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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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 조해진


요즘 모든 작품들을 열심히 정주행하고 있던 조해진 작가의 신작이 또 나와 반갑게 집어들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책소개에 솔깃하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읽으며 부모님과 결국엔 작별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 슬퍼졌고 좀 더 많은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엄마와의 이별로 끝나는 소설은 아니었다. 엄마의 죽음, 그 이후에 주인공의 아주 밀도높은 심리묘사와 사유가 일품이었던 소설이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가면서, 슬픔으로 짜여졌지만 정작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그 결핍이 이번 슬픔의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걸 가까스로 깨달으며


그리고 동지와 대한, 우수로 이어지는 세 절기로 챕터를 나눠 풀어내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절기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을 조해진 작가 특유의 스타일로 그려낸다. 그렇게 커다란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또 다른 아픈 이를 향해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엄마는 없지만, 그만큼 더 선명해지는 엄마의 흔적들에 대한 대목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실 옷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의 양말과 머플러, 엄마가 직접 겨자색의 굵은 실로 뜬 털모자에도 내 손은 뻗어갔다. 엄마의 물건에서 구불거리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한 날이면 핀셋으로 조심조심 떼어내 빈 유리병에 모으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그건 그 나름대로 즐거운 취미가 됐다. 엄마가 쓰던 비누,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을 나도 썼고 엄마에게는 애장품이던 금목걸이라든지 팔찌를 하고 산책을 나간 적도 있었다. 내 몸에서는 엄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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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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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요즘 가장 핫하고 개인적으로도 꼭 챙겨보는 정보라 작가의 환상문학 단편선이다. 이미 올해 초 나온 첫번째 단편선에 이어 이번에도 여러 장르문학 지면에서 발표되었던 작품 10편이 엮여있는 형식이다. 


열편이나 되지만 막상 읽어보면 단번에 서너편씩 읽게 되는 즐거운 페이지터너였고 욕망과 공포의 심연을 마주하는 하이퍼 리얼리즘 ‘보라 월드’의 서막이라는 책 소개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표제작이면서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는 죽음과 원죄에 관한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정보라 작가가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나타나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들에게 다른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고통받고 괴로워하며 가해자에게 도취감을 제공해주는 오락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잊어버린다. 하나의 도취감이 한계에 도달하여 더 이상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되면 그들은 잊는다. 그리고 다른 오락거리를 찾아 나선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잊지 않는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며 즐긴 사람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이야기 곳곳에는 이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가 태엽처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쉼 없이 흔들며 ‘그대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 외에도 인간의 기이한 욕망을 내밀하게 그려낸 〈리발관離拔館의 괴이〉, 타의에 휘둘려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떤 희극을 감내해야 하는지, 탐욕과 집착으로 점철된 삶의 현실 속 지옥은 어떤 빛깔인지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은 열편의 환상문학을 만나볼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 만나볼 수 있는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독자님들의 세상이 너무 지나치게 기괴하고 너무 오랫동안 낯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평온하고 차분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께는 그냥 잠시 이상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경험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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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착각, 올바른 미래 - AI, 챗GPT… 기술에 관한 온갖 오해와 진실
박대성 지음 / 인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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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착각, 올바른 미래 


요즘 시중에 AI, 챗GPT 등 첨단기술과 관련된 책이라면 넘쳐날 정도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기술에 관한 온갖 오해와 진실을 착각의 역사를 알면 기술이 보인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는 읽을거리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메타(Meta) 전 대외정책 부사장과 로블록스(Roblox) APAC 정책 총괄을 역임한 한국계 글로벌 기업 임원으로서 빅테크 기업에 근무하며 직접 고민하고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술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사이트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두번째 챕터의 기술에 관한 5가지 법칙에 대한 내용인 인상적이었다. 1 본능의 법칙: 인간은 기술 변화를 두려워한다. 2 비용의 법칙: 모든 기술에는 대가가 따른다. 3 경쟁의 법칙: 혁신 기술은 갈등을 부른다. 4 문화의 법칙: 기술에는 창조자의 정신이 깃든다. 5 시간의 법칙 기술의 가치는 미래에서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새로 등장하는 기술은 항상 기회이자 위협으로 간주 되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대표적인 예다. 제1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수많은 자본가를 탄생시키며 시장경제를 꽃피웠다. 그러나 증기기관을 이용한 공장생산체제의 개막은 노동 계층에겐 고난의 시작이었다. 분노는 이내 계급투쟁을 불러왔다. 투쟁의 대상은 자본가, 투쟁의 방식은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소중한 기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폭동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다. 그러나 러다이트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 정부가 폭동을 일으키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사형 등의 가혹한 벌로 다스리자 운동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 외에도 테크노 디스토피아, 위험한 AI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 로봇 때문에 기본소득을 달라는 사람들, 노인을 위한 키오스크는 없다, 전화 통화가 두려운 MZ세대, 인간이 AI를 사랑할 때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서비스는 누구에게나 편리하게 열려있어야 한다. 택시를 부르는 앱, 장을 대신 봐주는 서비스, 직접 가지 않아도 화상으로 들을 수 있는 온라인 강의 등은 이용자의 나이를 따져서는 안 된다.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로 표현되는 21세기 문해력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디지털 대전환은 불가능하다. 어르신들이 기술과 기계를 편히 다룰 수 있을 때야말로 진정한 ‘사람이 중심인 제4차 산업혁명’이 가능해진다. 아무리 사람이 기술보다 중요하다고 백날 떠들어 봐야, 하물며 기술과 기업이 나쁘다고 욕을 해도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결국 디지털 격차는 불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진다. 디지털 약자가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디지털 전환과 디지털 역량 교육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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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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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정처 없음’을 살아내고 있는 노재희 작가의 산문집이다. 여느 산문집처럼 작가의 인생이야기, 경험, 생각, 느낌, 여러 에피소드들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노재희 작가만의 특별한 감수성에 흠뻑 빠져드는 울림이 있었다. 삶과 기억, 죽음과 질병, 종교와 무신론의 문제, 글쓰기와 읽기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즐거웠다. 


