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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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진정한 외톨이 로버트 네빌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이라는 것이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개인마다, 주어진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들은

완벽한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곁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나 관계망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여기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진짜 생생한 고독을 경험하고 있다.

 

핵 전쟁 이후 발생한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흡혈귀로 변해버린 상황에 처해버린

그에게 고독은 유일한 친구였다.

 

그야말로 고독만이 친구인

진정한 외톨이.

<나는 전설이다>는 이렇게 진정한 외톨이가 되어버린

로버트 네빌의 이야기이다.

 

일상의 지옥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존재하는 것은 그의 육신을 노리는

굼주린 흡혈귀들 뿐.

 

단지 흡혈귀만 있는 것이라면

어쩌면 생에 대한 의지로

지옥같은 일상까지는 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흡혈귀의 위협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을 진정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독과

과거의 상처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다는

그 엄청난 고독이

네빌의 심신을 좀먹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과거의 상처도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병에 걸려 죽은 아내가 살아 있는 괴물이 되어

돌아오던 날 아내를 직접 죽인 기억.

딸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

그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히고, 얽어매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미쳐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일상의 지옥 속에서 로버트 네빌은

점점 광기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화는 미약한 전설, 소설은 진짜 전설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미진하다.

물론 고독한 남자의 삶이라는 주 테마가 살아있긴 하지만

고독으로 미쳐가는 한 남자의 생생한 묘사가 주인

소설에 비한다면 영화의 고독은 미약하다.

 

거기에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결말은 정말 안타깝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종종 보여주는 자기 희생과 휴머니즘의

테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의 결말은

소설이 보여주는 진정한 전설을 희석시키고

미약한 결말로 마무리짓고 있다.

 

자기희생은 재난영화나 휴머니즘적인 영화들에서,

숭고하고 헌신적이게 살았던 인물들의 삶에서

볼 수 있기에 그 정도를 가지고

네빌이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약하다.

 

스티븐 킹과 딘 쿤츠의 원조가 되는 공포소설가

매드슨은 이 점에서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네빌은 진정한 공포, 진정한 전설이 된다.

그는 최후의 생존자이자 최초의 사탄으로서,

마지막 남은 인간이자 첫 재앙으로서,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된다.

 

성경에 기록된 악마 사탄처럼,

인류가 처음 기록했던 신화나 전설처럼

그의 이름은 진정한 전설의 장이 되는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소설에서 ^^;; 죄송합니다.

스포일러는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이런 결말을 가지고 있는 소설을

그 정도의 결말로 마무리 짓는 것은

정녕 안쓰러운 모습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매니아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빼려는 영화사의 의도가 작용 했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그 점이 결국은 이 영화를

그저 그런 범작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는 소설의 정수를 빼어버린

겉만 비슷한 블록버스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좀비물의 원조 그러나 진짜 공포는 인간에게 있다!

 

이 소설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좀비 영화와

바이오 해저드나 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

스티븐 킹의 공포 소설들에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좀비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작품은 좀비나 흡혈귀보다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네빌이 처한 상황이고,

거기에서 공포가 나온다.

 

매드슨은 네빌이 미쳐가는 과정과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 안의 공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전설이 되는 시점에서

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눈과

우리가 우리와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고찰한다.

 

그러니까 매드슨이 느끼는 공포는

귀신이나 유령, 흡혈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셈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공포스럽다는 말로서 이어지고

결국은 이 한마디로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공포는 인간 그 자신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표제작인 <나는 전설이다>외에도 다른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소설도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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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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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표지

에셔의 그림.

분명히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같은 층을 계속 돌고도는 사람들.

고도의 계산을 통해 완성되는 그의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이 그림은 일상이라는 틀을 깨지 못하고

그곳에서 맴돌 수 밖에 우리의 삶을 표상하는 듯 하다.

 

책을 펼치면

최고시속 240킬로미터인 신칸센 안에

두 명의 인물이 보인다.

 

화상 도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우며 끊임없이 부를 추구하는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며

인간따위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는 탐욕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이다.

 

그의 곁에는 여자 화가 시나코가 있다.

시나코는 도다에게 속한 화가로

자신의 가능성만 믿고 발탁해준 젊은 화상을

돈 때문에 배신하고

도다에게 꼼짝 못하는 존재이다.

그녀는 자본주의 체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틀속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소시민을 상징한다.

