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이원규 시인이 노래한 지리산. 지리산에는 4번쯤 갔었다. 꽃 피는 춘삼월의 지리산, 한여름 땡볕의 지리산, 가을날 단풍에 불 타오르던 지리산, 찬바람 매서운 삭풍이 몰아지며 눈바람 날리던 지리산. 물론 모두 카메라와 동행했었고 지리산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찍었다. 여름날 지리산은 덥고 습하여 오르는 동안 땀이 내내 몸을 적셔도, 겨울의 지리산이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오솔길을 걸으면서도, 지리산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산에 거친 호흡과 지친 다리로 몰입된 시간이었고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지리산에서 사는 시인이 사진 시집을 냈다. 시인은 ""시의 얼굴""같은 사진을 시집에 걸었다고 했다. 사진도 시의 얼굴이 될 수도 있구나.


사진을 담은 시집도 이젠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사진에 어떤 시가 걸렸고 첨부되었을까. 시에는 무슨 사진을 얼굴처럼 덧대졌을까. 사진과 시를 좋아하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시인의 사진 시집을 보고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과 같은 셈이다. 지나가다 참새 한 마리 쪼르륵 지나칠 수 없어 들렸던 방앗간에 흩어져 있는 낱알 곡식을 쪼아 먹듯이, 사진 한장을 쪼아 먹고 사진에 달린 시 몇 구를 또 퍼마신다. 지리산에서 어떤 사진이 숨어 있는지 나도 어느 테마의 장소에서 몇 년이고 지속적으로 사진을 담고 싶은 마음이야 다를 수가 없다.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속을 포기하여 접는다는 것과 같다. 산속과 세 속은 공간적으로도 떨어져 있으니 산에서의 세상은 세속의 도시와는 전혀 다르다. 아스팔트에 굴러 가는 자동차 대신에 산의 정상을 넘나드는 구름이, 보도 블록으로 지나치는 많은 인파 대신에 산속 골짜기 사이로 새들이 빠르게 계곡을 넘나든다. 도시에서 살면서 도시의 이질감에 여전히 적응 못한 채로 억지로 붙어 있는 것도 세속에서 얻는 것들을 포기 못해서 발목을 잡힌 것일 따름이다. 편리가 주는 안락함 대신에 산속에서의 불편을 감내하며 얻는 것과의 무게감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 걸까? 여전히 도시 속의 무게가 더 무겁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전화 한 통으로 배달되는 편리성들. 주문만 하고 결제만 이루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들을 산에서는 하나도 기대할 수 없다. 산을 그리워하며 산에서 사는 시인이 사진을 거는걸 간과하지 못함은 결국은 나도 산으로 가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에서의 편리한 삶을 덜어내서 무게를 가볍게 하고 싶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가까운 산에서 열심히 찾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를 못했다. 아직 도시에서 발생하는 당겨진 끈이 더 있다는 관계와 편의의 힘을 포기 못한 탓일 테다. 아직 해야 할 의무는 남았으니 외면하여 나 하나 좋다고 훌쩍 떠나는 무책임으로 방기는 못하겠다.

 

언젠가 산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려니 도시의 삶이 너무 공허하다. 물론 이 잠시의 공허를 시인의 사진과 글로써 대리만족이라면 이 사진 시집을 읽는 맛은 어쩌면 달고도 쓴 것이다.

 

시인의 사진은 시처럼 사진을 찍었구나. 앞으로 시인의 덕목에는 문학성도 높아야겠지만 이미지의 창작성도 넘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사진의 퀄리티가 초보 수준이 아니다. 야경 사진에서 사진의 수준이 나온다. 별의 원주로 궤적을 찍을 정도면 장노출로 담았을 텐데 어쩌면 야경의 빛의 사진이 시의 맥과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시만으로는 뭔가 부족했을 것이다. 시인이 시만 가지고는 못 배겼을 테다. 그러니 시집에 사진을 넣을 생각을 했을 것이고 비교적 오랫동안 사진을 담았을 것이다. 사진은 시처럼 금방 나오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의 경과 기간을 거쳐야만 시적인 시간이 축약될 것이므로, 사진과 시를 염두 했던 것이 확실하다.

