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절망선생 7
쿠메타 코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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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애니화가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한을 풀었을 것인가? 그러나 (소수의) 전원이 뭔가 잘못되기를 애타게 기원하고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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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자위대 1549 1
한무라 료 지음, 아크 퍼포먼스 그림, 후쿠이 하루토시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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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떻게 봐도 그 그림체인데...? 게다가,

...볼수록 재미있네 이거... 아무튼 이런 만화 좋아해서 큰일이라니까. 근데 이 센코쿠 병사들의 헤드기어, 아무리 봐도 해골바가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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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스미스 캣츠 버스트 3
소노다 켄이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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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는 RPG를 손으로 잡아 되던지는 놈이 나오질 않나, 본편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격방법에 대해 20페이지나 늘어놓지 않나, 아무튼 총과 자동차를 그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쭉빵한 여자를 그리는 소노다 씨 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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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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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핵심은 ‘정의롭지 않은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중 가장 빠른 경제발전과 함께 가장 뛰어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국가라고 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정부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결코 그것을 묵과하지 않고 지적하고 저항하며 고쳐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이런 소리를 하면서도 남산 아래로 끌려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선인들이 남겨준 이 유산을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의 의무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하는, 더 선하고 정의로운- 문제는, [과연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소로우가 강하게 지적한 멕시코 전쟁은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이었고, 확실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묵자는 “강대국이 약한 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악이고, 약소국이 이에 저항하는 것은 정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자기보다 약한 나라들을 마구 침략하는 약소국을 정의로운 강대국이 침략해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악일까? 자신의 나라에 이민족을 끌어들인 ‘민족반역자’를 처벌하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악일까?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뱀이 하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과실을 먹으면 신과 같이 선과 악을 알 것이고...” 여기서 얼핏 느낄 수 있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짓는 능력이야말로 신의 권능이라는 사실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회라는 조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그 사회가 구성원들간의 충돌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규범이 필요하며, 사람들이 이 규범을 존중하고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는 규범에 권위가 필요했다. 그러기에 옛 시대에는 그 규범에 신의 이름을 덧씌웠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규범에 국민의 이름을 덧씌운다. 그리고 그 규범에 정의라는 이름을 덧붙여 휘황찬란한 광채로 뒤덮는다. 그런데, 그 규범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대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과 조직들 간에 복잡하게 얽힌 구성체이고, 심지어는 선과 악의 개념마저 혼동을 가져올 만큼 혼란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단순히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열리고 네 천사가 내려와 나팔을 부매 낡은 성이 무너지고 새 시대가 열린다면야 속 편하겠지만 아직까지 천년왕국은 소식이 없으니, 이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어느 쪽의 의지가 옳은가? [누가 선과 악을 정하는가?]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 그것을 독재라고 부른다. 더 많은 사람이? - 그것을 다수의 횡포라고 부른다. 나의 양심에 따라서? - 그것을 독선이라고 부른다. 소로우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했다. 그러나 그 양심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한 명의 전제군주가 결정한 정의가 자신의 것과 다르다면? 한 명의 전제군주가 결정한 정의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의 그것과 다르다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적법하게 선출된 대리인들이 결정한 정의가 자신의 것과 다르다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한 정의가 자신의 것과 다르다면? 그 전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정의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모두가 동의한 정의를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소로우는 자신의 손해를 각오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소로우는 국민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악한 일을 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돕지 않겠다고 단언하며 납세를 거부했고, 그 결과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그들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다. 이러한 모습은 백여년 뒤에 다시 한 번 나타나는데, 초강대국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여 연간 수만 톤의 폭탄을 퍼부을 때, 무하마드 알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징병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감옥으로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의를 추구함에 의해 무고한 한 명의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에도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 정의를 추구함에 의해 무고한 수십 명의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에도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 정의를 추구함에 의해 사회 전체에 손해를 끼치는 경우에도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권리로 타인에게 손해를 강요하는가? 소로우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단언했다. “한 국민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정의를 실현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경우”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인가? 그것이 언제인지를 [누가] 정하는가? 아울러 “불의한 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국가가 준비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 아닌, “투표쪽지 한 장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방법으로” 지금 당장 그것을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법이 불의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둘째치고서라도,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지금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야 할까?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있다. 여기에 불의가 있다. 불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 정의도 있다. 그런데 그 정의를 양심으로 간직하고서라도, 어째서 이렇게 저항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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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 다락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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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창조라는 꿈은 역사가 깊다. 탈로스의 청동거인, 황금의 신부, 카발라의 고렘, 연금술사의 호문클루스를 거쳐 현대의 인조인간과 로봇과 복제인간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창조신화에 뒤이은, 신성의 획득을 위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창조물의 반란이라는 공포 역시 그 역사가 깊다.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나 논의할 대상, ‘프랑켄슈타인’. 시체를 끌어모아 만들어낸 추악한 생물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섬찟할 따름이다. 그 섬찟함 안에는 자신보다 강인하고 지혜로우며 심지어는 고결하기까지 한 존재를 창조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야생동물을 몰아내 경작지를 만들고 모기를 몰아내 운하를 판 것처럼, 더 위대한 생물에게 ‘몰아내어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 공포의 원점이라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에는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많은 관점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학소설이나 미래소설이 아닌 공포물이기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나, 반대로 공포물이기에 사람들이 직시하지 않는-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공포를 눈 앞에 끄집어내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은 생명 혹은 지성의 창조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복제인간이 옳은가 그른가의 논쟁은 이미 식상할 지경이고,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공포는 사회적인 힘까지 지니고 있으며, 일부 미래학자들은 인간처럼 대화하고 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가 곧 등장하리라고 단언한다. 이런 시대에 있어 인간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 ‘프랑켄슈타인’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 ‘생명’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특별한 목적도 계획도 없이 생명을 창조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방치하며, 문제가 발생하자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살해하는 것으로 뚜껑을 덮으려 한다. 그 오만함! 자만! 자기기만! 그 무책임한 약속과 신의 없는 파기 속에는 스스로 발전하여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미연에 제거하여 언제까지나 지상의 지배자이고자 하는 인간이 지닌 추악함의 정수가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인간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생명의 창조라는 것에 손을 대야 할까? 생명의 창조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여 아이를 낳는 것은, 이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아이에게 시대를 넘겨주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의무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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