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 나탄 지만지 고전선집 336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지음, 윤도중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현자 나탄-고트홀트 레싱

진정한 지혜란 무엇일까요? 저같이 무지하고, 지혜롭지 못한 인간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지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 것
몇가지를 알기에 그 행동을 안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 방법을 쓰면 최소한 어리석어
보이지 않거나 나 자신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든요. 그런 지혜롭지 못한 행동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싸우는 행위인데요, 어떨때는 이 행동이 반드시 필요할 때도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싸운다면 그건 정말로 어리석은 행동이겠죠. 개인적으로 본다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이는 잦은 싸움.그런데 불행히도 인류의 역사는 집단적 싸움인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죠. 
이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가 지혜로운 길을 걸어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어찌되었든 진짜 지혜로운 이는 싸우기 전에 이기거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겠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자 나탄>의 나탄은 작품의 제목대로 진정한 현자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독교인들에게 원한을 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기독교인의 자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자식처럼 아끼며 키웁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의 방법이
나중에 이것이 종교적,정치적으로 문제가 됐을 때 그 자신의 위기를 넘기게 해줍니다.(물론
이런 것을 바라고 키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종교의 구분, 종교적
기득권과 종교와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인간을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는 나탄의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원수인 기독교도의 자식을,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은
신전기사를, 자신에게서 재산을 빼앗으려 한 술탄을, 자신에게서 불리한 정보를 얻으려 한
수사와도 대화를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줍니다. 그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포용하려는
그의 진심을 행동으로서, 영혼의 울림을 통해서 이해하고 그를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행동은 현자라는 말보다는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성인에 가까워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제목도 <현자 나탄>보다는 <성인 나탄>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물론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지혜로움을 증명한 현자 나탄. 이 희곡은 그런 그의 행동이 극의 갈등을
해소하고, 나탄 자신의 위기를 넘기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 모두가 화합하는 상태로 만들어 극을 마무리짓게 합니다. 한 사람의 지혜로움이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형태의 이상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결말. 저는 이런 결말이 어찌나 좋은지, 그 모습을 상상해도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독일 근대 희곡의 아버지 레싱은 이렇게 계몽주의와 근대의 합리적 인간관의 이상적인 모습이 실현되는 모습을 하나의 극으로서 실현시켜 보여주며 자신의 꿈을 표현한 것이겠죠. 문인들이
열어주는 이야기로서의 이상. 현실의 힘이 우리를 집어삼키며 압력을 가하는 이 시대에 이런 이상이 실현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힘들지도 모르지만 이상을 꿈꾸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상의 이야기로서 보여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꿈꿀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겠죠. 네, 그래서 저도 <현자 나탄>을 읽고 다시한번 힘을 내어보렵니다. 다시한번 꿈을 꾸어 보렵니다. 내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이지고, 내 주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꿈과 이상을.
*물론 그렇기 되기 위해서는 실천이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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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러시아 통신-요네하라 마리

