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발소
사와무라 고스케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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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2.밤의 이발소-사와무라 고스케

이 연작 단편집은 두 번의 질적 도약을 거친다. 시작은 일반적인 의미의 추리소설로부터 시작한다. 무언가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파들어가보면 인간들이 저지르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로 구성된 사건임을 알 수 있는 추리소설. 거기서 사건들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근대적 인과론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연작 단편집은, 추리소설의 범주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목숨을 건 도약'처럼, 이 책 속의 소설들은 추리소설인 척은 하지만 추리소설이 아닌 것 같은 추리소설의 영역에 도달한다. 거기에는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등장한다. 기이하고 몽환적이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그 요소들은, 책 속의 소설들을 '추리소설의 목숨'을 걸고 추리소설이 아닌 지점으로 도약시킨다. 책을 읽는 독자는 당황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읽은 추리 소설이 아닌 추리소설이 아닌 지점으로 넘어갔다는.

마지막에 도달하면 책은 모든 것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포함시킨다. 전혀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맞추어지면서 소설은 이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세계 속에 모아진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나는 여기서 신의 그림자를 느낀다. 모든 것을 자기의 의도 속에 품고 하나로 만드는 신. 그러나 이 책은 서양작가의 책이 아니기에 '신의 그림자'는 흐릿하게 느껴지는 정도에 그친다.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일본 작가이기에 가질 수 있는 한계랄까. 일본 작가가 추리 소설이라는 서양의 문학장르를 가지고 왔는데, 추리소설에는 신의 그림자가 묻어 있기에 일본작가가 추리 소설을 쓰면서 그것이 딸려 왔다고나 할까. 이 소설에서 느껴졌던 '신의 그림자'를 '이야기 창조자'라는 단어로 바꾸면 더 정확할 것 같다. 책의 저자 사와무라 고스케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이 소설집 자체가 '이야기 창조자의 이야기 창조'를 다룬 소설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불완전한 인간이 시도하는 이야기 창조의 이야기, 이야기 창조의 추리소설 버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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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2.밤의 이발소-사와무라 고스케

총페이지:300p

읽은 기간:2021.4.28~2021.4.29

읽은 책에 대하여:

1.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무인역을 찾았다고 가정해보자. 무인역 근처 상점가는 모두 문을 닫았고, 역에는 내일까지 기차가 오지 않는다. 몸을 누일 곳이 없어 무인역에서 잘 수 밖에 없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아침에 문을 닫았던 역 근처 이발소에 불이 켜져 있다. 이발소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궁금해서 이발소로 가면 에무슨 일이 일어날까?

2.침대에서 자다가 일어나보니 자기 밑에 깔려 있던 양탄자가 사라졌다. 날으는 양탄자 꿈을 꾸면서 잤던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도대체 그 사람이 자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건가?

3. 한 아이가 찾아와 아이의 친구가 도플갱어를 만났다고 한다. 도플갱어 만난 친구가 죽을 수도 있으니 아이는 도와달라고 한다. 과연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세 가지 사건을 중세나 고대의 사고방식으로 파악해보면,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가 등장할 것이다. 신이나 천사, 악마, 요정, 괴물, 유령이 등장하는. 기이하고 신비한 사건을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이성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중요시하는, 근대의 사고방식에 따른다면, 이 세 가지 사건은 철저하게 '인과론'에 의해서 파악될 것이다.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는. 추리소설은 이런 근대 사상에서 출발한다. 신이나 천사, 악마, 요정이나 유령, 초능력이나 마법은 근대에서 탄생한 추리소설에 뛰어들 자리가 없다. 만약에 추리소설적인 상황에서 신,천사,악마,유령,마법 같은 요소가 끼어들면 그건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건 판타지나 호러 소설이 될 것이다.

<밤의 이발소>도 마찬가지다. 위에 나온 세 가지 사건들은, <밤의 이발소>에 처음으로 나온 세 가지 소설들의 사건을 적은 것이다. 말도 안 되고, 이상한 상황이지만, 추리소설 독자들은 안다. 이 사건들이 말이 되고 이해되는 상황이 되리라는 것을. 여기까지 읽으면 독특한 느낌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밤의 이발소>는 더 나아간다. 세 가지 소설 이후에 등장하는 네 가지 소설들은 무언가 비현실적이고 기이하고 몽환적인 소설의 분위기를 풍긴다. 추리소설의 요소를 도입하긴 하지만, 이 소설들은 추리 소설을 벗어나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의 소설로 나아간다. 마지막의 <에필로그>까지 가면 이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세계관 안으로 모여든다. 나는 저자가 이 소설집을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소설을 넘어서는 소설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소설 같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인 소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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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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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1.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 서평을 쓰면서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최근에 연속적으로 하나의 책에 대한 서평을 두 개 쓰는데, 처음에 쓰는 글은 책 내용을 대충 훑고, 다른 하나는 책에 대한 내 감정을 쓴다고. 그런데 <공리주의> 서평을 쓰다보니 처음에 쓴 글에 책 내용은 거의 없고 제 감정만 잔뜩 썼네요.^^;; 역시 저는 제 마음대로 어떤 형식에 관계없이 글을 쓰나봅니다. 제가 한 말에 비추어보면, 이제는 책 내용을 담은 글을 써야하는데, 제대로 될지 알 수 없네요. 그래도 어쨌든 써야 하기에 꾸역꾸역 적어 봅니다.

