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

살림이란 게 설거지에서 완결된다지만

완결이라는 말이 아프다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집 안을 둘러본다

헝클어진 이불, 무릎께가 닳은 추리닝,

윗목에 돌돌 말린 양말짝

이 모든 게 살아왔다는 증거처럼 구구절절하다

설거지는 구구절절에 대한 즐거운 설명이다

 

젓가락 한 짝과 수저 하나로 남은 생

붉은 고춧가루 하나가 아프게 찍혀 있다

설명보다는 실명에 가까운 고적한 설거지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전깃불을 끄고 나가야 하는데

설거지 하다가 나는 모른다

전등을 끌 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

그게 내 손안에 있기는 있는지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설거지하는 나를 개관한다

젖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본다

차갑다는 느낌이 내 삶의 온도다

​----------------------------------------------------

출근하지 않는 주말. 밀린 집안일을 하고 일주일간 먹을 반찬을 준비한다.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고, 끼니를 해결하고, 설거지를 하고, 다시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고...

 

창문이 덜컹대는 건 바람이 분다는 말이다. 아주 많이 분다는 말이다.

창문이 톡톡 튀는 건 비가 온다는 말이다. 젖는 줄도 모른 채 흠뻑 젖는 그런 비가 온다는 말이다.

창문이 밝은 건 해가 강하다는 말이다. 잔뜩 찌푸린 채로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나는 집 안에 있는게 맞다.

 

내 삶의 도돌이표가 끝나지 않는 곳. 그 곳에 한번씩 도돌이표에 다녀온 흔적이 남았다.

낡아가는 행주와 수세미, 조금씩 휘어지는 조리기구, 빛을 잃어가다 차츰 찌그러지기 시작하는 냄비며 프라이팬,

이제는 이가 헐거워 조금만 스쳐도 뚜껑을 떨구고 속엣 것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양념통까지..

구석구석 내가 매만진 흔적을 담고 있는 부엌은 나의 오케스트라이다.

 

아직까지는 아다지오를 더 자주 연주하고는 있으나, 미뉴엣을 연주할 날도 있긴 할게다.

왈츠도 좋고 탱고도 좋다. 탱고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쁘지 않다.

내 걱정은...

아다지오에서 레퀴엠으로 넘어가는 건 아닐지에 대한 걱정..

말끔하게 씻어서 엎어 둔 밥공기와 대접, 접시들..그리고 언제나처럼 함께 누워 마르고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

 

늘..잼을 하듯 즉흥곡이 연주되고, 규율도 원칙도 없이 제멋대로인 것을 단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온전한 내 공간.

시린 손이 오히려 익숙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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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 한다

어떤 일도 안하고 '아니함'만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충 하지 않고 끝까지 철저하게 안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일 외에

다른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모욕을 당해도

내쫓겨도

감옥에 가

끝내 죽음에 이르러도

그는 온순하고 예의 바른 자세로

안 한다. 절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부탁하는, 일은

안 한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부분이 있다

앞뒤 꽉 막혀 답답한 부분


                        ◆


그러나 혁명은 이런

처절한 거부에서 온다


                     ◆


사람을 얼마든지 질식사시킬 수 있는

검은 비닐봉지*에

때로는 봄의, 화사한 페츄니아 화분을 담기도 하는


----

* 1994년 4월에서 7월 아프리카에 있는 르완다공화국에서 다수족인 '후투'가 소수족인 '투치'에 대해 집단학살을 자행하면서 실제로 검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켜 죽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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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다 만난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는 구멍이 숭숭 뚫린 엄마의 낡은 속곳을 보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거기 있었기에 낡아 버린, 아무것도 한 것은 없음에도 모든 것을 하고 있던 낡은 속곳같은..비약일까.

" I would prefer not to."

심지어 들뢰즈는 바틀비에 대해 은밀한 비문법성이 파괴적인 힘을 낳는다고도 했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선택과 의지..소심해보이지만 '안 하는'것을 '하는' 의지의 표현은 완고하다.  유연성, 혹은 융통성이라는 덫에 발목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움이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안 하는'것을 열심히 '하며' 살아내겠다는 결연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틀비는 정말 안했을까? 어쩌면 치열하게 하지 않았을까?