 

지리산에서 보이는 사진은 얼마나 명징하고 깨끗한지. 산에서 찍은 사진은 나에겐 유혹이고, 시가 산을 유인한다. 마치 끈적끈적한 본드로 끌어당기는 맛이랄까. 인간아. 도시에서 뭘 하고 있나. 빨랑 산으로 오라고 손짓하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곳에 있어 봤자 부대낌만 늘어나고 인연의 앙금이 쌓이고 지쳐버린 인간상에 환멸이 일어날 텐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라고 소리를 치는 것처럼 현혹하는 거 같다. 글쎄 아직은 도시에서 견딜만해서 피난할 것까지는 버티려고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훌쩍 떠날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안다. 그렇기에 미련은 더 남았고 유혹에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거 같다.

 

- 그 얼마나 -

 

병원에서 폐암 말기를 선고받아봐야

아프지 않은 날들이 그 얼마나 다행인지

지리산 어느 골짜기로 사라질까 홀로 고민한다

폐암 말기가 아니라 결행성 늑막염

아홉 달만 약 먹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봐야

치료 가능한 병은 병도 아니라고는 것을 절감하고

댓글 하나로 선거법 위반 고소를 당해봐야

법 없이 살아온 날들이 그 얼마나 한심했는지

벌금을 내고 전과자가 되거나

문인간첩 기자 간첩단으로 엮일 뻔해봐야

옥사하거나 무기징역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투사 민주열사들의 어금니를 겨우 알게 되고

먼저 죽은 친구의 문상을 가봐야

아직 살아남은 날들이 그 얼마나 복에 겨운지

언제나 행복의 바탕화면은 불행이지만

눈보라 속에 핀 복수초 꽃을 직접 봐야

군불 지피는 저녁이 그 얼마나 눈물겨운지.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오후 시선 03, 시, 사진 이원규저, 역락, 116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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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23 2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말씀처럼 ‘사진의 시간‘과 ‘시의 시간‘ 이 다르겠지요. 길고 짧은 서로 다른 시간에서 빚어낸 이미지가 절묘하게 만났을 때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yureka01 2019-06-24 08:48   좋아요 2 | URL
이미지의 언어와 텍스트의 언어가 만나서 이루어 내는 콜라보가 감정을 더 끌어 올리는 시너지 효과가 있지요..^^..

雨香 2019-06-23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사진은 시처럼 사진을 찍었거나’
시화에 익숙해져서인지 그 동안 시는 그림과는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와도 잘 어울릴 듯 합니다.

* 어느 사건 이후 ‘명징’이라는 단어가 눈에 잘 들어옵니다. ^^

yureka01 2019-06-24 08:49   좋아요 0 | URL
사진도 시와 잘 어울리는 한쌍이더군요..
결국 두가지 장르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지향하는 바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cyrus 2019-06-24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가 정말 좋네요.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몽환적인 느낌이 납니다. ^^

yureka01 2019-06-24 08:49   좋아요 0 | URL
지리산 야경 사진..참 잘 담았더라구요...~~^^..

강옥 2019-06-24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원규 시 사진전 6/26~7/2
인사동에서 있네요. 북콘서트도 있구요.
이원규 사진전 ‘몽중도화‘보고 깜놀했어요 전에
지리산 안개 속에 핀 야생화를 담았는데 아, 진짜.....
야간촬영은 장비도 그렇고 여러가지 환경이 받쳐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찌감치 포기했슴다. 신포도와 여우 되겠습니다 ㅎㅎ

yureka01 2019-06-24 13:4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지리산에서 사진이 참 부럽더군요..
그러나....
전시회 한번 못해보고 사진생활 끝내는게 맞다 싶어요..ㅎㅎㅎㅎ
이젠 사진에도 욕심 내려 놨습니다...

Nussbaum 2019-06-24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진을 찍어 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요즘 느끼는 바는, 아래와 같네요.

1. 나는 사진을 참 못찍는다.
2. 꽤 오랫동안 일상의 모습만 찍을 예정이다.
3. 카메라의 눈과 사람의 눈은 또 다르구나.

늘 유레카님 덕분에 사진에 대한 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극을 받고 갑니다 ^^
알라딘에 오래 남아 주셔요 ~

yureka01 2019-06-24 17:56   좋아요 1 | URL
Nussbaum님께서 사진찍고 인화까지 하신다니...아주 반가운 일이네요..

저도 사진 잘 찍어서 찍는 것도 아니니 잘 찍어야겠다는 부담 가지지 마시고 찍으셔도 유효한 사진찍기입니다.
네..특별한 출사가서 찍느 사진도 좋지만 일상적인 사진이 개인사적인 기록으로는 의미를 부여하면 좋아요.
그럼요..기계가 사람눈을 닮았지만 랜즈에 빛을 감광하는 것과 시선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다른거 맞습니다...