제가 공리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정의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전에도 다른 책에서 벤담이나 밀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단편적으론 공리주의를 알긴 했지만, 관심의 정도는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의 가장 앞 부분에 공리주의가 언급되고, 그걸 마이클 샌델이 비판하면서 저는 궁금했습니다. 공리주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벤담의 말대로 개인의 행복이 수량화가 되는지도 궁금했고. 그런데 <공리주의>를 보니, 밀은 벤담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계량화에서 이어지는 '양적 공리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벤담이 부정한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합니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우월하다면서.

적어놓고 보니 '공리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군요.^^;; '공리주의'는 쉽게 말해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연결시키는 사상입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으로. 벤담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죠. 여기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공리'입니다. 이 '공리'의 한문을 잘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공리주의'의 '공리'가 '공공이익'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한자가 다르더군요. '공리주의'의 '공리'는 '公利'가 아니라 '功利'였습니다. 한자말과 책의 내용을 써서 풀이해보면, '공리주의'의 '공리'는 '공공이익'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 ' 정도로 쓸 수 있습니다. 공리의 원어인 'utility''에도 이 뜻이 더 잘 맞는 것 같고요.

어쨌거나 벤담처럼 밀도 공리주의자로서 개인의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를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밀은 벤담처럼 수량화된 행복은 거부했습니다. 그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고, 우리가 육체적인 쾌락 보다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도적적 규범과 의무, 지적인 욕망을 더 높고 고귀한 행복의 추구와 연결시키는 듯한 이 주장은, 밀이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공리주의' 안에 품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적고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네요. 이제 제가 할 말을 하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유튜브를 보고 세상을 배우는 이 시대에 <공리주의>라는 윤리학 책을 읽는 것이 어쩌면 낡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윤리학이나 도덕철학에 대해서 논의하고 사고하는 것이 고색창연한 빛을 지니게 된다고 해서, 그 빛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건재하다면, 인간 삶의 기본적인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들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공리주의>는 그렇게 시대를 흐르면서 지속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의 한 버전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일이란, 우리 시대의 도덕적 윤리적 논의, 우리 시대의 공리주의적인 논쟁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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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4-28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1-04-28 23:05   좋아요 1 | URL
공리주의 자체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질문을 받고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일단 저는 기본적으로 공리주의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공리주의는 그냥 ‘공리주의‘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개념이고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딱 그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철학책이나 고전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알고 있지, 제 삶에는 공리주의 ‘공‘자도 등장하지 않거든요.^^

짜라투스트라 2021-04-28 23:19   좋아요 1 | URL
두 번째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공리주의자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리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공리주의자, 공리주의에 비판적인 공리주의자, 필요나 상황에 따르면 공리주의를 버릴 수 있는 공리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공리주의라는 사상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벤담 같은 경우는 행복이나 쾌락 같은 것들을 수량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게 수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벤담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밀의 경우는 더욱 복잡합니다. <공리주의>에 나오지만, 밀은 인간에 대해서 생각보다 순진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공공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저급의 쾌락과 도덕적이고 지적인 고급의 쾌락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고급의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밀이 말하는데, 인간이 밀의 주장처럼 반드시 고급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벤담에 비해 밀의 주장은 더욱 더 공감이 가는 것은 맞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1-04-28 23:20   좋아요 1 | URL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는 공리주의는 그 당시의 사상이고, 현대의 사상 체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현대의 여러 가지 학문, 제도,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맞지만, 공리주의 자체로 보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리주의는 지나간 사상이고, 현대의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는 사상처럼 보입니다. 공리주의를 이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 한다면 모르겠지만. 저에게 공리주의는 흘러간 옛 노래이고, 고색창연한 옛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옛 노래나 옛 그림에도 매력이 있기에 책을 읽으면서 그 매력을 찾으려고 노력중입니다. 여기까지가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네요. 적다보니 너무 많이 적었네요. 길게 적어서 죄송합니다.^^;; 어찌되었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1-04-29 16:37   좋아요 1 | URL
좋은 리뷰 읽은 후 그냥 가볍고 짧게 여쭤봤는데, 긴 답글 남겨주셔서, 괜히 부담만 드린 것은 아니었는지, 후회도 되고 죄송합니다. ㅠㅠ

하여튼, 정답은 없겠지만, 말씀해 주신 답글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우선, 벤덤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행복 등 질적인 가치를 양적으로 가치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사람 중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예를 들면, 돈으로 환산한 양적인 가치로 필요한 질적인 가치를 살 수 있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돈이면 다 돼!)