그 중에서도 문자공화국이란 키워드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소리보다 문자에 반응하며 오랫동안 문자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의 시민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나도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문자공화국으로 귀화하고 싶었다. 이 공화국의 시민은 공화국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의사대로 문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이 공화국에는 국경도 없고 입국 심사 같은 것도 없다. 단지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좋아하기만 하면 이곳의 시민이 될 수 있다.


또한 책 제목이기도 한 ‘나무와 함께 정처없음’이란 챕터가 큰 여움을 남긴다. 

나무와 함께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우리랑 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나무를 키우면서도 한군데 정착하지 못했지만 이제 나무들을 땅에 심고 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여름씨 지인의 농장 이전 소식을 들었다. 나무는 어쩌고? 놀란 나의 물음에 여름씨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파서 옮겨 심으면 되지. 그럼 우리도 언젠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나무를 파서 또 어딘가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거네? 나는 좀 싱겁게 웃었다. 나무를 심는다고 정착이 되는 건 아니었구나.


노재희는 서른세 살 여름에 결핵성 뇌수막염이라는 “죽을 뻔한 병”에 걸렸다. 치사율은 50퍼센트, 정확히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살아남더라도 대부분 예후가 좋지 않아 청각 장애, 시각 장애, 인지 장애 등이 남을 수 있었던 상황. 당시 저자는 40여 일을 병상에 누워 지냈고, 20여 일간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기억 회로 전체가 꼬인 듯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이후로 그의 인생은 아프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병원에 있던 40여 일간은 “아주 커다랗고 기괴한 징검다리”였다고. 그걸 딛고 다른 세계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평소보다 체온이 1.5도 높아져서 응급실에 갔을 뿐인데, 당시 모든 일상이 중단되었다는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뇌수막염으로 인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짧고도 긴 과정을 통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색해간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도 손에 꼽는 소설인 ‘솔라리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읽은 것은 생각나지만 그 고립된 행성에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갔다는 것 말고는 소설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도 않았다는 얘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기억들은 가물가물 깜박이다 어딘가로 사라져 숨어버리거나 기억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시간에 휩쓸려 희미해지는 것 말고도 무언가가 우리 기억을 단박에 앗아 가는 일도 있다. 오래전에 읽은 책 내용이나 오래 만나지 못한 누군가의 이름 같은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을 잊기도 한다는 것은 신비롭고도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잊혀져 완전히 사라지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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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는 유니버스 - 고전 마니아가 사랑한 세기의 여주인공들
송은주 지음 / ㅁ(미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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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는 유니버스


여러 걸작들에서 만나봤던 송은주 번역가의 고전 속 여주인공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문학평론집 같은 딱딱한 느낌은 아니었고 에세이 같은 즐거운 읽을거리였다. 


개인적으로도 고전소설이라면 항상 동경하지만 일년에 한두편 읽을까 말까하는 정도다. 그런 아쉬움을 이 책을 통해 대리만족 할 수 있었고 고전 속 여덟 여주인공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볼 수 있었다. 


마담 보바리부터 제인에어, 위대한, 개츠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성과 감성 등 읽어본 소설도 있고 못 읽어본 소설도 있었지만 저자만의 해설과 의미부여, 해석들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자기 팔자를 꼬는 가난한 가정교사 제인 에어, 착실한 남편을 두고 불륜과 사치에 푹 빠진 에마 보바리,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발랄한 동생과 비교되는 재미없는 모범생 엘리너 대시우드, 몰락했음에도 허세를 부리며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블랑쉬 드보아 등 고전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고 나의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그 중에서도 제인 에어에 대한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제인에게는 도덕관념 말고도 그의 사랑에 굴복하지 않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라 해도, 그는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른 누구도 나를 보호하거나 지켜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내가 나를 염려한다. 고독할수록, 홀로일수록, 의지할 데 없을수록,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할 거야.”


그러나 제인 오스틴은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생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책이 몇 권 팔렸고 인세가 얼마나 들어왔고 판권은 얼마에 넘겼는지 등의 문제를 꼼꼼히 따졌다.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로 돈을 벌고 싶어 했고, 전문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은 여가 시간에 심심풀이로 끄적인 글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수차례 공들여 수정하고 퇴고한 글이다. 오스틴은 물려받은 재산 없이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해석도 흥미로웠다. 성공이 근면 성실함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이러한 엉뚱한 전개는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모독으로 비쳤다. 그리고 ‘자수성가한 사람’은 ‘셀프 메이드 맨’이지 ‘우먼’이 아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허스트우드가 이에 더 가깝다. 적어도 그는 사고를 치기 전까진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 고용인들의 신임을 얻고 부를 쌓았다. 그랬던 허스트우드는 뉴욕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로 전락하고, 캐리는 그를 버리고도 운이 좋아 원하는 것을 다 가진다니. 당대 독자들로서는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노력이 늘 정당한 보상을 받지는 못하며, 성공한 사람 모두가 존경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아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드라이저의 진짜 죄목은 모두가 알아도 외면해왔던 추한 진실을 덮은 포장을 걷어치워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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