네 알라딘은 책과 관련된 서재 블로그인데도 사진 가끔 올리긴 하지만 주는 책이니까요.
사진 책 관련 글이 자주 올렸거든요...앞으로 꾸준히 사진 찍으시길 바랍니다.
사진은 오래 오래 긴 시간을 요구하거든요...

서니데이 2019-06-24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예쁜 책이네요. 처음에는 그림인 줄 알았어요.
사진을 찍어보면 눈으로 보는 것과 조금 달라지는데, 그게 카메라의 눈이겠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유레카님, 편안한 밤 되세요.^^

yureka01 2019-06-25 08:49   좋아요 1 | URL
사진이 들어간 시집이라서 사진이 똭^^..
시도 사진도 읽기 좋았습니다..
지리산 가고 싶어지더군요..ㅎㅎㅎ

페크pek0501 2019-06-25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유레카 님은) 예술적이다, 라는 생각과...
마지막에 옮겨 주신 시는 꽤 의미심장하네요. 묵직한 시 같습니다.

yureka01 2019-06-25 12:38   좋아요 0 | URL
예술은 늘 인생을 허기지게 만들어요..예술의 욕망은 어쩌면 부나방의 불꽃 탐닉인지도..^^..

시가 지긋하더군요~^^.

2019-06-26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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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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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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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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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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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6: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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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5: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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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6: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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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3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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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4 0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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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5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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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5 1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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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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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2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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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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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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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1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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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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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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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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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중독시킨 한마디 괜찮아
김경진 지음 / 애지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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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의 영화를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노 프라블럼!~".( 문제없어. 괜찮아.)라고 한다. 절체 절명의 긴박한 순간에서도 몇 마디 까지 이어가는 여유를 건네는 장면에서 감상자는 조급함으로 애가 탄다. 늦어짐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데 주인공은 태연스럽고 간단하게 '괜찮아'라며 한마디가 "노 프라블럼~"인 것이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우린 가끔 자기 최면을 걸며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이까 짓거 별거 아니야."라고 태무심하듯 낙천의 여유를 부리는 척한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아니 조금만 더 들어가서, 문제가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심각해."라는 거다. 막판에서도 극심한 공포와 고통이 머리를 쥐어뜯고도 이게 뭐가 문제 인가라며 아픈 거 빼고는 아무 문제는 없다고 최면을 건다. 문제는 답을 요구하지만 문제가 없다잖아. 답을 낼 필요가 없어. 그럼 문제없어. 노 프라블럼. 내일 지구가 짜게 져도 뭐가 문제야 노프라블럼. 괜찮아.

 

거대한 태양계에서 태양이 플라스마 폭발해서 방사능 태양풍이 지구를 덮쳐도 노 프라블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인 우리가 문제에 대해 답을 설사 안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도리가 없으니 차라리 자포자기적인 낙천성으로써 노 프라블럼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도 영화에서처럼 절체 절명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도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딱 한마디를 외치게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괜찮아. 이거 별거 아니야. 그래서 노프라블럼을 연발할수록 지켜보는 시청자는 더더욱 심장이 흥분하고 감정이 극렬해지며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그 위기의 여운을 주인공이 어떻게 결말을 맺은 엔딩의 환영이다.

 

