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천년대 중후반엔 나도 일본 소설을 좋아했다. 매체에서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10선과 내가 관심 갖는 책이 크게 다르지 않던 시절에 나는 국내에서 발간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전부 모아야지 다짐했었다. 그 마음으로 산 마지막 책이 《왕국》 시리즈였고 이후로 10년 이상 이 작가의 책을 읽지 않았으니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즈음에 이력에 한 줄이라도 채워넣자고 난이도 낮은 JLPT 급수를 취득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일본과 일본 소설에 관해 내가 아는 배경지식은 딱 거기서 멈춘 기분이 든다. 이후에 아는 척 좀 하고 싶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으면서 회사를 다녔고 내게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여자 같다는 말을 칭찬 삼아 해준(ㅋㅋㅋㅋㅋㅋ) 남자와 맨정신으로 잘 지낸 과거도 있으니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제법 훌륭한 스까적 이력 아닐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젠체하며 나는 이제 일본의 문화적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더러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어는 내가 공부가 아니라 실사용성을 따지며 배워본 첫 외국어고 또, 이 나라가 10대에서 20대 중반까지 내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문화권인 탓인지 아직도 일본 영화에 입힌 영자막보다는 어설프게 이해하는 일본어오디오에서 더 날것의 감정을 만난다고 느낀다. 뭔가 오랜만에 일본 이야기를 하려니 말이 쓸데없이 길어진다.

이런 배경에 비해 '일본 여자'에 관해서라면 아는 게 전혀 없다. 미디어를 통해 스테리오타이핑된 '일본 여자는 자고로 이래야지' 같은 알맹이 없는 이미지 말고, 일본 여자들이 직접 만들고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별로 없다. 내가 아는 일본 여자에 관한 상식은 '마츠 다카코'나 다케우치 유코처럼 이름에 '코(子)'가 주로 들어간다는 것 정도(두 사람이 나온 드라마는 거의 다 봤다는 사족에 3천자짜리 축약 버전 썰을 덧붙이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하는 중ㅋㅋㅋ). 이외에는 흔하게 남자 이름으로 쓰이는 이름이 아니라면 이름을 통해 성별을 짐작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리노 나쓰오라는 이름처럼.

책을 읽기 직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작가 소개를 읽는 순간이다. 구체적으로는 작가가 여자라는 걸 확인할 때, 그리고 어떤 작품을 쓰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그 녹록지 않았을 자취를 쉽게도 읽어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에 가장 가슴이 두근거린다.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루키남 자리를 (어떤 의미로) 여성 캐릭터가 차지하게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엔진의 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게 된다.

"이렇듯 폭력적이면서도 복잡다단한 여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기리노 나쓰오는 매 작품마다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왔다.

(중략)

주인공인 아이코의 잔인한 행동과 이기적인 모습은

여태까지의 작품 속 인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하다.

그는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필요하면 훔치고, 눈에 거슬리면 죽이고

단지 질투가 나서 유괴하고 방화한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아이코의 시선에서는 모든 것이 추악하다.

(중략)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은 단순한 범죄 소설의 차원을 뛰어넘어

여성의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심리와 행동을 통해

사회적 규범과 틀에 갇혀버린 현대 여성상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대 일본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괴물 같은 여성상을 통해 세상을 조명한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세계(역자: 이은주)


익명 사건(?)으로 시작하는 범죄수사 시리즈물처럼 《아임 소리 마마》 역시 어떤 사건으로 문을 연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범인을 찾아내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전개 방식 대신 이 소설은 범인이자 주인공인 아이코가 끝내고 싶을 때 제 결말을 맞이한다. 영상이 아니라 글인데도 편집점이 탁월하다는 느낌이 단번에 들고, 매끄러우며 흡인력 있게 읽힌다. 또, 애쓰지 않고도 아이코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아이코의 성별은 그의 삶과 이 이야기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지만 적당히 뭉퉁그리는 식으로 안일하게 넘어가지 않을 때 이는 아이코라는 한 개인을 비춰보여주는 더없이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아이코가 저지른 범죄는 그 어떤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허나 잠시나마 우리가 아이코와 꼭 같은 자리에 서있다고 상상해본다면 고뇌와 소외, 그리고 충동으로 혼란스럽게 뒤엉킨 머릿속 어느 몇 가닥을 절묘하게 엮는대도 결코 아이코와 같은 삶이 되진 않을 거라고,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을 거라는 점에서 《아임 소리 마마》는 씁쓸하고도 묵직한 뒷맛을 남긴다.

