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다룬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요직에서 자신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재판 전, 대부분의 사람은 아이히만을 악의 화신으로 예상했지만, 재판 전 정신 감정이나 재판 중 그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여기에 착안한 아렌트는 평범한 우리들도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특정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순을 느끼며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p65, <한나 아렌트의 생각>
이 같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답을 틀리게 말할 때마다 피험자가 450V까지 전압을 올린 것을 보여줌으로써 증거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리고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그리고 나와 그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 누구든 히틀러의 나치 아래에서 행정업무를 하게 되면, 그 체제하에서는 불법이 아니니 노인이든, 여성이든, 아이이든, 600만 명을 죽이는 계획을 세우고, 운용하고, 개선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따르면 말이다.
아이히만도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도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우리 모두가 '인류'가 상황에 따라 극악무도해질 수 있다고 보편화시킬 수 있을까? 그 보편화는 불편하게도 '인정'하고 '관용'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아이히만으로부터 아렌트가 탄생시킨 악의 평범성과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을 파헤쳤다.
브레흐만이 폭로에 가깝게 이야기해준 아이히만의 그 실체는 다음과 같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 요원에게 체포될 당시 그는 네덜란드의 나치 친위대 (SS) 장교 빌럼 사센(Willem Sassen)과 몇 개월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사센은 유대인 학살의 홀로코스트가 나치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한 거짓이라는 것을 아이히만이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아이히만은 "나는 아무 후회도 없다!" 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1945년 이미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있다. "나는 웃으며 나의 무덤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내 양심 속에 500만 명의 인간이 있다는 느낌이 나에게 엄청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생각과 환상으로 가득 찬 1,300쪽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면 아이히만은 생각 없는 관료가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광신자였다. 그는 무관심이 아니라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p274, <휴먼카인드>
아이히만의 재판 당시 검찰은 사센의 인터뷰 사본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아이히만이 그 문서가 진짜인지 의혹을 제기했다고 하고, 50년이 지나서 '독일연방 문서보관소'에서 원본을 찾았다고 한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아서, 상부의 지시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든 말든 그저 명령을 따랐다는 것도 새빨갛게 거짓임이 밝혀졌다.
공식 명령이 거의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창의성에 의존해야했다.
이들은 단순히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총통의 정신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를 위해, 그를 바라보고 일했다. p275, <휴먼카인드>
거대한 조립 공장의 한 파트에서 컨베이어 벨트 위로 밀려오는 조립품에 자신이 맡은 나사를 생각도 영혼도 없이 째깍째깍 조립한 것이 아니고, 더 많은 포드 T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고 몸과 마음을 불사르듯이, 아이히만은 더 많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고, 더 빨리 더 쉽게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역량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뿌듯해했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아이히만이 될 수 있을까? 브레흐만이 밝혀낸 사실들만 봐도 그렇지 않다. 하지만, 브레흐만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잘 못 해석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다소 모호하게 이야기했고, 그래서 그녀의 생각과 글을 참조한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해석했다고 한다.
브레흐만이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럴까? <휴먼카인드> 자체가 '편향'된 이분법적 사고를 깨기 위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인간은 악하다.", "인간은 선하다.", "주어진 상황에서 누구나 바알이 될 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와 같은 말 그 자체가 보편성을 띨 때, 우리는 편향된 가치관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쉽게 조정 당하고 의도된 대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과 같은 말을 즉흥 삼행시처럼 말한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뛸 때, 어떤 파급 효과를 줄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모호함은 결백함이 될 수 없다. 특히 그녀와 같은 철학자의 모호함은 진실을 더 왜곡시켜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담, 역시 이번에도 인터넷 서점의 이 보라색보다 종이책 보라색이 진짜 에쁘다. 3%가 좋아할 것 같은 광고의 그 보라색)
하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서 하나를 더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녀는 아이히만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되돌아보지 않아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아서', 악이 된다고 한다. 사유하지 않아서 악이 된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의 '사유' 은총알(silver bullet)은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다루기도 했다.
"이어서 그녀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쑥 사유의 힘에 호소한다.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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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도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p45, <피로 사회>
아렌트는 '행동'과 '사유'를 분리한 것만 같다. 그리고 '행동'의 해법을 '사유'로 삼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에게 행동과 사유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유하지 않음'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카를로 로벨리의 최신작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은 자서전 형식으로 그가 가진 반항적이고 뜨거웠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어떻게 이론 물리학에 접목했는지 이야기하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이어, 양자역학에서 루프이론을 어떻게 생각해내고 또 발전시켜왔는지 동료 과학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고백한다.
"실험을 통해 가설들이 확인된 것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응용된 적도 없다." p195,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단단하게 말한다.
"우리가 틀릴 수 있다" p207,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의 네 번째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모두 틀릴 수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 그래도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이다.
물론, "악의 평범성" 때문에, 인간이 악의 화신이 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게 노력하자는 관점에서 보면 그 논리는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라는 전제가 지배층에 의해 오용되고 남용되어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또한, "악의 평범성"의 "사유하지 않음"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은 논리는 죄에 대한 사회적 묵인을 초래할 수 있다. 가령, 술을 마셨기 때문에 어떤 행동은 정상일 때보다 가볍게 다루어야 한다는 식의 묵인 말이다.
작은 나이지만, 나는 "악의 평범성"이 "인류의 발전"에 득보다는 실이, 나아감보다는 퇴보가 더 많을 것 같아 이렇게 서평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