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키면

퍼렇게 날 선 칼이 된다

나중에는 날이다 뭐다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살은 거멓게 타고 마르고

눈에는 핏발이 오른 뒤

그것도 지나면 차라리 누레지는 것이다

악물고 악물어 어금니가 주저앉고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나면

칼이 된다

입은 웃는 것처럼 잇바디가 드러나고

한기가 피식피식 웃음처럼 새는 것이다

무딘 듯 누더기인 듯 온몸이 서는 것이다


한두십년에 오지 않는다

진펄에 멍석말이로 뒹굴며

피떡이 되어 이백년 삼백년

비로소 칼이 서는 것이다

꺼먼 칼이 되는 것이다


김남주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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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을 기억해야 하기 전, 가슴 속에 해마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울리는 통곡소리를 담고 살았다.

그 해 5월을 말이다.

수없이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던 통곡의 곡조는 너무나 많아 어디쯤에서 눈물을 닦고 숨을 골라야할지도 알 수 없었다.

5월의 시는 그랬다. 처절했고 결연했고 혁명적이었으며 애통했다. 아무 상관도 없을 시에도 광주는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5.18 이후 모든 것에는 버즘처럼 광주가 피어있었다. 어떻게 읽어도 느껴지는 참담함은 어떤 트라우마 같은건지도 몰랐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두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때, 65%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노래라고..기사가 쓰이는 때, 독립군가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독립을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행태, 혹은 작태라 불러도 좋을 일들이 자꾸만 벌어진다.

광주민주화투쟁을 진압했던 이는 아직도 살아남았고, 사죄하지 않으며 급기야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망언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칼을 잘 벼리지 못했나보다.

일격에 숨통을 베어낼 칼이 되지 못했나보다. 아직 남아있는 유약함과 비겁함이 어금니를 주저앉히지 못했나보다.

5.18이 일어나기 전에 나온 고은 선생의 시에서는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중략)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번

우리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화살-고은. 중에서)


고 했다.

화살도 되지 못했다. 칼도 덜 벼려졌다. 주저앉을텐가.

기꺼이 날아가 박힌 화살들이 있었다. 금남로에 충장로에 수북히 쌓였던 화살들을 기억해야 한다.

잘 벼리기는 커녕 자꾸만 녹이 스는, 피떡이 되어 뒹구는 것이 아직도 두려운 비겁을 떨쳐내어 꺼먼 칼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에 쓰여진 이름 '김남주'

이름 석자만으로도 서늘해지는 건, 아직 칼이 되지 못한 자책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광주에선 수없이 많은 칼들이 님들 위한 행진곡을 부를게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들은 오랫동안 시퍼런 칼이었다.

칼들의 노래가 들린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통째로 칼이 된 사람들의 노래가 들린다.
오늘이 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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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결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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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 상을 받았다는 낭보를 아침에 듣는다.

천박한 기사 헤드라인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를테면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을 제치고...따위의..

표현 방법은 저급했지만 반가운 소식임에 분명하다.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난 해 책 좀 읽는 다는 사람들을 분노조절장애인으로 대거 만들어버린 신경숙이랄지..

맨부커 후보로 확정된 후로도 난리가 아니었다. 수상까지 했으니 쾌거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왠지 찢어지게 가난한 집 둘째가 어느날 도지사 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옹색한 장면이 그려진다.

어쩌면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더 이상 뒤를 이를 형제도 자매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집에선 오로지 이 둘째의 이야기만 끝없이 되뇌이며 자족하며 여전히 빈한하고 옹색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뭐..그렇다는거다.

희랍어 시간을 읽고 소년이 온다를 읽고 채식주의자를 읽고..노랑무늬 영원을 읽고..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를 읽고..음..더는 딱히 기억나는게 없다.

언젠가 채식주의자를 읽고 독후감이랍시고 끄적여 둔 글에서 '한강의 시가 더 좋았다'라는 뜬금없는 정리를 했었다.

그녀의 작품들에 배어있는 어떤 리듬은 다분히 시의 리듬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길게 써낸 서사.

아직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파동이 그 안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회상을 읽는다.

