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관 살인사건 스토리콜렉터 7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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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4.흑사관 살인사건-오구리 무시타로

 

살다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왜 살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의 들 때가 있다. 사실 산다는 건

어느 정도의 자동적인 메커니즘에 가깝기 때문에, 특정한 사이클에 갇히기 쉽고, 그것 자체를

의문시하거나 회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진화라는 노도와 같은 파도를 거쳐온 인간의

뇌는, 가끔식 그 쉽지 않은 일들을 이끌어내는데, 삶에 대한 의문 제기도 뇌가 가끔씩 이끌어내는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찌보면 쓸데없는 행동 같지만, 뇌가 가끔씩 이런 일들을 벌인다는 것은

, 이것 자체가 분명히 하나의 기회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질을 높이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뇌가 제공한다는 말이다.

 

독서도, 많이 하는 이에게는 자동적인 부분이 있다. 읽다 보니 읽는 거고, 받아들이다 보니 받아들

이는 거라는 식의 독서. 많이 읽다 보니 비판적이거나 꼼꼼한 독서보다는 그냥 기계적으로 문자들

읽어나가는 행동을 반복하는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독서를 하고 있는데, 이 기계적인

독서 속에서도, 주관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나의 독서가 어느

정도의 자정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아직 그 정도 자정작용 밖에 하고

있지 않다사실의미한다. 아직 나는 이 정도 수준인 바, 무언가를 더 채우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나는 계속해서 읽어나가고 또 읽어나가는 먹깨비 독서를 계속하고 있다. 채워도 채워지

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것이다. 이쯤되면 마르크스의 물신을

능가하는 '책신'이 내머리강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더,더 많은 책을 원하고, 읽기

원하는 책신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얘기이다. 책신이 도사리고 있는 한은 쉽사리 기계적

인 독서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내 독서의 딜레마이다.

 

하지만 가끔씩 이 기계적 독서를 깨뜨려버리는 책들이 등장한다. 어떤 책은 읽다가 바로 뇌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켜, 책을 덮어버리게 만들고, 어떤 책은 큰 감동과 재미를 선사해서 마음을

쥐고 흔들고, 어떤 책은 이게 도대체 뭔지 궁금하게 만들어 기계적인 독서를 거부하게 만든다.

<흑사관 살인사건>은 도대체 이게 뭔지 궁금하게 만들어 나의 기계적인 독서를 깨부수는

책이었다. 사실 이 정도 책이면 뇌에 거의 핵폭탄을 맞은 것과 다름없다. 어떻게, 책을 읽는데

30%도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읽어도 읽어도 도대체 이해를 못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가 그렇게 머리가 나쁜 건가? 아면 나에게 언어적인 장애가 있는 걸까? 분명히

한국어로 쓰인 것은 맞는데, 이해를 못하겠다는 건 내한국사람이면서도 한국어를 잘 모른다

는 의미일까? 더 기분 나쁜 건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이다. 독자의 재미를 추구하는

추리소설을 읽는데, 이해를 못한다는 건 지금까지의 내 독서가 헛되고 헛되다는 의미일까?

내가 읽은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들뢰즈나 데리다의

책이 아니라 분명히 사람이 죽고, 죽인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이 맞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탐정이 말하는 장광설과 추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진짜 뭐가 문제인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이 책을 펼쳐서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일본 추리 소설의 3대 기서

라는 말에 그냥 덮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 문구에 끌려서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내가 출구없는 미궁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죽어

가고, 탐정은 헛소리를 지껄이며 자신만의 추리로 범인을 잡아가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둠에

가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황.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해도 어둠이

상황파악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상황. 방대한 지식량과 현학적인 장광설로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이 책은 진짜 추리소설의 대신전이라는 별칭이 딱 들어맞는다. 독서의 한 걸음이, 한 걸음이, 

어쩜 이렇게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독서가 있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의도적으로 헛소리와 황당하

기 그지없는 논리와 방대한 지식량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의 지식들을 들먹이며 읽는 독자

들을 늪으로 유도한다. 나는 그저 그 늪에 잠겨가다 '?'만 머리 위에 떠올리고 늪에 가라앉아

버린 셈이다. 다 읽고 나서도 도대체 뭐를 읽었는지 이해 못하는 독서의 죽음. '나의 독서'를

죽여버린 이 책에 복수할 수 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복수하는 거다. 그렇게 복수를 외치며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쳐든다. 아뿔사, 이미 나는 이 책이 펼치는 독서의 흑마술에 빠져버린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이끌린 자에게는 죽음이라는 결말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에 빠져버린 사람에게는 그 유혹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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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혹은 시작
우타노 쇼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3.세상의 끝,혹은 시작-우타노 쇼고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운명에게 볼모를 바치는 일이다.'

