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조병준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되살아난 여행에 대한 그리움

 

한때는 여행을 미친듯이 그리워했다.

 

군대에서 근무를 서면서

눈앞으로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가슴이 설레었고,

파랗게 펼쳐진 바다의 풍경에 넋을 잃고

그 바다를 지나서 어딘가로 떠나기를 꿈꾸고,

경쾌한 복장으로 나서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 또한 어딘가로 떠나기를 수 없이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그때는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라는 틀 속에서

찌들어가면서

나는 어느새 여행에 대한 그리움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내가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간직한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어느새 나는 그리움을 망각한

밋밋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여행 에세이들은

내게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그 책들은 그 곳에 가면 좋겠다 혹은

거기에 가면 좋은 점이 있다 정도의

느낌만 불러 일으켰을 뿐

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는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나는 이 책과의 만남을 통해서

길로 나서서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나 자신의 영혼을 바꾸어가기 원하는

예전의 나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을 위한 여행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는

다른 여행 에세이와 다르다.

 

이 책은 여행지에 대한 소개나 감상보다는

길에서 만난 인연과

그것으로 인한 자기 영혼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 좋았다.

다른 여행 에서이처럼

여행지의 특성과 개인적 감상만

주욱 늘어놓은 식이었다면

이렇게 좋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책을 통해 만난건

인간 조병준의 영혼과

그 영혼과 교류한 다른 영혼들,

그리고 그 영혼들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영혼의 공명이었다.

 

조병준씨의 여행은 몇일 정도의 여행이나

관광 목적의 여행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을 내게 던져 주었다.

 

영혼의 울림.

그것은 그의 여행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여행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길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길들을 내가 걸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가.

얼마나 많은 길들을 결국 밟아보지 못하고 잊어버렸던가.

내가 걸어왔다고 믿은 그 길들은 정말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바로 그 길이었던가.

얼마나 많은 길에서 길을 잃었던가.

내가 갔던 그 많은 길들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은 몇이나 되는가.

왜 길에 나서면 그렇게 가슴이 뛰었던가.

길이 끝날 때마다 다시는 떠나지 못하리라는

어설픈 절망은 왜 그리도 많았던가.

가고 싶은 길은 왜 그리도 많았는가.

떠나지 못한 길은 또 왜 그리도 많아야 했는가.'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여행

 

일반적인 우리들의 여행은

일상의 틀 속에서 갇혀서

영혼의 에너지를 소진하다

어느날 새로운 활력과 힘을 얻고,

삶의 휴식과 재충천을 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그때의 여행은 정주민의 여행이다.

우리는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우리의 고정된 삶을 위해서

떠난다.

 

그러나 장기 여행자나 영혼의 구도자들이 하는 여행은

다르다.

 

그들은 떠나기 위해 떠난다.

그들은 떠나기 위해 돌아온다.

그들은 떠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떠난다.

그들은 여행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떠난다.

그들에게는 여행이 삶이고,  

일상은 여행을 위한 다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자신을 만나서

자신의 영혼을 형성한다.

 

그들은 유목민의 여행을 한다.


 

30대를 여행에 바친,

떠나기 위한 삶을 살았던

조병준의 여행은

그렇기에 유목민의 여행이었다.

 

떠나자.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나는 그들이 그립다.

외딴 곳이지만, 모르는 곳이지만

나를 반겨주고 또다른 인연을 만들어줄

그들이.

 

나는 그곳이 그립다.

낯선 매력을 풍기며

나를 놀라움과 그리움에 젖게 해줄

그곳이.

 

나의 영혼은 목말라있다.

나의 영혼은 일상성의 감옥에서

자유를 잃고 방황하다가

여행이 만들어내는 그리움에 허기를 느끼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조병준이 다시한번 일깨워준

내 영혼의 유랑끼는

내가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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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

 

이제는 빵굽는 마법사다!!

 

멀린이 아더왕을 도우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마법사라는
직업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거치고 나서
현대의 소설,영화,만화,게임을 만나서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미치광이 마법사, 여자 마법사, 깡패 같은 마법사...
그러다 드디어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빵을 굽고,
빵집을 운영하는 제빵 기술자 마법사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마법사는 웬지 사연이 있는 듯하다.
내면의 아픔을 간직한 채 인간을 멀리하고
쌀쌀맞게 구는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마법사들의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
빵굽는 마법사가 있는 빵집 위저드 베이커리.
그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빵. 그러나...

