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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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책이 나오고 시끄러울 때, 나는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이름없는 책을 골라 읽었다. 나기를 타고난 반골로 태어났거늘 반정을 일으킬만큼 부지런하지 못했기에, 임금이 내려준 고기를 먹기 싫었다. 그래서 물결이 지고 풍랑이 진 다음에야 나는 내 손으로 책을 뽑아 읽었다. 아름다웠다. 이제야 나에게 책을 안겨준 내 고집을 원망하고 이제라도 나에게 책을 안겨준 운명에 감사했다.
반천년 전, 충무공은 울었다. 그러나 절제하여 울었다. '맑음, 나는 오늘 울었다.' 로만 제한된 울음이었다. 충무공의 애끓는 울음 대신 그의 칼이 노래했다. 물들일 염 한 글자로 저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겠노라 노래했다. 정치며 외교 따위에 발목 잡힌 주인의 손에서망정 나는 칼이고 칼이며 칼이라고 노래했다. 그 단순성. 그 올곧음. 진정 아름다웠다.
적보다 임금이 무서웠다. 여러 날 전투가 없었다. 적은 우리 백성들을 끌고가 부리고, 임금은 발목을 잡았다. 동풍이 일었다.
짧고 건조한 문장문장마다 오백 년이란 시간을 넘어 충무공의 눈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분노이고, 애끓음이고, 절규였다. 저 담담한 기록 속에서 충무공은 단장의 심정을 뱉어내고 있었다. 오백 년의 세월을 넘어, 나는 충무공의 마음 속을 들여다본다. 충무공은 두렵다. 패배가 두렵고 임금이 두렵고 죽음이 두렵다. 충무공=나는 슬펐다. 싸우지 못함이 슬펐고 죽어야 함이 슬펐다. 나=충무공은 분노했다. 진린이 싸우지 말라 했다. 임금은 적들을 보내주라 한다. 군을 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기에 답하였다. 나에겐 고향이 없다. 적들이 모두 죽이고 불태웠다.
나는 죽었다.
죽음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내 일을 다하고 죽었다. 임금의 칼이 아닌 내 의지로 죽었다. 죽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었다.
충무공은 그렇게 죽었다. 김훈의 글을 타고 진정한 인간으로 죽었다.
왠지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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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포트리스 1
댄 브라운 지음, 이창식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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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단 '댄 브라운' 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작품. 댄 브라운의 처녀작이라는데, 도리어 [다빈치 코드] 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점은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아쉬워해야 할까? 확실히 작품의 완성도는 높으며, 배신과 음모가 뒤섞인 전개구조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머리좋은 놈 둘이서 승부를 겨루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바보가 골인해 있다는 전개라는 점이 조금 당황스럽지도 않달 정도지만. 스릴러에 익숙하지 못하니 깊이 평가할 재주는 없지만 일단 읽었을 때 어색함이나 진부함 없이 이어진다는 점 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다만 공학도로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암호를 풀 수 있는' 위대한 컴퓨터 트랜슬러의 정체가 결국 병렬처리에 의한 단순한(?) 극초고속 연산장치일 뿐이라는 점이 조금 슬프달까. 하기사 카이사르 박스보다 더 파고들어가 '암호해독구조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중심으로 했다가는 대중소설이 아니라 코드연산학 입문서 내지는 대학 졸업논문이 되어버리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21세기걸랑요. 차라리 배경 1940년에 최강의 암호작성기 에니그마의 해독을 위한 '에니악'의 개발과 그 파괴공작에 대한 재해석 소설이었다면 내 영혼에 직격했을지 모른다(당신... 2차대전/군사과학/전쟁사 오타쿠도(度)가 너무 높아...).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 전개구조에서 이렇다 할 모순점도 찾아내지 못했고, 흘러넘치는 테크놀로지 스릴러의 기계적이고 차가운 빛에 더해 적당히 섞인 애증의 얽힘이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작품에 충분한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단 두 시간만에 두 권을 정신없이 읽어버린 작품, 그 속도감과 긴장감의 연속은 지나치게 빡빡하기는 하지만 2중 구성으로 두 장소에서 이어지는 긴박한 사건이 끝나자마자 '조국의 운명이 걸린' 대사건으로 이어지는, 강약 조절 없이 끝도 없이 질주해가는 사건의 연속이야말로 읽는 속도가 머리 회전과 호흡을 따라가지 못해 숨가빠지는 느낌을 끌어낸다. 그 정신적인 속도감을 만끽해보고 싶다면 절대로 추천한다!
...근데 번역이 상당히... 1권에서만 번역 오류가 5군데였던가. 개정판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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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르츠 바스켓 15
타카야 나츠키 지음, 정은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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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에게 안기면 동물이 되는 소마 가의 사람들. 상당히 당황스런 설정이지만 확실히 임팩트가 있다. 이건 뭐 카운셀링을 받고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괴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들. 당연히 비틀어지고 흔들리고 흐트러지고 망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혐오와 배척만으로도 무겁고 무거운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일족의 눈은 혐오건 동정이건 고통을 몇 배나 덧씌운다. 심지어는 부모마저도 괴물을 낳았다며 히스테리를 일으켜버리는 판국. 결국 그들은 자신을 감쌀 수밖에 없다.

