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한적한 시골에서 시내로 출퇴근을 하며 집,직장만을 오가는 남들은 지루하겠다고 혀를 차지만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일상을 보내며 산다. 그렇게 오가는 시간과 비는 시간에 책을 읽다보면, 2,3일에 한권은 뚝딱 읽어내기도 하고, 때론 영 속도가 나지 않는 책을 만나, '그래서 어쩌라고? 어떻게 되는거냐고?'를 속으로 외치며 읽어대다보면 일주일을 훌쩍 넘기곤 한다.

일상이라는게 그렇다. 집에서 일을 하고, 나가서 일을 하고, 바보상자의 최면에 수긍해주다가 손전화에게 손과 눈을 모두 잡히기도 하고..그러다보면 책을 읽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다. 게다가 아까 본 드라마의 장면과 겹치기라도 하면..삼천포로 빠지는 건 일도 아닌게 된다.
자연히 늦은 밤을 저당잡히게 되고, 그렇게 잠을 잃은 하루 하루가 쌓여 때때로 예민한 송곳같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책을 읽는 외적 폐단이다.
늦은 밤, 식구들이 잠든 시간, 혼자 앉아 책을 읽는 건 때때로 외롭다. 책읽기란 외로운 작업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앞에 앉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경우는 그렇다.
위로 받고 싶은 것, 해소하고 싶은 것, 즐겁고 싶은 것.
감상의 과잉이라는 불치의 습관을 갖고 있다보니..스스로에게 스스로가 치이고 상처받고 하는 일도 있고, 작고 사소한 일에 아파하기도 한다. 별것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일에도..나는 온전히 아파하곤 한다. 이런 생기다 만 성정을 치유하는 책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책들..산문을 읽으며 호흡을 다스린다. 내 호흡의 결을 따라 글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그 울림에 생각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떨림과 침잠의 시간은 위로와 치유를 내어준다.


때때로 이렇게 놀기도 한다.


 













이 두 권의 선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조합이다.

 카미유 드 페레티는 조르주 페렉에게 아마 이 작품을 헌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에 이행된 제약들을 이 소설에서 따르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진행되는 이야기..

전체를 64개로 나누고 64개의 에피소드를 시간별로 배치하는 행마법을 사용한다

멋지지 않은가.

페렉의 글은 또 얼마나 기발하고 환상적인 배치와 내용의 구조를 갖고 있는지..페렉의 한 아파트의 이야기는 99개의 서로다른 장별 제목을 갖고 있고, 역시 체스의 행마법에 따라 서술해간다. 배경과 이야기가 하나의 거대한 퍼즐이 되어지는 묘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 두권의 책을 들고 오래도록 즐거웠다. 


때때로는 이런 것을 들고 즐거워 하기도 한다.


 시인의 질문에 혼자 대답하거나..그러게 그건 왜? 이렇게 같이 반문하며 시간을 보낸다. 많은 생각들과 대답들이 오가는 시간. 한 면에만 인쇄가 되어있는 책의 편집. 그래서..그 여백들을 이런 저런 대답으로 채운다. 아. 날짜를 적는다.

같은 질문에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대답을 보며 내 의식의 흐름을 읽는다.

멋지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면..그러다보니..리뷰를 쓴다거나 하는 일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서재를 드나들며 드는 생각 중 하나는..매일 처럼 리뷰를 쓰는 대단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게을러터진 한량적 사고를 하는 나로서는 의문일 수 밖에 없다.


나의 책읽기는 다독도 아니고..정독도 아니고..그저 樂讀 이니 말이다.

대단한 사람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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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은 어떤 것일까..


좋아하는 뮤지션 타블로의 노트에 그런 말이 있었다.

"난 왜 잘하는 게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맞는 기억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아마 비슷한 내용이었을거다.

조금쯤 기억의 왜곡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기억하니 말이다.


어쨌든..최선은 어떤 것일까의 의문은..남는다.

시집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문득 어떤 대화를 엿듣는다.

다만 몇개의 시를 엮어 곡해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나는 그 대화가 마음에 들었다.

 



초록 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랏빛 오동꽃 보며


라고, 그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상행선 기차, 검진하러 가는 길


미친 복사꽃 지나

오동꽃 문드러지는 한나절 타고

짓이긴 꽃물 구성지게 번진 한판 세월

(....)

(p25)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

(P65)



저, 저, 하는 사이에


(....)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 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P16)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P24)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자꾸만 남는 몇개의 시를 묶어 그리운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때론 아프고 때론 멋적고 때론 그 마음이 너무 깊어 완벽한 날을 잡지 못하고 자꾸만 미루고 미루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그런 때가 기어코 올것만 같아서..그러다..그러다..결국은 알아보지 못하는 그 날이 올것만 같아서 말이다.


