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이! 문학의 비명 제안들 32
엘렌 식수 지음, 이혜인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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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6.아야이문학의 비명-엘런 식수

 

여러분은 엘런 식수를 읽을 수 있나요?”(p.99)

 

서평을 쓰다보니 느끼는 건데요, 제가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의 서평이 있습니다. 어렵다, 이해 안 된다, 이번에 이해 못 했으니 다음번에 또 도전해 보겠다... 번명은 아닌데 책 읽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런 식의 서평을 지속적으로 쓰는 건 제가 진짜 읽기 어려운 책들을 읽기 때문입니다. 일단 읽긴 했는데 뭘 읽었는지 모르니까 서평도 이해 안 된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네요.^^;; 아니 그러면 그런 책을 안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아니 이게 안 읽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려운 책을 읽겠다고 다짐했고 그걸 지속적으로 해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그런 책을 읽으면 서평을 안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렇긴 한데요, 서평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가 읽은 책이 어렵다고 어려운 책 서평을 쓰지 않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이런 류의 책들 서평 쓰기를 포기하면 제가 읽은 책들 일부 만 서평을 써야 하고, 그렇게 글쓰기에 제한을 두면 저는 제한된 책의 서평만 써야 하는 반쪽짜리가 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간단합니다. 이제 어려운 책을 읽어도 전과는 다른 서평을 쓰면 됩니다. 다르게 말해 어려운 책을 읽고 어렵다고 말하는 서평을 쓰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어려운 책을 읽고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요? . 어려운 책을 읽지만 어렵지 않아요. 이제 저는 이런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어요. 저한테는 이게 다 거짓말이거든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거짓말 하면서 뭔가 있는 것처럼 글을 쓸 능력도 안 되고 실력도 안 되거든요. , 고민이 되네요.

 

엘런 식수의 <아야이문학의 비명>을 다 읽고 역시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책을 어떻게 서평을 써야 하나. 다행히 저만 고민한 게 아니더군요. 일단 위에 처음으로 적은 문장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한 질문입니다. 어려운 책을 쓰기로 소문난 자크 데리다도 엘런 식수의 책을 어렵다고 말하며 저런 질문을 하더군요. 뿐만 아닙니다. 이 책 뒷부분의 옮긴이의 글을 보면 엘런 식수의 책이 왜 어려운지 나옵니다. 식수의 글이 갖는 힘은 시적 언어의 중의성과 변화무쌍함에 있을 것이다. 식수는 프랑스어뿐 아니라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표를 토대로 어휘를 비틀고, 한 단어에 무수한 의미를 녹여 낸다. 그녀을 글은 낯설고, 더욱더 재빠르다. 문장 하나하나에 문학적,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래퍼런스가 켜켜이 쌓여 있지만, 식수는 멈춰 서서 설명하는 법이 거의 없다.’(p.101) 그러니까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표를 토대로 어휘를 비틀고, 한 단어에 무수한 의미를 녹여내며,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 래퍼런스가 켜켜이 쌓인 글을 읽고 어떻게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정확한 의미에 고정되는 걸 거부하고 이해 가능성의 끝자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유동하는 엘런 식수의 문장들을 읽고 나서 제가 무슨 말을 해야할까요?

 

아 생각해보니 간단한 답이 있네요. 이런 책을 안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답이 안 됩니다. 위에도 적었듯이 저는 어려운 책을 계속해서 읽을 예정이거든요. 순환논법같지만(^^;;) 저는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어려운 책을 읽고 어려운 거에 쾌감을 느끼는 지적 변태거나 지적인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어떤 책이든지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겁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읽는 책의 범위도 제한되고 그러면 책을 읽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어쨌든 포기할 생각이 없어서 <아야이문학의 비명>을 읽긴 했는데, 읽고 나니 포기할 걸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제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런 거겠죠.^^;; 삶과 죽음의 경계와 언어의 경계가 맞닿은 지점에서 토해내는 알 수 없는 문학의 비명들이 담긴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야이!’라는 비명이 토해지는 건 제가 어려운 책을 읽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엘런 식수의 비명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있는 거지만, 저는 그냥 읽기가 어려워서 저도 모르게 내뱉은 거니까요. 엘런 식수의 글 속 분신인 아이아스가 내뱉은 비명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지는 기적의 마법. 저와 엘런 식수는 그렇게 읽기의 어려움 때문에 전혀 다른 의미의 일체화가 되었습니다. 아 적다 보니 역시 이번에도 어렵다고 한탄하는 글이 되었네요. 다음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다르게 적을 것임을 다짐해봅니다. 그런데 이거 무한 반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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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04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전정신에 화이팅을 보냅니다. 그래봤자 책인데 언젠가는 이해될 날이 오겠지요라고 우겨보고싶네요. ㅎㅎ

짜라투스트라 2023-03-05 11: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려운 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을 예정입니다. 바람돌이님 말대로 언젠가 이해될 날이 오겠죠.ㅎㅎㅎ
 