 

마법사가 만드는 빵이기에 당연히 보통 빵은 아니다.
일명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빵.
다양한 용도의 마법의 빵들이 있고,
인간들은 그 중에서 골라서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이 마법의 빵에는 피드백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남을 저주하는 빵을 선택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나중에 그 피해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실명이 되거나, 집이 불타거나, 장애인이 되거나.
아이가 유산되거나, 자신의 아이가 장애인이 되거나...
저주같은 부정적 능력만이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의 묘약과 비슷하게 누군가를 홀리는 빵에도
무서운 부작용이 있다.
내가 유혹하기를 바랬던 상대방이 그 빵을 먹고
연인에서 스토커 수준으로까지 변신해
나를 죽이거나 폭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은
현실이라는 기반위에 있다.
단순히 적을 물리치거나 사랑을 이루거나 상황의 반전을 위한
꿈 같은 마법이 아니라
초월적 마법이 사용되면 어떤 상황이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법의 빵.
그러나 그 빵은 마법이지만 그 마법의 대가로
현실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론 당사자가 견딜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일 수 있다.
이렇게 위저드 베이커리는 판타지이지만
환상보다는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화같은, 환상같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선택한 판타지

주인공 '나'의 상황은 최악이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던 경험 때문에
말을 더듬고,
아버지는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새 엄마는 부부간의 불화를 자신에게 화풀이하고,
학교에서는 친구하나 없고.
그런 최악의 상황이 더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순간
'나'는 현실을 벗어나서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지내는 걸 선택한다.
그러나 위저드 베이커리도 단지 환상의 영역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마법사를 돕는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 인간들의 비극과 어리석음,
현실의 무게감을 마주본다.
초월적인 능력을 보유한 마법사조차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힘.
마법의 빵을 먹어서 소원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한 인간으로서
성숙이란 현실과 맞부딪히며 얻어가는 경험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자신이 위저드 베이커리를 벗어나
불행의 포스를 뿜어내는 집으로 돌아가
그 상황을 마주해야만
자신이 성숙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나'가 겪은 판타지는
'나'로 하여금 현실을 선택하게 했다.
그렇다. 이 소설은 판타지이지만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동화같은 해피엔딩이나
판타지 소설의 초월적 힘의 출현보다는
현실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판타지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마법의 빵 찾기는 계속된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만이 해결할 수 있다.
환상의 영역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는 있다.
환상 속에서 원기를 충전하고, 피로를 씻고,
감동을 느끼고, 메마른 가슴을 사랑으로 채우는 식의
활동을 통해 현실로 나가기 위한 힘을 새롭게 충전할 수 있다.
환상은 우리를 위한 휴식처는 될 수 있어도
목적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마법의 빵을 찾아다니고 있다.
현실의 무게감을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아니면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렬해서
인간들은 마법의 빵을 원한다.
그것이 비록 비극을 초래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마법의 빵을 계속 원할 것이다.
그렇게 마법의 빵 찾기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계속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도 마법의 빵을 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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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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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어둠 속에서 차차차 스텝을 밟다!!

 

그의 이름은 도.완.득.
학교의 누구와도 친하지 않고, 공부보다는 싸움에 능한 아이.
세상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완득이의 근처에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의 구멍 속에서 허우적대는 형편에
아버지는 난쟁이에 춤꾼이고,
피가 섞이지 않은 삼촌은 말더듬이에
정신이 박약한 인물이다.
어머니는 한국으로 건너온 필리핀 사람으로
어릴 적에 완득이의 곁을 떠난 상황이다.

 

마냥 어두울 것 같은 완득이의 삶.
하지만 완득이의 삶은 어둡지 않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가르쳐준 차차차 스텝을 밟으며
경쾌하게 어둠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완득이의 옆에서 힘을 주는 인물이 바로 똥주다.

 

똥주, 완득이의 영원한 천적

 

소설의 첫 부분.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똥주는 완득이의 담임 선생님으로
지나친 솔직함과 거침없는 입담, 괴팍한 성정으로
스스로를 조폭 스승이라고 부른다.