<모든 시스템은 무겁다. 시스템을 온전히 떠받치고 있는

바퀴는 무거워, 구르고 싶은거다 (중략)

이렇게라도 구르지 않으면 생업의 시스템을 견딜 수 없어요(중략)

제몸을 맹렬히 굴리지 않고서는 그나마 견딜 수 없는거다(중략)

시스템은 도깨비 빤쓰보다 찔기고도 튼튼하다,끄덕없다.

무겁다. 세상의 모든 바퀴는 구르고 싶은거다.- 세상의 모든 바퀴 /중에서>


간절히 구르고 싶지만, 이렇게 굴러야 생업의 시스템을 견딜 수 있지만 이는 구르고 싶지 않음의 절박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깨지고 사랑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도 죽은게 아닌 시스템을 견디는 건 치욕적이다. 그래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싶은거다.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숨통이 시스템 사이에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없는 시스템이 있다.

없다는 건, 없어야 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안 하려면 해야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해야만 한다.

있다는 건 없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해야 한다는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바틀비의 비문법성은 낱말과 사물, 행위들, 언어행위와 낱말들을 어긋나게 하며 그것은 언어를 모든 지시로부터 떼어놓는다고..들뢰즈가 말했을거다.


이것이 비단 낱말과 사물, 행위, 지시에 대한 구분뿐은 아닐거다. 그것은 혁명일지도 몰랐다. 당연하게 연결되고 당연하게 구속되고 당연하게 종속되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선언.

선언은 간단했다. '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


노점 할머니의 채반에 수북하게 담긴 향 좋은 쑥을 담아주던 검은 비닐봉지가 학살의 도구가 되어지기도 하고, 학살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비닐봉지에서 쑥쑥 자라날 고추모종을 꺼내기도 한다. 어떻게? 라는 물음과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을 담고 끊임없이 뭔가 '하는', '해야만 하는' 일상, 그래야 한다고 믿게 하는 틀 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깨고 나오는 일 밖에 없지 않을까?


소금 울음.

김진숙의 소금꽃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목덜미에 하얗게 돋아나던 소금꽃. 행복을 위해 희생하며 술 마신 어느 저녁 잠꼬대처럼 웅얼대던 아버지의 노래가 소금 울음이었다는 낮은 시는 고춧가루 하나도 없이 맵짰다.

태생이 바닷물이었던, 너른 염전에서 하염없이 말려지고 모아져 창고에 수북히 쌓였다가 어느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부엌 양념통에 들어찬 소금.

바다로 모여진 삶의 찌꺼기들이 다시 되돌아 와 삶에 간을 맞추는 이 순환은 절묘하다. 이 짠 맛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오래전 바다에 던져버린 내 사연의 일정부분이 포착될것도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진 살갑지 않은 아비의 말처럼, 철없는 아들녀석의 말처럼, 생각없는 남자의 말처럼 있는대로 쓰여진 시들.

아무리 포장을 달리해도 소금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리 투박해도 시일 수 밖에 없구나 싶어진다.


바틀비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깊어진다..'했네..했어..'라고 자꾸 중얼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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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녁 발걸음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오고생이 죽어지는

게 말년 늦복이렌 허영게 하이고 게메 느네 아방은 이미 글

러부러신게 경해도 귀는 트연 뭐센 고르믄 고개로 끄덕허

고 물 도렌도 허고 그것만도 어디라 더 아프지만 말앙 자는

듯이 죽어지믄 그것도 복이주 하루라도 나보다 먼저 죽어

주는 것만도 큰 복이고 말고

  게나저나 나 죽을 때랑 나냥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톡, 허

게 죽어져사 헐건디 경해서 느네덜이 덜 고생헐 건디, 게메

경 해지카.


