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대한 저항의 대화편.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고대를 지배했던 사상 하나를 지우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젖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388.크리톤-플라톤(2)


*역시 이 글도 북플에서는 안 보인다고 해서 다시 올립니다.^^ 

 

나에게는 이 책이 하나의 책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이 책이 네 개의 분리된 책이 한 권으로 묶인 것으로 보인다. 그건 고전독서모임의 영향이 크다. 고전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천병희 번역본의 <플라톤 전집1>을 첫 책으로 선정했다. 모임 진행에서는 이 책을 한꺼번에 다 읽고 모임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네 번 나누어서 모임을 진행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따로, <크리톤> 따로, <파이돈> 따로, <향연> 따로 하는 식으로. 당연히 나는 하나의 책에 모아진 네 개의 작품들을 모임 시기에 맞추어서 다 따로따로 읽었다. 다 따로따로 읽은 탓인지, 지금 이 책을 봐도 여전히 내게는 네 개의 작품이 한 권에 모아진 느낌이 든다.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이 책을 작품마다 다 따로따로 읽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따로, <크리톤> 따로. 두 책의 인상은 과거와 달랐다. 과거에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소크라테스를 광인으로 생각했던 나는, 다시 읽으며 소크라테스에게 설득됐다. <크리톤>은 과거의 읽은 느낌과 거의 유사했다. 거의라는 말을 쓴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나는 이 책이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위험하다는 느낌은 다시 읽으면서 더 커졌다.

 

 

어떤 면에서 더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했을까? 이걸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의 가치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말하려면 '축의 시대'라는 말부터 시작해야겠다. '축의 시대'.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 말은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고안한 표현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를 일컫는 말로,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라는 말이 나온다. 예수, 부처, 공자, 노자, 묵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면서 인류사는 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되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종교와 사상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기라고도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 시기와 그 이전 시기는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일까?

 

 

4대 성인이니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 고대 그리스 철학의 탄생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축의 시기'는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르다. 그 이전 시기를 대표하는 어떤 특정한 흐름이나 조류를 알기 위해서는 고대를 다룬 역사책이나 역사 교과서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를 다룬 역사책의 앞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 중에 함무라비 법전이라는 것이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담겨 있는 주요한 정신은 무엇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응익주의.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정신. 세계사뿐만이 아니다. 한국사를 다룬 역사책을 살펴보라. 고조선 파트를 보면 8조법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8조법에 담긴 정신은 무엇일까? 바로 당한 만큼 돌려주는 응익주의이다. 세계사와 한국사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법조문이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응익주의라는 것을 알고 나면 ,고대의 주요한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흐름이 응익주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 부처 같은 이들은 달랐다. 이들은 당당하게 응익주의를 거부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부처는 자비를 주장했다. 응익주의를 거부한, 당한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의 발견, 더 나아가 그것이 어쩌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발견은 시대를 뛰어넘은 진일보한 발전이다. 이들은 그렇게 한 시대를 뛰어넘은 주장을 해왔다. 소크라테스도 예수, 부처와 함께한다. <크리톤>을 통해서.

 

 

<크리톤>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친구인 크리톤이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대화편이다. 둘은 감옥에서 대화를 나눈다. 크리톤은 죽을 위기에 처한 소크라테스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감옥에서 내보내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이 권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특유의 산파술을 이용해서 알리고, 친구를 자기 의지에 따르게 설득한다. 자기 목숨 살리려는 친구를,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설득시키는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내게 미지의 존재이지만(^^;;), 그가 크리톤에게 말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그 시대의 시대 조류에서 앞서나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국가가 자신에게 현재 불의를 저질렀다고 해서, 내가 그 불의를 똑같이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자기가 사랑하고 따랐던 국가이고, 자신에게 과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제 국가가 자신에게 불의를 저질렀다고 해서 불의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응익주의가 옳지 못하다고 말하며, 자신은 응익주의를 따를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크리톤>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흐름에서 벗어난, 시대를 앞서간 책이다. 그러나 앞서간 흐름을 주장하면서 펼쳐놓은 내용중에 독재자나 권위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 국가나 국가주의에 대한 옹호, 이미 만들어진 법률에 대한 정당화나 옹호가 들어있기에. 독재자나 권위주의자들이 그 부분만 발췌해놓고 자신들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크리톤>이 시대를 앞서간 주장을 하는 뛰어난 책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위험한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뛰어나면서도 위험한, 위험하면서도 뛰어난, 시대를 벗어나서 발전하려는 흐름과 한 시대를 고착시키려는 움직임이 공존하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책으로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8387.소크라테스의 변론-플라톤(3)


*이유는 모르겠지만 북플에서는 글이 안 보인다고 해서 다시 한번 올립니다.^^

 

 

삼독.

