를 묘사한 문장도 재밌다.

'자, 다 됐어요.' 레치아는 피터스 부인의 모자를 손 끝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 그의 말꼬리는 마치 꼭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똑, 똑, 똑, 물이 새는 것처럼 방울져 사라졌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남은 것은 창문뿐이었다.

블룸즈버리 하숙집의 커다란 창문,

바로 그 창문을 열어 스스로 몸을 던지는 일의

피곤스럽고도 성가시며 신파극적인 속성이란.

There remained only the window,

the large Bloomsbury lodging-house window;

the tiresome, the troublesome, and rather melodramatic business

of opening the window and throwing himself out.

『Mrs Dalloway』 중

영화 <디 아워스>의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진 못하는데, 적어도 이 장면이 '그 장면'이라는 건 알아챘다.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오늘'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집중해가며 읽다가 결말을 맞이하고 나면 다소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역자 해설에서 소개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서 작가가 셉티머스 스미스를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알터에고'로 기능하게끔, 생전 클라리사를 만나본 적도 없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삶)을 이해하게끔 설정했음을 알려준다. 영화 속에서는 (스포 주의)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의 또다른 분신 같은 캐릭터인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의 아들 리처드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모자 관계로 설정해 두 인물의 거리를 좀 더 좁혔다는 느낌이 든다.

또 하나 재밌는 비화는, 이 『댈러웨이 부인』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빅벤' 시계탑의 시종 소리를 작품 전반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삼아 한동안 <The Hours>를 『댈러웨이 부인』의 잠정적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는 점이다(열린책들 역자 해설, 최애리). 아마 이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영화의 제목으로 삼은 듯 하다.

영국에 최초로 '서머타임'제가 도입된 것을 언급한 대목도 재밌다. 20년대 영국에는 참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군, 생각하게 되는 것.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엔가 한 번 실시한 적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길어봤자 8시 반 전후로 찾아오는 한국의 일몰에 비하면, 여긴 정말 시간을 혼동할 정도로 하절기 낮이 길어, 그야말로 서머타임이 필요한 대륙이다(?). 요즘은 대략 4시쯤 해가 떠서 밤 10시 즈음에 지는 것 같은데 여름이 깊어지면 더 길어지겠지.

윌리엄 월레트씨의 서머타임이라는 대혁명은

피터 월시가 지난번 영국에 다녀간 후로 생겨난 것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사실 잘못은 그 몸 파는 여자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있는 게 아니야,

우리 한심한 사회 제도 탓이지.

리처드는 온갖 생각에 잠겼다,

반백의 머리에 고집스럽고 단정하게 깔끔한 모습으로,

공원을 가로질러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러 가면서.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남편 댈러웨이보다 두 배는 똑똑하면서도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도 결혼 생활의 비극 중 하나일 터였다.

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리처드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니.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클라리사의 남편 '리처드 댈러웨이'와 어릴 적 연인 '피터 월시' 두 남자의 입을 빌려 '바른말(?)'을 시킨다는 점도 재밌다.

더 소개하고 싶은 문장이 몇 개 남았는데, 습관적 인용대잔치로 매번 끝나게 될 것 같아 이번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1923년 6월 배경이니까 딱 100년 후인 2023년 6월에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은 계획이 될 것 같다. 그럼 끝인 줄 모르고 만난 마지막 문장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 을 통해 전하고 싶던 메시지가 그 무엇보다도 '삶'에 있음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번에도 전치사 FOR를 쓴 문장으로 끝나는데, 책 본문의 구두점을 살짝 바꿨다. 원래는 피터 월시가 하는 말이다.

'클라리사.'

그가 있은 탓이다.

'It is Clarrissa,'

For there she was.

『Mrs Dalloway』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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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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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다가 읽은 책이었다. 초반에는 '어슐러 K. 르귄'이 만든 어느 세계관이 연상되기도 했다. 세계관을 이루는 모든 것이 이질적이고 새롭다는 걸 제외하면 접점이랄 게 없다시피 하지만. 그래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다가 훅 멱살을 잡혀 빨려들어간 시점이 있는데 그 순간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순전히 내가 그 당시 이 책을 읽다 내릴 지하철역을 놓쳤기 때문이다. 솔직히는 하기 싫은 일을 하러 가는 길이어서 내리기 싫은 마음에 더 열심히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페이지를 전부 다 넘긴 지금까지도, 레스터 스퀘어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재밌게 읽느라 호본 역에서야 그걸 알아챈 책으로 살짝 왜곡해 기억에 남기기로 마음 먹었다.

낯선 세계관을 머릿속에서 얼기설기 다시 쌓아올려가며 읽는 일에는 퍽 에너지가 든다. 게다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연관 관계도 아주 후반부에 밝혀지는 것을 감안했을 때 휙휙 전환되는 인물 정보를 임시 메모리에 올려두고 읽자니 더욱 힘이 들기도 했다. 대신 파편처럼 흩어진 인물들 간의 실마리가 별안간 밝혀지는 그 순간의 쾌감은 솔직히 이 모든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내 로가 이름을 정했어요."