살아온 시간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으면 괜찮을 거고, 반대로, 아냐, 내 인생은 정말 심각했어. 지금까지 이렇게 어렵게 벼텨온거야 그래서 대단해. 대단하니 괜찮아진 거야.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 옆에서 훈수질 뜨는 사람이나 제 3자나 혹은 오지랖이 태평양 바다처럼 넓은 사람이 보기에는 굉장히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뭐 이 정도쯤이야 난 괜찮아. 설사 뒷감당이 "전~~~혀" 되지 않아 속수무책인 무비에 유환이 뻔함에도 "괜찮아. 노 프리블럼을 외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는 것. 원천적으로 부정할 수 없을 때는 긍정으로 자기 착각을 해야 살아가고, 살아지는 원리가 우리 이만하면 괜찮은 거라고 얼버무리는 낙천적 외면성이다. 반대로, 아니더라도 괜찮아라며 의식적인 최면을 걸어야만 한다. 그래야 오늘을 견디고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어쩔 건데? 그냥 여기서 꼬꾸라져서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 버리고 말 결론은 또 아니란 거다. 괜찮을 때는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을 수도 있고 반대로 괜찮지 않을 때라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력감에 빠졌을 때도, 괜찮음이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괜찮다가 강조될수록 괜찮지 않는다는 말과 동격이다. 반대의 반대는 강조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픈 환자에게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해질 때에서도 약을 주며 이 약으로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최면의 플렉 시보 효과는 그래서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괜찮아질 거라는 긍정의 희망이 때론 자신에게 무척 배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또 시간은 흐를 것이고 지나면 또 괜찮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세상에는 전부 다 괜찮아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저마다 한두 가지씩, 혹은 아니 더 많이 몇 가지씩 마음의 짐을 지며 힘 들어서 꼬꾸라질 거 같아도 멀쩡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를 띠며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노 프라블럼을 외쳐야 하는 경우, 과연 누가 심저에 가라앉은 슬픔을 오열로 쏟아 내게 할 수 있을까?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절대로 난 괜찮지 않아. 그래서 이번 생은 망했어라며 미리 포기하겠다고 약봉지를 털어 넣는 사람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자기 힐링이든 자기 연민이든 타인의 위로이든 등을 토닥이며 아무런 말 없어도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정화가 어느 시대보다도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이든 간에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당면한 문제가 가장 아픈 법이다. 시대는 시대에 벌어진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아픈 법이지, 시대와 시대를 비교해서 어느 시대가 더 아프고 덜 아프고라는 식의 비교의 대차 대조는 의미가 없다. 하기야 내 손톱 아래에 찔린 가시 바늘이 더 아픈 법이니까. 더 아프고 덜 아프고의 문제가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픔이 있느냐와 없냐라는 거다. 요즘 다들 배가 불러서 진짜 아픈 걸 모른다는 식의 꼰대는 그래서 인기가 전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개인사적으로도 어느 시대이고 간에, 누구든 간에 엄밀하게 보면 괜찮은 적이 거의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한 살인 사건도 가족 간에 일어난 불화 때문인지 정신병적인 것인지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자행되고 죽이고 죽는 걸 보면 이게  괜찮을 리가 결코 없다. 다만 문제가 있음에도 덮고 작정조차 할 수 없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 일쑤인 것이 우리 인간이 사는 현재의 모습일 따름이다. 따라서 인연이란 기쁨이다가도 때론 잔인한 것 중에 하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하는 것일 테다. 만나지 않으면 부대낌도 기쁨에 겨울 일도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만났으니 때론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서 아파하기도 하고 한다. 늘상 그랬다. 괜찮았으니까 덮었고 덮어 지나쳐 버렸으니 다시 괜찮을 거라도 우리는 또 그런 줄 알면서도 새로운 인연을 욕망한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괜찮음이란 종교를 맹신하고 추종하는 기초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자, 다시 우리가 외쳐 보자. 괜찮아. 노 프라블럼. 에브리싱, 오케이라고.

이 책은 긴 투병 생활에 지쳤고 아내를 일찍 떠나보낸 한 남자의 자기 위로의 독백 같은 책이다. 다행히 생의 업이 시인이라서 그 치유와 자기 연민을 글로 치료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떠난 아내가 남긴 생의 의미들. 그리고 남겨진 시인의 고독한 자기 체면들. 하기야 우리 모두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인연에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실제 현실로 만났을 때는 무어라 애써 상흔을 남기지 않을 리도 없다. 그래서 주문처럼 외우는 염력의 용언이 괜찮음이라고. 그래 노 프라블럼 이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준비 없는 이별에 직면한다. 그동안 수많은 사진을 담으며 이별을 만났다. 시간과 이별했고 공간과 이별했고 아기였던 딸이 어느새 성장해서 어릴 때 아이 때의 딸과 이별했다. 와이프가 만난 이후에서도 언젠가 나의 아버지와 이별했듯이 이별하고야 만다. 예정된 이별인 셈이다. 이별은 닥치고 사랑은 언제가 기억에서조차 희미하게 퇴색되어 가는 내 아버지의 얼굴처럼 선명하지가 못하다. 기억은 희석되어 묽어지며 점점 한때의 기억은 특정 부분만 남는 추억이 되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는 이별을 할 줄 전혀 모르지도 않는데 새로운 만남의 인연을 맺어간다. 왜 그렇게 다들 괜찮았으니까. 만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것도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또 괜찮아질 거라고 주문을 외우듯 외친다. 괜찮아. 에브리싱 오케이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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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6-20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인도 영화 [세 얼간이]에서 주인공이 항상 ˝알 이즈 웰 all is well˝ 을 외치며 항상 괜찮다고 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yureka01 2019-06-21 08:54   좋아요 1 | URL
대체적으로 인도인과 일해본 분들이 가장 많이 듣는 게 노프라블럼..이라고 하더라구요..

