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죽음 미래의 문학 9
존 크리스토퍼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사람 모두 진짜 야만인이네요. ... 아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마찬가지겠죠.(27)
여차하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을 수도 있어요. 지금 말씀하시려는 뜻이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또다시 그들을 잊고 말았어요. 그리고 앞으로 5분 뒤에는 또다시 그들을 잊어버릴 많한 또 다른 핑계를 아마 발견하게 될 거고요.(37)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어. ...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된 시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폭넓은 충성심은 문명화된 사치품일 뿐이야. 앞으로는 충성심이 이전보다 더 좁아질 것이고, 더 좁아지는 대신에 더 격렬해지겠지.(93)
우리가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어. 최소한 우리 일을 우리가 결정할 수는 있을 테니까. 더는 자국민을 속이고 괴롭히고 이용하는 국가의 묵인하에 살게 되지는 않을 거야.(103)
자비란 언제나 사치이게 마련이야. 저런 비극이 충분히 편안한 거리를 두고 벌어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극장 좌석에 앉아서 구경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 비극이 우리 집 문간에, 사실상 모든 집 문간에 닥쳤을 때에는 상황이 다르지.(265)
나를 바꿔놓은 뭔가가 있다면, 그건 피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비인격적인 뭔가야. 즉 우리가 앞으로 살 수밖에 없는 종류의 삶이라고.(289)

외딴 섬에 표류된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대표적인 서양문학 작품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들 수 있습니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그린 작품인데, 소설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신기하게도(^^;;) 합리적인 근대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대되는 소설도 있습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사고로 난파되어 무인도에 표류된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와 반대로 소년들이 고립된 섬에서 살다 문명인의 껍질을 벗고 야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하는 게 이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지금 제가 서평을 쓰고 있는 <풀의 죽음>이 두 책 중에서 어디에 가깝냐를 이야기하기 위해 두 책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풀의 죽음>은 어디에 가까울 까요? <풀의 죽음>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파리대왕>에 더 가깝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풀의 죽음>은 볏과 식물들을 죽이는 충리 바이러스가 아시아를 거쳐 영국을 습격하며 심각한 식량난이 벌어진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무능하고 폭력적인 정부의 대응,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려지며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 처 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말합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풀의 죽음>에서 문명인을 자처하던 영국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파리대왕>처럼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진 야만인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난파와 무인도에서의 삶을 통해서 야만적인 행동을 하나 마지막으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소년들에게 야만인이 된 것은 일시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이죠. 그런데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달리,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충리 바이러스는 여전히 세상을 장악하고 있고 무정부 상태의 영국에서 사람들은 원시적인 부족 상태로 돌아갔기에 <풀의 죽음>의 주인공 존 커스턴스 무리는 앞으로도 쭉 야만적인 상태를 유지한 채 살아갈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극단이 아닙니다. 영국 뉴웨이브  SF를 대표하는 작가 J. G. 발라드의 <하이라이즈>과 비교해보면 <풀의 죽음>은 양호한 편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초고층 아파트가 스스로 고립되며 벌어지는 퇴행과 야생의 드라마를 독특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문명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능을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부유층의 모습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며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굳이 따지자면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하이라이즈>의 중간에 위치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진짜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야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걸까요? 흡사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진실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같은 책을 들이댈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서로를 돕는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서 반드시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또한 이타적 본능에 대한 생물학의 이론을 이야기하며 이타적 행동이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최악의 상황에서 이기적인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야만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주류세력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모습이 하나의 행동방식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풀의 죽음>처럼 된다고 해서 반드시 <풀의 죽음> 속 주인공처럼 된다는 건 아닌거죠.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가슴에 품을 때 <풀의 죽음>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능성의 소설이 됩니다. 아주 끔찍한 소설이 아니라. 저는 이 소설을 가능성의 소설로 읽을 때 책을 조금 더 자유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의 소설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다양한 소설을 읽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년동안 다니던 독서모임을 그만두었습니다.
여기에 좀 더 자세하게 적어볼께요.
9년동안 다니던 독서모임 분들과 텔레그램으로 간혹 소통을 했습니다.
인문학 독서모임이었기 때문에 토론도 종종 하고 그래서 저에게는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었죠.
어저께는 작정하고 조금 문제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와중에 말을 주고받은 분과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당사자가 아닌 제3자분께서 갑자기 저에게 맹비난을 퍼붓더군요.
기회주의자... 음 기회주의자라...
테러를 해야한다... 음 생각이 다르면 테러를 해야하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일반적인 언어를 자기들 나름대로