<그해 늦 봄>..그해 늦봄의 붉은 시간이 그려졌다. 개인적인 유추일것일테지만 소년이 온다를 읽은 탓인지 내가 그리는 그해 늦봄은 5월이다.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그 거리는 광주다.

원한과 분노와 상실과 그리움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부서지고 깨지고 외면된 채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은 아무리 생각해도 광주다.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어김없이 5월은 돌아오고 끈질기게 돌아오고 영원히 돌아올테지만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다. 사과와 단죄는 여전히 멀고 왜곡과 조작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면 온기가 빠진 텍스트만이 그날을 증언할지도 모른다.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일지도 모를 하루 하루를 지나며 조금씩 희석되는 그해 늦 봄의 사건. 증언이 회상이 되는 시점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한강의 뿌리는 어디인가 궁금해졌다. 폭력과 슬픔을 끌어내는 주술사 같은 그녀의 펜이 어디로 향할지도 궁금해졌다.

시집 한 페이지에 적힌


몇 개의 이야기 12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다.


단촐하게 적힌 시를 끌어온다. 물기없이 단단한 슬픔..그것이 그녀의 펜의 방향일까 라고 짐작만 한다.


쾌거를 들으며 조심스런 응원을 한다. 이제 그녀는 상품이 되어버렸을거다. 그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잘 팔리는 한강이 될지도 모른다. 세심하게 세공되어 진열장에 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원석의 단단함을 틀어쥔 작가를 기대한다. 단단한 슬픔을, 줄줄 흘러내리는 물러터진 슬픔이 아닌 눈물을 덮어쓰고 견고해지고 뾰족해져 그해 늦 봄 누군가 들었을 무기처럼 글을 썼으면 좋겠다. 단단하게 얼어붙어 이켠의 설움에서 저켠의 희망으로 의심없이 건너도 좋을 그런 한강이었으면 좋겠다.


회상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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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들이 가는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

멍석말이를 당한 몸으로

콩나물시루도 아닌데 꼭 조여져서

육시를 당한 몸으로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닌데 잘게 토막이 나서


나란히 누운

치즈복자, 참치복자, 누드복자들

순교의 뒤끝에서 식어가는 밥알은

김밥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헐거운 육신이다


김밥들이 가지 않는 불신지옥도 있을까

버려진 몸들답게 김밥들은 금방 쉰다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

계란은 처음부터 중국산이야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지 전의 김밥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밥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깨소금이 데코레이션을 감당하는 그 나라,

김밥천국

자기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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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을 꺼냈다. 우중충해지면 가끔 꺼낸다. 우중충해진다는 건 명확하지 않음에서 온다. 우울함도 그렇다.

불안과 불명확함이 가져오는 일종의 혼란이며 견디기 위해 쓸데없이 에너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실이 그 감정을, 혹은 증상을 악화시키곤 한다.

그럴 때 꼬리 치는 당신을 꺼내거나 미주알 고주알을 꺼내거나 생각하는 연필을 꺼낸다.

권혁웅의 책들이다. 어떤 사물과 대상을 오래 또렷이 들여다보고 건져내는 또 다른 이야기들..과학적이거나 분석적이라기보다 애정어린 눈빛으로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것들을 잘도 찾아낸다.

빨간 사과를 보고 달큰한 과육이나 빨갛거나 파란 껍질, 흰 사과꽃을 떠올리거나 잘 갈아서 주스를 만들고 파이를 만들고 잼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내기보다는 빨간 사과를 손에 들고 사과보다 빨간 볼로 웃었던 사과향이 나던 그대나 사과맛이 날 것이 분명한 입맞춤을 꺼내는 것. 사과의 그림자마저도 붉을 수 있다고 귀뜸하는 여유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명확해지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말이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울었고 나는 김밥천국에서 토막난, 육시를 당한 김밥을 마주한다.

때때로 식사시간을 놓칠 때, 김밥천국을, 김가네를 들어간다. 가지런하게 누운 시커먼 김밥을 입에 넣으며 간혹 생각한다.

어떤 주검으로 채워지는 생기.