2019-06-21 0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1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6-21 0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 곧 「라이온 킹」실사판이 개봉예정이어서인지 ‘하쿠나 마타타‘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yureka01 2019-06-21 08:52   좋아요 2 | URL
하쿠나 마타타..
딸아이가 어릴 때 동요로 부르던 노래^^..

강옥 2019-06-21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모르파티
라는 노래 아시죠? 중독성이 있는 멜로디라 나도 몰래 흥얼거렸는데
제목의 뜻을 최근에야 알았어요
아모르는 사랑, 파티는 인생.....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라는 뜻이라네요
괜찮아, 다 잘될거야,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면 되는 거겠지요
기왕이면 웃으며, 즐겁게. 찡그리면 나만 손해니까요 ^^*

yureka01 2019-06-21 10:42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아우츠비츠에서도 살아 남은 사람들의 특징이 긍정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부정이 앞서면....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아모르 파티..저도 노래 들어 봐야겠습니다~^^.

2019-06-21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1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1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한철의 ‘슈퍼스타’에 나오는 후렴구도 중독성이 있어요.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괜찮아 잘 될 거야 우린 널 믿어 의심치 않아.”

yureka01 2019-06-21 16:17   좋아요 1 | URL
그노래 ...기억 나네요..
네 잘 될 거예요..라고 믿고 사는 거죠..

2019-06-22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3 0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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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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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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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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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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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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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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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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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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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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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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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낸 절벽에

 

지층의 시간이

 

덧게를 벗었다

 

한줄과 한줄의

 

사이에 굳어간

 

세월의 무게감

 

한순간 지각이

 

뒤집혀 일어난

 

영원한 사건들

 

순간과 영원의

 

어제와 오늘에

 

침묵한 아우성

 

모조리 부절이

 

없다는 사실을

 

무심코 앓았다

 


우리의 존재감

 

어디에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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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09: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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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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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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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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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6-21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생활을 할 때는 일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곤 했는데
나이 먹어가니 존재감이 점점 떨어지더군요.
가정에서의 위치나 인간관계속에서 존재감을 찾기보다
자아실현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들 책을 내고 전시회를 하고.... 뭔가 확인하려하는지도....

yureka01 2019-06-21 10:44   좋아요 0 | URL
^^ 지우당님도 존재감이 있습니다.
자주 블로그에 사진과 글 보여주시잖습니까..
그럼요..늙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는,
뭐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존재감으로는 제일 좋은 거라서요....

2019-06-22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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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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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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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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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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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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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뒤집자.

사진으로 가끔 세상을 뒤집어 본다.

시간도 좀 뒤집어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역사라고도 하지.

 

왜곡된 물질 세계의 현상에서 뒤집어 보고,

우리의 삶을 뒤집어 보다 보면,

가지고 있는 슬픔과 고통과 쓰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져 들게 된다.

비록 현실을 디집지는 못할지라도,

가끔 뒤집어 보자.

사진처럼 뒤집기하듯이.


 

 

긍정을 부정하고, 부정을 긍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진대,

사진으로는 의외로 간단하다.

 

다만, 뒤집어 보겠다는 의도만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의도가 우리 삶에 의지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기를...

 

 

2.MAY I TAKE YOU PICTURE?

 

사진 찍어도 되겠습니까?

아니오 라면 돌아서야 하고,

예라고 한다면 다가가야 한다.

 

비단,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풍경에게 말을 걸어,

풍경아,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라고 물어본다.

 

오늘의 빛과 그림자에

일렁이는 이랑과 고랑 사이로,

인연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틈을 비집고,

그래서 순간의 멈춤을 만나서,

찍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친수성이 친밀성으로 만나는 거룩한 관계겠지.

적어도 풍경에게서 조차 정중하고도

무례하고 싶지가 않아서이다.

