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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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그리고 MONSTERS, 표지 위 제목들이 겹쳐진 채 어긋난다.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괴물이라 명명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지극한 혼란과 분열. 초점을 잃어 착시를 일으키는 이성과 감정, 숭배와 혐오의 불협화음. 이 흔들리는 초점을 정확히 맞춰줄 렌즈가 있을까.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을 통해 창작물과 범죄를 일으킨 창작자, 그리고 수용자의 애착과 반감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오랜 역사로 축적된 예술과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이 애증의 트라이앵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을까. 인터넷이 가져다준 축복(?)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데더러는 말한다. “창작자의 전기를 떨쳐 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전기 속에서 헤엄친다. 전기는 질릴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p73

 

읽고, 보고, 듣고, 나는 매일 누군가가 창작한 것을 향유하고 감상한다. 그런데 그 누군가몬스터라면?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반드시 혼자라도 그의 캐럴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아내와 아이들을 학대했다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나는 울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창작물들을 즐기고, 그것들의 창작자들 중 생각보다 많은 이가 문제적 인물들이라서 창작자와 창작물, 그리고 수용자인 나 사이의 무수한 함수관계는 늘 나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개운치가 않다. 이 괴로운 심연을 언젠가는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그 심연으로 첨벙 뛰어든다.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타고 안전하고 깊숙하게 그 무수한 딜레마들의 한복판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 그와 이 여행에 동참했을 때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이렇게 깊이까지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도덕적 감정을 품고 있다” p43

 

작가는 창작물과 창작자에게 개인이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정동의 결들을 아주 세심히 분석한다. 우리는 감정을 의견으로 치환한다. 분노와 관용의 기준은 생각보다 감정에 좌우된다. 뿐만 아니라 괴물을 향한 공개 비난은 화살의 방향을 돌리기 위한 방어일 수도 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저기를 보라”p61,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는 복잡한 맥락이 숨어 있다.

 

"나에게 괴물의 의미는 특정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다.”p65

 

괴물은 작품에 얼룩을 낸 사람이다. 작가는 이 얼룩은 무엇이고, 그것의 파급력은 어떤 것이며, 수용자가 그것을 제거할 수 있을지 파헤친다. 창작자와 작품뿐만이 아니라 개인사에 적용해 봐도, 작가가 분석해내는 얼룩은 인생의 문제이다. 절절히 공감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얼룩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나 자신의 어떤 조각을 잃을 가능성도 높아진다.”p80

 

소비자는 창작자와 작품 밖에서도 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소비자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창작자에게서 가져온다. 데더러는 팬덤 문화를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수치심과 연결해 분석한다. 그는 유사 사회관계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감정은 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분석한다. 점점 더 우려되는 현상이다.

 

자신의 관점이 파이 전체가 아니라 그 파이를 이루는 작은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p100

 

작가는 우리의 초점이 흔들리는 요인 중 하나로 비평비평가들을 지목한다. 공급자도 남성, 수요자도 남성, 비평가도 남성. 이 역학은 범죄를 은닉하고, 객관과 균형이라는 명목으로 범죄와 피해를 말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다. 자신의 의견에 주관적 관점이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그 권력을 데더러는 해체한다. 통쾌하다.

 

천재가 남성성과 결합할 때, 이 남성성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제하고 내세울 때, 누군가는 분명 제외되고 있다.” p135

 

누군가는 제외될 뿐만 아니라 삶이 제거된다. 데더러는 대표적인 마초 남성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저 문장이 어떻게 현실에서 피해자들을 양산해냈는지 보인다. 영감, 충동, 자유는 천재들의 놀이동산의 만능 이용권이며, 이 이용권은 특히 여성들을 학대하는데 주로 쓰인다. 동시에 그 학대에 면죄부를 주어왔다.