 
완득이가 생활 보호 대상자라고
아이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완득이에게 값싼 애정을 잔뜩 베푸는 듯하면서도(?)
등쳐먹고,
옆 집에 살면서 시시때때로 완득이의 생활에 참견하는
똥주는 완득이의 천적이었다.

 
동시에 똥주는 단지 완득이를 못 살게 구는 존재만은 아니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자비로서 만들고,
완득이의 어머니를 찾아내어
그녀를 완득이에게로 이끌고,
집안의 어려운 일에 큰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똥주는 완득이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완득이에게 똥주는
미움의 대상이자, 스승이자, 친구이자, 조력자와 같은 
복합적인 존재가 되고,
그들의 관계는 산초와 동키호테, 셜록 홈즈와 와트슨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로 발전한다.
똥주가 베푼 애정과 관심, 노력이
상처투성이 완득이를 감싸안고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완득이>에서 똥주는
비인간적인 완득이를 사람 냄새나는
인간의 세계로 이끄는 진정한 천적이 된다.

 

절망을 향해 날리는 거침없는 하이킥!!



 

완득이의 삶은 어둡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그 삶속에서
희망을 보고 유쾌함을 이끌어낸다.

분명히 어둡고 힘든 절망의 향기가 아른거리는
현실이지만
완득이는 똥주의 도움과 다른 이들의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한다.

 

후반부에 킥복싱 선수가 되어
(한번도 이기지 못하지만^^;;)
상대방에게 킥을 날리는 건 장면은
절망을 향한 완득이의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지금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건 사실이다.
어쩌면 그런 상황때문에 절망이 우리를 덮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완득이처럼 일어설 수 있다.
아니 절망적이라면 오히려 더 힘을 내어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서 절망을 향해, 어려운 현실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희망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유쾌하고 즐겁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똥주가 없더라도
우리의 발걸음은 지속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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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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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

이스마엘 베야.
12살에 시작된 전쟁은 그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고향은 전투의 흔적으로 사라지고,
가족들은 그의 눈앞에서 시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같이 도망치던 친구들은 죽거나 실종되고,
자신은 일반 병사도 아닌
소년병이 되어
웃고 떠들고 공부해야 할 나이에
총을 들고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며
살인을 자행한다.

 

살기 위해 죽이고,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죽이고,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죽이고,
총에 맞은 친구를 위해, 이미 죽어버린 가족들을 위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죽이고...

 
살인의 일상화는 마약없이는 견뎌낼 수 없는 삶이라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점점 그는 자신을 정신적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도움의 손길은
재활이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죽음이 가득한 삶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생의 현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책은 죽음의 삶에서 빠져나온 베야가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자신의 자전적 여정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2.
전쟁은 인간사가 시작된 이래로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수많은 전쟁에서 언제나 희생되는 이들은
힘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총을 쥐고 군인이 되어 전쟁의 한복판에서 희생되거나
여성이나 노약자의 이름으로 처참한 살인을 당했다.

그 생생한 전쟁의 비극.
이 책은 너무 적나라하게 그 전쟁의 비극을 까발리고 있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스러웠기에,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현실적이었기에
강한 의지를 솟구치게 했다.

바로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지.

 

이 글을 통해 당당하게 말하겠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전쟁에 반대한다.

 

3.

아직 베야의
집으로 가는 길은 끝나지 않았다.
시에라리온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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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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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트 디즈니판 <노틀담의 꼽추>.
월트 디즈니는 법정에서 판사복을 입은채로
망치를 들고 최후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관객석에 앉아 그의 판결을 들었다.

 
'본 판사는 지금 여기서 말하겠소.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는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 콰지모도가 아니라
잘생기고 정의로운 피버스와 이루어져야 하오.
콰지모도는 단지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해야 하오.

아마 콰지모도 본인도 이 결정에 만족할꺼요.'

 

뭐라고? 오만가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에스메랄다를 성심성의껏 구해준
최고의 순진남 콰지모도가
아니라 피버스랑 이루어진다고?
그건 에스메랄다의 결정도 아니고
이 만화의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의 결정도 아니고
월트 디즈니 너희 회사가 만들어낸 결정이잖아.

 

차라리 에스메랄다가
콰지모도의 사랑을 외면하고
콰지모도가 슬퍼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게 훨씬 낫겠다.