김밥 천국에서 김밥 한 줄을 앞에 놓고 따끈하게 데운 다시다 푼 물을 앞에 두고 읽고 싶어진다.

한 조각씩 입에 넣으며 "허기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라며 김밥의 명복을 빌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의 허기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본분이 드러나는 복자들. 아무리 여며도 풀리고 터져나오고마는 속멧 것들을 굳이 감추지도 여미지도 않는 순정함.

어차피 허기진 영혼은 흩어진 것들을 야무지게 주워 입 속에 넣고 하나가 되도록 씹어삼킬 것이라는 믿음.


어쩌면 천국은, 혹은 불토는 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어느 곳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다만 사람의 세상에 머물거나 사람의 세상에서 내쫓겨지는 순간만으로 생의 굴레를 마감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끝없이 이어지는 허기와, 그 허기를 채워줄 수없는 주검들을 감당할 길이 없다. 때론 허기를 가장한 절망이 짐짓 선한 눈빛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네 생을 위해 댓가를 치르는 주검들을 봐. 이 짓을 더 해야겠어?. 너 하나만 없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의 삶이 더 연명이 될지 생각해봤어?' 따위의 가당찮은 요설을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살아감의 고리는 어느 한 곳도 풀려서는 안된다. 그 연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 없다. 내가 빠져나간 자리에 나와 닮은 또 다른 내가 자리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이어지는 삶의 고리는 숭고하지 않을까?

자괴감은 허기지지 않았음의 증거다. 오만하게 자라버린 자기연민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우울은 거울이 된다. 거울 저 편의 나는 조금 덜 우중충하고 조금 덜 자조적이며 조금 덜 밉다.

입을 크게 벌리고 김밥 한 조각을 맛있게 우물거리는 모습은 살아가야 할 정당성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믿어야 한다.


엄마는 소풍날 김밥을 싸주지 않았다. 신식 엄마는 샌드위치를 싸주었고, 주먹밥을 예쁘게 치장해 넣어주기도 했다.

나는 늘 내 도시락을 내어주고 연주 엄마가 싸준 연주의 도시락을 먹었다. 계란과 김치가 전부였던 참기름내가 좋았던 연주의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연주 엄마의 손가락을 빨아먹으면 세상의 모든 맛이 다 날 것 같던 김밥.

김밥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첫번째 힌트 같은 걸지도 모를 일이다. 죽어서도 기억할 이승의 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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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되새김질 할 수 없는 일 

너희는 울며 기며 먹을거리로 내 뒤를 씹지만

나는 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서 잠든다고 비웃지만

등기대 지새는 버릇

소젖에 빠진 파리인 양 재갈을 물었지만

종마만 남기고 거세를 당했지만

너희처럼 핏줄끼리 몸을 섞지는 않는다

우물 곁 사람이 퍼주는 물을 마셔야만 사는 집짐승

그래도 너희 양 낙타와 같이

사람 올 때까지 물냄새만 맡다 쓰러질 수야

염소 뿔 떨어지는 추위

갈기와 눈썹을 내려 접고

바람 가는 남쪽으로 서 있다만

이 바람 자면 달려갈

저 들 저 지옥이

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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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단어가 갖는 미묘한 구성에 눈이 갔다. 수십년을 쓰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단어가 낯설어 지는 건 아마도

그 단어가 갖는 의미와 나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ㄹ 과 ㅁ 의 배치.

어째서 처음부터 ㅁ 을 앞에 쓰지 못했을까?

살다"라는 동사에서 명사형으로 어쩌구 하는 장황한 설명을 요하는 물음이 아니다.

살다"가 처음부터 ㄹ 을 받침으로 갖고 있지 않는 글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사막에 "삶"이라는 단어를 분해하여 뿌려 놓는다면..

ㅅ, ㅏ, ㄹ, ㅁ..

나는 어쩌면 "말"과 "ㅅ"(사람인이라고 우기며), 이렇게 두 글자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같이 있어야 아름다운 몽골의 그니들 처럼말이다.

 

초원과 사막의 경계에 아슬한 초록이 눈부신 이유다.