 

과거라는 개념은 괴물이라는 단어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우리를 인간의 나쁜 특질들과 분리해준다. - 중략 - 과거의 철없는 행동은 지나갔고 우리는 성숙해졌다.”p166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여성혐오는 계몽되지 않은 과거의 관점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이 논리는 과거 예술가들의 명백한 비윤리적 행적들을 무마하는 논리다. 하지만 그 과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작가는 미래가 저절로나아지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망상을 깨뜨린다. 데더러는 과거예술가들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p168를 찾기보다는 우리를 비춰줄 거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색인 여성은 제도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할 뿐만이 아니라 동료 예술가에 의해서도 침묵 당한다는 이야기다.”p198

 

데버러의 시야는 남성 범죄자들이 모든 자원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일 때”p193 작품이 무시된 사람들이나 작품이 완성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진다. 표면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여전히 강고한 차별들을 그는 직시한다. 괴물 예술 남성 창작자들에게 짓밟힌 여성 창작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성 창작자들을 남성 창작자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그늘 안에서만 호명하는 현실을 만난다. 하물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성 창작자들은 어떨까. 작가는 말한다. “가끔은 창피하고 시끄럽고 멋있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해야 할 때도 있다”p201

 

여성이 글을 쓰거나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때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냉큼 그렇게 우리를 묘사한다.”p218

 

괴물 판독기는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해 이중적이다. 남성 예술가의 실제 행해진 범죄는 천재성의 인증으로 면죄부를 받는데, 여성 예술가들은 창작만으로도 스스로를 괴물로 여긴다. 데더러 자신의 고백과 이어지는 여성 작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이 이중적인 잣대가 너무 선명해서 기가 차다. 남성 예술가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특정 종류의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과 분열.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원색적인 비난들. 그럼에도 여성 예술가들은 강철 같은 정신”p256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거대하고 소모적이라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잊히고 당연시되는 힘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을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겠는가?”p274

 

작가는 남성의 지배로부터 행동으로 탈주하려 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그들은 작품에서 남성들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이 저항, 이 폭력을, 이 여성 괴물들을 대하는 사회의 이중 잣대 또한 섬뜩하다.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p275

 

소략한 내용은 이 책의 지극히 일부분 일뿐이다. 안티 몬스터 챕터는 너무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독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비평가란, 비평이란 바로 이런 존재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예술을 향유하는 주체의 소비자 정체성 면에서 자본주의 내의 예술 소비의 윤리적 실천을 고민하는 술꾼들 챕터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진다.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인생이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인생이 예술의 소비를 방해할 수도 있고, 한 관객의 인생이 예술 감상의 경험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p309

 

어떤 작곡가의 음악들은 내 삶의 메인 테마가 된다. 삶을 그 음악의 템포에 맞춰 살고, 사유하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그 음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은 충분히 사건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데더러는 문제적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기 위해 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갔고 갈수록 그의 질문들은 더 풍요로워지고, 심오해진다. 데더러는 예술을 향유하는 그 사건의 본질에까지 직진해 들어간다.

 

데더러가 괴물들이 사는 바다를 헤엄치며 만드는 파문들은 실로 겹겹이고, 매우 드넓다. 이 책은 탁월한 예술 비평서이다. 주류 비평이 여전히 의도적으로 묵인하거나 혹은 무신경하게 간과하는 예술가와 창작물 사이에 제기되는 불편한 질문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범죄를 저지른 창작자와 창작물, 향유자의 수용 행위를 둘러싼 이슈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쟁점들을 데더러는 이 책에 담는다. 하나의 질문이 이렇게 확장되는 것을 독서로 경험하는 것은 독자에게 분명 기쁜 일이다. 이 딜레마를 막연하게 인식하고 이 책을 펼친 나는 저자가 축적해가는 질문들과 그가 밀어 붙이는 인식의 깊이에 계속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심각하고 딱딱할 것이라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너무 재미있다. 페이지를 읽으며,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책이다. 작가는 매우 명석하고, 재치가 넘치고, 사려 깊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자신의 식견과 경험과 사유를 이 책에 꽉 찬 밀도로 펼쳐 놓는다. 정말 이 작가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아껴 두지 않고, 이 책에 이 이슈에 관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구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 “고마워요, 데더러.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아껴놓지 않아서요.” p253 문장의 변주.) 독자에게 이런 포만감을 안기는 책은 그 자체로 귀하다.