우등생의 딱딱한 껍질로,
불량배의 고슴도치같은 가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애벌레의 고치로,
심지어는 폭군의 갑옷으로 자신을 지키는 수밖에.

그런 그들에게 태양이 나타난다.
순진하고, 솔직하고, 기꺼이 손해 보고, 억지로라도 환하게 웃는, 그런 바보스러운 태양.
한없는 믿음과 신뢰, 그러나 맹목적인 것이 아닌 의심과 거부감을 뛰어넘은ㅡ 마치 신의 것과도 같은 긍휼.
비록 아무것도 해주지 못할지라도 함께 웃는 여자. 먼저 울어주는 친구. 대신 아파하는 바보.

이쯤 되면 다른 단점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상하다. 수상하다. 믿을 수 없다. 속임수다. 상처받기 싫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그러나 어느 틈에 껍질은 벗어지고, 그녀가 있는 이상 다시는 껍질로 자신을 감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스한 햇님에 의해 외투를 벗은 여행자처럼. 짐승으로 변해야만 꼭 괴물이랴. 자신의 아픔과 약점을 단단한 껍질로 감춘 사람들은 많고도 많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기에 사람들은 단단하게 자신을 감추고, 그러기에 껍질과 가시가 부딪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겠지. 이제는 답답하다. 껍질을 벗고 싶다. 이런 태양이 단 하나만 내 곁에 있더라면 이 무거운 갑옷을 훨훨 던져버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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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슬링거 걸 Gunslinger Girl 4
아이다 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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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을 보았다. 애들 좀 그만 괴롭혀 이놈의 작가야! 뭐 본인들은 별로 안 괴로운 것 같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타격이 심각하단 말이다. 트리에라… 그레텔이었단 말이냐!(참조: 블랙 라군) 솔직히 이렇게까지 당하고 망가진 아이들을 사회복귀시키려면 머릿속을 닥닥 긁어내고 세뇌해서 기억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본다. 그렇게 살려내서 살인인형으로 쓰는 사회복지공사의 행태에는 그동안 거부감이 좀 있었지만, 트리에라를 '죽인' 놈들 같은 것들은 전기톱으로 썰어버려야 한다는 데 전면적으로 동의.
우아한 드레스에 감격하면서 가차없이 표적의 목을 꺾어버리고, 철갑탄 20발을 뒤집어쓴 반 시체 앞에서 '주인'에게 칭찬받았다고 너무나 기쁘게 웃는 사냥개들. 나는 그런 아이들이 좋다. 처음에는 P-90을 무릎쏴 자세로 긁어버리는 헨리에타의 화사한 허벅지에 반해서(사살당한다) 시작했었지만, 이제는 히르샤의 속보이는 비위맞춤에 부끄러워하는 트리에라, 들뜬 머리로 멍하니 웃는 리코, 죠제의 방에 들어갔다가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울먹이는 헨리에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베토벤 9번 환희의 송가를 노래하는 소녀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자기절제에 다시한번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이쪽 업계 사람들은 대부분 에로에로한 스토리 전개에 폭주하는 경향이 있는데다(예: 여성 동성애 총잡이물의 거장 소노다 켄이치, '정부'와 '매춘부'에 광분하는 아카히로 이토 등. 모독죄로 끌려가는 거 아닌지 몰라) 이 사람만 해도 이 순수한 그림체로 18금 게임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서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가끔씩 굉장히 농염한 표정을 그려내면서도 투명할 정도로 순수하게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이 굉장하다. 나였으면 당장에 XX하고 XY한 20금 하드고어 에로물로 돌입했을 것이다(매장된다).
제한된 수명, 제한된 기억, 제한된 세계, 제한된 의지. 그러나 그녀들은 행복하게 죽어 가리라. 이미 한 번, 너무나 고통스럽게 죽은 영혼들에게 두 번째의 고통이 없기를. 그저 행복할 뿐이었던 두 번째 삶이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끝나기를 기원한다. 죠제 따위는 울건 뒹굴건 망가지건 알 바 아니다(남녀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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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선생 네기마! 10
아카마츠 켄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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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마츠 켄의 작품은 '막나감'에 핵심을 두고 있다. 전작 [러브 인 러브]가 후반 도다이 유적 어드벤처로 밀고들어가며 작품 분위기가 폭주해버렸던 것처럼 막나가버려야 제맛인데, 그동안 엄청나게 묵직한 배경설정으로 잠시 무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학원제의 시작과 함께  세 배쯤 막나가면서 물이 오르고 있어 읽는 보람을 느끼게 하니 행복. 아스나는 벌써 반쯤 잊혀진 것 같고(나오기는 많이 나오지만 진행에 도움이 안된다), 세츠나와 코노카 커플은 야반도주 날짜만 기다리는 분위기에 그간 키워주던 노도카와 에반제린까지 구석에 처박아 둔 채 마나 누님만을 마구마구 띄워준 권이었다. 키스와 충돌신과 판치라에 집착하는 만화가다운 한 권. 무엇보다 건카타가 멋있어졌다! 누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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