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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전공 관련 책이다. 할 말이야 많지만 책하고는 관련 없는 몇 개의 이야기로 가름하기로 한다. 자 들어가자.
서두에 앞서, 나도 물론 건설업에 종사해 왔다. 첫 직장부터 지금까지 건설업 이 바닥을 떠난 적이 한 번 IMF 때 자영업(1년 정도) 외에는 계속 있었다. 게다가 가족 중에도 처남은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기사 자격을 따고 졸업해서 오랜 기간 동안 건설업에 종사하면서 이제는 작은 공사를 수주하면서 잔뼈가 굵어 어엿한 건설업체 대표로 있다. 등록 면허도 이제 건축공사업 조경시설업 시설물 유지관리업 등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업종의 종사하다 보면 함께 술을 마시거나 만나게 되면 늘 이야기의 중심에는 자신의 종사하는 분야에 촛점을 맞추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만나면 항상 하는 말이, 노가다란 말 좀 하지 말라고 한다. 하기에 처남은 건설업에 스스로가 자부심도 있는 터라서 노가다라고 하니 굉장히 듣기 싫어했다. 노가다? 그렇다.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 통틀어 스스로를 비하하는 어감의 노동자를 의미이거나 또는 뭉뜽거려서 낮춰 부르는 노가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자조적이거나 폄하하는 의도로도 쓰인다. 나도 건설업에 종사하는데 나는 자조적인 의미와 자책적인 느낌으로 쓰고, 듣는 처남은 비하로도 들렸을 것이다.
노가다가 내 입에서 건축예술가로 듣고 싶으면, 노가다들이 건축예술을 하면 되는 거다. 노가다짓해 놓고 예술가로 불러 달라는 게 어불성설이며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하는 짓들이 노가다라서이다. 노가다를 노가다로 부르는 게 잘못은 아니다. 지금의 건축이 예술이 되면 얼마든지 예술로 불러 줄 것이다. 그러니 건축은 노가다에서 예술로 바뀌어야한다. 그러면 당연히 예술로 불린다. 불러달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예술로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술이 아직 멀어도 너무 멀었다. 이게 내 지론이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에서 그 한가운데 복마전이 바로 건축이 있다. 건설시장 한 해 222조. 이런 규모이니 어쨌거나 한 국가의 기간산업이고 종사자 수도 통틀어보면 몇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 복마전의 한가운데라고 했다. 즉 돈싸움이란 이야기다. 언제부터 예술이 돈싸움으로 더럽혀진 적이 있었드나? 아닐 것이다. 예술은 예술적 가치로써 판단했지 예술이 돈이 들러붙으면 그게 상업성이고 타락하면 복마전이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건축 예술이 타락하니 노가다짓들이 나올 수 밖에. 전혀 예술적이지 못하면서 예술로 불리길 바라지만 결국은 돈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인류사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언제 돈으로만 승부를 봤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전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의 건축물 중에 단 10%라도 돈하고 전혀 관련하지 않고 의미나 기념으로라도 하였더라면 이렇게까지 폄하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건축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건축이 이루어지는데 이게 다 돈이다. 자본은 늘 본질을 흐리게 하는 첫 번째 난관이다. 마찬가지로 건축물을 얻고 싶은 사람은 비용을 최대한 아끼고 싶고 건축물을 만드는 사람은 최대한 뽑아내고 싶은, 이 충돌의 지점이 전체를 판가름해 버린다. 물론 이런 경향은 어디 나라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결국은 사람들의 마인드에서 결정이 난다. 아무리 비용을 줄이고 싶어도 일단은 자신이 의미하는 바에 따라 혹은 의지에 따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좋은 건축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싶은 욕구와 비용의 절감 사이에서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 고민에서 어느 것을 더 우선이 하는 것인가라는 관점의 차이를 말한다. 비용을 더 들이는 한이 있어도 멋진 작품 하나 내고 싶은 욕구. 이게 인간의 미학적인 욕구가 아니겠는가. 어느 박물관 큐레이터가 경매하는 물품에 예술 작품이 고가로 거래되는 것도 작품의 희귀성이나 작품의 가치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생존의 문제를 넘어 미학을 추구하는 입장은 비슷하다. 그러니 건축도 마찬가지로 이에 견주어 보면 단순히 비용대 효율성만 따지는 것보다 기하학적인 미술을 거대한 규모의 미술을 만나는 것이 바로 건축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감수도 허용될 수 있다.
호주의 시드니 항구에 서 있는 오페라 하우스를 보면 과연 비용과 효율성을 따지면 건물 자체로는 참 낭비적인 요소들이 많았겠지만 심미성이나 관광성으로 따졌을 때는 건물 자체의 비용적 효율성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물 자체의 심미성 때문에 한 해에 시드니를 찾는 관광객의 숫자를 생각하고 관광객이 지출하는 비용을 따졌을 때 어느 게 더 유리한 것인지는 자명하다. 결국 건축은 근시안적이냐 장시안적이냐의 그 차이다. 당장의 수익과 이익 대비 비용적 효율성을 따진다면 저렴하고 싸구려로 짓고 말았을 텐데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갖춘다면 지금의 비용은 결국 더많은 수익으로 되돌아오는 리바운드 효과를 놓치는 결과를 우리 한국의 건축에서 비일비재하고 보고 있다. 노가다적 시각이 그만큼 근시안적이고 계획을 수립하는 사람들이 근시안적이다.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건축은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 빨리 될수록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놓고 무너지지 않으리란 보장을 기술자들이 해야 한다는 점이 불안하다는 점이다.
