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민음의 시 101
김경후 지음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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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0.그날,말이 돌아오지 않는다-김경후

 

 

나는 분명 시를 읽었다. 분명 시를 읽었는데, 시는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시로 쓰여진 언어는, 그게 시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뭉쳐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암호해독과 같은 고투를 거쳤지만, 눈 앞에 놓인 시라는 암호는 해독이 되지 않았고, 암호해독에 실패한 나는 이 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알라딘에 들어가시 이 시집의 소개글을 읽는다. '시편들은 하나같이 언어에 저항하는 시인의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 보인다. 언어에 저항하고 있다라... 언어에 저항하고 있다면 기존에 쓰이는 언어의 사용, 용법, 맥락에 저항하여 자신만의 언어 사용법을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만의 언어 사용법이 있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개글을 더보니,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보다는 시인의 상상력과 시적 일탈을 보여주기 위한 시임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적혀 있는데, 의미전달 보다는 자기 자신의 상상력과 시적 일탈을 보여주기 위한 시가 읽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내가 이해 못했다고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집을 이해 못했고, 읽는 게 힘들고 괴로웠다. 내가 왜 이 시집을 읽어야 하는지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시집에 나오는 시들의 분위기가 어딘가 괴이하고 이상한 것도 시 읽기를 힘들게 했다.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붙을 수 있을 정도의 시들 앞에서 나는 힘들고 괴롭게 시들을 다 읽고 책을 덮었다. 책을 덮어서 다행히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그럼에도 시는 시에 불과하다. 시에 불과하기에 좌절 없이 나의 시 읽기는 지속된다. 동시에 시는 시라서 읽을 가치가 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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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557
이혜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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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3.빛의 자격을 얻어-이혜미

 

 

시집을 읽을 때마다 시는 나를 스쳐 지나간다. 내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채로. 나는 그저 내 몸에 남긴 시의 흔적을 훑을 뿐이다. 다양한 감정의 편린을 불러 일으키는 시의 흔적들은 내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마다, 시집마다 다르다. 때로 어떤 시, 시집은 내게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어떤 시, 시집은 알 수 없는 무수한 질문들을 남긴채 사라져간다. 또 어떤 시, 시집은 내가 살아가는 삶과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 외에도 시들, 시집들은 내 몸속에 자신만의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간다.

 

 

<빛의 자격을 얻어>는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이 시집을 읽었다. 분명 이 시집의 시들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 시집의 시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내게 남긴 흔적들을 뭐라고 정의하긴 어렵다. 딱 꼬집어서 뭐라고 말하긴 어려운 상태의 시들. 확실한 건 하나다. 이 시집의 시들을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 이 시집의 시들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아름답다. 이 시들이 펼쳐내는 언어들이, 시인이 시를 쓰면서 형상화한 시의 언어들이, 내게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예술적 아름다움은 어쩌면 내 삶과는 상관이 없는 예술적이고 문학적이며 시적인 아름다움일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이 말은 틀린 말 같다. 이 시들의 아름다움은 내 삶과 상관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피상적이지 않다. 이 시집의 아름다움은 시인이 창작활동의 고투를 통해 건져올린 시적인 현실의 산물이다. 시인이 구축한 시적 세계에서 이 시들은 충분히 시적인 의미에서 현실적이다. 시적인 의미에서 현실적이기 때문에, 이 시적 현실성을, 나는 시집을 읽는 독자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내 독서의 끝에서 내 현실과 시인이 구축한 시적인 현실은 만난다. 시를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이 시적인 아름다움은 내 삶의 아름다움과 하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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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편지 - 개정판 민음의 시 12
정호승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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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0.새벽편지-정호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새벽편지>를 읽고, '한 때 우리가 뜨거웠던 시간이 있었다'라고 쓴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우리에 내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로서 뜨거웠던 시간이 없었다. 나 개인의 삶에서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집합적인 우리로서 뜨거웠던 시절은 내 삶을 돌아보건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 시절은 짧았고 내세울만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로서 뜨거웠던 시절을 찾아본다. 우리로서 뜨거웠던, 그 잃어버린 시간을 <새벽편지>를 읽으며.

 

 

1987년에 초판이 나온 정호승 시인의 <새벽편지>는 내가 속하지 않는, '우리가 뜨거웠던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그 시절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자유를 부르짖었던 무수한 청춘들의 시기를 지나갔던 시인은, 지나간 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아름답고 쓸쓸하며 서정적인 시의 묶음으로 엮어낸다. 나같이 그 시절을 지나가지 않았던 사람은 시인이 엮어낸 그 시절의 삶들을 들여다보며 그 시절을 추체험해본다. 잃어버린 적도 없는데,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겪은 적도 없는데 겪은 것처럼.