변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테러라는 말도 말 그대로의 테러가 아니라 인문학적 테러,

혹은 사고의 테러라고 이해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테러라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옳은 일일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는데, 짧은 분노의 순간이 지나자 오히려

강한 헛헛함이 밀려왔습니다.
뭐하자고 9년이나 모임에 나갔을까...
내 9년동안의 시간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모임에 나간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9년이 아깝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오늘 들은 말로 생각해본다면,
'조금 아깝기는 하다'고 말하겠습니다.
나의 옳음을 주장할 때, 자신의 옳음에 취한다면

남의 말 따위는 짓밟고 그 사람을
마구 공격할 수 있겠죠.
맹신의 위험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말이 옳다고 해도 맹신하고 남을 공격한다면

그 위험성은 제어되어야만 합니다.
인문학책을 읽는 분들이 이런 당연한 애기도 이해 못하고
너무 뻔한 공격을 해서 당황했는데,
생각해보니 원래 이런 일들이 너무 뻔하고

지겹게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지겨움과 뻔함과 헛헛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의 시간만 지나면 잊어버리겠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공격해놓고 미안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는

그분의 말을 생각하면
그분은 굳이 인문학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책 안 읽어도 그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명한 선택이 가져올 혜택은 어마어마한 반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냐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11)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 폐기된다. 우리가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89~90)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91)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277)

<호모 데우스>에 대해 뭔가 쓴다는 게 두려워집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독서를 하며 떠오른 생각들을 제대로 정리를 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독 1서평 원칙을 지켜야한다는 내 마음의 강박관념이 글쓰기를 강요합니다. 강요에 따라 저는 할 수 없이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면서. 고민하다 보니 짧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게 쓰자고 하면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질 것 같아서. 그리고 아직 한 번 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만족하는 만큼의 길이를 쓸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보다 긴 글은 나중에 한 번 더 읽으면 그 때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시작해보죠. 

