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볼까?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위해 씻는 과정에서 욕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매일 바라본다. 눈 밑에 주름도 살짝살짝 보이기도 하고, 어제 혹시나 피로했으면 퉁퉁 부어 버린 모습을 마주 하곤 한다. 혹은, 넌 행복하냐고 묻기도 한다. 흰머리가 늘어나는 걸 실감하기도 하며 염색할 때가 다 되었나 싶기도 하고, 자신의 얼굴에 자신의 삶이 거울처럼 반영된 얼굴이 아닐까 싶다. 거울 속에 비친 내가 과연 나인지도 묻기도 한다. 백설공주에서 나오는 계모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묻는 대상도 다름 아닌 거울에게 향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묻는다. 거울이 영물이 아니고서야 거울은 아무런 말이 없다. 유시민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나오는 대목 중에 유시민조차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 모습을 보고 정치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정치인을 그만두고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를 바라보겠다며 정치 은퇴를 선언한 것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말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의 현상태를 파악하고 자신의 마음가짐의 태도를 얼굴에서 엿보곤 한다. 그래서 얼마나 자신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것인지를 묻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끔 역사적인 사건, 사고와 관련해서 얼굴 사진의 상태로 사회가 혁명에 휩싸이기도 하고 얼굴 사진으로 유발되는 감정은 대단히 복잡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한열의 사진에서 의식을 잃어가면서 얼굴 옆으로 흐르는 피는 그의 상태를 단적으로 말해주기도 하고 얼굴 사진으로 인한 사람들의 감정적 판단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맞선 자리에서 처음의 인상. 바로 첫인상이란 얼굴의 느낌일 것이다. 인상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첫인상을 결정하는 것인지에 따라 얼굴의 상태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도 많다. 그만큼 인간의 얼굴에서 마음의 거울처럼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읽으려 표정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자신의 얼굴을 얼마나 자주 들여다볼수록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현 상태에 자신의 모습을 혐오로 미워지기도 한다.
오늘도 내가 늙어감과 전혀 생뚱맞은 무덤덤함. 그리고 피로함의 얼굴에서 오늘의 시간에서 이 공간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얼굴에 쓰여 있다는 것이 바로 초상론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론이다. 자신의 삶의 결과가 얼굴에 쓰여 있다고도 하고, 자신의 삶의 결과로써 얼굴에 비치는 거울이라는 것은 우리는 삶의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대신 얼굴의 표정과 생김새에서 유추하려 한다. 얼굴의 주름이 많을수록 고생을 많이 했거나, 혹은 얼굴이 상해 보일수록 삶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파악하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자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성찰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 온화해 보이는 얼굴, 탐욕같이 욕심이 덕지 덕지 붙은 얼굴, 섬세하게 날카로운 턱 선의 얼굴, 웃음 띈 미소의 얼굴. 이렇게 얼굴에 대해 전반적인 해석을 하고자 했던 것이 동양에서는 관상학이라고도 한다. 얼마 전에 송강호 주연의 관상이란 영화에서 보면 왕의 얼굴을 묻고 왕의 입지에 대해 따지는 관상가의 인생을 표현한 스토리가 여사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얼굴이란 살아온 상태와 앞으로 살아갈 자세의 표정이 얼굴에서 반영되어 얼굴이 변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진학에서도 얼굴이 중요한 정보중에 하나임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증명서나 신분이나 자격을 나타내는 증명서에 증명사진이 들어가는 이유이다. 얼굴로써 신분과 자격을 증명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얼굴의 모습이 사람의 신분을 증명하거나 구별하려고 했다. 아마도 대표적인 것이 주민등록증일 것이다. 그래서 증명사진은 바로 신분을 증명하는 메인의 자리에 차지한다. 또한, 선거 벽보에도 후보자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프린트되어 내걸리며 얼굴의 인상으로 후보자가 유권자들의 의사를 대변하겠다는 신분의 증명으로 포스터를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상 사진에서는 최대한 인자한 모습과 시민들의 뜻을 받들겠다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리고 미소를 띠며 내가 열사 봉공의 마음을 가진 얼굴이라며 어필하는 것도 다 얼굴의 인상학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렇게 얼굴의 모습에서 표정은 시대를 대표하는 아우라를 만들고 인간이란 존재론의 한 뼈대를 일루기도 한다. 와이프나 남편의 선택도 결혼이란 제도에서 얼굴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의 한 종류가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상을 바꾸고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성형술이 발전하는 것도 다 얼굴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IT기술로 얼굴 인식하는 인공지능으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지문처럼 등록하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인식하여 얼굴로 범죄자를 가려 내는 것까지 발전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얼굴의 화장과 분장은 오래전부터 얼굴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인 일종의 장치가 되었으며 나아가 문화적이며 예술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아우르게 나타난다. 화가들이 그리는 인물화에서부터 인간의 얼굴을 묘사하는 스케치를 비롯한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얼굴에 관련한 인간의 연구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얼굴에 관련된 근육은 표정으로 나타내고 근육의 움직임으로 마음의 표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슬프거나 웃기거나 고민스럽거나 화나거나 이런 표정에서 얼굴 연기는 연기자의 연기 수준을 가름하는 척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얼굴에서 나타내는 인류학의 본질은 얼굴의 현상에서 유추되는 것도 얼마나 얼굴에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인지 충분히 간파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미적인 기준은 시대상에서 힘의 반영하기도 한다. 