< 제 발걸음으로 화장실 출입하다 조용하게 죽어지는 게

말년 늦복이라 하던데 아이고 글쎄다 네 아버지는 이미 틀

린 거 같아 그래도 귀는 트여서 뭐라 말하면 고개도 끄덕하

고 물 달라고도 하고 그것만도 어디냐 더 아프지만 말고 자

는 듯이 죽으면 그것도 복이지 하루라도 나보다 먼저 죽어

주는 것만도 큰 복이고 말고

  그러나저러나 나 죽을 땐 나대로 화장실 출입하다 가만

히 죽어야 할 텐데 그래야 너희들이 덜 고생할 텐데, 글쎄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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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국의 언어처럼 들린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언어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말은 늘 그렇게 들린다. 특별한 문법과 어투를 가진 어머니의 말은 세상의 분석으로 온전히 해석할 방도가 없다.

제주의 시인 김수열의 시에서는 사투리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라고 하는 제주말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만나지는 돌담처럼 쌓여있다.

잘 마무리 된 반듯한 시멘트 담장이 아닌 얼기설기 쌓은 듯해도 견고하고 바람이 통할 길까지 갖춘 제주의 돌담. 티끌 하나도 넘지 못하게 시멘트를 바른 담장과는 다르다.

김수열의 시를 읽으면 통증이 온다. 온전히 해석이 안되는 단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동과 쌓아두며 쏟았을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통증이 시작된다.

가슴 어디께..혹은 정수리 근처가 따끔따끔해진다. 그런 통증이 시작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관절염에 휘어진 어미의 손가락처럼 못생기고 믿음직한 바람이 들어앉는다.

그 순간 극대화되는 안도감. 통증이 없었다면 밍숭맹숭했을 문법이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소망 뒤 쪽으로 이어지는 시에는 아버지의 투병과 아버지가 나온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이 이유가 ..


아이들과 아내와 어머니와 아버지와 친구와..

모든 사람들이 시인의 곁에서 함께 시를 일군다. 제주의 바람이, 제주의 바다가, 제주의 사람이 시를 짓는다.

일구어 지은 시는 순박하고 정갈하다. 바닷가 모래 속에 주먹 하나 넣어 토닥거리며 만든 두꺼비집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높이 선 타워팰리스보다 애틋한 이유와 닮았을것도 같다.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라고 다같이 부르는 노래와 마지막에 주먹을 뺄 때의 긴장. 딱 주먹만한 넓이로 지어지는 집. 만족은 딱 맞는 크기로 지어진다.

어쩌면 무덤을 닮은 두꺼비집. 딱 내 몸뚱이가 누울만큼의 땅만이 필요할 뿐인 무덤. 그 속에는 더 넣을 것도 더 뺄 것도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어머니가 그렇다. 더 넣을 것도 더 뺄것도 없이 만족한 존재..


시집의 끄트머리에 제주말을 다시 표준어로 적어둔 해석본(?)이 있다. 무슨 사연인줄은 읽어내겠지만 어머니의 음조는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다시 읽으니 더 선명해지는 어머니의 말. 우리 엄마도 그랬지.


어려서 가장이 되었던 엄마는 영민해서 미8군 타이피스트를 했었단다. 그러다 제주공항에서 일을 했었고, 거기서 꽤 오래 머물렀다고 했다.

내게 화가 나면 엄마는 제주말로 야단을 치곤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건지, 하나도 못알아들을 말을 왜 하는건지..참 별일이다 싶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어미가 되고나서 어느날엔가 엄마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대? 제주말 하나도 모르는 애한테..'

'홧김에 말을 하다보면 엄마도 사람인데 도를 넘을수도 있고, 그게 너한테는 상처가 되고 나한테는 후회가 되고 그럴게 분명하잖아. 근데 그게 조절이 되니? 나는 알아듣고 지나쳤다 싶으면 혼자 반성하고, 너는 못알아들으니 엄마가 화가 났구나 잘못했네..까지만 알고 넘어가면 되는거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

'너도 애 키워보니 알잖니. 말이 씨가 된다고 좋은 말 해주고 싶어도 그게 맘대로 되니? 안하자니 홧병 나겠고, 하자니 못할짓이고..'


제주 말은 어미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모르겠는..그런 말..

어미의 말은 세상의 언어가 아니다. 할미에게서 배우는 딸에게 저절로 가르쳐지는 신내림처럼 어찌할 수 없이 이어지는 내림일지도..

나는 아직 배우지 못한 어미의 말..새벽 정화수라도 떠 놓고 배우고 싶은 어미의 말..