 

책 첫장에 나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 문장을 보면서 떠오르는 건, 이 문장에서

흘러넘치는 남성적인 자신감과 남성 우월주의가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이컨과 동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가 쓴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에는 사회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무력한 존재였고, 가정의 지배권은 남성이 잡고 있었다. 가정이라는 배의 선장으로

거침없이 항해를 이끌어나가는 강력한 힘의 소유자인 남성. 바로 그런 당대의 사

회상이 있었기에, 베이컨은 자신감 있게 이 문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우리 사회나 옆 나라인 일본 사회에서도 베이컨의 시대와 같은 강력한 남성상이 

정에 서도 지배적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면서 가정에

남성들의 위치는 과거와 같이 강하지는 않다. 지금 우리 시대의 남성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할지는 몰라도, 가정의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물론 모든 가정이 동일한지는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수는 없다.^^;;)

 

<세상의 끝,혹은 시작>은 그렇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의 이야

기이다. 아니, 이 남자에게 고군분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버렸고,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건 고

군분투라기 보다는 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워 보인다. 이 남자의 발악은 숨겨져 있던

자식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이 행복하

다고 여겼고, 남의 일에는 무관심하기 그지없던 평범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러나 자식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그는 더 이상 자기삶이 평온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이 행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이 아닌, 기만과 허위로 가

득했기에 행복했던 그의 삶. 하지만 이 남자의 삶은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식

절망으로 치닫게 된다. 진실이라는 태풍은 기만과 허위가 만든 행복을 용납하

않고 날려리고 앙상한 실제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삶의 앙상한 모습이 실제의

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이제 앙상한 삶이나마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며

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아마 궁금할 것이다. 남자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

해준 자식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자의 자식이 초등학생 연쇄유괴살

건의 범인이였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끔직한 진실 앞에서 남자는 절망했고, 기만과 허위에 가득찬 자신의 이기적

을 되돌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행동은 이미 때늦은 행동이고, 과거를

식으로든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남자는 어떻게 이 사태에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릴 것인가? 그는 자식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세상의 끝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한 가정을 꾸려 나가지 못한

나는 감히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이런 끔찍한 일이 내 미래에 일어나

않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다만, 나는 이 책의 처음에 나온 베이컨의 말을 소설 속

현실과 지금의 상황에 맞춰서 바꿀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상의 이야기가 던진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기기에. 마지막

으로 이렇게 내가 바꾼 문장을 남기며 이제 이 부족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운명적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 한다.

만약에 그런 각오가 없다면, 당신은 아내와 자식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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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밀리언셀러 클럽 121
스콧 터로 지음, 신예경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2.이노센트-스콧 터로

 

어린 시절에 봤던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의혹>은 여러모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였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해리슨 포드의 눈빛이었다. 자신의 무죄를

강력히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품고 있는 그 눈빛은 나로 하여금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진정 궁금했다. 해리슨 포드의 모순적인 눈빛이 어떤

진실을 나에게 보여줄지.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나서야 나는 해리슨 포드의 눈빛이

말하는 진실을 부분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이해

에 불과했다. 나는 <의혹>의 진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세상 경험도 부족했고,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관계의 모순적인 복잡함과 가족 관계의 복잡미묘함을 체험해본

적도,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이 가정을 평안한 곳으로만 여기는 단순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이해의 불완전성은 그 영화를  내 머리 속에서 해리슨

포드의 시선과 함께 묻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나는 <의혹>을, 해리슨 포드의 불안한

시선을 잊어 버렸다.