바게트 소년병
오한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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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5.바게트 소년병-오한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제가 농담을 던지는 상황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고, 듣는 상대방은 말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그 농담이 현실이 되는 거에요. 지금 들어도 말이 안 되죠?^^;; 제가 만난 오한기의 소설들이 딱 이 상황에 들어맞습니다. 말이 안 되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그게 갑자가 현실이 되면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 되는 소설들. 현실에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서 환상과 현실이 겹쳐지는 소설들. 농담 같은 소설, 소설 같은 농담. 저는 오한기의 소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한기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인 <바게트 소년병>에 나오는 소설들도 제가 생각하는 오한기 소설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작품인 바게트 소년병부터 두 번째 작품인 ‘25’. 세 번째 작품인 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까지는 현실과 가상,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소설인 사랑하는 토끼 머리에게에 오면 달라집니다. 우선 이 소설은 현실과 가상의 교차가 아닙니다. 이 소설은 환상이 현실을 잡아먹어버립니다. 현실을 장악한 환상. 저는 이런 류의 소설을 보면 언제가 카프카가 생각납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에는 현실을 장악한 환상이 가득하거든요. 이런 소설들은 환상이 가득하다보니 상징으로 가득하고 우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소설들은 환상이 많이 나오지만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작가의 개인적인 불안이나 고독 같은 심리가 환상들에 투영되어 있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이런 환상들이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져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우리 현실의 모습들이거든요.

 

 

다섯 번째 작품인 곰 사냥으로 가면 사랑하는 토끼 머리에게의 느낌을 벗어나 내가 아는 오한기 소설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펜팔세일즈맨은 오한기의 소설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점들이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바로 유머라는 장점. 저는 두 소설을 읽으며 계속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펜팔은 감옥에 있는 MB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펜팔 친구가 된다는 기상천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세일즈맨은 엉덩이에 관한 집착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네 번째 작품 빼고는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면서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오한기의 소설은 저에게 참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마지막의 대담 같은 걸 보면 오한기 작가가 최근에 유머러스하게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변화도 참 마음에 드네요. 잘 읽었다는 말을 남기며 다음에도 이렇게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유머러스한 소설들을 읽고 싶다는 말로 글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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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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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4.쇼샤-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결말을 알고 책을 읽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요? 뻔히 결말을 아는데 책이 재미있을 수가 있을까요? <쇼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배경이고 20세기 초반이 무대라면 그러면 결말이 정해진 거 아닌가. 여기 나오는 유대인들은 모두 다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거나 그전에 비참하게 죽거나 아니면 운좋게 여기를 빠져나가겠지. 읽기도 전에 저런 생각을 하니 책을 읽는 흥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읽었습니다. 제가 읽기로 결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쇼샤>는 예상밖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우선 이 소설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료나 통계자로에 나오는 단순한 희생자로서의 유대인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희생자이기 이전에,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사진 속 시체이거나 참사나 폭력의 희생자로서 물화되기 이전의 인간 그 자체로서의 모습으로서. 이들은 울고, 웃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즐거워하고, 어떤 때는 악하고, 어떤 때는 순수하고, 서로를 위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 하고, 다가오는 나치의 그림자 앞에서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서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유대인이라는 틈바구니 안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하고, 패거리를 이루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증명하려 하고, 삶을 살아나가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이들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이후에 겪는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희생자 이전에 인간으로서 살았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 얼마나 처참하게 죽는지 알기에, 이들의 삶을 이후에 다가오는 참사의 예비과정으로서 인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에 무슨 일을 겪었든, 이들에게 중요한 건 현재의 삶입니다. 현재를 사는 것, 현재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사는 것, 이것이 아직 나치가 다가오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겁니다. <쇼샤>가 보여주는 게 그겁니다. 나치 이전의 바르샤바 유대인 사회를 살았던 작가인 나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여인 쇼샤의 사랑 이야기와 그 주변 유대인들의 삶을 그려낸 <쇼샤>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게.

 

작가가 나치가 다가오기 이전에 소설을 끝내고, 에필로그에 전쟁 이후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는 건, 참사 이전에 유대인들이 인간으로서 살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건 소설의 어딘가 경쾌하고 아이러니하며 풍자적이며 지적이며 신비하며 어딘가 슬픈 분위기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학살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역사의 무게감을 부각시키는 대신에 인간 삶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유대인들도 유대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인간의 삶을 그리는 데 집중하면서 형상화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나치의 그림자를 예고하는 혐오의 만연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위협은 이들의 삶이 역사와 어쩔 수 없이 이어져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마저 뺄 수는 없었겠죠. 그 모든 것들도 삶과 이어져 있으니까요. , 분명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들도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그 속삭임 속에서 저는 명심 또 명심합니다. 역사 속 희생자들 이전에 그들의 삶이 먼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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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3-1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짜라투스트라 2023-03-13 17: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뤼시스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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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3.뤼시스-플라톤

 