우리 엄마도 늘 그런다.

'자다가 조용히 불러가시라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한다. 내 걱정은 말아라...'

그럴 때 나는 철딱서니 없이 대꾸하곤 한다.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진짜 너무하네"

어미의 말은 끝끝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세상의 언어가 아닌 탓이다.


시를 읽으며 내가 뱉은 한마디도.."엄마는 도대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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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끊임없이 주덕이라 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의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가본 일이 없으니 아버지의 유년은

여수에 있었다. 때로 그곳은 작은형이 창호지에 눈이 가린

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곳이었고, 상사 계급장을 단 큰형

이 작은형을 구해낸 곳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여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의 입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여수를 보았지만 아버지의 여

수는 요절한 아버지의 핏덩이를 두고 떠난 어머니의 여수

일 뿐. 돌산 갓김치와 홍어의 알싸한 맛이 아버지의 입에서

오랫동안 씹히는 동안 내 사타구니에 검은 것이 돋았다.


  연좌제는 내 단어가 아니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내가 만

난 대부분의 어른은 군인이었다. 갱지 위에 부모의 학력만

을 메울 때 번번이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사실 나는 안다. 어

머니의 학력이 국졸이었다가 중졸로 정정되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버지의 졸업장과 어머니의 졸

업장을 원망해본 일은 없으나. 나는 고백한다. 지우개로 지

운 빈칸에 '고졸'이란 어린 글씨를 남겼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유년을 누이의 앞뒤도 맞지 않는 무서운 얘기

나 들으며 엄마를 기다려본 이라면 알 수 있다. 공무원이나

교사를 아비로 둔 아이들의 틈에서 구멍가겟집 아들로 자

라본 이라면 고개를 주억거릴 수도 있다. 그들은 당연했고

나는 기특했다.


  여수에서 춘천으로 본적지가 바뀌었다는 걸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화천 촌놈은 그러는 동안 전라도 사

투리를 익히고 친구들에게 그랬다. '나가 여수 놈이여'라고.

학살이 광주에서 이뤄지는 동안. 전라도 것들이 정의를 외치

는 동안 보잘것없는 가족사가 여수를 통해 찬란해지길 나는

바랐다. 그러면서 가끔 고향 친구들의 얼굴도 잊혔다.


  2002년 가을 금강산에서 나는 비로소 정직해지길 원했

다 북녘 친구들이 아버지의 과거사를 물었을 때 난 그랬

다. 일제시대 수도 기술자였던 할아버지는 신의주로부터

여수까지 수도를 놓았다. 그것이 일제에 도움이 되었다면

울 할아버지는 친일파다. 라고 말해버렸다. 연좌제가 무서

워 본적까지 바꾼 아비가 비겁했다면 내 가족사는 유신의

편이었다. 고 말해버렸다.


  독립군이니, 친일파니 하는, 뼈대 있는 집안의 가족사가

신문지상을 온통 장식할 때 남은 사내들이 모여 이장을 했

다. 칠십 년이 넘는 동안 할아버지의 시신은 물에 잠겨 허

벅지의 뼈 한 뼘만 남아 있었다


  먼 길과 세월을 돌아 양지를 찾아왔다. 그냥 웃음만이 있

었다. 회다지를 흉내 내며 추을 추는 철없는 아들. 녀석의

미래에 나는 단지 근대사와 현대사에 집착했더 소심한 아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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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을 읽는다. 형식을 파괴하고 도전적이며 은유와 치장이 넘쳐나는 시가 아니라 할미의 비나리처럼 가락을 넣은 사설같은 시를 읽는다.

온통 부딪히며 끌어안다 던져버리는 시는 때론 과격하다 싶기도 하지만 달려와 부딪는 것이 크다면 튕겨져 나가는 것 또한 큰것이 당연하다.

 

"略曆' 이라는 시가 제일 첫머리에 있다.

<1975년 열한 살 봄, 수두를 앓다 >로 시작하여 <쓰다. 스무 살 적 절망을 다시 쓰다>로 끝나는 시.

'운동권 考古學' 을 지나면 나오는 '어머니의 이력서'.