 

 

내가 다시 그 시선을 떠올린 건 몇년 전<무죄추정>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였다. 그저

소설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읽었는데, 읽으면서 운명적인 느낌처럼 나는 이 소설이

<의혹>의 원작소설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해리슨 포드의

눈빛의 의미를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야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부족한 경험 때문에 영상이 환기시키는 메시지를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책 속 주인공 러스티 사비치 내면의 진솔한 감정표현과 고뇌,고민, 그의 시야로

바라본 사건의 진실을 접하고 나서야 해리슨 포드의 눈빛에서 보인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하나의 문장이나 표현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한 문장으로 감히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비슷하게 닮아 있다. 그러나

불행한 가족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라고. 너무나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야말로 소설 <무죄추정>과 영화 <의혹>을 설명하는 한 문장일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그 말에서 시작해, 다시 그 문장으로 끝나버린다.

 

 

불행한 가족의 이야기로서 시작하고 끝나버린 <무죄추정>의 이야기를 진짜 끝내기 위해

작가 스콧 터로는 20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펜을 들었다. <이노센트>는 <무죄추정>의

후속작이자 완결편으로, 노년의 작가의 폭넓고 차분한 시야와 생각이 소설 곳곳에 스며 있다.

20년의 세월이라는 삶의 담금질은, 차분하지만 그 안에 가늠할 길 없는 자기파괴적 열정을

품고 있던 소설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삶의 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음성이

들리는 소설로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이노센트>의 시작은 <무죄추정>과 다를 바 없었다.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비슷하게 닮아 있다. 그러나 불행한 가족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이 소설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이 문장은 시작부터

내 뇌리를 지배했고, 중간까지 변화하지 않은 이 소설의 낙인으로 머리에 각인되어 버렸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넘어가면서 이 문장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소설 속 다중의 다양한 목소리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몸부림이 몸에 전해지며, 머리 속 문장은 서서히 사라

지기 시작했다. 마치 액자로 만들어진 문장에서 액체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문장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위의 문장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대신 하나의 문장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나쁜 결혼은 좋은 결혼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언제나 마찬가지

회한으로 가득하다. '당신은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 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무죄추정>에서 <이노센트>로 이어지는 여정이 두 문장 사이의

변화였다는 사실을. 미스터리나 법정 스릴러, 인간들의 얽히고 섥힌 애정극, 비극적 가족

이야기는 두 문장의 변화를 포장해주는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것을 알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해리슨 포드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불안은 비극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비극의 무한성을 속삭이는 눈빛이었다. 어린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그 눈빛의 불안에 매료된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었다.

 

사족. 두 문장에 덧붙이는 나의 이야기:비극을 비극으로서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는 비극을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그게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20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비극과

마주한 남자는 자신이 비극을 마주쳤고 비극을 떠나보냈다고 생각해지만,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비극의 무한성 앞에서 노년의 남자는 삶의 진실을 깨닫고, 삶의

급류 앞에서 자신을 놓아버리고 물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다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비극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 끝나지 않은 비극의 순환고리가 자신의 삶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파악한다. 그 순간 남자는 편안해진다. 자신의 삶이 비극이라면 비극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가 편안히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자 말자, 다시 비극은 시작된다.

물론 이때의 비극은 전의 비극과 다른 비극이었다. 더 이상 그 남자의 삶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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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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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오가와 요코

 

체스는 우주였다. 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을 빛내는 성좌를 만드는 건 체스판에서

체스말을 움직이는 기사들의 손놀림에 달려 있었다. 체스라는 우주에 어떤 성좌가

새겨지는 가는 체스 기사들의 정신과 체스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태도, 그들의

분위기와 체스와 그들이 체스라는 게임과 호응해서 빚어지는 호흡에 달려 있었다.

체스판에 새겨진 성좌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을 넘나들며

자신의 모습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물론 항상 성좌가 빛만을 내뿜는건 아니었다. 때로는

이 성좌들은 빛무리를 넘어서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가 되기도 했다.

 

아니, 체스는 바다였다. 체스라는 대양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그 무한의 바다에서

체스 기사들은 저마다의 영법으로 헤엄치며 자신만의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몸놀림은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의 점수를 따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의 가치를 표출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름답기도 했고, 아름답지 않기도

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틀 알레힌은 8X8의 체스판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그 우주를 탐사한 우주비행사이자, 무한의 대양을 헤엄쳐다닌 탐험가였다.