 

책을 처음으로 다독하던 시절만 해도,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도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았다. 마치 독서가 하나의 스쳐지나감이라는 듯이, 한 번 나를 거쳐간 책들을 나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놓아 주었다. 다시 읽는 것은 지겨움을 불러온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읽은 책이 쌓여만 가고, 책을 읽는 경험이 늘어나면서 나의 생각은 바뀐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번 읽어도 되는 책들이 있다. 시류에 영합하는 책들, 삶의 필요에 따라서 읽어야 하는 지식과 정보가 들어 있는 책들은 굳이 여러번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여러 번 읽어야 이해되는 책들도 존재한다. 너무 어려워서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책들, 처음 읽었을 때의 감정과 시간이 지나서 느낀 감정이 달라질 여지가 있는 책들은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책들은 여러번 읽음으로써 이해의 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모르는 것들을 알 수 있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도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감정의 변화 가능성이 존재하는 책들은, 여러번 읽음으로써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감정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새로운 독서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건 한 번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을 때라야 느낄 수 있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과거의 내가 알 수 없었던 독서의 즐거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세 번 읽으며 나는 왜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첫번째 읽었을 때와 세 번째 읽었을 때의 느낌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소크라테스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고전독서 모임에서도 말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소크라테스가 광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배심원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목을 쳐들고 말한다. 당신들의 삶이 틀렸다고. 당신의 생의 태도가 잘못됐다고. 아무리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그는 죽음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옳은 삶에 대한 추구 없이,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세상에 도움도 되지 않는, 죽은 듯이 사는 것보다, 그냥 죽는 게 좋다고.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은 깊숙한 잠을 영원히 자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고, 죽음 뒤에 사후 세계가 있다면, 이미 죽은 친구들을 만나고, 죽은 과거의 영웅들과 현인들을 만날 수 있는데 뭐가 나쁜 것이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한치의 망설임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함의 영역에 가닿아 있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광인의 철학이라고 할까.

 

 

그러나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조금씩 나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책을 처음 읽을 때 느꼈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낯설음을 극복했기 때문일까. 비범함의 영역에 가닿은, 광인의 철학처럼 보이던 소크라테스의 언변이 어느 순간부터는 충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의 용기와 당당함은 내가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에 설득된 것이다. 플라톤의 다른 책이나 사상 전체의 그림과 따로 떨어져서 <소크라테스의 변론>만 놓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이 왜 문제일까? 책을 삼독하면서 나는 그것이 표현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표현의 자유.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남용되어서도 안 되고, 오용되어서도 안 될 말이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말이 혐오와 증오의 자유로 이어지지 않음을, 차별과 부조리의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혐오와 증오의 자유로 남용하는 순간, 그건 표현의 폭력이 되어 말을 듣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니까. 내가 이 말을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삼독하면서 쓰게 되는 건 이유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론하면서 말하는 내용이 표현의 자유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표현의 폭력이 되지 않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머무르는 표현을 한다면,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소크라테스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대화하고 말한다. 당신이 어떤 부분에서 나보다 많이 알지만 모든 것을 다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어떤 부분에서 무지하고 잘 모르기에 전체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이 말을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특유의 대화법인 산파술을 이용하면서나는 자신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당신들은 왜 자신이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냐면서.

 

 

변론의 이 내용만 놓고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힘있고 돈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실을 알리면서 기분 나쁘게 한 것에 불과하다. 기분 나쁜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내가 기분 나쁘다고 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한 행동 자체가 죽을 범죄는 아니니까. 하지만 힘있고 돈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분 나쁘게 한 소크라테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외친다. '니가 감히 나를 기분 나쁘게 해' 라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 용서할 수 없어' 하면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고간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표현의 자유는 짓밟힌다. 권력자들의 기분을 나쁘게 한 표현의 자유는 생존 이유가 없다면서.

 

 

사실 그 당시 상황을 둘러싼 역사, 정치, 사회적 맥락을 덧입히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다. 들여다보는 렌즈에 따라 시각이 바뀌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만 들었지,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이들의 입장을 세밀하게 들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들의 입장도 세밀하고 듣고 생각해보면 분명히 지금의 내 생각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삼독하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입장만 듣고 그의 말에만 집중했다. 집중한 결과로서 소크라테스에게 설득됐다면 오늘만큼은 그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련다. 다음에 사독을 할 때는 달라진 생각으로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붕붕툐툐 2021-09-04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재독은 봤어도, 삼독은 첨 보는 거 같아요~ 대단대단~ 많이 읽는 것에만 의의를 두는 저는 짜라투스트라님의 이런 모습이 참독서인처럼 보이네요~👍