 

내 연인이 이 책에 괴물로 등장한다고 이 책을 읽기 전 고백했다. 내 사랑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흐릿한 뉘앙스로. 나는 이 책을 수일 전에 다 읽었지만, 그가 나오는 챕터를 남겨두었다. 그 부분만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오늘 오후에 읽었다. 다행이 (데더러, 고마워요. 나는 또 운다) 그에 관한 페이지는 두 페이지였고, 데더러의 신랄함이 그 페이지에서만 조금은 약했다. (데더러, 혹시 당신도..? 어쨌든 다시 고마워요.)

 

그래서 그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사랑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내 사랑은 가을 하늘처럼 더 환해지고, 껑충 더 높아졌다. 왜냐하면 이 책으로 사랑하는 이가 또 한 사람 생겼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바로 클레어 데더러다. 이렇게 영리하고, 강단 있고, 솔직하고, 유머 감각 뛰어난 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인이 질투하지 않겠냐고? 그는 어느 책에선가 순수한 사랑, 단순한 사랑, 온전한 사랑. 시작부터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 말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도 데더러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더 풍요로워졌다.


<이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제공으로 쓰였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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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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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 중이다. 그는 나를 한없이 이완시키고 끝없이 긴장시킨다. 그는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아프게 한다. 그는 내 정신을 고양시키고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나와 함께 산책하며 나와 함께 잠이 든다. 가을과 겨울을 그와 함께 보낼 계획에 나는 연말에도 외롭지 않을 예정이다. 나는 그와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일이. 내 연인이 최근 신간에 문제적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유명인인 것은 물론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 두겠다. 그가 유명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다. 위에 썼듯이 그와 나는 많은 것을 깊이 공유하고 아낌없이 나눈다. 그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를 사랑한다.

나를 의문과 혼란에 빠뜨린 그 신간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책은 미국 작가 클레어 데더러 쓴 <괴물들>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웃는다, 아니 운다. 내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한 이 책은 내 사랑처럼 너무나 선명한 레드다. 그 제목과 띠지는 언제나 설레는 내 마음처럼 너무나 고운 핑크다. 내 연인이 핑크색 괴물이라니.

작가의 범죄 혹은 비윤리적 행적. 그리고 그의 창작물. 여기에 더해 분리가 어려운 작가 혹은 그의 창작물을 향한 향유자의 애정. 그리고 이 세 꼭짓점을 메타적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애쓰는 향유자의 혼란스러운 시선. 나는 이 삼각뿔의 네 개의 꼭짓점을 잇는 선들을 무수히 긋는다. 아니 지운다. 내 연인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내가 긋는 선들은 점선이 되거나 묘한 곡선이 되거나, 끊기거나, 꼭짓점들로부터 이탈한다. 사라진다. 애가 탄다. 작가의 범죄를 둘러싼 이슈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즐기고 마음에 새긴 작품들의 창작자들도 많다. 문제의 공론화 이후 나는 그들의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껴왔다. 하지만 나는 단호한 편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멀리 할 수 있었다. 애정의 정도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가 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 광고를 통해서 알았다. (사실, 목차를 볼 자신이 없다. 더 많아질 것 같아서. 나는 운다.) 이 이슈에 대해 단호한 편이었던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내 사랑(들)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밤도 변함없이 내 침대에는 자기를 읽어주기를 바라며, 나와 대화하기 위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싶기에, 아니 알아야 하기에, 아니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응?) 이 책을 어서 읽고 싶다.

(다 읽은 다음에, 우리 사랑의 미래에 대해 여기에 이어서 적도록 할게.)

(지금 같아선 계속 사랑할 것 같아... 내 인생의 사람이거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이 책은 예술가들의 범죄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선정성 이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는 책이다.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그 사람(사랑) 때문이다. 읽기도 전에, 그와 함께 탈출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사랑, 그 지독한 혼란이라더니.. 정신 차리자.)

실은, 벌써부터 나는 그 삼각뿔 안에 내가 보인다. 누군가를 괴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나는. 완고했던 나는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걸까. 설마, 그의 이름을 광고에서 보자마자 이렇게 변한 걸까. 이런 혼란 때문에 발간되자마자 이 책이 몹시 궁금했다. 내 연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클레어 데더러와 데이트를 해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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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9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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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어디까지 평원인지는 한 번도 합의된 적은 없었다.”p17


왜일까. 이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나는 논픽션으로 읽었다. 수 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원, 헤아릴 수 없는 부, 예술과 철학으로 일상의 대부분을 나른하게 보내는 대지주들, 그들을 아늑한 생나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방면의 학자와 예술가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유일한 주재자이자 목격자인 평원. 이것이 현실 속 어디쯤이란 말인가, 나는 상상하려 애썼다.