그의 탐사와 수영은 오직 체스 자체를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그의 숭고한 미학적

이상에 따라 이루어진 행위였는데, 숭고한 미학적 이상을 추구함에도 계속해서 그의

체스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목표 자체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체스 그 자체를

사랑하고, 체스를 두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그의 습성 때문이었다. 목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과정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었기에 그의 체스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반하의 시인' 리틀 알레힌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그와 체스를 함께 하고,

그의 체스를 들여다보고, 체스의 기보를 바라본 책 속 등장인물들에게 전해져 그들의

삶을 풍족하고 아름답게 해준다.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책을 바라보는 독자인 나에게까지 리틀 알레힌의 체스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데, 종이에 새겨진 글자들이 모여들어서 형성한 이 아름다움은

체스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리틀 알레힌의 특별한 삶의 아름다움도 함께 전해준다.

외롭고 쓸쓸하며 매우 독특한 리틀 알레힌 삶의 아름다움이 체스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체스의 아름다움이 삶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나가는 삶과 체스의 아름다운

이중주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나도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함께 체스의 바다를

헤엄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무척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수영을

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오가와 요코의 유물론적이며 몽환적인 체스

동화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가.

 

현실 그 어딘가에 위치한 듯 보이지만 결코 현실은 아닌 것을 그리는, 오가와 요코의

작은 것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작은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큰 것인지. 외관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품 속에 무한을 품을 수 있는

작은 것의 커다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무한의 씨앗을

품은 작은 것의 거대성을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외면의 크기와

규모에만 집착하지 않고 작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잘 들여다보면

작은 씨앗 하나에도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

 

사족. 기보 하나만 남긴 리틀 알레힌의 삶을 읽다보니 망상이 생겨난다. 분명히 세상

어디에선가 내가 리틀 알레힌과 체스를 두고 있는 영상이 보이는 것이다. 뚱뚱한 고양이를

안고 그와 체스를 두는 영상 말이다. 어쩌면 그건 평형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사족 두번째. 위의 글을 보니 내가 점점 이상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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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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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야아츠지 유키토

마징가 Z의 원작자인 나가이 고의 전설의 걸작 <데빌 맨>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간과 악마의 대결에서, 인간들은 자신들 안에 숨은 악마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정말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인간의 외양을 하고 천연덕스럽게 인간 품에 살면서, 인간들을 죽이

는 악마들을 인간들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가장 경계하며 두려워한다.

악마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이 공포를 이용한 계략을 꾸미고, 악마의 힘을 받아들여 악마들과

싸우는 데빌맨에게 사용한다. 악마들과의 싸움의 선봉장으로서, 정체를 숨긴 채 싸워나가던 주인

공이 데빌맨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몰래 촬영한 사탄은 그것을 공개해서 마치 주인공이 악마인

척 꾸민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영상만 보고 데빌맨이 악마라고 여겨, 집단적 광기에

휩싸인채 몰려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여버린다. 극단의 고통을 겪는 데빌맨. 그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사람들에게서도, 자신의 상대인 악마들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양측 모두에게 미움 받고 박해받는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을 증오하는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에,마지막까지 악마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이미 그가 지키려 했던 인간

들의 실체를 봤음에도, 그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이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맞는지는 나 자신도 장담할 수 없다.^^;;)

 

여기서 이 만화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특별한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데빌맨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인 사람들의 심리에 관해 잠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미쳐 날뛸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심리는 공포에서 기인한다. '이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이 세상 누구도 악마일 수 있기에 언제라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파생된

공포는 영상을 통해 증폭되어 거침없이 한 여인을 죽이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들은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공포 때문에, 희생양을 내세우고, 그 희생양을 죽이면서 자신들의

공포를 잊으려 했다. 세상 누구도 자신을 죽일 수 있으며, 그래서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공포가

그들의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이 공포는, 그래도 아직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있는 것이다.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두렵고,

타인을 못 믿겠다는 것이지, 자기 자신은 그래도 악마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정통 미스터리 작가로만 소개된 아야츠지 유키토의 감각적인 청춘호러미스터리인

<어나더>는 이 확신마저 없는 상태의 공포를 다룬다. 모두의 기억과 실제적인 기록마저

날조해버리는 초현실적인 현상에 직면한 이들은 타인도 의심해야 하고, 자기 자신도 진짜

자기 자신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남들도 믿을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공포. 그 공포란 어떤 것일까? <어나더>를 읽는 행위는 그 공포의 심연과

마주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정통 미스터리 작가의 감각적인 변신이 빚어낸 공포의 축제에

참석받은 나는 그저 그 공포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대다 간신히 빠져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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