<1955년 열네 살, 양친을 잃고 소녀 가장이 됨> 으로 시작하여<원풍모방과 YH에서 소녀 실절을 마감한 모든 어머니들의 이력서다> 라고 끝맺는 시.

시들은 어떤 포장도 없이 가난한 집 어미가 바지런한 손으로 장만해 채반에 올려 장독 위에 둔 무말랭이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시간을 입고 햇볕을 마주한채 순순히 꼬들꼬들해지는 무말랭이의 결연한 변신처럼 말이다.

아무리 말라비틀어져도 그것이 무였음을 기억하는 끈질긴 자기확인의 과정처럼...

시는 드러난 현대사이며 드러나지 않은 운동사에 가깝다.

반문과 확인, 고민과 사투가 극명했던 어떤 시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분단의 현실을 정략적인 차원이 아닌 분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우고, 그 삶의 모양을 드러냄으로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확인시킨다.

 

얼마 전 읽은 책 '밤의 눈' 탓인지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시 속에 밟히는 얼굴들은 내 할아버지와 닮았고, 내 아버지거나 어머니의 형제들과도 닮았고,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사막촌 주막 중)라고 묻는 수학문제를 풀던 아들에게서 내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들으면 알음직한 이름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시집은 자꾸만 시선을 붙잡는다.

시를 읽어내며 행간을 읽는다느니 독자의 상상을 끌어온다드니 하는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괜히 폼을 재는 일 따위를 애시당초 할 이유가 없다.

꼬들꼬들 말라가는 무말랭이를 보면서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상상해야할까? 기껏해야 고추장을 넣고 물엿을 넣고 참기름도 좀 넣어 조물조물 무쳐내면 참 맛있겠다. 하는 것 외에..

그런 느낌으로 읽어낸다.

사실은 모두가 갖고 있는 상처를 모른척 하거나 아직 발견 못했을 뿐인데..안다친게 아니라고 굳이 지적해줄 이유도 없고 내 상처에 문지르던 된장을 조금 나누어 발라주면 되는거다. 상처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같이 치유해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창피해서, 혹은 겁이나서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신동호는 담담하게 적어낸다.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는 시인의 말.

< 삶은 자주 시와 엇박자를 냈다. 시로 모든 걸 말하려다가 시를 잃었다. 시가 멀어져가면서 꼭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십 수 년 동안 평양과 개성, 금강산과 중국을 다녔다. 그나마 시적 상상력이 허용되는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익숙한 낯섦. 그 의외의 곳에서 시가 돌아왔다.(후략)>

잡지의 광고란이 있을 법한 자리에, 대박 이벤트 쿠폰이 붙어있을 자리에 소박하게 쓰여진 시인의 말은 작은 위로처럼 읽혔다.

도대체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분단의 두려움에 떨지 않을 때, 그 때 위로가 될법한 냉면을 잘 끓여낸 육수에 말아주시려나..

근대사를 배우고 현대사를 살고 있는 미래를 걱정하는 소심한 아비와 어미들과 같이 찾아 나서봐야겠다.



 

회다지가 뭔가 싶어 찾아본다. 달구질이다. 이장을 잘 끝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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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 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

물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거나


이 집엔 많은 신발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 있구나


-------------------------------------------------------------------------


<귀신>이란 제목의 시집이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노래한 것들은 많지만 대놓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귀신이라 제목 붙인 것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언어에 귀신의 온도를 준 것인가? 인간의 체온으로 그려낼 결들이 마뜩치않아 결국 귀신의 서늘함을 빌려온 것인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귀신이라 쓰인 책 제목 때문이었을까?


"지하철 환승 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이 없이 서 있는자..

(박연준 - 아침을 닮은 아침 중에서)"

박연준의 시를 잠시 떠올렸었다.


시인에게 귀신은 도대체 뭐였을까? 라는 물음은 여전히 물음표로 저장되었다.


그 후 2년. 다시 보게 된 강정의 시집은 '백치의 산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귀신보다는 경쾌하게 느껴지는 제목..

시집의 제목과 같은 시를 펼친다.

흰 신발과 검은 신발과 푸른 신발과 지난봄의 나비와 이 집에 살고 있는 없는 사람..신발이 걸어다니고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있다.