 

뭐,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야 한다고.
돈은 벌어야 한다고.
그래, 너희들의 장사속 앞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명작도
한낱 상업적인 영화에 불과하게 되겠지.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너희들이 이 작품을 만든다고 했을 때부터
웬지 불길하더니만
이건 뭐 빅토르 위고의 명작을
완전 삼류 시나리오로 만든 것에 불과하잖아.
안 그래?
이제부터는 죽은 작가들에게 미안하지 않게
뛰어난 명작들은
너희들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지 말아라.
제발 부탁이다!!

 

2.



음, 그런데 생각해보면
뛰어난 문호인 빅토르 위고가 썼었던 원작도
한계가 있었어.

 
인간의 사랑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이 작품도 결국 외모 지상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으니까.

 
생각해 봐. 최강의 추남인 콰지모도가
사랑한 것은 아름다운 에스메랄다야.

 
진정 콰지모도가 순수하다면
정신적 교감만으로도 사랑이 가능해야지.

물론 에스메랄다의 영혼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야.

단지 사랑의 순수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콰지모도의 상대가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라는게 걸려.

 

진정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겉모습이 아름다운
에스멜라다가 아니라
이 빠진 노파와 사랑에 빠져야 하는 거야.

 
그게 더 순수한 사랑이지 않을까?

아멜리 노통은 <공격>에서
이런 생각을 실천하고 있어.

 

아멜리 노통

' 콰지모도, 그의 영혼은 더럽고 천박하다.
... 그는 이 빠진 노파와 사랑에 빠져야 마땅하다.
그래야 그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지.'

 

3.

신사숙녀 여러분!!
여기 지상 최고의 추남 에피판 오토스를 소개합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리란 걸 장담합니다!!
'그의 얼굴은 찡그림 그 자체였다.'

 
그의 벗은 몸을 보게 된다면
여드름의 불가사의를 만끽하시며
화장실로 구토하러 직행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에피판의 직업이 모델입니다.

 
네? 농담하지 말라구요?
아! 농담이 아닙니다.
에피판은 진짜 모델입니다.
그는 추한모델로
아름다운 미남미녀 곁에서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지극히 추한 것 옆에서
더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이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추한모델로 성공하는 에피판은
돈을 많이 벌어도
자신의 성적인 순결을 지킵니다.

 

그도 자기 나름대로 순결한 사랑을 꿈꾸었던
것이죠.
그 사랑의 대상은
에텔이라는 아름다운 여배우입니다.

 
그녀는 에피판이 유명하지 않던 시절에
그의 얼굴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를 인간처럼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죠.

 
그래서 에피판은 그녀를 성녀로 생각하고
유일한 사랑을 퍼붓죠.

 
자, 에피판과 에텔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아멜리 노통의 상상력은 어떤
결말을 만들었을까요?

 

4.

에피판.
그는 외모가 추한만큼이나
정신도 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만 쳐다보지
추한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추하디 추한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상황이나 성향을
끊임없는 괴변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자신의 성격을 더욱 추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네 못난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움을 필요로 해.'
'우리는 쌍둥이 남매야.
내 사랑, 우린 닮았어.
선이 악을 닮듯. 천사가 짐승을 닮듯'

 

에피판의 그런 모습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아멜리 노통식 공격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녀는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외쳐대는 내 방어막을 공격해서
그 안에 숨어있는 외모 지상주의의
흔적을 사정없이 공개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숫컷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간직한
내 안의 에피판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 공격이 성공한 것일까?
어느새 나는 내 안의 에피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역시, 너는 내 안에 있었구나.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미안, 그동안 내가 너를 인정하지 않았구나.
이제부터는 인정해 볼께.
그리고 너를 없애도록 노력해 볼께.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아멜리 노통이 내게 건네준
칼은 그녀의 소설 속에서만 사용 가능한 것이 아닐까.

 

5.

아멜리 노통은 나랑 코드가 맞는
인물인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정상적이지 않는 상황설정이
마음에 들고,
배드엔딩에 가까운 엔딩도 마음에 든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가 내게 가하는 소설을 통한 공격이 마음에 든다.

나의 방어막을 무너뜨리고
내 안의 악마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그녀의 글은 그 자체로 쾌락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나는 아마 아멜리 노통의 글을
끊지 못할 것 같다.

 마약처럼 계속 읽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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