저에게 <호모 데우스>에 대한 느낌은,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와 비슷합니다.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유발 하라리 특유의 다양하고 상당한 양의 지식을 잘 섞어서 읽기 쉽게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게 읽다고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지식을 얻은 것 같다는 느낌도 좋습니다. 책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도 비슷합니다. 강렬하고 무언가 지적인 깨달음을 던져주는 초반부와 중반부, 뭔가 헛헛한 느낌의 후반부까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과거 해석에는 깊이 공감하며 큰 인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과거 해석이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가 미래를 이야기하며 상상력을 발휘해 미래에 대한 픽션적인 사고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들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뭔가 믿음이 안가기 시작합니다. <사피엔스> 때도 그랬고, <호모 데우스>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미래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가, 자신이 구태의연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뻔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그가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문명의 초기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룩한 계기가 허구를 창조하여 그것을 믿는 '인지혁명'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감탄했습니다. 마치 내가 어렴풋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 정리하여 설득력 있고 통찰력 있게 얘기하여 감탄했다고 할까. '농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부본도 좋았습니다. 대체적으로 다른 역사서가 '농업혁명'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면, 그는 '농업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게 좋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호모 데우스>에도 이어집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은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에 있다고 하면서, 그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은 대규모의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믿을 수 있게 만들어낸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나 국가에 대한 믿음, 민족주의나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인 것이겠죠. 저는 이번에도 그 말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습니다. '아 맞다 맞어'하고. 우리를 진정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협력을 이루어내는 능력과 그에 기반한 성과, 그 협력을 이루어내기 위해 구축된 허구들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말하기 시작하면 저는 그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호모 데우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저는 그가 인간이 기술을 이용해 불사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낼 때 '이건 뭔가'하고 이상하게 느껴습니다. 인간이 발전된 기술로 인해 죽음을 극복하고 불사를 이루어내는 게 진정 가능하다고 믿는단 말인가? 책의 뒤에 보면 유발 하라리는 불사를 진짜 불사가 아니라 수명이 많이 늘어나는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며 잠시 자신의 주장에서 물러나는 말을 합니다. 지금의 인간보다 오래 살지만 사고나 질병으로 죽을 수는 있다고.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불사입니까? 그건 지금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그가 말하는 죽음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는 기술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기술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것을 마치 확실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기술만능주의나 과학만능주의라는 이름의 믿음. 저는 그런 말들이 과학적이라거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 해석에서는 날카롭고 독창적인 해석 능력을 발휘한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말할 때는 갑자기 기술만능주의라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기반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거죠. 불사 얘기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미래에는 인간이 기술로 발전된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삶을 산다고 말하며, 비유기체적인 알고리즘이 인간을 지배하여 지금의 인간의 자리를 박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가능하다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만 있는 이야기를 확신하려면 더 많은 근거와 설득력 있는 논거가 필요할 듯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가능하다는 말은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저는 유발 하라리가 인간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에 기반해서 미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은 아주 오래되고 길게 이어진 뻔한 레파토리죠.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종교나 플라톤의 철학 같은 고대의 철학부터 이어진 이 환상은 근대의 니체 사상이나 뉴에이지 사상으로 계승되며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이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미래의 기술 발전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내놓는다고 그 뻔함과 구태의연함이 사라지나요? 차라리 인간이 신적인 존재인 '호모 데우스'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다른 말을 하면 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유발 하라리가 괜찮은 점은, 자신이 상상한 미래 세계의 모습을 비교적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래에 대한 시선이 업그레이드의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는 흥미진진하게 읽다 실망감에 느끼는 걸로 끝나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두 책에서 만족을 느끼시는 분들에 비해 제가 깐깐하고 괴팍한 독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 어쩌겠습니까. 자기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야죠. 책을 읽는 방식에도. 약간의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저는 <호모 데우스>를 덮고, 다른 책으로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다른 책은 제발 실망감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6-11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1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주겠어. 영원히.(9)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의 그림자가 된 것 같아. ... 그리고 넌 내 것이고. 황홀하군!(11)
공연장의 심장은 사람이다.(15)
당신은 무대 위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죠.
모두를 웃게 해줘요. 무엇이 잘못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곧 그 일에는 희생이 따르는 걸 알게 되죠.
모두가 당신의 영혼을 한 조각씩 원하고 있으니까.(52)
스토커 같은 관음적인 범인들은 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들은 남을 훔쳐보며 편안해진다.(89)
에드윈이 현실 파악을 못 한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케일리와 접촉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는 거죠.(152)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 성공하는 유명인이 될 수록 사람들은 점점 그의 영혼까지 앗아갈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237)

최근에 우연히 인터넷 방송을 자주 보게 됐습니다. 채팅을 치면서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고,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이가 선보이는 것들도 재미있고 해서 즐기고 있게 됐죠. 그런데 가끔씩 예상못한 악플을 쓰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어떻게 그런 독하고 나쁘고 더러운 말들을 마구 내뱉을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그렇게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함부로 말할 권리가 있다고 진짜로 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익명성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제가 그 사람이 아니니 알 수 없지만, 안타까운 건 그들에게 상호교류라는 인간 특유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언어에만 집착하는 자폐성이었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스토커도 위에서 이야기한 악플러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토킹 하는 대상이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관계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스토킹의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나 별의미 없는 행동을 했는데 오해하고 착각하면서 자신만의 망상 스토리를 써나가는 스토커는 스토킹의 대상과 상호교류를 하지 않습니다. 스토커에겐 오직 일방향의 자폐적인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만의 망상 스토리에 빠진 스토커에게 스토킹의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할 뿐. 어떻게 보면 스토커에겐 스토킹의 대상은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망상을 투여하는 '물건'일 뿐입니다. 저는 스토킹의 비극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XO>도 스토킹의 비극이 담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컨트리 가수로 유명한 케일리 타운이 최악의 스토커 에드윈 샤프에게 시달리고, 케일리 타운과 알고 지내던 행동학전문가 캐트린 댄스가 그와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국 크라임 스릴러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제프리 디버의 소설답게, 책은 곳곳에 독자들을 홀리고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고나가는 '미스디렉션'이 가득합니다.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마술을 바라보는 이들을 홀리는 기술을 가리키는 '미스디렉션'을 잘 쓰는 작가답게 제프리 디버는 독자들을 쥐고 뒤흔들다 자신만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저도 초반에 디버에게 뒤흔들리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리고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결론까지 다 읽고나니 남는 건 관계에 대한 생각이더군요.

