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사용하는 카메라가 늙었는지 최근에는 여기저기 고장이 난다. 특정 모드(흑백의 거친 톤 모드)로 사진을 찍으면 큰 반점이 나타났다가 컬러로 담으면 반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나 렌즈나 센서에 먼지 때문인가 의심했었다. 먼지라면 어떤 사진이든지 모두 나타나야 하고 청소하면 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꼭 특정 모드에서만 반점이 출몰한다는 점이다. CCD 센서에 뭔가 전기적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 할 뿐이다. 게다가 가끔씩 LCD 모니터가 일그러진 영상이나 혹은 빛바랜 듯한 푸른 톤의 깨진 영상이 보일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 카메라를 재부팅하면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 뭔가 증상이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서히 맛탱이 가려는 거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고 확대되면 사망에 점점 다가가는 게 꼭 우리 삶의 시간과 다르지도 않을듯하다. 어떤 날은 메모리가 인식이 되지 않는 적도 있었다. 분명 메모리가 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메모리가 없다고 나오거나 메모리 오류로 표시되고 셔터조차 눌러지지 않는 증상들이다. 이 정도면 늙은이 근근이 숨구멍이 붙어 있는 셈은 아닐까 싶다. 그러다 초기화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하기도 하고 이내 또 비슷한 증상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이 카메라는 나날이 리프레시의 낡아가는 역사를 보여주는 건가 싶었다.
비교적 큰 카메라가 있어도 일상에서 단출하게 다니기에는 사이즈가 작고 아담한 크기여서 들고 다니기 딱 좋은데 이걸 어쩐다 싶다. 고치려고 하니 마이너 브랜드라서 지방에는 변변한 수리 센터가 없다. 처음 구입할 때 가격이 70 정도 줬는데 지금 가격을 보니 반 토막 이하의 가격이다. 게다가 A/S 보내려고 하니 또 어디로 보내야 할지 알아봐야 하는 성가심이 뒤따르다 보니 차일 피일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동일 브랜드의 카메라를 찾아 봤더니, 첫 초기 출시가가 거의 100이었는데 지금 보니 30을 겨우 넘는 가격을 보고 이렇게 많이 추락했나 싶을 정도로 놀랍기까지 하다. 이렇게 떨어진 가격이면 고치는 것보다 아예 하나 더 구입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까짓 거 뭐 있나 지르고 보는 거? 문득 카메라를 검색하다가 써보지 못한 카메라에 대해 설레지가 않는다는 걸 보고 스스로에게 또 놀랐다. 처음 D_SLR 카메라를 살 때의 떨리던 마음으로 카메라 박스를 열었었는데 이제는 심드렁하기까지 한다. 나도 호기심의 예각은 많이 뭉그러졌구나 싶었다. 게다가 가격이 출시가에 비해 1/3이라면 충분히 질러야 맞는 건데 카메라를 봐도 설레지가 않는다니.
최근에 딸아이가 아이폰에 끼울 에어 팟을 이야기하길래 중간시험 치면 질러라고 했다. 귓 구멍에 꼽는 게 그리 비싼 줄은 몰랐으니까. 고작 이어폰인데 흔쾌히 질러라 하고 나서 가격 보고 완전 깜놀~. 내뱉은 말을 도로 담을 수는 없었다. 괜히 했나 싶어서 조금 후회? 가 밀려들었지만 어쩌겠나, 딸아이에게 약속을 해버렸으니까 시원하게 송금했다. 딸아이는 그냥 한번 해본 소리라고 넘어갈 줄 알았으나 대뜸 아빠가 돈을 보내 주니 놀랐다고 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싶어서 가졌을 때의 기쁨이 이젠 나에게 없다는 것의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게 뭐라고 가져서 기뻐하는 딸아이가 대뜸 부러워졌다. 딸아이의 진단은, 아빠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니 심드렁 한 거라서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적다고도 했다. 몇억이나 하는 차를 타고 다닌 것도 부럽지도 않는 건 왜 일까라고 다시 물었다. 계속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필수인데 점점 고장이 늘어가는 카메라를 대체할 욕망이 줄어든다는 것의 의미는 무슨 심리적인 현상일까 싶었다.