 

PS 참조: 사진에 느낌을 담는 여덟 가지 방법, <스가와라 이치고(菅原一剛)지음, 김욱 옮김, 한빛미디어, 2010>

3. 어설프게 모르고 어설프게 아는, 이 사이의 길.

 

'봐야 한다.

안 보일 때까지.

 

보지 말아야 한다.

보일 때까지.

 

본다는 건 볼록 렌즈의 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

 

<인용 _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이영광 산문집, 이블, 2015 12>

 

 

어설프게 알고 봤던 것들과,

어설프게 모르고 봤던 것들의 사진들.

이런다고 알면 얼마나 알 수 있을런지,

모르면 또 얼마나 모를 수 있을런지.

그래서 인간인가 싶었다.


다 아는 것도 못하고,

다 모르는 것조차도 못하고,

이 어정쩡함의 정체가 모습의 실체 같았으니까.

 

전지(全知)한 신과 전무(全無)한 백치.

이 사이에 난 길에서 서성댈 따름인 거 같아서 이다.

 

사진이란, 

얼마인지도 모르고 마구 써버린 신용카드의 전표같은 것.

훗날에야 전표에 찍힌 숫자를 보고 까무러치게도

너무 많이 써버렸구나,

이걸 다 어떻게 갚을 거지'라는 부채.

그러니 사진 찍는 게 두려워져.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두려움, 

감당하려는 난감함.

 

어줍잖게라도 찍겠다고 나설 때는 

겁없이 맹렬히 날아드는 불나방이 홀린 것처럼 빛에게 달겨 들어,

그리고 초라하게 사멸한다.

 

이는 필시 중독된 거다, 나방의 맹목에 대한 어설픈 시간처럼.


-----------------------------

3년전에 담은 사진과 글입니다.

 

봉인된 사진 블로그를 보면,

이 사진과 글을 내가 직접 적은 건지

낯설 때가 있어서 다시 알라딘으로

옮겨봤습니다.

 

즐거운 감상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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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3 1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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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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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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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6-15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락, 반가워라. 낯익은 저 사진들 ^^*
유레카님이 즐겨 찍으시는 소재를 눈치챈 지 제법 되거든요 ㅎ
며칠 나갔다 왔더니 피곤이 누적되어 눈 앞이 어질어질합니다.
집 앞 저수지에서 유레카표 물결무늬 흉내도 내봤지 말입니다 제가 ㅋ