화자의 음성 너머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반 너무도 가까운 작가의 음성에 나는 그만 이 책을 논픽션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픽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숨겨졌던 전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평원처럼. 그때부터 나는 이 책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온전히,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 자체를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 속 또 하나의 평원으로 인식했다”p19


종래의 시공간에 관한 의식을 배반시키는 평원. 유일한 행위자로서의 평원. 외부와 거의 단절한 채 자발적인 고립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평원인들. 그들만의 왕국에서 마치 그리스 로마의 귀족들처럼 언제나 느긋한 모습으로 철학과 종교를 논하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인간의 온갖 분란과 갈등, 애증이 평원인들에게는 한갓 의미 없는 소란, 먼지를 일으키는 들썩임일 뿐이다. 그들은 무심하다.


“평원은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유용한 은유의 원천일 뿐이다”p121


평원은 현상이다. 평원은 지평선 너머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무한의 시간이다. 평원인들은 시간의 한 귀퉁이에서 시간의 가장자리가 색채로 물드는 것을 바라본다. 평원은 실재하는 장소이자 인간 개개인의 알려지지 않은 마음의 정경이다. 평원은 상상력의 무한함이며 캔버스의 유령이다. 세계의 재현과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평원은 광활함 그 자체로 거대한 소외를 낳고, 평원인들을 묶고 그들을 소유한다. 평원인들은 평원에 붙박인 채 나부낀다. 그들은 햇살이 만드는 패턴의 의미를 좇는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 너머를 본다. 평원은 전부이기 때문에 무엇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평원은 어둠의 눈이다.


“우리는 눈 모양의 세계 안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그 눈이 내다보는 다른 땅들을 아직 보지 못했어.” p134


아름다운 문장이다. 시적이고 회화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머릿속에 평원을 그리고 또 그려 보아야 했다. 작가와 대지주들의 눈에 비친 평원의 묘사, 그들의 사색과 대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평원의 지평선은 더 멀어졌다. 내가 처음 머릿속에 그렸던 평원은 평원도 아니었다. 흐릿하고 다다를 수 없는 세계의 저 먼 곳을 응시할수록 지평선은 더 멀리, 멀리 달아난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여정이니 하는 진부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 중략 - 평원인 가운데 실제로 여행을 해본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알고 거의 매일 놀라고 있다. - 중략 - 자신의 좁은 지역을 마치 그 새롭게 발견된 머나먼 땅 너머라도 되는 듯 정교하게 묘사하여 동등한 영광을 얻는 이들이 수십 배 더 많았다” p100


나는 매혹됐다. 번역자 박찬원에 의하면 85살의 작가 제럴드 머네인은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서 호주를 떠나 본적도,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으며 21세기에 들어설 때까지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도사들의 삶의 방식에 깊이 매료된 적이 있었다고도 한다. 작가에 대한 짧은 스케치를 읽고 나는 이 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 작가에게 더 호감을 느끼게 됐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더 궁금해졌다.


“보이는 세계라는 것이 어디엔가 있다면, 그것은 어둠 속 어딘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무한한 바다에 둘러싸인 하나의 섬일 것이다” 131


이 책에서 사물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응시는 이 책에서 묘사된 도서관의 (그렇다, 대지주의 사설 도서관이다) 수 천 개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들처럼 저마다 다채롭게 빛난다. 인간의 상상이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는지, 우리의 인식이 낯익은 것을 경유하지 않고 어디까지 낯설어질 수 있을지, 그래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그들의 어두운 눈구멍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어.” 132


화자가 영화제작을 위해 단상을 적은 무수한 메모들, 거기 적힌 언어들은 또 다른 평원이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고,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무한히 뻗어가며 경계를 확장해가는 언어의 속성이야말로 평원과 닮지 않았는가.