어쩐지 지난 시집과 닮았다. 강정은 아직도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에서 발을 빼지 못했나보다..라고 생각한다.

문을 열고 들어와 앉은 나는 얼마나 묘연한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라고 진술하는 시인. 들어옴과 나옴, 안과 밖의 경계를 묻는다.


"누가, 밖에서 벨을 누르고 나를 불러주면 좋겠네

이곳은 너무 어두워

이 얼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밤에 집 밖에서 누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세 번 부를 때까지 절대 나가선 안된다

(중략)

누가,

내 목숨 밖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얼른 일어나 뛰어나가겠네

단숨에 그림자를 끊는

새들의 비상처럼


힘차게

화려하게

(박지웅- 문. 중에서)


모호해진 위치와 모호해진 입술과 묘연해진 존재에 대한 막막함에 박지웅의 시를 빌어 부적처럼 붙여본다.

아, 이래서 백치의 산수인건가?

눈에 빤히 보이는 흰 신과 검은 신과 푸른 신을 셀 수 없고, 문 밖인건지 안인건지 구분할 수 없는, <말 하려다 턱이 빠지>고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보지만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 마침표처럼 <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스를 수 없는 상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풀어내야하는 산수는 고역이며 암담함이다. 틀릴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메도 혹시나 어쩌다 요행히 맞힐 수도 있다는 없느니만 못한 희망을 붙잡고 풀어내야만 한다. 그 문제를 왜 풀어야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삶은 그렇게 강요한다. 살아있다는 건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도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방정식을 풀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흰 신과 검은 신을 번갈아 신으며 문 안으로 나가고 문 밖으로 들어가는 짓을 해명도 없이 지속한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해보아도 수의 본질을 알 수 없는 백치에게 셈이란 막연한 것이리라.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고무줄 뛰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인은 아직 어느 쪽에서 노래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이쪽과 저쪽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등식이라는 걸 눈치챘으니..어떻게 이항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된다.

끝내 그 해를 구하지 못한다할지라도..구하지 못하거나, 해가 없음이라고 또는 무수히 많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항등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의 안쪽 벽에는 문이 없다 어둠을 썰어 도열한 글자들은 실로 꿴 뼈다귀들처럼 흐물흐물 춤을 추고 (중략) 혹여, 어느 집 없는 자가 오래 떠돌며 부려 놓은 발자국들을 길게 꿰어 이어 붙인다 한들, 어떤 완전한 파국을 일목요연하게 액자처럼 걸어 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혀에서 떼어 내 말의 안쪽 벽에다 길게 그려 놓으려고만 할 뿐이다.(중략)하여, 말이라 하는 것이 꿈에서 저지른 불경不敬을 입에 물고 불을 뿜는 몸 안의 누룩이거나 몸이 가닿지 못한 천상을 인간의 두뇌 속에 욱여넣어 짓씹으려 하는 오욕의 되새김질 같은 거라 여기게도 되었다(중략) 나는 발가벗고 춤추고 싶었다 춤이란 게 실상, 몸이 불이 되거나 물이 되어 사그라지길 바라 스스로를 스스로로부터도 방임해 버리는 일일터인데, 그렇게 재가 되고 진물이 되어 바닥에 납작 엎으린 내 몸을 어릴 적 날 무등 태웠던 소에게 먹이거나 울음을 갉아먹던 독수리가 목 축일 물로 여기게 된다면 그제야 어떤 뚜렷한 말들이 흙 속이거나 바닷속이거나 누가 죽어 걸어 잠근 저 깊은 벽 속의 어둠 뒤에서 뼈다귀들에게 살을 입혀 뚜벅뚜벅 걸어나오게 되지 않을까 믿게 되었던 것이다(중략) 바람아, 너는 이미 만년토록 해독 안 된 너의 진심을 어둠의 낱알로 몸에 둘러 춤추고 있었음을 만년 뒤의 죽음에게 일러라 (죽음의 외경畏敬, 혹은 외경外經/중에서) >


어쩌면 그의 시가 품은 비밀을 담아 둔 시를 분절해본다. 귀신이 되건 백치가 되건 시의 본래성을 묻는 어떤 미련한 구도자의 수행기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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