yureka01 2019-06-15 23:05   좋아요 1 | URL
네 .저걸 보면 일렁이는 시간이 느껴져서요..
앞으로도 저런 사진 궁극까지 한번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2019-06-15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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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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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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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0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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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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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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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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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간식은 감꽃이야! - 최순나 교단일기
최순나 지음 / 만인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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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초등학교 선생님.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제자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교사가 교단에서 쓴 일기로 구성된 책이다. 요즘 초등학교의 교육은 어떤 것인지 거의 모른다. 딸아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서 학부모가 되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초등교육에 관심을 가졌을 뿐 딸아이가 진학함으로써 초등학교는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정규 교육과정으로, 그리고 첫 사회생활의 범주에 포함되는 학창시절의 생활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사람으로 변화해야 하는 첫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초등학교의 교육이 별 대수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에서 경험과 지식과 담아지는 추억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즐거움이거나, 때론 인생의 나쁜 추억의 짐으로 자리매김 하는 과정이다. 어릴 시절에 받았던 사랑이나 결핍이 일생에 트라우마를 낳기도 하는 만큼, 굉장히 중요한 시절임에는 틀림없다. 중학교는 초등을 거쳐 고등학교의 과정으로 짧은 기억에 크게 남지 않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는 대입이라는 관문에 인상이 강렬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성인으로써의 역할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도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이렇듯이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란 때로는 미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초등학교의 선생님에 대한 역할은 인생에서 무의식적으로도 심어지는 인성의 판도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일 수 있다. 특히 선생님의 인품과 성격이나 성향 그리고 사명감이나 교육 철학과 방향에 따라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각인되는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적다. 한 반에 고작 30명도 채 되지 않는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아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를 격세지감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다녔든 국민학교 시절에는 베이비 붐의 끝 세대였다. 한 반에 거의 70명 가까이 넘는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서 바글바글했었다. 넘치는 아이들이 보물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쯤은 아니었던가 싶었다. 많아도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러니 선생님은 있어도, 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도 없고 개인별로 선생님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웠다. 책임져야 할 아이가 넘쳐났으니 선생님의 교육은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하루하루가 북새통으로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절이었다. 열악한 품질의 교과서로 몽당연필의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과의 관계란 그저 한 학년 거치면서 지나쳐 버리고야 마는 그저 스쳐버린 관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 결정적으로 각인된 추억 자리에서는 선생이라는 교육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생산이 사회적이거나 혹은 개인적으로도 어떤 문제와 어떤 과정의 인생을 겪는 것인가에 대한 각성은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낳아 놓기만 하면 제 먹을 것은 다 있다는 이 터무니없는 육아 방식은 때로는 효도라는 보험적 성격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먹고 입히고 학비를 들여서 공부 시키면 양육은 끝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리적으로 들이는 비용이 양육의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아이의 시대적 십자가에 대해 그 시대의 부모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배운 적도 없고 알아야 할 개별적 동기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결혼하면 아이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오토매틱 시스템처럼 작동하던 시대의 과잉의 인구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산아 재한 정책의 결과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습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무조건 낳기만 하면 다 되던 시절에 사연 많은 집들이 어디 한둘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태어났던 사람이 이제는 장년층이 되고 보니 왜 그렇게 무턱대고 낳았던 것인가에 대한 각성과 함께 자신의 세대의 치열한 경쟁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도래했다. 한 반에서 이부제 수업까지 했었던 내 또래들 세대가 겪은 그 바글바글한 숫자에 대해 다들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 넉넉하지도 못했던 가정 형편에 아이들이의 감내할 고단함은 지금의 기성세대가 겪는 일종의 슬픈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많이 낳아 방임하듯 양육하기보다는 적게 낳고 보살핌을 집중하겠다는 자연스러운 발상은 전혀 낯선 것도 아니다. 우리 세대의 마지막 베이비붐 세대으로 대학 진학률은 졸업 정원제를 시작으로 급격히 고등 교육이 늘어났던 점도 이에 부합하고 따라서 우리 부모 세대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과잉의 경쟁과 바글바글함에서 부대끼며 겨워했을 세대가 취할 행동 패턴은 당연히 각성된 여건이 이를 증명하듯 급속하게 인구 숫자를 줄이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고도성장에서 야기된 부의 재분배 문제와 더불어서 급격하게 치솟는 부동산의 가격과 결혼 비용의 증가로 이어짐으로써 혼인율을 낮아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혼인율이 낮아질수록 출생률도 비례하여 떨어지는 것도 이와 맞물려 있다. 또한 양육비와 교육비에 비례해서 소득은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야 당연히 인구 감소로 이어진다. 길게 설명했다만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어려우면 낳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쯤은 당연하다. 여유와 잉여가 없이 낳음으로써 무대책의 결핍을 재현하고 싶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는 아이 하나하나가 귀중한 보물처럼 여기는 이유도 부모 세대의 바글바글함으로 빚어진 결핍을 다시는 겪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도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 또래 친구들 아이를 보면 대부분 하나 아니면 둘이다. 셋 이상은 거의 없다. 넷까지 낳았다면 굉장히 측은하게 보는 것도 어쩌면 부모 세대가 겪은 트라우마의 작용과 반작용적인 역학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귀중한 존재로서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문제에 있어서 선생님의 존재가 특별히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아이 하나하나를 지속적인 관심과 개별적인 성향을 파악하고 교육의 지침과 방향을 설정하는 문제는 아이가 장차 성장하면서 미치는 영향은 평생을 이어간다는 전인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봤던 부분이 바로 선생님의 담임반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교육이 굉장히 부럽게 다가왔다. 아이를 내버려 두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느끼게 한다.

 