지형적으로 본다면 미국보다 훨씬 가까운 나라 러시아. 하지만 우리는 지형상의 거리와
상관없이 러시아 보다 미국을 훨씬 더 가깝게 생각하고,대신 러시아를 굉장히 낯설어합니다.
미국보다 실제로 훨씬 더 가깝지만 인식적으로 훨씬 더 먼 나라인 러시아.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바로 러시아어 동시통역자이자 유쾌한 지식여행자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러시아 통신>이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 마리 여사는 제2의 고국이나 다름없는 러시아의 문화와 풍습,가치관,정세,러시아인의
삶의 모습 등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리 여사가 제2의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자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서 여러 차례 러시아를
방문하고, 다수의 러시아인들을 만난 과정에서 얻은 것으로 박제된 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지식으로서 러시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이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러시아의 생생한 모습은 마리 여사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독특한 상상력과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다가갑니다. 독자들은 그저 마음의 문을 열고 마리 여사가
입맛 좋게 요리한 러시아라는 생생하고 맛좋은 요리를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러시아는 자신의 속살을 펼쳐 보여줄 것입니다. 대처의 말대로 '러시아는 수수께끼 속 수수께끼.
그리고 또 수수께끼'이지만 우리는 그 수수께끼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리 여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수께끼를 조망할 수 있는 지형도를 그려주기 때문입니다.그녀 덕분에 
이제 러시아라는 수수께끼는 힘겹고 어두운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가능성이 가득한 하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 같은 수수께끼로 다가옵니다. 어떤 것에서도 흥미진진한 요소를 발견해서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해줘서 그것들에 흥미를 가지게 만드는 마리 여사 특유의 능력 때문에
발견한 러시아라는 미지의 이야기 보따리. 앞으로 조금 더 흥미를 가지고 그 이야기 보따리를
바라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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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쥬코 - 프랑스 희곡선 1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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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베르토 쥬코-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책을 좀 읽는다는 분들도 모르는게 어찌보면 
이상하지 않는 이 희곡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해서
읽게 되었냐구요? 정말로 어이없는 이유인데 '그냥 읽고 싶어서 한번 읽어봤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며칠 전부터 희곡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희곡을 찾아서 읽고
있는데, 이 작품은 어쩌다 보니 제 레이더망에 걸려서 읽게 된 책이랍니다.
(사실은 책이 얇다는게 가장 큰 이유겠죠.^^) 어쩌다 보니 읽게 되었고, 어찌어찌 책을 넘기다
보니 다 읽게 된 작품인데, 읽고 나서의 제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전주의적 작품도 아니고,낭만주의극도 아니고,부조리극도 아니어서 뭐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극이며, 분명히 연속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자의 이야기인데, 이 살인자가 광기와 정상을
왔다갔다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때로는 사람을
돕기도 하는 걸 보니 여러모로 혼란스럽고,거기다 극에 나오는 인물 대다수가 어딘지 모르게
소외되고 외로운 인물들로서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소외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었습니다.책을 읽고서 반드시 무언가의 정의를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하나의 광기일까요?) 그래도 이렇게 혼란스러우니 당혹감을 금할 수 없더군요.

뒤의 해설을 보니 이 희곡은 부조리극 이후에 유행한 일상극과도 다르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 극은 베르나르-마리 콜테스가 만들어낸 자신만의 극인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잘 모르는 작가가 이미 자신만의 극 양식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정말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일도 많고, 작가가 많은 걸 다시한번 실감했습니다. 감히 좁은 소견과 식견으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만 벼도 되지 못한 쭉정이에 가까운 저같은 인간은 먼저
벼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어쨌든 콜테스는 확고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극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독서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독서가 이런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저는 저만의 의미를 찾는 독서 여정에 나섰습니다. 하나의 책에서 의미를 찾는
저만의 여정은 콜테스가 등장인물들이나 사건에 대해 일체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머물렀습니다. 콜테스는 어떤 철학적,윤리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어떤 사건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수 없이 많은 정보와 마주하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게 되는 현대의 우리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정보량과 잦은 정보들과의 접촉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이 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고 해서 우리의 고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와 스마트 폰과 인터넷과 블로그와 포탈 사이트를 열심히 활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욱 더 고독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수 없이 많은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기술의 발달로 더욱 더 빠른 의사소통이
강해졌지만 그만큼이나 직접적인 감정의 교류는 멀어진 사회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자신만의 
성에 빠져 첨단 기술 문명이 만든 기계에만 집착하는 셈이지요. 군중 속의 고독, 정보화 시대의
소외, 눈에 보이는 벽은 없지만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 견고해져만 가는 인간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 가속화되는 개인화가 부른 인간 개인의 파편화. 콜테스가 보여주는 건 그런
인간들의 우울하고 고독한 초상이었습니다.
 