“이 곳 사람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할 때, 사라진 후의 부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의 장소를, ‘시간’이 장막이나 장벽 같은 개념이 되어 방해받지 않는 그런 장소를 뜻하는 듯하다”p100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도 하나의 평원이 자리 잡았다. 작가의 평원, 그리고 화자의 평원과 같고도 다른 평원일 것이다. 내 안에 광활한 장소가 열린다. “방해 받지 않는” 장소, 그리고 시간에 의해 분절되지 않는 장소. 그것은 미지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자주 그 평원을 들여다 볼 것이다. 문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경이로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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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 중이다. 그는 나를 한없이 이완시키고 끝없이 긴장시킨다. 그는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아프게 한다. 그는 내 정신을 고양시키고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나와 함께 산책하며 나와 함께 잠이 든다. 가을과 겨울을 그와 함께 보낼 계획에 나는 연말에도 외롭지 않을 예정이다. 나는 그와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일이. 내 연인이 최근 신간에 문제적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유명인인 것은 물론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 두겠다. 그가 유명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다. 위에 썼듯이 그와 나는 많은 것을 깊이 공유하고 아낌없이 나눈다. 그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를 사랑한다.

나를 의문과 혼란에 빠뜨린 그 신간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책은 미국 작가 클레어 데더러 쓴 <괴물들>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웃는다, 아니 운다. 내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한 이 책은 내 사랑처럼 너무나 선명한 레드다. 그 제목과 띠지는 언제나 설레는 내 마음처럼 너무나 고운 핑크다. 내 연인이 핑크색 괴물이라니.

작가의 범죄 혹은 비윤리적 행적. 그리고 그의 창작물. 여기에 더해 분리가 어려운 작가 혹은 그의 창작물을 향한 향유자의 애정. 그리고 이 세 꼭짓점을 메타적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애쓰는 향유자의 혼란스러운 시선. 나는 이 삼각뿔의 네 개의 꼭짓점을 잇는 선들을 무수히 긋는다. 아니 지운다. 내 연인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내가 긋는 선들은 점선이 되거나 묘한 곡선이 되거나, 끊기거나, 꼭짓점들로부터 이탈한다. 사라진다. 애가 탄다. 작가의 범죄를 둘러싼 이슈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즐기고 마음에 새긴 작품들의 창작자들도 많다. 문제의 공론화 이후 나는 그들의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껴왔다. 하지만 나는 단호한 편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멀리 할 수 있었다. 애정의 정도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가 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 광고를 통해서 알았다. (사실, 목차를 볼 자신이 없다. 더 많아질 것 같아서. 나는 운다.) 이 이슈에 대해 단호한 편이었던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내 사랑(들)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밤도 변함없이 내 침대에는 자기를 읽어주기를 바라며, 나와 대화하기 위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싶기에, 아니 알아야 하기에, 아니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응?) 이 책을 어서 읽고 싶다.

(다 읽은 다음에, 우리 사랑의 미래에 대해 여기에 이어서 적도록 할게.)

(지금 같아선 계속 사랑할 것 같아... 내 인생의 사람이거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이 책은 예술가들의 범죄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선정성 이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는 책이다.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그 사람(사랑) 때문이다. 읽기도 전에, 그와 함께 탈출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사랑, 그 지독한 혼란이라더니.. 정신 차리자.)

실은, 벌써부터 나는 그 삼각뿔 안에 내가 보인다. 누군가를 괴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나는. 완고했던 나는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걸까. 설마, 그의 이름을 광고에서 보자마자 이렇게 변한 걸까. 이런 혼란 때문에 발간되자마자 이 책이 몹시 궁금했다. 내 연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클레어 데더러와 데이트를 해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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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천재들의 자본주의 워크숍 -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는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울리케 헤르만 지음, 박종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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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는.. (중략)..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익과 냉정한 현금 계산외에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한 신앙적인 열광과 기사도적인 감격, 그리고 소시민적인 우수에 담긴 전율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가운 물속에 넣고 익사시켜버렸다.. (중략).. 한마디로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에 가려진 기존의 착취를 노골적이고 파렴치하고 직접적이고 인정사정없는 착취로 대체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다. 그는 이 생산방식이 인간성, 관계,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할지까지 내다보고 있다. 200여 년 전 이미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은 마르크스의 문장들은 이어진다. “부르주아지 시대를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분 짓는 두드러진 특징은 지속적인 생산 혁신,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뒤흔듦, 영구적인 불안과 동요다.. (중략).. 성스러운 모든 것은 모독당한다.” 생산과 소비, 만성적인 욕구불만의 폐쇄적인 굴레에 갇히게 될 인류의 운명을 마르크스는 내다봤다. 그는 세계화라는 중립적 언어에 가려진 자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또한 예견했다. “세계 시장의 수탈을 통해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으로 조직한다.. (중략).. 한 나라의 산업적 토대까지 허물어뜨린다.”