말씀하신 것처럼, 밀은 벤덤보다 아주 조금 나았지만, 공리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점은 안타깝습니다. (제가 안타깝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의 여성관 등 다른 사상은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공리주의 한계는 너무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은 소홀히 한다는 점입니다. 목적을 위한 과정에서 약자나 소수가 희생될 개연성이 너무 많은 사상이라고 보입니다.

결국, 전반적으로 보면, 공리주의는 자본주의와 무척 잘 어울리는 사상이라고 생각되며, 그렇기에 학교에서는 다른 사상보다 공리주의를 꼭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긴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넘 잘 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1-04-29 19:39   좋아요 1 | URL
제가 더 감사하죠^^;;
 

8331.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총페이지:216p

읽은 기간:2021.4.27~2021.4.28

읽은 책에 대하여:

해설을 보니, 이 책이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인터넷에서 서평을 찾아보니, 또 이 책이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흠... 내가 이 사람들과 똑같은 책을 읽은 게 맞은 것일까? 왜 나는 어렵지도 않고, 술술 익혔지. 이거 뭔가 이상한데...

이상함을 파고들어가보니 무언가가 나왔다. 나는 깨달았다. 그 무언가 때문에 내가 <공리주의>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구나.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이전에 읽은 책과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존재와 시간> 같은. 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렵다고 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고 해석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분명히 나는 그 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그냥 읽기만 했다. 눈 앞에서 한글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이 모여서 문단을 만들고, 문단이 모여서 책의 한 파트를 이루고, 그 파트들이 모여 하나의 책을 만들면서. 그러나 내가 파악한 것은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 정도였다. 도대체 책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내가 한글을 읽은 게 맞는데 왜 해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 해석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데 나는 왜 이 이 책을 읽는다고 앉아 있는지. 회의감도 들고, 나의 독해력의 부족함에 분노를 느꼈다. 책을 읽는 시간인데, 왜 암호해독 시간처럼 느껴지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읽기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보면 단테가 지옥문에서 이런 구절을 보는 장면이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 문장은 내가 위의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독해와 이해의 희망을 모두 버렸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 해설서라도 읽어서 내용을 대충 파악했지, 만약 해설서라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고전읽기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내가 그 책들을 읽고 느낀 무력감은 컸다. 독서의 희망을 잃게 만들고, 책읽기의 무력감을 이 정도로 강하게 들게 했다면, 그게 읽기의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단테처럼,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읽기의 지옥'을 돌파했다. 해설서라는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서. 해설서 읽기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해설서는 내가 '읽기의 지옥'을 건너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게 사실이다.

'읽기의 지옥'을 돌파한 내게 <공리주의>는 천국에 가까웠다. 일단 글을 읽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도 보였다.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나 표현도 거의 없었다. 읽을 수 있고, 이해도 되고,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게 '읽기의 천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순수이성비판>이나 <존재와 시간> 읽기에 비하면, <공리주의> 읽기는 내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존 스튜어트 밀이 '공리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 행복이었지. 비록 <공리주의>를 읽으며 내가 느낀 행복이, 전체 사회의 행복을 늘리는 것에 기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행복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이 책을 읽은 값은 충분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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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주니어 클래식 11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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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0.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강신준(4)

두 달 넘는 기간을 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두 개의 서평을 써왔습니다. 하나는 책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책에 관한 내 감정이나 느낌, 떠오르는 생각들을 쓰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책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는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그래서 두 번째 글을 쓰려고 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 생각도 안 떠오릅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면 안 쓰면 되는데, 내 원칙을 버릴 수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글을 씁니다.^^;; 쓴 걸 보니 진짜 아무렇게나 막 쓰고 있습니다. 막 쓰다가 보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오르네요. 제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때는, 제가 고전 읽기에 도전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원전을 몇 번 읽다가 도저히 못 읽어서 해설서 위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해설서로 기초체력을 쌓고, 기초체력을 쌓은 뒤에 다시 원전을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자본> 해설서 읽기도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은 다 그 시기에 읽는 책들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너무 편하게 읽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너무 편했기에 중간중간 계속 읽었고요, 읽다보니 네 번째 독서가 됐네요.

생각해보면 다시보기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일단 제 기억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읽다보면 아는 것도 나오고. 그래서 다시보기는 모른 것 같은데도 알고, 아는 것 같은데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또 다른 좋은 점으로는 지속적으로 뇌 속에 지식이 쌓인다는 점이죠. 한 번 읽으면 스쳐지나가는 지식이 되기 쉬운데, 재독,삼독,사독까지 하면 제 뇌 속에 그 책에 대한 지식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죠. 지식이 남아 있는만큼 더 알게 되고요. 그런데 분명 아는데 다시 읽으면 왜 새책 같은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책 내용에 관해서도 써야 하는데, 앞에 길게 써서 별로 쓰고 싶지 않네요. '<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자본>이 자본주의 교환과정에서 자본가들이 이득을 취하는 기적의 과정을 파헤친 책'이라고 말하는 책' 정도의 글은 쓸 수 있네요. 더 이상은 제 뇌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네요. 제 뇌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이만 쓰겠습니다. 앞으로 이 책의 오독 이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는 하지 말라고 해도 이것보다 더 길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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