 

 

나는 그 시절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그 시절의 삶을 써내려간 시를 읽는 것은, 겪지 않은 일을 겪는 가상의 경험이다. 이걸 상상력에 기반한 경험이기 때문에, 판타지라고도 바꿔쓸 수도 있다. 판타지라고 바꿔 쓰는 순간, 무언가 환상적인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새벽편지>를 읽는 건 환상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건 시대의 아픔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며, 뜨거웠던 우리로서 살아가지만 그때 '우리'들이 느끼고 받았던 고통과 슬픔과 힘겨움을 함께 지고 가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라서 행복하거나 즐거운 게 아니다. 그 시절은, 내가 겪지 않았던 '우리'들은, 뜨거웠지만 고통스러웠고, 힘겨웠지만 단호했다. 사회에 나온 시절부터 집단적인 우리로서의 열정보다는, 오직 돈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사회를 살아왔던 내게는, 그 시절 삶의 모습이 특별하고 눈물겹다.

 

 

시인을 따라, 내가 겪지 않은 그 시절을, 마치 겪었던 것처럼 겪으며,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절을 '잃어버린 시절'로서 재구성한다. 잃어버린 적도 없는데, 잃어버린 것처럼 그 시절을 재구성하며, 나는 존재한적 없는 나의 그 시절을 상상해낸다. 우리라는 '공통의 경험'을 상상하며 나는 꿈꾼다. 나가 우리가 되어 함께 뜨거워지는 순간을. 시인이 <새벽편지>를 독자에게 띄우며 실려보낸 상상력의 힘이 내게 전해져 이뤄진, 이 상상력의 마법 앞에서 나 또한 시인처럼 나만의 새벽편지를 보낸다. 내 마음속 '우리'가 되기를 꿈꾸는 가상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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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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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3.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한문이라는 낯선 타자...

 

 

제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이어지는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글을 쓰자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계속 뭔가 이어지네요. <, 만들어진 위험>의 리뷰를 쓰는 척하며 제 안에 있던 이야기를 했던 게 계속 이어지니 신기하네요.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에 홀린 듯한, 나도 모르는 어떤 에너지의 끌림에 따라서 계속 글이 써지는 듯한...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계속 써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쓰게 됐네요. <, 만들어진 위험>에서 '유일신의 공백상태'로 지냈던 제 삶을 고백하고, <신을 옹호하다>에서 제게는 너무나 낯선 '유신론'을 만난 걸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낯선 타자는 '유신론'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만났던 낯선 타자 이야기를 이 글에서 한 번 해보려합니다.

 

 

시작은 시읽기였습니다. 한때 저는 시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창비,문지,문학동네,민음사,실천문학,문예중앙에서 나온 시들을 쭈욱 읽어왔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를 끊었습니다. 마치 뭔가에 중독된 사람이 자신을 중독시킨 물질을 끊는 것처럼. 제가 왜 시를 끊었는지, 시의 ''자도 쳐다보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흐름이 흘러갔다 지나가는 것처럼, 시를 읽는 흐름이 사라져간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중독이 뭔지 아시는 분들을 아실 건데요, 사실 진짜 중독 상태가 되면 중독을 불러일으킨 물질을 끊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독자에게 중독물질을 끊는 건, 단지 잠시 중독된 물질을 멀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시를 끊은 저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예 없이 잘 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가 그리워지는 거에요. 다시 시를 읽어야겠다, 언젠가는 읽어야겠다 하는 식으로. 말은 많이했습니다. 실행은 하지 못했죠.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다가 최근에야 시집을 펼쳤습니다. , 얼마나 좋던지. 어떤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책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와 눈이 부시는 경험을 했다고 해야하나? 제가 읽은 시집에서 마법의 힘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새롭게 시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집들을 한 번 순서대로 읽어보자 식으로. 그래서 저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1번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1번 시집인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문제없이 잘 넘어갔습니다. 다음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2번 시집인 마종기 시인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펼쳤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펼칠 때부터 뭔가 불안했습니다. 글자 모양부터, 인쇄의 느낌이 확 예전 느낌이 나는 거에요. 고전적이라서 매력적인데 하는 생각으로 아무생각 없이 읽는데... 읽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제가 읽지 못하는 한문들이 눈앞에 마구 나타나기 시작한겁니다. 몇 글자가 나타난 건 괜찮았는데, 읽다보니 한문이 시야를 가득 채우더군요. 한문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도저히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군요. 추측해보건데, 저는 최근의 판본이 아니라 예전 판본을 저도 모르게 읽은 것 같습니다. 독자가 한문을 당연히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인이 써내려간 무수한 '한문의 바다'가 펼쳐지는데, '한문세대'도 아니고 한문과 친해져본 적이 없는 저는 그 한문의 바다 앞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난파선을 탄 기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의 언어라는 형태로 나타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한문이라는 타자 앞에 선 상황.

 

 

<신을 옹호하다> 리뷰에서도 썼지만, 저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을 따라서, 타자라면 제가 이해할 수 없고 낯선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타자의 정의대로라면,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나타난 무수한 한문들의 더미는 타자가 맞습니다. 타자가 맞으니,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타자와 함께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물론 타자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낯선 존재이지만, 저는 소통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으니까요. 이해도 못했고 뭘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읽었습니다. 읽었긴 했는데,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눈앞으로 종이가 스쳐 지나간 기분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글자가 보이는데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 제목이 딱 맞네요. 시집 제목에 들어간 '안 보이는' 이라는 단어처럼 저는 시집을 봤지만 안 본 것이니까요.ㅎㅎㅎ 어쨌든 봤지만 안 보이는 시를 읽은 경험을 한 저는 이 시집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문더미가 아니라 한글이 많은 시로서. 그때서야 이 시집과의 제대로 된 만남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리고 역시 타자와의 만남은 너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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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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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3.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3)

 

 

유신론과 만나다...