현재 해당 도서는 절판인데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을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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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자 발견으로 유명한 제임스 채드윅은 입학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줄을 잘못 서서 물리학과에 서 있었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만 물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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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그리고 물리학에서 우리는 정말로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본다.

기존 이론의 결함은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기존 이론의 결함은 더 정확한 실험으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새로운 물리 현상의 전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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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에디션) 한국SF작가선 4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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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 따위는 믿지 않았다. 먹고 살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보다는 조금 전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고, 앞날보다는 지금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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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페이의 보시팬츠 - 나댄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당신은 아무도 아니다 코믹 릴리프 3
티나 페이 지음, 박가을 옮김 / 책덕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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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페이를 (작품으로) 처음 만난 건 <파크 앤 레크레이션>에서였다. 그 다음은 그가 제작한 넷플릭스 코미디 <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였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개그 코드가 잘 맞는 코미디언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기묘하게 안 맞음"으로 기억하게 된 인물에 가깝다. 《보시팬츠》를 읽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티나 페이 작은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영화를 끝으로 아, 이제 이 사람을 알려는 시도는 그만해도 되겠다 잠정적 결론을 내렸었다. 내가 소위 불편함을 느낀 지점은 그가 너무 '하얗고', 또 남초 코미디판을 오래 구른 베테랑인 탓에 필연적으로 미묘한 '마초 냄새'가 난다는 점이었다.

《보시팬츠》 속에서 이런 티나 페이의 완전히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는 반전 같은 건 없다. 내가 티나 페이의 책을 통해 얄팍하게 읽어낸 건 그가 (내가 얄팍하게 알던 대로) '하얗고' 또, 어느 정도 '마초'스럽다는 변치않는 결론으로 나를 데려다주었지만, 대신 그가 작품 속에서는 할 수 없던 장황한 부연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단 게 그동안과 다른 점일 것이다. 《보시팬츠》를 통해 티나 페이는 여성 코미디언으로서 낡은 체계에 맞선 자신의 고독한 분투기를 낱낱이 들려준다. 이는 다분히 개인적이라는 점에서 좀 더 남다른 역사로 느껴진다. 《보시팬츠》를 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짧게 요약하자면, 상투적이지만 "왜 《보시팬츠》, 《보시팬츠》하는지 알 것 같다"는 것이고(민디 케일링 역시 위의 저서에서 몇 번이나 '보시팬츠'를 언급한다.), 티나 페이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이 되는 일 같은 건 아마 평생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코미디를 좋아해보려는 시도를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보시팬츠》를 다 읽자마자 그날 밤으로 <30 락스>를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방영 당시 어째서 흥행하지 못했는가는 나 역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제 내게 누군가 티나 페이의 베스트 필모를 묻는다면 나는 어쩐지 <30 락>라고 답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성 코미디언을 좋아하기에 앞서 우리는 왜인지 많은 이유를 찾게 된다. 싫어할 이유는 단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좋아할 이유는 수백 가지를 가져온대도 그 모두를 충족해야 '통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쉽게 남자를 좋아하고, 대신 여자는 쉽게 싫어하도록 학습해왔다. 코미디판에서 고군분투해가며 지금의 자리에 오른 티나 페이를 본받아, 나도 이 낡았지만 무너질 생각을 않는 이 교묘한 체제의 흐름에 맞서 더 많은 여성에게 무분별한 사랑과 지지를 보내기 위해 힘쓰는 한 해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또한, 새로운 10년을 여는, 이번 2020년이 여성들이 더 많이 나대고 웃기고 그야말로 다 해먹는 한 해로 거듭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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