글을 쓰려고 앉아 있으니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왜 이 책은 읽기 어려운가.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읽기 어렵습니다. 필연적으로 이 글은 이 책이 왜 읽기 어려운지 고찰하는 방식으로 쓸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나에게 왜 이 책은 읽기 어려운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겠죠. , 먼저 그 전에 책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우정이라고 번역되는 필리아에 대해 논의한 서양 최초의 책이라고 합니다. 에로스에서 시작해서 필리아로 옮겨가는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어떤 걸 주장하고, 주장한 그걸 자신이 반박하고, 반박한 것 자체를 다시 반박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적어놓고 보니 어렵네.^^;; 책의 내용을 대충 말했으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이 책의 형식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A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소크라테스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A라는 명제가 맞는지 대화를 나눕니다. 소크라테스는 A를 분석하며 A가 맞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다른 두 사람도 동의하죠. 이제 셋은 A가 아닌, B라는 명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소크라테스는 B라는 명제를 파고들며 B라는 명제가 틀렸음을 알아냅니다. 다음에는 C가 등장하죠. 소크라테스는 C도 맞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뒤이어 D, E도 등장하지만 모두 소크라테스의 증명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이 작품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라는 두 소년의 보호자가 등장하며 어정쩡하게 막을 내립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냐고...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 이런 식으로 말을 계속해서 논박하다가 특정한 결론 없이 파장인 아포리아로 끝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읽을 때마다 찾아오는 저 허무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을 계속해서 읽을 생각이라면, 허무함을 넘어서서 이 방식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저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질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두 번째로 이 책의 문장, 아니 말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제 이해력, 독해력이 부족한 걸까요? 분명히 한글로 적혀 있는데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문장은 이해되는 것 같은데 늘여서 파악해보면 전체적으로 이해가 안 되요.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한 주장을 반박했다가 다시 옳다고 하고, 옳다고 한 이야기를 뒤에는 다시 부정하죠. 이걸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뒤집히고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글을 읽다가 결론도 없이 막을 내리는데 이게 어떻게 이해가 되나요?

 

어쩌면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 불리는 논증의 방법을 초기 대화편을 통해서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몸으로 체화하는 것이죠. 자기 몸으로 스승의 대화술을 익힌 뒤에 그걸 바탕으로 중기 이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해나는 것이죠. 어찌 되었든 초기 대화편인 <뤼시스>는 읽기가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있나요. 읽기로 했으니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뤼시스> 읽기도 이번 한 번이 끝이 아닙니다. 꾸준히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한 번 시작했으니 포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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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4-30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하고 담백한 글에 막 웃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서재를 만들어 운영하시네요.

소크라테스의 우정은 크리톤에게 했던 마지막 부탁이 정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뤼시스론을 좀더 기대하고 있을게요.

짜라투스트라 2023-05-01 14:30   좋아요 0 | URL
감시합니다^^
 
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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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리슐리외 호텔 살인-아니타 블랙몬

 

처음에는 화자인 나의 모습에 답답함이 치밀었습니다. 아니 똑똑한 것처럼 말하던 사람이 왜 온통 당하기만 하는거야. 범인을 모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 추리소설의 관행상 초반부, 중반부에는 화자인 나가 범인을 알 수야 없지. 그런데... 범인을 모르고 제대로된 추리를 못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구. 그렇다고 왜 바보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거야. 누군가의 협박을 당했으면 그 협박에 조금 더 괜찮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협박범을 잡겠다고 혼자서 난리치다 돈만 뺐기고 위험에 처하냐구. 혼자서 무언가 하는 거 보다 다른 이를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더 괜찮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지속되는 추리의 헛발질은 알고는 있었지만 보다보니 너무 답답함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마지막에 진상이 드러나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는 셜록 홈즈가 없습니다. 홈즈 같은 명탐정이 없는 대신, 다수의 왓슨들과 레스트레이드 경감 같은 무능력한 경찰들이 있죠. 홈즈가 없고 왓슨과 레스트레이드들만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는 누군가 나서서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걸 기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대신에 무수한 추리의 헛발질과 사람들의 오류,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의심과 모두를 의심하는 경찰의 눈초리만 있죠. 하지만 무수한 오류들이 더해지며, 사람들의 헛발질과 노력이 더해지고, 거기에 우연들이 합해지며 리슐리외 호텔에서 일어난 사건은 진실이라는 햇빛으로 다가갑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로서 해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들이 맺어나가는 관계의 힘과 그 관계의 힘에서 인간들 다수의 의견이 더해지며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 비범한 한 사림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가 합쳐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 아무래도 저는 변태인가 봅니다.^^;; 이런 클래식한 정통 추리 소설에서 평법한 이들의 연대, 함께 하면 더욱 더 강해지는 관계의 힘 같은 이상한 관념들을 보니까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저를 이런 관념쪽으로 몰아가나봐요, 어쨌든 클래식한 정통 추리 소설에서는 비범한 엘리트가 주도하는 엘리트주의가 정통이고, 이런 평범한 이들의 연대로서 해결되는 구조는 이단이니까, 이 소설은 이단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재미있는 추리로설 정도로만 결론 내리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왜 <손에 손잡고>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거죠.^^;;;


*진짜 <손에 손잡고> 노래 듣고 있습니다. 노래 참 좋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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