어릴 때만 해도 글쓰기의 시작이 일기 쓰기였다. 일기라는 숙제도 제일 골치였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혹은 생각을 어떤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으로 이어 나갈 것인지 큼지막한 칸에 글씨를 채워 넣어야 하는 숙제가 제일 싫었다. 지나고 보니 일기를 쓰라는 숙제는 내줬지만 일기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이어 나갈지,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없었다. 단순하게 그 날 있었던 사실의 나열이 곧 일기라고 짧은 가르침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가라는 글쓰기 창작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일기라고 쓰기만을 강요했을 뿐이다. 주입식 일방적인 것을 교육이랍시고 그 시절의 선생님들 대부분 그러 했었다.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나열하며 자신의 느낌을 글감으로 만들어 내는 훈련도 없으면서도 쓰라는 일기의 강요는 결국 제일 싫은 숙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방학숙제에 제일 큰 걸림돌이 일기 쓰기 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보니 문득 요즘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에서 보면 최순나 선생님의 별명이 아이들이 지어낸 "최쓰나 선생님"이라고 하니 글쓰기 교육이 얼마나 잘 강조된 것인지 감동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자기 생각을 담는 교육이야말로 앞으로 학생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대해 표현하는 방법론이 이루어질 때 생각을 도출하여 판단하며 정리하게 됨으로써 논리를 갖추고 부족한 지식과 정보에 대해 찾아서 자신의 생각에 반영시키는 능력이 얻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런 글쓰기야말로 비로소 창작이라는 과정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글쓰기가 심화되면 시처럼 확대되는 효과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한다. 특히, 우리 세대에서는 글쓰기를 재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글쓰기를 배운 부모가 없으니 아이들이 장차 글잘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는 아이의 장례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시대는 바뀌었다. 글쓰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컨텐츠와 창작의 시대가 더 크가 작용한다는 걸 간과한다.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는 교육에서도 개별적인 생각의 표출을 막았다. 개별적인 특출난 사고방식은 억제된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사고가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전부 다른데 비슷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저렇게 하라"고만 하는지에 대한 아무 논리의 강요가 선생님을 존경의 대상보다는 강압적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글감의 발상을 의도하여 이끌어 주고 의견을 지속적으로 묻고 너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이 곧 교육의 토론 방식에 대한 시작이다. 개별적 학생들의 특성을 고려하고 그 적재적소의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르는 개성적인 교육이 한 아이 아이마다 이 특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글쓰기가 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시절에 김순나 선생님 같은 스승이 있었더라면 작가는 못되더라도 글쓰기에 아주 좋은 가르침을 배웠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쓰기에 대해 배우지 못한 세대는 단순 글씨의 문맹은 낮아도 문장의 문맹은 높다. 하물며 몇 줄 조차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일방적으로 주입된 교육의 방식은 받아들이는 in put이 활발했으나 out-put이 어려운 이유이다. 읽기가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해력의 미흡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창의력은 사유에서 비롯된다. 사유의 근본은 단어와 단어로 이어지는 문장으로 도출되는 논리를 띄는 측면이 강하다. 창의력 뿐만 아니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뛰어난 문장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만 평범한 일기 같은 글은 일상의 꾸준한 글쓰기는 많은 연습과 훈련에서 나온다. 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의 글쓰기 토대가 마련되고 장차 글쓰기를 통해서 사유할 수 있기에 몽매를 피해 갈 수 있다. 생각은 행동하게 하는 단초이다. 비상식적인 사회에 무지함을 이겨 낼 수 있는 기초가 결국은 글쓰기에 있다고 믿는다.

 

특히 선생님이라는 선행과 글쓰기의 모범으로 아이들에게 본보기는 진정한 선생 다운 교단일기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란 업이 무엇인가. 학생들보다 먼저 하고 선두에서 모범으로 보이며 따라오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이다. 가르침이라는 게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피동적인 교육보다 능동적이고 동기 유발의 교육이 확실히 효과가 있음은 이미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울러, 선생님의 교단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해서 교육하는 교육가인지 엿보고 이런 훈련을 받아 자란 아이들이 정말 부럽고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비정상적인 교육을 그대로 이어받은 선생으로부터 교육받은 이후 세대이다 보니 바글바글한 학생을 통솔하기 위해서 매을 들고 몽둥이질하는 선생을 자주 겪었다. 좁은 교실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교육이라는 게 고작 주입과 강요에 의하는 것도 일견 이해는 한다. 교실을 더 늘리고 학생 수를 더 줄이고 교사의 수를 많이 하기에는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 재정의 한계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실히 교사 업무에 임하는 스승도 찾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선생님이 한해 동안의 교단에서 아이를 돌보며 관찰하고 학습계획을 아이들과 공유하며 함께 써 내려간 일기를 제자들이 보고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초등학교 선생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랑은 받아먹은 사람만이 아는 그 심리적 여유와 만족감에 대해 아이들이 얼마나 견고한 자아의 확립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게 한다.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아이 하나하나가 존귀함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아이에 걸맞은 교육자는 직업 가로써의 선생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내보이며 아이 하나하나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스스로 아이가 느낀다면 그 아이가 성장하며 형성해 나갈 인격은 그야말로 품격을 갖추는 시민으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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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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