삶이 죽음과 멀지 않음에 반가워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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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똥



소 먹이는 영정이가

소똥 한 트럭 싣고 왔다


삼년 묵혀 말린 소똥이란다

그래서일까, 고슬고슬한

소똥에서 똥내가 나지 않는다

아니다, 이제 내 똥이니까

똥오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텃밭 앞에 받아둔 소똥을 낸다


얼갈이배추 고랑에도 내고

열무 아욱 대파 고랑에도 낸다

호박 구덩이에도 한 삽

오이 구덩이에도 한 삽,

한 삽씩 내다 서운해서

한 삽씩 더 보태어 낸다


소똥 내던 삽자루 놓도

두 주 만에 처가에 간다


길이 어지간히 막혀

처가 식구들조차 늦은 밥상을 받는다


딸애 봐주시는 장모님이

네 살 딸애가 싼 오줌을 받아

옥상 스티로폼 상자에서 키웠다는

쑥갓과 상추를 내놓으신다


풋것이 하도 쌉싸래하고 달아

어린것이 벌써 애비를 먹이는구나, 생각다가

한참 소똥 얘기를 늘어놓는데


모두가 숟가락 내려놓고 내 입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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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쪼끄만 어린애였을 때, 내 유년의 대부분을 들여다본 외할머니는 늘 묻곤 하셨다.

현이는 커서 뭐가 되련?

요술사!

요술사가 되면 뭘 하련?

꽃이요~사탕이요~토끼요~ 이렇게 만들어 낼꺼야.

그게 좋으니?

응.

그럼 할미는 거름으로 맨들어주련?

거름? 똥? 더러워.

더럽긴 내 먹은거 나온건데 똥이 더러우면 내가 더러운거다. 할미는 좋은 거름으로 만들어주려므나.


나는 요술사도 뭣도 되지 못했지만 TV에 농촌이 보이면, 농부의 땀이 읽히면 무던히 외할미 생각에 빠지곤 한다.

언젠가 SNS에서 농사 짓는 분과 히히덕대다 '똥거름 되는게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진심이었다. 그 대답을 내 놓는 순간 외할미와 요술사와 영악한 손주년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것인가가 과제처럼 주어진 시간을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천착해가는 지금. 무엇을 쌀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깊어진다.

내 삶의 찌꺼기가 남은 이들의 생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질수록 그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한다.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을 것이라면 잘 썩은 똥거름처럼 냄새조차 없이 포실포실 부서지며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썩음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쓰인다면 좋겠다는 과한 욕심도 부려본다.


박성우의 시들을 하나씩 넘기며 어떤 이야기들을 꺼낸다.

시들이 그려내는 풍경과 소리와 냄새와 촉감이 순박하게 어울리고 순정하게 드러난다.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자주 자주 가고 싶어진다.

거기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좋아서, 아무도 없는 쓸쓸함이 좋아서, 북적대는 숨소리가 좋아서, 영악스럽게 들고 있던 짐 하나를 슬쩍 숨겨두고 마치 잃어버린 양 다시 찾으러 가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어슬렁어슬렁 길을 잡고 싶어진다.

키작은 자두 나무가 만만하게 서 있겠지. 별볼일 없는 자두 나무가 새빨간 열매를 장하게 매달기 전까진 만만하기만 하겠지.


잘 묵힌 된장을 풀어 거칠게 손으로 뚝뚝 잘라넣은 푸성귀를 넣고 붉은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희고 푸른 양념을 넣어 누렇게 끓여낸 할미의 된장국처럼.

아무렇게나 숟가락을 집어넣고 맛있게 입속에 굴리다 시원하게 꿀꺽 삼키는 순간의 포만감.

그런 시들이 빼곡하다. 허리를 숙여 김을 매고 대를 세우고 돌아 온 저녁. 푸근하게 내어놓는 밥상 같은 시들.

입으로 들어가 똥구멍으로 빠져나와 다시 입으로 들어가는 간단한 순리를, 내 몸은 어쩌면 세상의 정화기관일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는 시집. 잘 묵힌 똥거름 같은 시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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