『다섯 번째 계절』 중


"그러고는 문득 네가 통키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섯 번째 계절』 중


이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그 공간과 시간에 놓인 인물의 여정을 따르는데, 그 갈래가 천천히 하나씩 합쳐지는 순간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는 전자책이 참 좋다. 종이책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책장을 깨끗하게 놔두고 따로 메모하는 방식을 택했을 테니까. 읽고 나면 이야기의 전개 방식 탓인지 살짝 영화 <디 아워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번역'에는 언제나 상당한 정신 노동과 수고가 따르지만 이 소설은 특히 더 독자가 번역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작품이다. 대강 얼기설기 번역의 모양새를 갖추는 게 가능한 텍스트가 있고, 그런 시도조차 꾀하지 못하는 텍스트가 있는데 『다섯 번째 계절』 은 분류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마음을 푹 놓고 기대어 읽어도 좋은 번역본이고.

북한 뉴스나, 노년층의 말 습관을 보면 아 저런 찰진 욕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욕설도 아주 재밌어서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었다. 단연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헌은 "삭아죽을!" 이다.

'우리는 사슬에 묶여 있는 신이지만

저건 아니지. 삭아죽을, 그래.'

『다섯 번째 계절』 중


불똥쌀 대지여, 감사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지랄." 상스러운 말을 하는 것은

부끄러우면서도 흥분되는 일이다.

꼭 반지를 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다섯 번째 계절』 중


『다섯 번째 계절』 이란 이야기는 물론이고, 작가 N. K. 제미신 역시 아주 재미있는 문장을 쓰는 작가라서, 전개나 흐름과 관계 없이 표현력이 재밌어서 표시해둔 문장도 많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가 늘어놓는 이야기라면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다, 는 마음이기도 했고.

"마치 팔꿈치를 단단한 곳에 부딪쳤을 때

손가락 끝까지 찡 하고 감각이 멍해지는 것처럼,

마치 그 부분을 관장하는 정신이 저려서

마비된 것처럼 얼얼하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자신에게 로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개새끼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귀싸대기를 갈기는 것과 같다.

그건 일종의…… 선언이다.

무엇을 선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번째 계절』 중

"알라배스터가 멍청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너는 멍청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사람들을 위해 아껴 놓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대꾸한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이야기 속에서 내가 가장 거리를 좁혀 가며 이입했던 이들은 펄크럼에서 자란 '오로진'들이었다. 새로운 세계 속에 놓인 새로운 존재를 통해 내가 느낀 뜻밖의 감정은 '동질감'과 거기서 비롯된 연민이었는데, 어쩌면 이 '새로움' 속에서 발견되는 '익숙함'이란, 모두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 속에 묻혀 살다시피 하면서도 인류가 끊임 없이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새로움을 갈구하지만 그 새로움이란 속성에는 늘 '익숙함으로의 회귀'가 빠지지 않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건 작가가 겹겹이 옷을 입히고 공들여 덧붙인 겉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날 것의 진실이다. 유산균만큼이나 캡슐이 필요한 존재들이다(장까지 안전하게!). 그 연약한 것이 타인의 머리와 마음에까지 안전하게 닿게 하는 일이란 때로는 상상 이상의 끈기를 요구한다.

돌의 가르침은 말한다. 안전이 먼저, 생존이 최우선이다.

죽은 영웅 보다는 산 겁쟁이가 낫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아, 세상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다섯 번째 계절』 중

난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우리를 좋아해 주길 바라지도 않고.

중요한 건 저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야.

『다섯 번째 계절』 중

그녀는 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행동해야 하며,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예리한 유리칼처럼 휘둘러야 한다.

그녀는 차분하고 냉철하게 분노하되,

괴물이라서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험담을 듣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젠장, 변명은 해서 뭐한담?

그래, 그것은 사랑이다.

그녀는 아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1년 내내 하루 종일

그 애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영국에 오면서 좀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 '고립'이나 단절에 관한 문장도 여럿 있어서 남달리 읽은 대목도 여럿 있었는데, 인용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어서 딱 하나만 더 소개해야겠다.

다마야는 아주 오랫동안 흐느낀다.

오늘 밤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다섯 번째 계절』 중

『다섯 번째 계절』 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두 번 이상 읽어야 하는 책이다. 비단 나처럼 부록으로 실린 세계관 주요 관념 소개를,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발견한 독자가 아니더라도. 모르는 상태에서 퍼즐 조각처럼 맞춰가는 재미가 있는 책에는 짝꿍처럼 모든 걸 알고 볼 때의 재미가 항상 동반되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문장을 재밌게 쓰는 작가의 책 감상을 남기는 만큼, 마무리는 작가의 말에서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작가가 글을 쓰다가 돌아 버리지 않으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다섯 번째 계절』 감사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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