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리라이팅 클래식 11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강대진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저절로 '기다림','인내'라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이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부터 얘기를 시작해서 등장인물들의 면면, 신화적인 배경을 거쳐서 책의 내용을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분석하고 해석한 이 책은, <일리아스>라는 작품 자체가

양이 만만치 않고 등장인물들이 많은데다 그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하고 있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다 해석과 분석을 붙인 책이기 때문에 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가장 읽기가 힘든 점은 너무나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그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작품을 따라서, 이 책도 똑같이 하면서도 저자의 해석을 붙이고 있다는 점.

이점 은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책 읽기를 힘들게 만들었다. 과거에 밀턴의 <실낙원>,

단테의 <신곡>을 힘겹지만 다 읽어낸 경험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읽

기가 힘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 꾸준히 희랍,로마의 고전 작품들을 읽어온 사람이

알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언급은 앎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앎의 즐거

움을 상쇄할 정도로 책은 기다림과 인내를 강요했고, 나는 그 강요에 따라서 꿋꿋하게 견디다

가 책 읽기를 종료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면 좋겠지만, 나는 책에서 저자가 요구하는 원전 

번역 읽기에 대한 욕망을 지울 수 없어 <일리아스> 원전 번역본 읽기에 도전하려고 생각 중이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분명 무언가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읽는 이에게 무언가를 전해준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나는 반드시 원전 번역본을 읽을 것이다. 아니 책의

내용을 따라해본다면, 나는 원전 번역본을 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장은진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이 말은 고독이라는 존재의 상태가 우리 삶에서 쉽게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고독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모두 함께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이건 책을 읽는 독자와 책을 쓰는 작가 모두 마찬가지다. 어쩌면 문학은 고독한 작가가, 자신의 고독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자신의 고독함이 담긴 '문학'이라는 편지를, 고독한 독자에게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문학이 그런 방식의 '고독의 소통'이라고 한다면 

이건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굉장히 좋은 일일 것이다. 고독한 독자는 작가가 보낸, '고독함이 담긴 편지인 문학'을 통해 나만 고독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자신의 고독을 조금 더 줄일 수 있을 것이고, 고독한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문학이라는 편지를 통해 독자와 세상을 향해 띄워 보내며 자신의 고독을 견뎌낼 수 있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내가 말하는 '고독의 소통'이 독자와 작가 간에 진짜 이루어지는가 아닌가에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타인이 아니기에, 나 아닌 타인이 

독자와 작가로서 '고독의 소통'을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읽은 나의 경험을 토대로 얘기해본다면,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고독의 소통'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나의 고독을 견딜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나에게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라는 '고독의 편지'를 보낸 작가에게 짧지만 답장을 보내고 싶다.  

 

작가여, 나는 당신이 보낸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라는 편지를 받고 나의 고독을 견뎌내는 힘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쭉 자신의 고독이 담긴 편지를 보내주기를. 나는 언제라도 당신의 편지를 받고 함께 고독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편지가 작가에게 닿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보건대 최소한 작가 옆집에는 닿을 수 있지 않을까? ^^;; 작가 옆집에만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 '고독'이라는 글자로 가득한 이상한 편지를 끝내도록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 물결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라승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 물결-투르게네프

 

 

1.

투르게네프의 손은 현실을 훑는다. 그가 현실을 훑자 현실은 물처럼 그의 몸에 

스며든다. 그는 어느순간 물같은 현실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몸에 스며 

든 현실을 원고지에다 글로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원고지에 스며든 그만의  

현실은 하나의 작품이 되어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펴는 순간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던 투르게네프만의 현실은 다시 우리의 몸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 몸에 고인 투르게네프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이렇게 투르게 

네프식 물의 흐름에 우리가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즐거운 세월 

행복한 나날이 

봄 물결처럼 

흘러가 버렸다.'(19) 

 