결국 살인자 로베르토 쥬코는 죽습니다. 초반부터 예정된 죽음이었던만큼 그의 죽음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지만 책 속의 외로운 등장인물들은 계속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쥬코의 죽음은 정의나 도덕,윤리의 승리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외로움의 지속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형사,늙은 신사,우아한 부인,여자아이,여자아이의 오빠와 언니는 쥬코가 죽는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죽음과 무관하게 자신의 외로움에 빠져서 계속해서 대화를 가장한 독백을 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 극의 엔딩은 진정한 비극의 서막처럼 느껴집니다. 죽음마저 아무 것도 아닌 사회, 죽음이 너무 흔한 사회, 죽음이 다른 이들의 외로움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사회. 생과 사의 교차점인 삶에서 이런 잔혹한 비극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주 겪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전혀 비극적이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로베르토 쥬코>를 읽고 나니 슬퍼집니다. 에이즈로 죽음을 앞둔 작가는 무엇 때문에 실제 살인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런 작품을 쓴 것일까요? 혹시 죽어가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서 우리에게 우리 삶의 무언가를 경고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요? 작가가 보기에 연속 살인 조차 우리 삶의 외로움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치 못할 정도로 우리의 외로움과 소외는 깊었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진짜 비극은 작품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삶에 있는 것이겠죠. 어쩌면 작가는 무언의 메시지로 '인생보다 더한 비극은 없다'고 외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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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앙 시선 지만지 고전선집 490
진자앙 지음, 송용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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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자앙 시선-진자앙 

점점 멀어져 가는 청운의 꿈, 실현될 가망조차 없는 이상, 무절제와 비리와 폭력,살인,비방과
고발,무능력한 통치와 흉계가 판치는 측천무후 시절의 당나라 조정, 능력있고 재능있으며
절개있는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조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현실. 눈 앞에 보이는 이 모든
상황앞에서 정치 개혁의 청운의 꿈을 안고 젊은 나이에 조정에 출사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측천무후에게 무시당했던 절개있는 정치가이자 문인인 진자앙은
울분과 의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그런 의기와 울분은 그가 진나라 이후로
당나라 초기에서까지 이어진 형식적 아름다움에 치중한 시가 한,위 시기의 풍골 가득한 시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모습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데요,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자신이 쓴 시로서 실현합니다. 형식과 미학에 치중하고, 현실과 사회에 눈을 돌린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사회의 진실한 모습을 표현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호기롭고, 의기있는
시를 쓰면서 그는 위정자의 폭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무후 시절의 폭력적이며 무능력한 정치가
지배하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 꿈도 있고,능력도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도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모습을 봐야 하는 한 인물의 안타까움,울분,고통,의기,슬픔....
그 감정의 덩어리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저같은 이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로 진자앙의 시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았습니다. 그가 가장 힘든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든 해봐도 더욱 더 나빠져만 가는 현실이었겠죠. 그 현실 앞에서 시의 아름다움이나
형식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저 좌절한 자신의 꿈을 시에 의탁해서 드러냈을 따름
입니다. 하지만 시를 써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현실을 표현하는 것도 위정자들은 못마땅했나
봅니다. 그래서 무후를 따라 세상을 지배하던 무씨 세력은 흉계를 써서 진자앙을 옥사시킵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용기있고, 의기로우며 아름다울 수 있었던 진자앙이라는 꽃은 그렇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져갔습니다. 천년 전의 씁쓸한 현실. 하지만 지금도 되풀이돼서 더욱 더
씁쓸해지는 현실. 저는 그런 현실 앞에서 그저 진자앙이라는 꽃이 남긴 향기를 조용히 들이마실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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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포트리스 1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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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포트리스-댄 브라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읽기를 거부했던 댄 브라운의 소설을 드디어 읽었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를 느낀 전형적인 미국식 테크노 스릴러.
탄카도가 스트래드모어에게 죽고 나서도 한방을 먹이는 장면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산 중달이 죽은 공명에게 패배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댄 브라운은 솜씨가 있는 작가이긴 하나보다.
그의 첫 소설이니만큼 앞으로 더욱 나아지기를 바라며, 이제 그의 다음 소설들을 한번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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