가끔 일종의 수집을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면 부럽기도 하고 때론 허무하기도 하다. 모아 놓고서 스스로가 흐뭇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게 충족되어 어느 정도 규모를 압도하게 되면 작은 박물관것과 같은, 물건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의 업적화가 되기도 한다. 문화재 수집가들이 그랬고 심지어 우표 수집이나 병뚜껑 수집하다 못해 라면 봉지의 수집만으로도 그러하기도 하다. 카메라 기종을 섭렵하고 새로운 카메라를 모으는 컬렉터들의 자신의 심도 있는 물건의 집착이 다 비슷한 심리상태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심리적으로 정서의 결핍은 끝임없이 물건의 탐욕으로 발전된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거. 이른바 수집벽이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는 수집함으로써 돈벌이, 즉 투기적 가치의 경제적 활동이거나, 아니면 심리적인 허기의 충족이 물건으로 대리적인 집착하는 경우이다. 아니면 또 좋아하는 선호의 취향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있으면 찍고 없으면 말고.... 다시 말해 살면 살고 못살면 안 살고.... 계속 그런 말이 뇌리 속에서 맴돈다. 억지스러움들이 온통 일상의 번뇌를 사로잡아버리는 거 같다. 그래서일까. 오늘 사진 블로그 지인의 글에서 사진에 힘을 빼라는 말이 유독 마음을 휘감는 느낌이 든다. 잔득 힘이 들어간 듯한 글과 사진들. 무거운 주제들,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이란 핑계로 점철된 글들과 운명을 자책하는 못난 마음들. 이런 것들이 계속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결핍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듯하다. 그저 한 세상 힘 빼고 설렁설렁 물 흐르는 것처럼 순리대로 흐르면 될 텐데 왜 이 억지스럽게 아등바등 거리며 욕망으로 불만으로 생의 아까운 시간을 소모시키고 있을까.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더 좋은 기종을 가져 본들,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마음이 고개를 처들게 되니 새로운 카메라에 흥미가 엷어져 가는 느낌도 가지게 되는 원인이다. 결국은 찍고 싶은 마음 없이 찍는 것. 살고 싶은 마음도 없이 사는 것. 그래야 비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 자체를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를 방임하고 싶을 때, 악착같음을 내려놓고서 하늘을 자주 보고 싶은 진정한 자신만의 충족감이 시시때때로 그립다. 늘상 허기지는 부족함 등이 어떤 물건으로 아무리 집착해도 영원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모델의 제품이 쏟아진다. 하기야 자본주의 물질 사회에서 항상 뉴페이스의 모델이 등장하고 새로운 호기심으로 사람의 욕구를 채우게 해서 어마어마한 차액을 남기는 시대가 아니었든가 말이다. 마음의 허기를 물건에 투사시키기에 너무나도 풍족한 사회인 반면에 제품의 사용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또는 싫증 나게 만들고 비교하게 만들어 물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대입시키게 만든다. 뭐 빠지게 일하고 벌었던 돈은 그렇게 카드 값으로 술술 빨리는 인생이 공허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당장에 뽀대는 그럴싸한데 흡사 목이 말라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증상은 현대인의 고질병 같은 착각이다. 매달 카드 값에 월급이라고는 정거장처럼 거쳐 나가버리고 또다시 할부의 유혹은 그칠 줄 모른다. 과연 이게 발전이란 말인지 종종 헤맬 때가 많다.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기능은 거의 변함이 없이 비슷하게 작동을 해도 디자인과 모델을 변경하고 껍데기의 폼을 바꾸는 리빌딩이라는 이름들. 리체인지라는 단어에서 정작 실속도 없는 허상에 대한 만족을 찾으려고 한다. 기능이 추가될수록 가격이 올라가지만 마음에 부는 변덕은 이내 곧 허기로 더더욱 강력한 자극을 바라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된 모델의 넘버는 이제 따져 보기에도 벅찬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할부의 카드값은 온갖 혜택으로 무장하고 공짜심리를 발동하게 한다. 소비의 허기가 소모의 인생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자원은 고갈되고 소비로 양산된 폐기 처분된 쓰레기와 만들어지는 유해물질들과 공해 환경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사람의 건강을 위협한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뜨거워지고 오늘에 내가 쓰다 버린 일회용 비닐은 어느 바다를 떠돌다 거북이의 뱃속에서, 썩어가지도 못한 채로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과연, 죄가 없는 사람이 없는 이유이다. 쓰다 버린 것들의 유해성이 곧 죄악이다. 그러나 현대 산업 자본 사회에서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조건에 부닥친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자원의 소비라는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원죄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1g의 비닐도 안쓸 수가 없고 1g의 플라스틱을 안쓸 수가 없다는 것이 죄의 근본 원인인지도 모른다. 이런 죄로 저지른 업보는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후대로 유전되고 전승되어 갈때, 농축되는 악조건의 환경을 물려주는 꼴이다. 그러면서 또 많이 낳으란다. 이 얼마나 존재론적인 모순이며 이 얼마나 치명적 오류인가. 자본의 무한대적인 수익이란 욕망으로 파생된 병든 환경은 결국 인간의 생존에 대한 병들어가는 증상인 거다. 뭐 어차피 죽을 거 팍팍 써보고 죽자라는 자살적 행위들이 야금야금 오늘도 쉬지 않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