<봄 물결>은 투르게네프가 흘려낸 '봄 물결'이 고인 소설이다. 아름답게 화사 

하게 다가와서는 화려하게 꽃 피우고 사라져셔는 봄 뒤의 계절을 기다리게  

만드는 '봄 물결'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뒤흔든다. 소설의 주인공인 사닌은 

자신에게 찾아온 봄 물결을 견뎌내지 못하고 젬마와 사랑에 빠져든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사닌을 몰아대는 '봄 물결'의 흐름 속에서, 사닌은 그 사랑의 

마법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흐름 속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고독하고 쓸쓸한 삶의 우울한 강둑에서 그는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으로 곤두박 

질치듯 뛰어들었다. ...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거센 물결이었다. 그것은 날아가듯 

앞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날아간다.'(104) 

 

사닌은 '봄 물결'을 열심히 헤쳐가다가 다시 다른 물결을 만난다. 그는 그 물결이 

또 다른 '봄 물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물결은 그가 아는 '봄 물 

결'이 아니었다. 그 물결은 사닌의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이룩한 

'봄 물결'의 행복을 파괴하는 어둡고 강한 물의 흐름이었다. 그는 폴로조바라는 

어두운 여인의 물결을 헤매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다. 

 

'뱀이다! 아, 이 여자는 뱀이다! ...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뱀이다!'(157) 

 

몸과 마음 모두 상처받은 사닌은 간신히 어둡고 강한 물결에서 헤쳐나와 러시아 

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그는 생명력 없는 조용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30년 

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다시 과거의 '봄 물결'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닫는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물결 앞에서 다시 젊은이가 된 사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다시한번 그 사랑의 물결에 몸을 맡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플로 

렌티노가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리고 다시 사랑을 되찾은 것처럼. <세렌디피티> 

의 조나단과 사라가 7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콜레라 시대의 사랑>라는 책에 맡겨 

둔 자신들의 사랑의 인연을 다시 이어가는 것처럼.

 

 

 

 

2. 

 

 

<노자>를 보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봄 물결>

에서 물은 최고의 선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흐름이자,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의 흐름이다. 낭만적 사랑의 소용돌이이자 운명의 압력으로서의 물의 흐름

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투르게네프는, 아주 심플하고 간단한

구조 속에 그것을 구현하며 독자를 낭만적 사랑이라는 물의 흐름으로 이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 러시아 사회와 러시아인들의 삶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 

내던 투르게네프는 <봄 물결>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린 낭만의 물로 소설을 쓴 것처럼 

글 곳곳에 물의 웅덩이를 만들어서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필연적으로 독자들은  

물 웅덩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고, 헤매다 보면 어느새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그들은 깨닫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19세기의 낭만이 우리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 

을. 

 

 

 

19세기의 낭만에 젖어 있다 보면 우리는 또다른 깨달음에 도달한다. 19세기의 낭만이 

19세기만의 낭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갈망하던 우리 내면에서 솟아나는 우리의 갈 

망과 같다는 사실을. 그 순간 우리는 19세기의 낭만을 우리 자신의 낭만으로 받아들이 

게 된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뛰어 투르게네프가 전해주는 이 보편적이고 오래된 

진실 앞에서, 나는 그저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것처럼 좋아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프랑스식 서재 - 김남주 번역 에세이
김남주 지음 / 이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 프랑스식 서재-김남주

번역가는 두 세계의 교차로에 서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쭉 살아왔고 경험했고 앞으로도 살면서 경험해야 하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살아온 세계와는 다른 낯선 세계이다. 이 두 세계의 교차로에 서서 번역가는 두 세계의 마주침과 뒤섞임과 혼합을 온전히 겪어내며 그 결과물로서 두 세계가 섞인 번역물을 완성하게 된다. 그때의 번역물은 오로지 한 세계에서만 살았을 경우 가지게 되는 익숙함이라는 틀을 깨버린 결과이자, 익숙함을 희생하고 불안과 혼란스러움과의 투쟁 끝에 태어난 번역가의 창조물이다.

