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이원규 시인이 노래한 지리산. 지리산에는 4번쯤 갔었다. 꽃 피는 춘삼월의 지리산, 한여름 땡볕의 지리산, 가을날 단풍에 불 타오르던 지리산, 찬바람 매서운 삭풍이 몰아지며 눈바람 날리던 지리산. 물론 모두 카메라와 동행했었고 지리산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찍었다. 여름날 지리산은 덥고 습하여 오르는 동안 땀이 내내 몸을 적셔도, 겨울의 지리산이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오솔길을 걸으면서도, 지리산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산에 거친 호흡과 지친 다리로 몰입된 시간이었고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지리산에서 사는 시인이 사진 시집을 냈다. 시인은 ""시의 얼굴""같은 사진을 시집에 걸었다고 했다. 사진도 시의 얼굴이 될 수도 있구나.
사진을 담은 시집도 이젠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사진에 어떤 시가 걸렸고 첨부되었을까. 시에는 무슨 사진을 얼굴처럼 덧대졌을까. 사진과 시를 좋아하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시인의 사진 시집을 보고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과 같은 셈이다. 지나가다 참새 한 마리 쪼르륵 지나칠 수 없어 들렸던 방앗간에 흩어져 있는 낱알 곡식을 쪼아 먹듯이, 사진 한장을 쪼아 먹고 사진에 달린 시 몇 구를 또 퍼마신다. 지리산에서 어떤 사진이 숨어 있는지 나도 어느 테마의 장소에서 몇 년이고 지속적으로 사진을 담고 싶은 마음이야 다를 수가 없다.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속을 포기하여 접는다는 것과 같다. 산속과 세 속은 공간적으로도 떨어져 있으니 산에서의 세상은 세속의 도시와는 전혀 다르다. 아스팔트에 굴러 가는 자동차 대신에 산의 정상을 넘나드는 구름이, 보도 블록으로 지나치는 많은 인파 대신에 산속 골짜기 사이로 새들이 빠르게 계곡을 넘나든다. 도시에서 살면서 도시의 이질감에 여전히 적응 못한 채로 억지로 붙어 있는 것도 세속에서 얻는 것들을 포기 못해서 발목을 잡힌 것일 따름이다. 편리가 주는 안락함 대신에 산속에서의 불편을 감내하며 얻는 것과의 무게감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 걸까? 여전히 도시 속의 무게가 더 무겁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전화 한 통으로 배달되는 편리성들. 주문만 하고 결제만 이루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들을 산에서는 하나도 기대할 수 없다. 산을 그리워하며 산에서 사는 시인이 사진을 거는걸 간과하지 못함은 결국은 나도 산으로 가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에서의 편리한 삶을 덜어내서 무게를 가볍게 하고 싶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가까운 산에서 열심히 찾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를 못했다. 아직 도시에서 발생하는 당겨진 끈이 더 있다는 관계와 편의의 힘을 포기 못한 탓일 테다. 아직 해야 할 의무는 남았으니 외면하여 나 하나 좋다고 훌쩍 떠나는 무책임으로 방기는 못하겠다.
언젠가 산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려니 도시의 삶이 너무 공허하다. 물론 이 잠시의 공허를 시인의 사진과 글로써 대리만족이라면 이 사진 시집을 읽는 맛은 어쩌면 달고도 쓴 것이다.
시인의 사진은 시처럼 사진을 찍었구나. 앞으로 시인의 덕목에는 문학성도 높아야겠지만 이미지의 창작성도 넘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사진의 퀄리티가 초보 수준이 아니다. 야경 사진에서 사진의 수준이 나온다. 별의 원주로 궤적을 찍을 정도면 장노출로 담았을 텐데 어쩌면 야경의 빛의 사진이 시의 맥과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시만으로는 뭔가 부족했을 것이다. 시인이 시만 가지고는 못 배겼을 테다. 그러니 시집에 사진을 넣을 생각을 했을 것이고 비교적 오랫동안 사진을 담았을 것이다. 사진은 시처럼 금방 나오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의 경과 기간을 거쳐야만 시적인 시간이 축약될 것이므로, 사진과 시를 염두 했던 것이 확실하다.
지리산에서 보이는 사진은 얼마나 명징하고 깨끗한지. 산에서 찍은 사진은 나에겐 유혹이고, 시가 산을 유인한다. 마치 끈적끈적한 본드로 끌어당기는 맛이랄까. 인간아. 도시에서 뭘 하고 있나. 빨랑 산으로 오라고 손짓하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곳에 있어 봤자 부대낌만 늘어나고 인연의 앙금이 쌓이고 지쳐버린 인간상에 환멸이 일어날 텐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라고 소리를 치는 것처럼 현혹하는 거 같다. 글쎄 아직은 도시에서 견딜만해서 피난할 것까지는 버티려고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훌쩍 떠날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안다. 그렇기에 미련은 더 남았고 유혹에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거 같다.
- 그 얼마나 -
병원에서 폐암 말기를 선고받아봐야
아프지 않은 날들이 그 얼마나 다행인지
지리산 어느 골짜기로 사라질까 홀로 고민한다
폐암 말기가 아니라 결행성 늑막염
아홉 달만 약 먹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봐야
치료 가능한 병은 병도 아니라고는 것을 절감하고
댓글 하나로 선거법 위반 고소를 당해봐야
법 없이 살아온 날들이 그 얼마나 한심했는지
벌금을 내고 전과자가 되거나
문인간첩 기자 간첩단으로 엮일 뻔해봐야
옥사하거나 무기징역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투사 민주열사들의 어금니를 겨우 알게 되고
먼저 죽은 친구의 문상을 가봐야
아직 살아남은 날들이 그 얼마나 복에 겨운지
언제나 행복의 바탕화면은 불행이지만
눈보라 속에 핀 복수초 꽃을 직접 봐야
군불 지피는 저녁이 그 얼마나 눈물겨운지.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오후 시선 03, 시, 사진 이원규저, 역락, 116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