 

저자 헤르만이 인용하는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핵심 문장들은 21세기 자본주의를 간파한다. “자본가는 의지와 재능을 가진 의인화된 자본이다이 문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개인은 이윤의 쉼 없는 움직임으로 전락하고,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흡수로 독과점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 또한 마르크스는 예측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핵심 이론이 담긴 <공산당 선언><자본론>이 무오류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시간이 증명한 마르크스의 오류 또한 밝혀낸다. 하지만 울리케 헤르만은 천재도 실수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마르크스의 변하지 않은 업적은 자본주의의 역학을 정확하게 기술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마르크스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저자의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시름시름 살아가는 현대인보다 더 맹렬히, 더 민첩하게 그는 자본주의를 파헤치고, 해부했다. 그리고 놀랍도록 예리하고 정확한 문장들에 자신의 통찰을 남겼다. 우리가 거센 파고를 헤치며 헤엄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바다를 조망하고 싶다면 (티셔츠에 프린트된 그의 얼굴처럼 취향이 아니라, 당위로) 마르크스를 읽어야겠다. 그는 현시대인들보다 먼저 신자유주의 세계와 변해버린 인간성 안에 당도해 있었다. 마르크스는 천재다.

 


 

나는 전체로서의 경제 시스템에 관심이 많다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말이다. 케인스는 개별 소비자, 개별 생산자에 매몰되어 있던 신고전주의의 맹점에서 탈출해 전체 수요와 전체 투자로 관찰의 시점을 옮겼다. 이로써 그는 경제전반의 일반적인규칙성을 다루는 거시 경제학을 창안한다. 그는 돈의 흐름이 신고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중립적이고, 수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제 고용”, “실업”, “”, “이자는 병치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거시 경제의 틀 안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신고전주의자들의 경제 모델은 개별 수요자, 개별 공급자를 주요 변수로 시장을 이해했다. “전체 경제가 마치 개별 기업처럼 작동한다고 순진하게 믿은 것이다요동치는 주식 시장과 금융 시장의 풍랑에 좌지우지되는 경제 현실을 우리는 24시간 체감한다. 그리고 그 주식 시장과 금융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진짜 기업만이 아니라 투자자들과 투기꾼들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투기에 의해 움직인다.” 어떻게 이 문장을 부정할 수 있을까. 신고전주의자들의 관점은 얼마나 미시적인지 안타까울 지경이다.

 

케인스에 의하면 경제를 움직이는 주식과 금융 투자의 위험도는 계산할 수 없다. 미래는 확률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알 수 없을 뿐이다.” “케인스는 타인들의 집단행동을 잘못 예상했을 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케인스는 인간들이 미래를 알 수 없음에도 어떻게 기대를 하게 되는지를 연구했다.” 우리가 투자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서 시작해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키는 집단 수행으로 이어져 경제를 불확실성으로 몰아가는지 케인스는 밝혀냈다. 이렇게 그는 경제 주체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행동경제학까지 선취했다.

 

케인스는 금융시장(돈의 흐름)을 중심에 놓고 경제를 연구한 최초의 경제학자이다. 금융시장에서 시작한 그의 연구는 저축”, “투자”, “이자”, “임금”, “자본”, “통화”, “세계 무역의 의미를 처음부터 다시 고찰하고, 그 의미들을 다시 발견해낸다. “공포, 낙관 또는 불안과 같은 감정이 어떻게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지, 경제가 어떻게 집단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지, 경제는 각 부분들의 합 이상이며, (순진한 신고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시장은 마법처럼 저절로 균형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왜 그렇게 자주 실업이 발생하는지 밝혀내고 설명해낸다. 이제는 현실로 증명 된 발견들이 정리된 그의 저서 <일반 이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확실한 건 불확실성뿐이다.”