 

작가 이사카 코타로는 그 둘의 이야기를 먼저 제시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상의 틀이란게 이렇게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에서

틀을 벗아나서 자신만의 길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들일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세상을 향해 어퍼컷을 날리는 모습,

체제를 조롱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십시오.'

 

 

 

이제 등장인물을 소개할 차례이다.

 

등장인물

 

구로사와- 달변가이자 현자에 가까운 존재.

그는 누구보다도 침착하며 자신의 지식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근데 그의 직업은 도둑

 

가와라자키- 아버지의 자살이후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가

신흥 종교에 빠진 젊은이.

신흥 종교의 교주를 진짜 신이라고 믿는 나약한 인물.

 

교코- 남편을 버리고 축구 선수 출신의 정부에게 목숨거는 여자.

무능한 남편대신 선택한 축구 선수와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녀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축구 선수의 아내를 죽이려고 한다.

직업은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카운셀러

 

도요타- 아내에게 버림받고,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집도 없이 방랑하는 실업자.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길거리에서 만난

개 한마리에게서 삶의 희망을 얻는다.

 

*도다와 시나코는 처음과 끝 부분에 한정되어 나오는 인물들.

중간중간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분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실패한 하류 인생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현명한 도둑 구로사와.

자신의 집에 도둑질하러 들어온 도둑에 대해서 

단 몇마디의 대화로 정체와 상황을 파악하고

길거리를 걷다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강도가

총을 들이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도둑은

책에 나오는 어떤 인물들보다도 뛰어난 삶의 현인이다.

 

신경질적인 카운셀러 교코.

정부의 아내가 되기 위해 살인을 서두르는 그녀는

엉성한 그녀의 정부와 함께 여러가지 실수를 저지르다

시체의 습격을 받는 상황까지 이른다.

 

의지박약아 청년 가와라자키.

신처럼 믿고 따르던 교주를 죽이라는 명령을 수행하던

그는 결국 미쳐 버린다.

 

개 때문에 의지적 인물이 된 실업자 도요타.

세상 모든 것에 버림받은 인물인 도요타는

개와 함께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점점 의지와 희망을 가진 인물이 된다.

그에게는 인간이 아닌 개가 희망이었다.

 

위의 소개처럼 따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중간중간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연관되는

장면이 보이고

마지막에 가면 거의 하나의 이야기처럼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소설적 마법이 펄쳐진다.

 

이렇듯 끝없이 연관되는 무한의 연쇄 고리 속에서

그들은 어떤 성공 스토리보다도 흥미진진한

비극, 호러, 스릴러, 코미디, 액션씬을 보여준다.

비루한 그들의 삶이 어떤 영화보다도

큰 재미와 울림을 던져주는 것이다.

 

러시 라이프

러시 라이프. 풍요로운 삶이라고 책에서 표현되는

이 단어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처음에 도다와 시나코의 이야기 다음에 나왔을 때는

이 단어가 단지 물질적 성공만을 의마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에 도요타와 개의 앞에 이 러시 라이프라는

단어가 다시 모습을 내밀 때

이 단어가 단순히 물질적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풍요로움이란 물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것일 수도 있고,

삶 자제의 여유로움일 수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움이란

물질적인 요소로만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삶의 여유가 없다면, 정신이 풍요롭지 않다면

그건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물질적 충족을 원하고

탐욕스럽게 물질을 좇는 삶은

풍요롭다기 보다는 부족하고 결핍된 삶일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이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애처롭고 비루하며 제정신이 아닌 삶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풍요로움이리라.

 

그러니 우리도 희망을 가지고 살자.

물질적으로 풍요롭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풍요로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풍요로운 삶이다.

 

작가에 대해서

 

속도감 있는 문체와 유쾌한 내용으로 대변되는

이사카 코타로는 그러나 주제에 있어서는

굉장히 무게감 있는 작가이다.

<중력 삐에로>에서는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마왕>에서는 파시즘의 문제를 해부하고,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에서는

권선징악의 비현실성을,

<오듀본의 기도>에서는 일본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바

그는 무거운 것을 가볍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희귀한 재주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주제의식보다는 가벼움에 무게를 둔

오쿠다 히데오와의 차별점이고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의 미야베 미유키같은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들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물론 칠드런 같은 작품은 오쿠다 히데오와 비슷한 패턴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도다는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시나코와 내기를 한다.

기차를 내려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풍족한 물질적 조건을 제시한 다음

그것의 대가로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받을 수 있느냐의 내기.

