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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18년 12월
평점 :
우선 첫 번째로 프롤로그와 본문의 두 구절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하자.
"기쁨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는 일이다. 예술 애호가로 살면서 느낀 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도 모두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의미를 둔 것만이 나에게 그 미적인 감흥을 허용한다. 명화도 명곡도, 일상의 작은 연필 하나까지도 그렇다. 심미안을 갖게 되는 건 결국 '마음의 눈"을 뜨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적인 가치를 느끼는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무기가 된다."
"PART 1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중에서 " 미적 감각이 좋은 사람들의 특정은 세상을 흘려버리지 않고 촘촘하게 본다는 거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차이에 민감하다. 무심한 이들은 뭘 봐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이 그전의 것과 어떤 게 다른지 모른다면, 미적인 수용이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상기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심미안, 즉 "마음의 눈"이란 것에 주목하게 된다. 즉 구별하는 마음의 민감도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적인 감각을 무엇으로부터 얻고 어떤 것으로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근원적으로 따져 보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각기 고유한 환경과 조건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 간다.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각기 고유한 개별성을 가진다. 물론 공통점은 있지만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같은 날 시차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조차 감각의 공통점은 있어도 각기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다른 점에서 저마다의 감각에 대한 수용적 민감도는 천차만별이다.
이와 비견 되게도,"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는 적절한 속담 하나가 떠오른다. 대부분은 의식이 지배하는 자의적인 필터를 가지고 있다. 선호와 혐오 사이에서 어떤 것을 차별로 구별하고 구분된 것의 호와 불호는 가치관의 의식적 필터가 걸러 낸다. 누구는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것들에서 또 어떤 이는 차이점을 발견하고 새로움을 재인식하며 재발견하기도 한다. 하나를 보더라도 각기 가진 의식적 필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무슨 가치로서 대입시켜 가는 것인지 그 사람의 고유한 가치관에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뭐 눈에는 뭐를 달리 보고자 하는 경우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아마 대부분의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들의 시선을 말한다.
어제는 연말이라 1년에 한번 가지는 연말 동창 모임을 가졌다. 나이가 들어가는 친구들이 머리가 희끗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고받는 대화에서 나도 너무나도 할 말이 거의 없구나 싶었다. 그만큼 각자가 살아온 이력의 차이일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들에 자신의 삶을 주목하면서 살아온 것인지는 곧 대화의 단절이 너무도 낯설지가 않는다. 대부분은 그렇다. 일례로 알라딘에서는 올해의 무슨 책이 제일 좋았던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할 수는 있어도 나이 들어가는 동창들의 모임에서는 끼어들 주제조차 되지 않는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고 싶지도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동창 모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도 별로 없다. 무심코 어릴 때 학교라는 제도에 편입된 관계에서 만들어진 피상성은 피할 도리도 없고 또한 어떻게 살아온 각자 저마다의 시간을 공유된 것도 없으니 일 년에 한번 만난다 한들 이야기는 겉돌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나온 과거의 관계성을 무시할 정도로 자르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도 나에게는 있어서일 것이다.
마음의 감각과 지각력은 현재의 삶에 대한 모습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심안을 공유할 수도 없고 더더구나 미적인 감각과 미덕의 언행은 멀게만 느껴진다. 지나온 삶의 과거의 관계는 이미 멀어진 다음부터는 이어진 끈은 다 떨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고 보니 무슨 말이 오고 간 것인지에 대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흡사 감각을 잃어버린 무감각의 관계를 만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사람은 감동하기 위해 산다고 한다지만, 감각이 동하는, 즉 감각이 움직일 수 있는 관계는 사라지고 무던해져만 간다는 걸 느낀다. 갈증도 없이 늙어가고 있구나를 새삼 인식하는 발견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이런 무미건조한 관계는 더 깊고 확장될 것이란 것도 안다. 그렇지도 모르겠다. 뭐 눈을 어떤 다를 것으로 바꿀 계기나 전기는 마련되기는 극히 희박하다는 것도 안다. 대부분은 사는 대로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한 사람을 더 자주 찾고자 한다는 점이다. 새로움의 인식이 부재하고 어떤 계기나 동기를 얻지 못하고,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새로움을 발견하고 찾지 못하면 나이 들어갈수록 과거의 추억에만 안주하려 하고 그런 과거의 추억을 공유한 사람을 더 찾게 될 수밖에 없다. 새로움이 없는 무덤덤함이란 그런 것이다. 살아온 시간에 만난 사람들의 경험론적인 두려움이나 새롭게 인식해야 할 감각은 점점 무뎌져만 가는 것에서 마치 노인네가 지난 시절의 기억으로 남은 시간을 살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내가 "왕년에~"를 주야장천 노래를 부르는 이유이다.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서 찾고자 해도 새로움의 거부감은 그래서 누적되어 갈 뿐이다. 진부한 관계의 진부한 대화들뿐이다. 친구들 중에는 예술을 찾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었더라면 여전히 새로움의 미학에 더 많은 대화를 지어낼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각자 저마다의 시선은 특별한 것도 없었다. 당연히 술만 몇 잔 마시다가 2차 가자는 것도 싫어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내내 첼로곡만 들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다시 앞에서 인용한 문구를 다시 한번 상기하자.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도 모두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것". 미학은 인간의 가치를 알아보는 의식의 본능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즉 의식적이란 것에 포인트를 둔다. 의식은 바로 삶을 선택하는 부분을 관여하고 결정하게 만든다. 지금의 오늘날의 내 모습과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스타일이 바로 의식적인 결과에 의한다. 즉 아름답게 산다는 것이 결정하는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나이 들어가는 친구를 보면서 다들 직장을 그런대로 무난하게 무덤 하게 견뎌냈음에 대해서 한편으론 별다른 평범함의 삶도 나쁘지 않게 보였으나, 다만 무료해 보이기도 하고 진부하고 단절된 느낌은 어쩔 수 없이 들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딱 한번 질문을 했지만 이 질문은 그들의 대화 속에 묻혀 버렸고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 앞으로 얼마나 남은 시간을 조리할 것인지에 대해 나는 궁금하였지만 질문의 약발은 그리 크게 작용하지 못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갈증은 그들에겐 필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오후 내내 자주 나가는 강가로 카메라를 들고나갔다. 빈 나뭇가지로 겨울의 동면 중인 나무를 보고 날아가는 새들과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과 무심코 흘러가는 구름과 반짝이는 빛들의 강이 서린 모습을 보았다. 무채색의 겨울 강가에서 나는 어떻게 삶을 바라보며 차별적 시선으로 나의 삶을 더 특별한 미학으로 점철시켜 낼 것인가 따져 물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강력한 안식을 무엇으로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혹시 아름다움이란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의 한 종류인데, 이 본능이 거세된 채 산다는 것은 과연 산다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예술은 본질의 본능적인 집착이다. 이것이 없다면, 살아도 산거 같지가 않다.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없다면 감탄이 없다는 것"일 테고, 탄식은 쉽게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탄식은 불행의 단말마적 비명이라. 그렇다면 이 탄식을 감탄으로 상쇄시키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리뷰 끝으로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