기술자들의 전문적인 공학적 지식은 법률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권한이 있어야 한다. 왜냐면 이는 공학적인 지식이 곧 건축의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건축의 구조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지만, 문제는 행정가나 비전문가의 자본가들에게 자본적인 권력으로 기술자의 양심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일전에 모 대형 건설사 중에 하나가 아파트 건축에서 지하의 기초에 철근을 빼먹었다는 뉴스가 났다. 과연 현장 기술자 내지 현장 책임 기술자들이 몰랐을까? 아니다. 다 안다. 그렇다면, 기술자들이 양심이 없을까? 아니다. 기술자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지식에 자부심이 상당하다.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기술자들은 양심을 속이고 그렇게 철근을 빼먹는 짓을 했을까? 기술자들의 권한을 자본가들이 눌러 압박한 거다. 자본가들이 기술자를 돈으로 눌러 버리면 기술자의 건축은 여지없이 노가다로 추락한다. 그래서 노가다라고 직접 욕을 먹지만 정작 욕을 먹고 지탄을 받아야 할 대상의 제일 큰 책임은 기술자들에게 있지 않다. 기술자가 자존심을 버리고 자본의 하수인이 되면 뭐든 비참하다. 노가다 짓을 하게 만든 사람들이 문제인 거다. 한편으로는 기술자들이 억울한 욕을 대신 먹는 셈이 된 것이다. 왜냐면 기술자 이전에 자신의 직장이고 밥벌이의 수단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짤린다면 양심과 밥벌이 이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것이 기술자들이다.
한때, 건축 붐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돈이 몰리던 시기에 대학의 건축과는 인기 학과 중 하나였다. 입학 커트라인이 상당했다. 경쟁률도 치열했을 것이고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기술 보국에서 현장마다 기술자들의 수요는 엄청나고 기술자들이 귀중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장 기술자들이 점점 늙어 간다.새로운 신입이 경력을 쌓고 노련한 기술자가 되기에 이 맥이 점점 끊겨 간다. 게다가 멋모르고 건축공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마저도 실상을 알고 나니 돈이 전부가 아니란 것도 알아가게 되고 점점 현장 시공 기술자가 되기를 꺼려한다. 현장만 돌아다니다가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하고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사람도 많다. 신붓감이 건축기술자를 보려 들지도 않을 것도 많다. 늘 현장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가정이 편할 리가 없는 조건에 놓인다. 자본에 치이고 관계에 치이는 게 이제 현장 기술자가 된 거다. 반대로 시공기술자가 인기가 없으니 다른 기술자로 전향하게 되니 그 또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설계가 덤핑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술자들의 가격이 날로 추락한다. 나부터도 건축과나 토목과 진학하겠다면 도시락 사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한강 호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
흔히 의식주라고 한다. 주거의 관건은 생존과 직접적이다. 인류는 수렵생활하던 원시시대에서도 동굴이나 어떤 형태로든 가림막이 있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살았다. 가끔 캠핑 가서 한두 번 노숙할 수는 있어도 계속 밤이슬 맞거나 동물들로부터 피할 수 없다면 오래 못 산다. 더욱이 동물처럼 야생에서는 살 수가 없다. 두꺼운 털도 없으니 추위에 견디고 항온성을 유지하기란 동물같이 효율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보온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주거 시설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더 따뜻하고 안전한 건축물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였다. 문명은 곧 건축이며 건축에 깃들 삶의 양식이었다. 건축은 사람의 생존에서부터 진화되어 왔고 기술의 발전에 대한 궤적과도 함께 했다. 이렇게 필수적인 집을 짓어 내는 건축가들이 의식주에 걸맞는 역할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는 분야가 공학 분야이다. 기술적인 부분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이제는 문명의 진화에 있어서 기본을 토대로 이루어진 물리적인 건축물에서 심미적이고도 기념적인 의미의 건축, 미학적 건축을 따지는 공학보다 한단계 넘어선 예술로도 이미 진입했어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공학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어느 대학에서는 예술대학에 건축학이 별도로 포진된 경우도 있어도 상당히 드문 케이스일 뿐 대부분은 공학부에서 놀고 있는 수준이다.
도시계획사에서 격언이 하나 있는 것이 기억난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환경을 만들었다고 했다. 자연과 인위적인 환경은 조화이지 대척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에서 영향을 받고 환경이 만들어지고 나면 결국 인간은 그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삶의 양식과 태도, 라이프 스타일 등등 환경에 구속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간이 삶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어느 곳에 어떻게 입지하고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살아가는 스타일도 천차만별의 성격을 가진다. 오늘도 아파트라는 하나의 재산적 가치 때문에 날밤을 세우며 혹은 투자나 투기나 대출이나 전세냐 월세냐 종목은 다르지만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은 어떻게 공간으로 인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그래서 건축이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