 

하지만 이 창조물은 안타깝게도 완벽할 수 없다.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완벽히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 세계를 품고 있는 언어를 다른 세계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완벽한 변화’라는 불가능한 꿈을 좇으며 꾸준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실패라는 운명을 안고갈 수밖에 없는 번역가의 삶이란 지속적인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 섣불리 번역가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와 연결하지 말자. 오히려 번역가의 실패가 ‘번역’이라는 영역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실패란 삶의 다른 이름이자 ‘완벽한 번역’이라는 꿈을 향한 사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낯선 문화적 산물을 번역가의 문화권에 편입시킴으로서, 번역가의 문화권을 더욱 풍요롭게 충만하게 만들고, 번역가의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낯선 문화라는 선물을 주면서 그들 또한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든다. 이 풍요로움과 충만함 속에서 번역가의 실패는 ‘문화적 성공’으로 변화한다. 번역가의 삶은 문화적 성공을 향햐여 나아가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가는 결국 성공하기 위해 실패하는 존재들이다. 아니 실패를 통해서 성공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꾸준히 성공을 위한 실패를 겪어온 한 번역자의 노고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책이다. 주로 프랑스 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해온 번역가 김남주가 번역을 하다 흘러나온 ‘옮긴이의 말’을 담아놓은 이 책은, 한 작품의 문학적 성취도나 문학적인 분석보다는 번역가 자신이 한 작품과 오롯이 마주하며 겪어낸 삶의 결들을 풀어내고 있다. 그건 문학을 삶으로 품어낸 자의 발자취이자, 문화의 뒤섞임과 마주침과 혼합이라는 혼돈의 영역을 묵묵히 걸어온 자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애정을 풀어낸 자리였다. 하여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저자에 대해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애정, 번역에 대한 애정, 번역을 위한 고투를 느끼면서 어설프게 문학을 읽어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녀가 번역한 책들로 고개를 돌려서 읽어보려고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번역에서 흘러나온 글이 다시 독서로 이끄는 경험을 하며 나는 외쳐본다. 번역은 위대하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팅커벨 꽃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27
최하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팅커벨 꽃집-최하연

 

1. 

<팅커벨 꽃집>을 읽다가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나는 이런 시집을 읽고 있는 것일까. 어쩌자고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시들이 가득한 이런 시집을 읽는 것일까.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전위니 실험이니 하는 말들 이전에, 독서 본연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을 수 없는 글을 읽는다는 것의 서글픔을 실감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저 그 ‘알 수 없음’의 영역에서 약간이라도 ‘알 수 있음’에 가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염원은 ‘알 수 없음’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알 수 없음’은 나의 희망과 염원을 짓밟고 나를 무지의 영역에 내팽개쳐 두고 떠나버렸다. 남겨진 자에게 남은 것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서글픔뿐. 해설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해설은 오히려 시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향의 시집을 다시 읽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음의 무자비한 짓밞음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나는 이런 시집들일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를 꾸준히 읽어왔고 앞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자의 서글픈 숙명이기 때문이다.

 

2. 

이런 시들을 읽는다는 건 시인의 자폐적이고 폐쇄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괴로운 건, 내가 이런 시들을 읽음으로서 나 스스로 자폐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시를 읽는 이마저 자폐적으로 만드는 시 읽기의 힘겨움. 그래도 나는 읽을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이런 시들을 읽어왔고, 앞으로 읽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음미하며 읽어나가는 이에게 서글픔이 다가오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글픔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렵다. <팅커벨 꽃집>을 읽는다는 건 서글픔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를 서글퍼하는 독자의 고통을 새삼 실감하는 자리였다. 그것은, 그 시간이 내게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의 고통을 환기시키는 삶의 흔적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 시집의 시들이 사라지면서 남긴 고통을 생생히 간직한 채 살아가리라. 그런데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이 시집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닐까. 자신만의 상처로 살아가는 시인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만의 상처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