최근의 저에게는 '재밌다', '재미없다'라는 감정보다 저 자신의 생각에 남겨진, '생각의 잉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XO>가 남긴 '생각의 잉여'는 관계에 가 닿고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이끌어냅니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의 관계에 집착하다 벌어진 스토킹 같은 비정상적인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관계의 상호성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하는가 같은. 결국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함께 산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야 자폐성에 집착하는 인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별로 특별한 건 없네요.^^;; 특별한 건 없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책이 제게 준 생각이라는 점에서 이 생각은 중요합니다. 스토킹이 아닌 쌍방향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잘 모르는 것을 그려?"
", 잘 모르는 것을 그리고 있네. 아니, 그리라는 대로 그리는 건가?"
"누가 그리라고 하는데?"
"글쎄다, 하느님인가?"(13)
너희는 모를 거야, 그 그림의 가치를. 거기에는 진리가 드러나 있어. 그 그림을 해석하면 소수란 무엇인가라는 수학계 최대의 수수께끼가 풀리고, 세기의 난문이던 리만 가설도 결론이 내려질 수 있어.(444~445)
데시마 가즈키요 씨는 <관서의 망>을 그려낸 것을 후회했어. 인간이 발을 들이밀어서는 안 될 영역이 있다고 깨달은 거야.(474)

<위험한 비너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입니다. 작가의 이름을 보는 순간, 혹시라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어온 이들이라면 뭔가가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어려운 말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 드라마틱한 전개. 네, 이 모든 것들을 <위험한 비너스>를 다 보여줍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나 문장은 없지만, 독자로 하여금 부담없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히가시노 게이고 했다'라고 해야할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별로 쓸게 없네요. '자, 끝내겠습니다'라고 하면 좋겠지만(^^;;) 너무 빨리 끝낼 수는 없어 조금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책의 스토리 전개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그림 이야기의 핵심은(스포일러 느낌이 있어서 다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 그림을 건드리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금기와 금지, 금단의 느낌이 나는 그림 이야기를 보고 있자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생각들에 관해 한 번 자세히 말해볼께요.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위험한 비너스>의 그림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금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종교나 종교와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계급적 지배질서를 구축한 전근대는 금기나 금지가 많습니다. 신의 영역을 넘본다느니,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면 벌을 받는다느니 하는 식의 말로 전근대는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무수한 금기나 금지를 남발합니다. 그건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종교나 문화적 관습에 기반한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신 중심의 사회가 아닌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는, 전근대의 금기나 금지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유전공학의 발달 같은 게 대표적이겠죠. 전근대 같았으면 신의 영역이라고 금기시됐던 생명의 영역을 건드리면서 유전공학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어나갔습니다. 점점 사라져가는 금기와 금지. 그러면서 발전해나가는 게 근대 사회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 책의 핵심에는 금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견해서는 안되는 비밀을 간직한 그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금지. 저는 이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이 책을 쓴 히가시노 게이고가 근대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근대적인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금기나 금지 같은 것을 없애는 데 가장 앞장선 가장 근대적인 학문인 이공계 출신의 작가가 전근대의 특징 중 하나인 금기에 관한 책을 쓴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생각됐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아이러니한 면이 있었습니다. 최초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쓴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근대라는 시대의 특징과 사상을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대에서 중요시여기는 논리가 중심이 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소설을 썼습니다.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이런 아이러니를 간직하고 탄생한 셈이죠. <위험한 비너스>에도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같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가장 근대적인 학문을 한 작가가 전근대적인 금기가 중심이 되는 소설을 썼으니까요.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제가 정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독서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종종 할 것을 다짐하면 이만 글을 마쳐야겠네요.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