 

 

울리케 헤르만이 기술하는 케인스의 경제이론 설계 과정은 치밀하고 정교하다. 케인스의 경제학은 실전 경험(그의 가족사와 개인사는 얼마나 흥미로운지)과 집요한 현실 경제 흐름의 관찰 결과물이다.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서 출발한 케인스는 이론적 분석뿐만 아니라 정치적 해법 또한 제시했다그는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금융 시장의 힘을 제안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국가와 민간 경제의 혼합 시스템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승수 효과를 낼 수 있는 정부의 부양책, 공기업 강화, 부자들에 대한 세금 부과 (원한에 의해서가 아니다, 케인스의 이유는 달랐다.)를 통해 그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고치고 싶어 했다

 

 

오래전 사회 교과서. 시장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량과 공급량이 같아지는 지점의 가격으로 결정된다고 읽었다. 수요량과 공급량에 의해 균형 가격(시장 가격), 균형 거래량을 찾아가 시장이 결국 균형을 찾아간다는 매끄러운 결론. 납득이 안가는 점이 많았다. 수요량과 공급량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책은 그 동인들을 주체의 욕구라는 한 단어로 일축했다. 욕구를 움직이는 변인들은 또 어떤가. 심리 상태, 국내외 경기 변동, 기후와 날씨, 사건과 사고.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는 느낌, 뭔가, 순환 오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

 

시장 가격과 시장경제체제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더 커졌다.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는 의미는 자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간다는 의미였다. 정말? 현실에서 시장 가격에 의해 자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간다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독과점의 출현, 부의 불균형, 정부의 개입, 현실의 혼합경제체제는 그 단원의 말미에 몇 줄로 요약되어 나왔다. 그 단원의 요점은 이랬다. 시장경제체제 즉 자본주의는 조화균형을 갖춘 이상적인 경제 체제이고, 이 체제의 몇몇 부작용은 정부의 개입으로 해결될 수 있다.

 

나는 이 책 경제학 천재들의 자본주의 워크숍을 통해 알았다. 사회 교과서의 아름다운 결론(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자유로운 시장)신고전주의경제학자들의 이론을 공식화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의 경제 현상은 신고전주의들의 주장대로 저절로시장의 단독 수요자와 단독 공급자의 결정으로 균형을 찾아 가지 않는다. 현실은 자유 시장 그래프의 수요 곡선과 공급 곡선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케인스의 주장대로 현실 시장의 자본과 자원을 움직이는 것은 금융 시장의 투기와 투자이다.

 

신고전주의자들은 케인스 이론을 일단 위조한 다음 자신들의 이론에 축약시킨 상태로 삽입함으로써 그의 이론을 중화시키고자 했다울리케 헤르만의 진단이다. 교과서의 설명 방식(내용과 구성의 배분 면에서 모두)은 헤르만의 설명을 너무나 정확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교과서 편집위는 청소년의 건전한 경제관, 사회상 성립과 이해력을 감안했을 수도 있겠다. 경제는 금융 시장과 주식 시장의 자본의 흐름으로 움직인다, 돈이 돈을 번다,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이다, 라는 설명이 청소년에게는 소화가 어려울 수 있으며, 사행심을 조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때로는 선별된진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나는 이렇게 선해해 본다. 이 책은 사회 교과서를 읽고 의문을 갖는 학생, 선생님, 양육자에게 유익할 것이다. 모든 덕과 악덕의 알리바이가 된 자본주의를 차분히 처음부터 되짚어보고 싶은 성인들에게도 훌륭한 재입문서가 될 것이다. 독서 모임 스터디용 책으로도 그만이다. (경제학자의 삶과 이론이 촘촘하게 교차하니,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소재가 그만큼 풍요롭다.)