마치 이 시처럼..


사라진 왕국


감각은 어떤 순서로 몸을 나가는지

신경이 죽어가는 어떤 환자를 깨우려

의사가 환자의 젖꼭지를 비틀 때,


때때로 너무 세게 비틀어

젖꼭지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도록 무얼 했을까


다 떨어져나가도록 우리는,


서랍 속 엽서를 만지작대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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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의 책들 중, 유난히 아끼는 몇권의 책이다. 팔, 다리에 어떤 패티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표지에서 주는 느낌이 좋다.

세계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나보코프의 롤리타. 그의 지성이 녹아든 글들을 처음 읽을 때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째서 이게 무슨 의민지 모르겠지? 왜?..오기로 다시 읽고 다시 읽고 소리내어 읽으며 그의 장치들과 문장에 매료된다. 롤-리-타..발음을 하면서 윗니를 치는 혀끝에서 나보코프가 그토록 좋아하고 오래 연구했던 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과대망상일까? 


 


 




또한 조엘 디케르의 장편에 나오는 노라와 해리 쿼버트의 이름 사이에서 롤리타와 험버트의 그림자를 보았다면..억측일까?










갤러웨이의 상승..저 위태로운 줄 위의 걸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좀 더 멀리서 보는 좀 더 아슬한 줄타기..멀리서 볼 수록 위태로운건 줄타기뿐만은 아니겠지.











디어라이프와 눈송이의 손이 향하는 방향은 서로 반대다. 아래로 향한 채 편안한 표정의 디어라이프의 손의 방향과 하늘을 향한 눈송이의 손의 방향은 어쩐지 시리다.

두 손을 포개어 주고 싶어진다.


손과 다리로부터 시작된 오늘의 꿈은..이렇게 몇개의 표지들을 들추어내고 그 표지들을 들추었을 때 드러났던 속살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 막막했던 기억과..먹먹했던 감상과..또한 애틋하고 명료했던 기억들을 말이다.

때때로..책의 표지는..내용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내용과 상관없는 꿈을 꾸게도 한다.

늘 다른 내용을 꿈꾸게 한다. 


오늘은 몇권의 책을 펼쳐두고 징검다리 놀이를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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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책읽기란 어떤 의미인걸까를 생각하게 하는 제목이다. 도대체 왜 읽으며 어떻게 읽어야할까를 늘 고민한다. <읽는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와 당위성이 궁금한것이다. 


나는 다독(多讀)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을 분석하고 파헤치고 연구하며 읽는 것도 아니며, 오래 남는 여운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감성적인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책 못읽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거야?"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어떤 책을 내가 읽었는가에 대한 검증없이 다만 집구석에 쌓여있는 책들의 양을 보고 하는 이야기이리라.

어쩌면 나는 일점호사주의자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의 책읽기는 경박하고 즉흥적이다. 

한 권의 책을 들고 읽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몰입이되면 예를 들어 음악이라든가, 아는 이름이라든가, 반대로 모르는 이야기이거나, 궁금해진 것이 있으면 바로 찾아서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종종 시작한 책과 마무리 짓는 책이 달라지곤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책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때론 하나의 주제로 읽었던 책들을 벽돌 쌓듯이 쌓고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띠지에 그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시인의 시를 적기도 하고, 때론 책 사이사이에 우스꽝스러운 낙서를 하기도 한다. 

아, 물론 밑줄긋기와 모서리 접기는 기본 옵션이다. 이렇게 책을 난장판을 만들며 읽는것이 내 스타일의 독서다.


거기에서 얻는 것? 작가의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도, 작품의 예술성도,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오로지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 읽는다.


 놀이를 하듯 책을 읽고 어떻게 놀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나의 책읽기의 결과물, 리뷰랄것도 없는 리뷰인 것이다. 호모루덴스적 독서법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할 수는 없다. 그냥 노는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이 참 좋다. 최근에 읽고 "맞아..맞아"를 연발했던..고품격의 책읽기 & 놀이.


작가의 범상치 않은 시선이 낯설지 않고 신선하다. 그가 얼마나 책을 아끼는지..느껴지는 책이다.

 















오직 소설로 말하는 윤대녕의 장미창과 사강의 독약, 그리고 언급된 책은 아니지만 '자코메티'의 등장과 더불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 책 

이렇게 하나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의 연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내 책장은 점점 비좁아지고, 가족들의 지탄은 태산만큼 쌓여가지만, 그 태산의 길목마다 묶인 재미난 리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것이 때론 통쾌하다.


