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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운명의 집 ㅣ 쏜살 문고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미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2023-48.수많은 운명의 집-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덮으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수많은 운명의 집>에서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소위 유럽에서 벨 에포크(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 혹은 좋은 시절이란 뜻) 시대라 부르는 19세기 말부터 1차대전 전까지의 평화롭고 학문과 기술과 예술이 발달하던 시대는 2차대전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물론 1차대전의 결과로 조금씩 균열이 가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벨에포크의 흔적은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폭풍의 등장으로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벨 에포크 시대의 화신과 같은 인물로서, 그 시대 세계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온갖 다양한 인종의 인물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형성합니다, 그런 그가 여행한 도시에 대한 인상과 느낌, 겪은 일들을 기록한 글들을 모은 <수많은 운명의 집>은 당연하게도 사라진 세계의 흔적들을 보여줍니다. 오스트리아인, 독일인뿐만 아니라 헝가리인, 폴란드인, 보헤미아인(현재의 체코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들, 유대인들 같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여서 문명과 문화와 예술을 형성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흔적부터 벨 에포크의 열정이 살아 있던 프랑스, 팍스 브리타니카를 완성하고 세계 최강대국의 면모를 보여주던 영국, 발빠르게 성장해나가고 있던 뉴욕에서 느껴지는 미국의 모습들은,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사라진 조각들로 가득합니다.
1차대전이나 2차대전 같은 거대한 전쟁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반유대주의는 존재했지만 세상의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홀로코스트 같은 만행은 꿈꿀 수 없었던, 아름다운 음악과 오페라, 연극, 문학을 즐기며 독인인들에게 쾌락주의자들이라고 불리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그 예술을 만끽하며서 같이 만들어나가기도 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예측할 수 없었던, 그 세계의 소멸과 파괴를 감당할 수 없었나 봅니다. 브라질로 망명하여 히틀러가 승승장구하던 1942년과 아내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걸 보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던 이가 남긴, 사라진 세계의 편린인 <수많은 운명의 집>은 슈테판 츠바이크 특유의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기이합니다. 왜냐구요? 츠바이크가 말한 아름다움은 2차대전의 포화 속에 사라지니까요.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삶을 마칠 것이고, 그가 말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1차 대전 이후에 여러 국가로 분열하고 소국으로 쪼그라들었지만 나름의 예술적 프라이드로 버티어나가다 2차대전 이후로는 완전히 존재조차 희미한 중앙 유럽의 소국이 될 것이고, 제국에 존재했던 이들은 모두 떠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만 그들 또한 전쟁에 말려들어서 전쟁의 참화를 겪을 것이고, 그 시대 유럽인들이 만들었던 문명과 문화와 예술과 사상은 2차대전의 참화 속에 사라지니까요.
결말을 알고서 보니 너무나 슬퍼집니다. 츠바이크가 말한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파괴되어 사라진 옛 세계를 들여다보는 건 그래서 허망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감흥을 남깁니다. 사라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니까요. 사라진 것이 아름다운 건, 그게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사라진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수 없겠죠. <수많은 운명의 집>의 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사라짐과 존재함 사이에 서서, 사라짐의 아름다움을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