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절날, 시골로 처음 간 며느리.
집안 일과 명절 대소사를 직접 해본 적도 없이 시댁에 가니,
뭐를 할 줄 몰라 서성일 때, 친인척들과 시어머니는,
"넌 거실로 가서 쉬어라, 내려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중에, 거처 거처서 들리는 이야기.
'시댁에 가서 어떻게 며느리가 손끝도 까딱하지 않을 수 있냐? 못 배웠네'라는 타박이 돌아올 때.
하지 말고 쉬라는 뜻이 옆에서 보고 배우고 거들어라는 왜곡이 숨어 있다.
차라리,
"일손이 좀 부족한데 이렇게 저렇게 해주겠니 혹은 서투르니 보고 연습 삼아라도 해봐"라고 솔직할 수는 없을까.
가끔 가식적인 말을 진실로 이해하면 벌어지는 오해.
2. 아버지. 겨울 외투 하나 사 가께요.
아니다 예야. 돈 버느라 힘든데 뭐 하러 사 오려고 하나, 안 사 와도 된다.
나 옷 많아. 사 오지 마라.라고 하시면서
정작 새 외투를 입고 무척 기뻐한다.
사 오지 말란다고 안 사갔을 때의 표정에서 약간이라도 섭섭함이
묻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을 보고 알아 차려야 한다.
한국어는 분위기의 언어이며 뉘앙스의 언어라서 무척 어렵다.
일본 사람 보고 혼네니, 다테마에니 따지지만 이는 한국도 비슷한 경우도 있고, 마찬가지다.
차라리, 예야 호주머니 사정 괜찮으냐. 새 외투 입으면 기분은 좋을 듯하다마는,
사 올 수 있는 여유는 되겠냐. 걱정되어서 그런단다.라고 솔직하면 얼마나 좋을까.
비쌀 텐데 그래도 네가 사주는 옷 입고 싶단다. 사와라.
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는 없을까?
사 오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면 반대로 하라.
이와 비슷하게 대표적으로는,
엄마, 이번 설에 꼭 내려갈게요.
예야, 하는 일도 바쁠 텐데 올 거 없다. 내려오지 않아도 된단다.
라며 정작 내려 가지 않으면 나중에서야 무척 섭섭하다고 토로하는 엄마의 모습.
차라리 내려와. 보고 싶단다.
바빠서 못 내려올 거 같으면 엄마가 아예 올라가마.
이게 솔직하게 낫다.
3. 당신은 집안일에 대체 뭘 했는데? 응?
쓰레기를 한 번 버려 줘봤어?
설거지나 빨래나 청소를 해준 적이 있어?
애하고 놀아주길 했어?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나 무지 섭섭해.
직장 다니고 집안일하느라 힘들어 죽었어.
물론, 결혼 전에는 "오빠,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에 대한 시즌 2이다.
이게 고전적이지만 흔한 대표적인 표현이다.
뭐에 불만을 즉시 토로하지 않고 내재시켰다가 나오는 수사법이다.
여기서 심하게 나가면 우리 헤어져로 나온다.
그런데 정작 와이프는 그 어떤 요구를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한 적이 자주 없다.
그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득했지 직접적인 구체적인 요구한 적이 없었다면,
남편이 모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오늘 쓰레기 버리는 날,
종이 박스 재활용 버리는 날이니 정돈해서 분리수거해서 배출해주세요.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를 하자.
'그 보면 알잖는가'라고 지레짐작하지 않는 것.
바라는 것이 정확하면 싸울 일도 조금은 줄어든다.
4. 전날 과음해서 마시는 콩나물국밥을 들이키며,
매운 청량 고춧가루를 팍팍 넣어 놓고 마시면서 하는 말.
시원하다고 한다.
여름날 냉장고에서 꺼낸 물도 시원하긴 마찬가지였으나 뉘앙스는 전혀 다르다.
이런 종류의 표현 스타일에 젖은 사회가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오해하게 만든다.
5. 친구들에게,
앞으로 늙어가면 자신이 좋아할 일들에 대해 연구하고 잘 살아 보자라고 했을 때,
'그러면 지나온 시간에 친구들은 못 살았단 말이야'
라고 와전되게 넘겨짚는 해석으로 되면 참으로 난감하다.
즉 해석의 과잉 증폭 현상이다.
친구들이 못 살았단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반대로 해석되는 경우.
마음이 술 마셔 취한 듯이 불콰 해지는 경험 있기도 하다.
6. "우리 언젠 밥 한 번 먹어요."혹은 "언제 소주 한 잔 하죠."라는 말도 가장 흔히 하는 오해들이다.
'밥 먹을 사이 정도로 좀 친해집시다'라는 뜻으로 달리 해석해야 한다.
몇 날 몇 시에 어디서 만나 밥 한번 먹어요라는 약속의 진실과는 전혀 다르게 쓰인다.
어느 외국인이 밥 한번 먹자는 말에 계속 기다렸는데 연락도 없길래 다시 물었다.
"언제 밥 먹자고 해놓고 연락이 없냐?"라고 되묻게 되는 오해들이 한국어에는 많다.
7. 가끔 처갓집에서 일어난 자잘한 관계적인 이야기를 실컷 해놓고,
어디 누군가에게 하지 말라고 한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든가.
왜 끄집어 내놓고 나서 묵히도록 담아두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섭섭한 대상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다시 와전되어 오해가 생길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8. 아무리 글자 그대로 적어 놓아도 다르게 해석될 때 이해력보다 오해력이 더 강한 게 한국어이다.
우리나라의 언어에는 상당히 많은 해석에 대한 필터들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나 혹은 뉘앙스를 알아차리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더라.
아무래도 이런 수사적 기법들이 발달하게 된 원인이 뭘까 생각해보면,
정말로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의 불이익이 많았음을 상징한다.
어디서 들은 말 한번 삐끗 잘 못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버린 사화가 일어났던 나라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말의 해석에 따라, 혹은 의도하는 작위성의 오류 때문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불안증이 한국어에도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말이 가장 신빙성이 없는 낮은 단계의 증언이다.
다음이 문서이고 문서에 사인이나 날인이 되어 있지 못할 때는 사인이나 인장이 있는 문서보다 증거력이 낮다.
물론 사인보다 인장에 인감증명서를 첨부하는 이유도 의사의 확인을 더 담보하는 이유일 것이다.
당연히 인감의 첨부에 사진이 추가되면 증언보다 증거가 우선한다.
우린 신빙성이 낮은 저 신뢰도에서 언어를 구사하고 산다.
따라서, 발생하는 오해와 이해의 사이에서 관계의 갈등이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생긴다.
9. 우리는 여전히 관계를 없앨 수도 없고
관계에서 갈등과 오해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도 없다.
따라서 좀 더 명확한 언어의 논리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는 이유도 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긴 말 치우고 대신에, 야 우리 그냥 술이나 마시자. 이거다.
간단하다. 어젯밤 술 한잔 마시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무슨 말을 했던지 무얼 담아 둔 걸 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만이다.
야 뭐 술 한 잔 먹고 횡설수설한 건데 뭘 그리 섭하냐. 그렇게 퉁칠 수 있는 핑게가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