  이쯤해서 등장해주어 마땅한 후마니타스의 연쇄독서. *^^*













책을 읽고, 결과물을 꼭 내놓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것은 전문가, 혹은 좀 더 심도있는 책읽기를 하는 사람들이 해주어도 괜찮다. 나의 책읽기는 이기적이며. 그렇기에 어떠해야 한다는 틀도, 기대감도 없다. 즐기는 것. 삶의 의문들을 유쾌하게 풀어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좋은 책들과 저자들이 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딱히 리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맹목적 읽기가 아닌 읽기에 힘을 더하는 방법론으로 잠시 펼쳤다가..이내 그만두었던 아쉬운 책이다..













 책읽기는 소통을 열어주기도 하고, 사유의 폭을 넓혀주기도 한다. 그 모든것이 가능한 것은 책과 나의 동격(同格)이 성립되야 가능하다. 책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자신의 독서력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책 읽기에서 조심해야 할 일 중 하나이리라.

무언가 얻어내겠다는 욕심도 무언가 감동하게 되겠지라는 기대도 다 접어 두는 것이 좋다.

독자의 이기적인 책읽기에 대한 책의 방어 역시 이기적이고 다의적이라는데 있다. 읽어낸 만큼만 독자의 몫이고, 책의 내용이라는 것. 

여튼..책읽기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충분히 개인적이고 고독한 일일테니까 말이다.

낭독과 별개로, 독서는 철저하게 외로운 행동이다. 나는 책을 누군가와 나눠 읽지 않는다 (...)
만약 독서가 인류에게 해로운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외로움을 정당화한다. 더 오래 홀로 있게 한다. 나는 그 해로움을 사랑한다. 읽는 속도도 내가 정해야 한다. ( 책등에 베이다. 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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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맛, 백설공주의 사과, 그리고 황금사과..가운데 끼인 저 설탕의 맛은 뭐지? 다름아닌 "김사과"의 글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는 김사과의 글이 나는 좋다. 차갑게 말하는 그 속에서 두려움과 간절함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천국에서를 읽을 때, 그녀의 글에 심하게 몰입했었던 기억이 오롯하다. 무엇때문이었을까? 낯설게 다가온 것들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경험의 왜곡이 일어났다고나 할까? 여튼..사과처럼 상큼하고 달달하지 않은 그녀의 글과 그녀의 이름이 어쩐지 잘 어울리는 느낌. 부실한 이로 사과를 깨물때..머리끝까지 쭈삣해지는 시림을 느끼는 것 처럼..


사과에 일종의 포비아가 있다면 다들 웃는다. 바늘이나, 벌레에 대한 포비아에는 익숙하니까..하지만 그런게 있다. 내가 그렇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나를 작가 김사과는 능숙하게 끌어내곤 한다. 그래서 그녀가 좋다. 그래서 그녀의 글이 호감인것이다. 단순하게도 말이다.

어느 날 즈음에 "사과야 미안해..널 오해했어"라고 사과에게 사과하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과를 한다는 건, 어쩌면 용감해지는 것이며 자신의 오류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사과를 한다는 것이 나약하고 비굴한 것이라는 이상한 통념과 학습효과가 부쩍 사과해야할 일들에 사과하지 않고 뻔뻔한 작태를 갖게 만드는 상황을 종종 마주한다. 소위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는 논리다. 버티면 이긴다는 수작이기도 하고..

올바르게 사과하는 법, 사과를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건 아닐까? 


                                    















정중하고 정확한 사과는 당연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거다. 그렇게 이어지는 관계들은 감정적인 호감이 아닌 이성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그것이 요즘 우리나라의 대표 화두가 되는 "소통"의 시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사과의 이야기에서 뜬금없이 소통의 이야기까지..삼천포로 빠진 이야기. 

사실..김사과라는 이름이 좋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거다. 아참..김개미도 참 좋은 이름이다. *^^*



그리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순간 밀려든 바람이 케이의 얼굴을 때렸다. 그건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그녀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걸음, 또 한걸음 이어지던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녀는 수족관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의 푸른 물은 나를 익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헤엄쳐 그 강을 건널 거니까. 그렇다 헤엄쳐, 저 너머에 닿을 거다. 거기에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다. 거기가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겠다. 아니, 지금 간다. 케이의 붉게 달아오른 뺨위로 이른 봄의 투명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봄이 왔음을 느꼈다. 여름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천국에서 p341~ p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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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29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