따라서 얼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서양의 백인 인종이 인류 문명에 중심에 있다 보니 얼굴 성형도 서양의 기준으로 미적 기준을 삼고자 하기도 하고 성형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서양 여자들처럼 하겠다고 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행동은 어떻게 얼굴을 바뀌게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사람의 행동도 마찬가지로 얼굴에 그대로 녹아들어 얼굴의 상을 바뀌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범생의 스타일에는 모범생의 얼굴의 전형을 편견처럼 작용하기도 하고 우락 부락하고 모난 얼굴에서 조폭의 스타일을 편견처럼 가지게 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에 찍힌 동영상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읽은 적이 있는가? 이번에 경북 시골 모 지역의 기초 의회 의원들이 외국에 나가서 버스 이동 중에 벌어진 폭력 사건의 당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먹을 휘두르는 그 순간의 얼굴 표정을 CCTV 동영상에서 직시할 수 있었다. 과연 그 폭력의 당사자 본인은 얼마나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봤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간의 살아온 삶의 과정에 따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얼굴에 덧대이진 자신의 삶의 과정의 얼굴이 어떠한지에 대해 본인은 한 번도 따져 봤을까? 만약 이런 질문들을 자주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서 물어봤더라면 과연 외국에 공무 출장 중인 버스 속에서 가이드에게 주먹을 달리는 폭력성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초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을 받고 자신의 얼굴을 사진에 담아 커다란 포스터에 인쇄되어 "내가 이런 후보자입니다"라며 동네방네 알리고자 초상 사진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런 얼굴에서 과연 자신은 무엇을 느꼈을까?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했던가? 인상학이나 관상학이 오늘날에 그리 크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못 배워 먹은 티가 얼굴에서 줄줄 흐르는 것은 나만의 과정의 관상 간별법인지 의심이 되기도 하였다. 역시나 다를까, 기초 의회 의원 출마 전에도 이미 벌써 도로교통법 위반의 법률 위반 벌금 전과가 나오는 걸 보니 그런 못 배운 티가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잘 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미적인 서양의 얼굴이 아니고 못생겼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보게 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못생겨도 이뿐 짓은 못생겨 보이지도 않는다. 어느 미적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리 못생긴 얼굴이라도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얼굴에는 못생김의 주눅 들어 있는 표정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정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숨어 있다. 즉, 이쁜 짓은 얼굴을 이쁘게 만들고 못난 짓은 얼굴을 흉측하게 만든다. 행동이 얼굴의 인상을 결정하는 것도 이런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기들이 왜 귀엽고 사랑스럽고 이쁠까 따져 보면 아기들이 태어나서 자신의 행동이 없다. 그래서 아기들의 얼굴에서 때묻지 않는 순수함이 이뻐 보이는 것은 거의 본능과도 같다. 그러나 아기에서 성장해서 살아가면서 가정에서 부모의 얼굴을 닮아가고 자신의 사회적 소속에 대한 얼굴을 닮아가고 시대를 닮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못 배운 티가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그래서 얼굴이 그 사람의 인생의 거울이란 말이 낯설지가 않다. 행동이 이쁘면 얼굴도 이뻐 보이는 것. 이게 관상의 결론 아닐까 한다. 반대로 행동의 불법적인 폭력이나 쓴다면 얼굴도 그대로 폭력화되어 가는 얼굴로 변한다. 성형으로 얼굴 백날 뜯어고쳐 봐야 소용없다. 삶이 얼굴에 그대로 인상을 반영시킨다는 거. 생김새가 삶을 결정할 수도 있지만 삶의 결정이 생김새로도 들어간다.
이쁘게 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이다. 못난 짓으로 혐오스럽게 먹칠하는 얼굴로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 주먹을 날린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어디 얼굴 들고 나가 살 수 있을까. 그런 말이 있다. 후안무치라고도 한다. 자신의 얼굴이 쪽팔린 줄도 모르고 고개 쳐들고 다닐 수야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삶도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그런 얼굴로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 얼굴에 써진 오명의 문신을 하고 주먹을 날린 놈이라고 얼굴에 써져 있는데 과연 누가 남아 있을까 싶다. 혹시나 이 세끼와 어떤 수가 틀리면 또다시 나에게 주먹을 날리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얼굴을 마주 보려 드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순간의 욱~하는 마음. 이거 하나 컨트롤이 안되는 얼굴에서 과연 자신의 삶이 어떻게 왔는지 따져 묻지 못한, 그의 실수는 후회가 아무리 깊다 해도 물릴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자신의 얼굴도 말할 것도 없고 자신과 연관된 가족들의 얼굴은?, 또한 사회적으로 관계 맺은 동네 사람들의 얼굴은? 심지어 죽고 나서 저 세상에 가서 조상님의 얼굴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두렵지 않을까 한다.
PS : 참고로, 사진을 오래 찍어 왔지만, 얼굴 사진은 거의 찍은 적이 없습니다. 특히 증명사진 이런 건 절대 안찍습니다. 얼굴 사진은 사진 분야에서도 특화된 분야로 가끔 얼굴 사진 찍어 달라면 증~말!!! 난감하기 그지 없거든요. 또한 제품 증명사진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로 풍경과 관련된 이면의 표정 사진이 주로 많이 찍었거든요.....나에게 사진 쫌 찍어 달라하면 거절하는 이유입니다. 간혹 무슨 사진 안찍어 준다고 섭섭하다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입니다. 사진이라고 다 같을 분야를 다루지 않거든요. 카메라 오래 든다고 아무거나 다 잘 찍는 줄 아는 사람,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이유기도 합니다.
약은 약사에게 사진은 그 분야의 전문 사진사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