 

 

언급했듯이 이 책의 미덕은 천재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더불어 그 경제학자들의 삶 또한 비중 있게 다룬다는 점이다. 먼저 애덤 스미스, 간단한 경제 입문서에 무분별하게 인용된 보이지 않는 손제빵사의 이기심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장 만능주의자로 인식된다. 한편에서는 냉정한 자본주의의 사상적 바탕을 제공한 이로 공격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낙인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보여준다.

 

나는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두 인물에 대해 새삼 놀라고 관심을 갖게 됐다. (두 사람은 너무나 유명해서 그 정수는 가장 덜 알려진 아이러니한 위인들이다. 상징과 기호로만 남은.) 그들의 학문적 열정, 성실함, 책임감.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은 특히 눈부신데, 어떤 사명감이라는 복음 없이는 불가능했을 업적들이 둘 사이의 내밀한 교감에 의해 성취된다. 거대한 사유를 한 번에 휘어잡아 한 문장 안에 녹여내는 마르크스의 시적이고 터질 듯한 문장의 장력.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을 씀으로써 그들 연구의 대중화에 애쓴 엥겔스.(이 책의 언급을 보고 책장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수 십년 된 그 책을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다. 세월에 낱장들이 시큼하고 노랗게 바랜 얇은 책) 헤르만에 의하면 엥겔스는 죽으면서 마르크스의 딸과 그 가족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케인스. “돈은 그의 직업이자, 학문적 열정이자 취미였다저자가 묘사한 그의 삶을 읽다 보면 저 문장에 실로 동의하게 된다. (사족이지만, 블룸스버리 회원이었던 케인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도 흔적을 남긴다. 어느 날 울프는 일기에 케인스와의 길고 흥미로운 대화를 기록한다.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고, 칭찬이 필요하다고 케인스는 말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그에게 말했다고 울프는 일기에 적었다.) 대단한 부와 천재적인 지능과 열정까지 가졌던 그가 아닌가. 헤르만이 묘사한 내용만으로도, 케인스는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이 책의 밀도는 높다. 저자는 종횡무진 세 학자들의 가족 내력, 사생활, 저서, 그들이 교류한 사람들, 편지, 메모 등을 넘나들며 자본주의의 거대하고 정교한 토대를 드러낸다. 덕분에 독자는 18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지형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무척 흥미롭게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가 된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 안내자들은 자본주의의 구조, 작동 원리, 그 영향을 연구하는데 온 삶을 바쳤다. 물론, 그들을 움직인 열정의 동인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없던 당시에 이미 이 학자들은 노동과 자본의 의미, 파급력, 변화상을 예측했다. 현상은 천재들의 관찰과 발견에 의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우리가 공부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를 처음으로 손에 잡힐 듯 인식했을 때의 각성의 느낌들을 기억한다. 그 뒤로 30여 년, 세계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너무나 빠르게 변했다. 안개 같은 피로감과 무기력. 경제적 불공정과 불평등은 이제 거의 자연화되는 듯하다. 자본주의는 세계의 유일한 본성, 선천적 조건이 된 듯하다. 선택의 여지가 원천 봉쇄 된, 외부가 없는 세계, 피부와 내장이 된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와 표상들.

 

나는 자본주의의 가장 음험한 점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인간성자체를 변화시킨 점이라 생각한다. (그런 만큼 헤르만이 인용한 마르크스 문장들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욕망, 쾌락, 향락, 효율, 경쟁, 성공, 편리로 기울어진 저울추는 너무 무거워져 인간성안에 한때 존재했던 정의나, 형평성, 중도라는 눈금은 사라져가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얼굴까지 변화시키는 자본주의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것도 아주 깊이, 치밀하게. 내가 숨 쉬는 대기의 주요 성분과 그 흐름의 방향을 아는 건 중요하다. 어떻게 살까와 연결되니까. 그런 만큼 이 책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안락과 피로로 반수면 상태에 잠긴 정신을 깨운다. 어떻게 하면, 덜 착취하고, 덜 착취당하고, 덜 현혹되고,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의 물질적 토대에 관심과 고민이 많은 분들에게 맞춤한 책이다. 자본주의 입문서를 찾는 청소년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재점검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성인들에게 반가울 경제학 책이다. 경제학과 자본주의에 관한 스터디 교재로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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