만약 소중한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시나코는 도다의 물건이 되고

받지 못한다면 시나코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다는 자신이 이 내기에서 질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기차에서 내린 다음에

처음 만난 사람이 실업자 도요타였다.

도다는 그에게

안정된 직장과 높은 급여를 제안하고

그가 현재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개를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한다.

 

과연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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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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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

수학.

그것은 숫자로 현실을 표현한다.

그때의 현실이란 실체적인 모습이 아닌

숫자로 나타나는 추상적인 모습이다.

 

수학에는 숫자로 표현되는 논리가 있지만

현실의 아픔이 없다.

수학에는 울고 웃는 삶이 없다.

수학에는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명체의

감정이 없다.

수학은 거칠게 부대끼는 삶의 질곡이 없다.

 

따라서 수학은 현실과 떨어져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현실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숫자의 마법이 있지만

삶의 현실적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

사랑은 추상적이기 보다는 현실적이기를 원한다.

사랑은 울고, 웃고, 싸우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현실이 있다.

사랑은 숫자처럼 명확하지 않지만

대신 그것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의 삶이 생생히

살아있다.

사랑이 현실적이지 못할 경우

그것은 짝사랑이나 스토킹같은 불완전한 아픔으로

표현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수학과 사랑의 오묘한 조화를

그리고 있다면

반대로 <용의자 X의 헌신>은

사랑이 수학화된다면 된다면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2.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수학에 웃고, 우는

수학에 미친 남자였다.

누가 뭐라해도 그는 수학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의 무게는 그를 수학자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수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수학교사가 되었다.

 

수학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 남자.

그는 희망없이 흘러가는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자신이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어있는 삶.

수학이라는 여신의 축복도 없이,

점점 죽어가던 그는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줄을 매달고 목을 메달려던

그때,

그녀가 나타난다.

 

옆집에 마침 이사왔던 그녀와 그녀의 딸.

죽음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보고

그는 수학 대신 그녀를 선택한다.

 

수학에 대한 사랑을

그녀와 그녀의 딸에 대한 사랑으로 바꾼 것이다.

 

이제 그는 수학에 마쳤던 그 모든 것을

그녀에게 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그 남자의 슬픈 사랑의 기록이다.

 

3.

이시가미의 비극은 그 사랑이

현실적이지 않다는데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어야 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아픔으로 끝나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다가가는 대신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를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비극을 초래했다.

 

자신의 사랑마저 수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했기 때문에,

그처럼 순수하게 추상적으로 사랑을 추구했기에

그는 파멸을 맞았다.

 

그의 파멸은 수학화된 사랑의 파멸이다.

아니 그것은 불균형한 사랑이 불러일으킨

사랑의 치명적 종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을 현실적으로 해야 한다.

멀리서 지켜보기보다, 필요할 때만 나타나기보다

그 혹은 그녀의 곁에 가서 자신의 사랑을 말하고

함께 울고 웃고 싸우고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이 사람과 현실을 떠나서

공중으로 뜨지 않게 끌어내려야 한다.

사랑이 삶의 무게를 가지고

우리 곁에 머물러 있게 해야 한다.

 

그게 우리 모두가 용의자 X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근데 그게 쉽게 될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시한번 나를 갖고 놀았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극한대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던 그가

이 작품에서는 엄청난 절망을 느끼게 해주었다.

역시 그래서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끊지 못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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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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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신이치는 평소와 다름없이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강도 살인 사건으로 일가족이 살해당한 그에게

산책은 일상속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과거의 악몽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음을 실감나게 해 주는 행위였다.

그날도 그는 언제나처럼 공원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버려진 여자의 오른팔과 핸드백.

그것은 그의 악몽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악몽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1.

나는 이 책을 읽는게 꺼려졌었다.

원래 2권 이상되는 책들은 읽기 싫어하는 데다가

(어이없게도 그런 이유 때문에 토지, 태백산맥, 아리랑, 혼불,

로마인 이야기같은 책들을 읽지 못하고 있다. ^^;;)

한권한권의 두께가 만만치 않았기에

읽기를 두려워하고 미루어 두었다.

그러다가 눈 딱 감고 읽어보자 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은...

 

악이 거기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즐거워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것 자체를 즐겼다.

그들은 살 수 있는 것처럼 피해자를 속이고

인형처럼 쥐고 흔들다가

죽음의 나락 속에 떨어뜨리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다른 인간들의 벌레처럼

뒹구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악에 물들어, 

자신들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2.