짜라투스트라 2021-09-04 22:33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걸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독서를 계속하다보니 어느새 그걸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됐습니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어서요.ㅎㅎㅎ 뭐, 독서의 방법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 붕붕툐툐님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어나가시면 됩니다. 그 독서의 길을 저도 응원하도록 할께요.^^
 

8389.동호문답-이이(2)

읽는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88.크리톤-플라톤(2)

나에게는 이 책이 하나의 책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이 책이 네 개의 분리된 책이 한 권으로 묶인 것으로 보인다. 그건 고전독서모임의 영향이 크다. 고전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천병희 번역본의 <플라톤 전집1>을 첫 책으로 선정했다. 모임 진행에서는 이 책을 한꺼번에 다 읽고 모임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네 번 나누어서 모임을 진행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따로, <크리톤> 따로, <파이돈> 따로, <향연> 따로 하는 식으로. 당연히 나는 하나의 책에 모아진 네 개의 작품들을 모임 시기에 맞추어서 다 따로따로 읽었다. 다 따로따로 읽은 탓인지, 지금 이 책을 봐도 여전히 내게는 네 개의 작품이 한 권에 모아진 느낌이 든다.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이 책을 작품마다 다 따로따로 읽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따로, <크리톤> 따로. 두 책의 인상은 과거와 달랐다. 과거에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소크라테스를 광인으로 생각했던 나는, 다시 읽으며 소크라테스에게 설득됐다. <크리톤>은 과거의 읽은 느낌과 거의 유사했다. 거의라는 말을 쓴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나는 이 책이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위험하다는 느낌은 다시 읽으면서 더 커졌다.

어떤 면에서 더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했을까? 이걸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의 가치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말하려면 '축의 시대'라는 말부터 시작해야겠다. '축의 시대'.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 말은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고안한 표현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를 일컫는 말로,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라는 말이 나온다. 예수, 부처, 공자, 노자, 묵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면서 인류사는 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되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종교와 사상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기라고도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 시기와 그 이전 시기는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일까?

4대 성인이니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 고대 그리스 철학의 탄생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축의 시기'는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르다. 그 이전 시기를 대표하는 어떤 특정한 흐름이나 조류를 알기 위해서는 고대를 다룬 역사책이나 역사 교과서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를 다룬 역사책의 앞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 중에 함무라비 법전이라는 것이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담겨 있는 주요한 정신은 무엇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응익주의.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정신. 세계사뿐만이 아니다. 한국사를 다룬 역사책을 살펴보라. 고조선 파트를 보면 8조법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8조법에 담긴 정신은 무엇일까? 바로 당한 만큼 돌려주는 응익주의이다. 세계사와 한국사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법조문이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응익주의라는 것을 알고 나면 ,고대의 주요한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흐름이 응익주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 부처 같은 이들은 달랐다. 이들은 당당하게 응익주의를 거부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부처는 자비를 주장했다. 응익주의를 거부한, 당한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의 발견, 더 나아가 그것이 어쩌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발견은 시대를 뛰어넘은 진일보한 발전이다. 이들은 그렇게 한 시대를 뛰어넘은 주장을 해왔다. 소크라테스도 예수, 부처와 함께한다. <크리톤>을 통해서.

<크리톤>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친구인 크리톤이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대화편이다. 둘은 감옥에서 대화를 나눈다. 크리톤은 죽을 위기에 처한 소크라테스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감옥에서 내보내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이 권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특유의 산파술을 이용해서 알리고, 친구를 자기 의지에 따르게 설득한다. 자기 목숨 살리려는 친구를,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설득시키는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내게 미지의 존재이지만(^^;;), 그가 크리톤에게 말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그 시대의 시대 조류에서 앞서나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국가가 자신에게 현재 불의를 저질렀다고 해서, 내가 그 불의를 똑같이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자기가 사랑하고 따랐던 국가이고, 자신에게 과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제 국가가 자신에게 불의를 저질렀다고 해서 불의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응익주의가 옳지 못하다고 말하며, 자신은 응익주의를 따를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크리톤>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흐름에서 벗어난, 시대를 앞서간 책이다. 그러나 앞서간 흐름을 주장하면서 펼쳐놓은 내용중에 독재자나 권위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 국가나 국가주의에 대한 옹호, 이미 만들어진 법률에 대한 정당화나 옹호가 들어있기에. 독재자나 권위주의자들이 그 부분만 발췌해놓고 자신들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크리톤>이 시대를 앞서간 주장을 하는 뛰어난 책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위험한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뛰어나면서도 위험한, 위험하면서도 뛰어난, 시대를 벗어나서 발전하려는 흐름과 한 시대를 고착시키려는 움직임이 공존하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책으로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9-04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21-09-04 18:22   좋아요 2 | URL
아아 그랬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