 

 

1.

 

칸트의 <학부들의 다툼>을 보면, 거의 끝 부분에 칸트 말년의 이상인 '영원한 평화'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노학자의 이상이었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영원한 평화'에의 제언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벼락처럼 이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마치 무언가 계시가 내려온 것처럼. 이전에도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을 읽으면서, 칸트의 '영원한 평화' 이야기를 들었고, 얼핏 관심을 가진 채 그와 관련된 책들을 몇 개 읽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내가 언제나 그렇듯(^^;;) 사그라졌고, 관심에서 멀어졌다. 벼락처럼 찾아온 생각들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던 현재의 나는 칸트와 가라타니 고진을 넘나들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세계공화국으로>,<탐구1>,<탐구2>,<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비판기 이전 저작1(1749~1755)><비판기 이전 저작2(1755~1763)>,<비판기 이전 저작3(1763~1777>...

 

 

2.

 

<탐구1>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대화란 자기 자신이랑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하는 것이라고. 이 때의 타자는 자기 자신과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대화에서의 타자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소통은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화의 가치는 더 빛난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와의 대화를 위해서는 놀라운 도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빌려 그 도약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말한다. 나의 입장에서 바꿔 말한다면, 내가 유신론자들이 쓴 책을 읽는 게 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유신론의 공백 상태에서 지내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로서의 유신론을 만났기에. 당연하게도 이를 위해서는 내 나름의 사상적 도약이 필요하고.

 

 

3.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입장 차가 있다는 것이다. 아주 맹목적인 이들도 있고, 조금 더 유연한 이들도 있고, 유신론자이지만 아주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고.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은,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테리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당연하게도 유물론자이고, 또 당연하지 않게 유신론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 유물론자에 유신론자라. 이 조합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신을 옹호하다>를 통해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모순적으로 보이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아주 소수파에 속하다는 자각을 분명히 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은, 소수파로서의 자신의 주장을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전개해나간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종 일관 유머와 유쾌함을 잃지 않은 그의 태도를 따라가다보면 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내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내가 타자와의 소통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대화를 위한 과정으로서의 웃음.

 

 

4.

 

영역의 차이. 무신론자들의 책과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내가 읽은 무신론자들의 책은 주로 과학의 영역에서 말한다. 반대로 내가 읽은 유신론자들의 책은 신학과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영역을 이용한다. 물론 고대,중세,근세,근대 초기만 해도 과학은 철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철학에서 갈라져 나와 힘을 획득한 이후로는 과학은 철학이 속한 인문학과 다른 영역처럼 느껴지게 됐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영역이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둘 다 똑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영역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식으로, 무언가 조금 어긋나 있는 느낌.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이 현대 신학의 발전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식으로.

 

 

5.

 

<신을 옹호하다>는 내가 거의 최초로 읽은 유신론 옹호 책이다. 그전에도 중세 관련 책이나 종교학,신화학, 문화사 관련 책을 읽은 적은 있다. 하지만 책 전체가 유신론 옹호에 쓰인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던 만큼 특별하고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테리 이글턴도, 다른 서양의 유신론자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풍기는 신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논리적으로 나름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지만 유신론의 공백상태로 살아온 내게는 신이 당연히 있다는 듯한 느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나 같이 평생을 신이 없이 살아온 이들을 만난적이 없었겠지. 만난 적이 없으니 그런 독자들을 상대로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아마 그들은 상상하지 못하리라. 평생에 걸쳐 신의 도 만나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상상력의 결여가 그들과 나 사이에 강력한 진입 장벽을 만든다. 그리고 그 진입장벽은 다시금 일깨운다. 그들이 나에게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타자라는 사실을.

 

 

6.

 

다시 가라타니 고진으로 돌아간다. 가라타니 고진은 나 자신과 같은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과만 대화하는 건 독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대화가 의미가 있으려면,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대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나에게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대화에 가까운 행위다. 나는 그들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신이 당연히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 도덕과 윤리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말하며, 그런 근원적 존재로서의 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듯이 말하는 걸 나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읽어도 읽어도 그 부분은 쉽게 이해가 안 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삶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이다. 신이 당연히 있는 삶을 상상해보고, 그런 사고방식을 온몸에 체화한 채 사는 삶을 상상해보면서. 이것이 완벽한 건 아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삶을 상상으로 추체험하며 그들을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대화의 의미는 대화를 완벽하게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향한 대화 참가자의 몸부림에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몸부림에서 타자를 향한 도약이 나오는 것이고. <신을 옹호하다>는 그 몸부림의 첫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니, 나는 앞으로도 종종 이 책을 읽을 것 같다. 유신론자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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