너무 어두웠다.

합쳐서 1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추리소설이 보여주는 트릭이나 추리보다는

살인자의 심리와

피해자의 아픔을 묘사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를

아픔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픔이었다.

죽은 자의 아픔,

죽은 자의 가족의 아픔,

살인자의 마음이 불러 일으키는

내 마음의 아픔,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느꼈을 아픔.

 

이 아픔들을 통해서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미야베 미유키는...

 

피해자 가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건 상상력이었다.

그 혹은 그녀가 어떻게 죽었을지,

그놈들이 그 혹은 그녀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혹은 그녀가 죽을 때 어떤 고통을 느꼈는지

하는 상상력이 그들을 옭아매었다.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그 혹은 그녀는 살아 있었지만 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울며 아파하며 가족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죽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피해자의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었다.

관심을 가지는 듯 하면서도 차별하는 시선,

당사자의 아픔을 몇 마디 말로 압축해 버리는 폭력.

무관심등에 의해서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3.

모방범에 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모방범이 뭐냐고?

간단하게 말해 모방범은 바로 우리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살인사건과는 관련 없을 듯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모방범이다.

 

우리는 살인사건의 피해자나 그 가족의 슬픔을 모른다.

우리는 단지 몇 마디 말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사건과 그들의 아픔을 술자리의 안주거리같은

흥미꺼리로 받아들이고 쉽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단 몇줄짜리 신문기사나

몇분짜리 TV기사로 보는 것에 불과함에도 

그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린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는 듯 하면서도

우리와는 다른 존재의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잊고

그 사건과 그들이 없는 것처렴 무관심해진다. 

 

살인사건은 누군가를 죽인다.

살인사건은 누군가의 가족과 관련자들의 마음을 죽인다.

그러나 살인사건만이 무언가를 죽이는 게 아니다.

 

바로 선량한 척 하는 우리가,

그 사건은 나와 관련없다고 여기는 우리가

 

그들을 또 한번 죽인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두 모방범이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혀도

피해자 가족의 아픔은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나갈 뿐이다.

그들에게 아픔은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나의 모방범 독서노트 중에서)

 

4.

이제 미야메 미유키의 조금 더 밝은

소설을 읽고 싶다.

어둠보다는 아픔보다는

밝음을 보고 싶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혀드립니다.

*모방범 2,3권의 포스터도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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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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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뷰

 

이런 것도 사랑인가?

-사요나라 사요나라 독서 노트 중에서

 

1.

읽고 나서 숨이 턱 막혔다.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오는 상태도 아닌,

슬퍼서 울음이 나오는 상태가 아닌,

감동해서 몸에 찌르르  전기가 오는 상태도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역시 이번에도 사랑이 문제였다.

그놈의 사랑. 빌어먹을 사랑.

너무나 아파서 발작을 불러일으키고,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먼저 죽을 사랑.

사랑 두 글자만 쓰다가 연필이 닿아버리는 사랑.

내가 부르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사랑. 

왜 너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지만 어느 순간 사랑하고 있는 사랑.

이런 사랑, 저런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다시 되돌릴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모든 것을 드러낼 수도,

같이 행복할 수도, 같이 한곳을 볼 수도 없는

그런 그들의 사랑의 노래.

 

어쩌자고 그들은 그 길로 들어서야 했던가?

그들은 그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매야 했던가?

그러니까 진짜

이런 것도 사랑인가?

 

사요나라 사요나라...

가나코이자 나쓰미이기도 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환청처럼 들려온다.

 

2.

모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와 그녀의 파멸의 전주곡이 울려 퍼진 것은

단 한 순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짓밟았다.

그들은 그녀를 유린했다.

그녀는 강간당했다.

 

그렇다. 그 순간

그와 그녀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이미 불행이 예고된 사랑이었다.

 

'나는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함께 있는 게 아니다.'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냥 한번 읽어보기를 권해드린다.

 

3.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것도 사랑인가? 에 대한 대답은

이런 것도 사랑이다 이다.

 

그래, 이런 것도 사랑이다.

이런 것도 사랑이기에

사랑이 어렵다.

이런 것도 사랑이기에

사랑은 슬프고 힘들다.

 

그래도 사랑을 한번 불러본다.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사랑을 불러본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요시다 슈이치!!

이제 그의 소설을 빠짐 없이 읽을 꺼 같은 예감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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