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르 지만지 희곡선집
장 라신 지음, 송민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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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페드르-장 라신

 

1.

라신의 눈은 세밀하다. 그의 눈은 인간이 감추고 있는 내면을 섬세하게 파헤치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좇아서, 그것들의 변화의 양상을 글

로써 펼쳐보여준다. 특히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

는데 있어서 그의 비극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더욱 더 놀라운 건, 그가 남자

도 불구하고 여성의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사실이다. 남자라는 성적인 한계

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의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사실은,그

세밀하고 섬세하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려준다. 이것은 그의 라이벌인 코르네유의 비극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는데, 코르네가 그려내는 남성적이고, 의지에 가득찬 인간들의 세계에서

념이 의지에 종속거나 아니면 정념이 의지의 힘에 눌려서 그 빛을 잃어버리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 앞에 무력한 정념, 혹은 의지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정념.

코르네유에게 정념의지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나친

지에의 강조는 오히려 르네이유 비극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어버

다. 권력에의 욕구,국가에충성 혹은 강력한 이상의 추구에 헌신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비극세계는 그의 극 자체를 현실이나 삶의 모습이라기보다

는 이상적인 이념이나 구호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인간들이 이상이

나 대의,국가정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다면서 극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선동한다.

 

하지만 라신은 그와 반대다. 라신은 인간 감정과 심리의 모순적이고,비이성적이며,

란스러움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이상과 이성을 말하면서도

작 자기 자신이 그에 따르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삶과 추상적인 구호와 철학의 괴리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일 수 있는지, 얼마나 이상하

게 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라신의 세밀한 눈은 그런 모습을 파악해서 비극에 담

는다. 정념비극이라고 불리는 그의 비극에서 인간들은 애정에 눈이 멀어 파멸이라

불꽃에 다가가는 부나방이 되어버린다. 라신은 이상과 구호가, 삶의 실체와 인간

감정의 혼란스러움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져내리는지 보여준다. 그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이상이니 정의를 떠들어도, 극으로 상연되는 작품에서는 불같은 사랑과

그에 따른 파멸적인 인간의 행동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 정도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코르네이유와 라신의 경쟁은 라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그리

라신은 섬세한 눈과 작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지위도, 돈도 없이 태어났다는 핸

디캡을 극복하고 문학적 성공과 정치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룩한다. 그에게 세한 눈이란 삶과 정치적, 문학적 성공을 위한 강력한 무

다름 아니었다.

 

2.

라신의 눈은 냉정하다. 그가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유

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의 섬세함과 세밀함은 역설적으로 그의 냉정함이 없었다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이념이나 이상,구호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그려나간다. 그가

바라본 인간들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정념의 비극을 창조해내

고, 그것을 계속 써나갔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극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출세,정치

에도 이용한다. 그가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의 극을 상연시켜주었던 희극의 대가

몰리에르를 배신하고, 그의 대본을 몰래 공연했던 일이나,그렇게 몰리에르가 자신과

절연을 선언하자 몰리에르 극단의 유명 여배우를 데리고 떠난 일, 코르네유와의 경쟁

에서 코르네유의 약점을 폭로하며 철저하게 승리한 일, 사교적인 재능으로 왕의 신

임을 얻어 왕의 치세에 대한 공식역사를 쓰는 사료편찬관을 시작으로 정치적인 출세

길로 들어선 일까지, 그는 냉정한 시각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인간의 성향과 성격을

악하고, 그 분석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삶의 성공을 거둔다. 3세에 부

님을 모두 여의고, 9세에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서 운좋게 교육을 받을 수 있

던, 이 아무것도 없었던 남자는 삶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각이 없었다면 삶에서 성공

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에 이 냉정함은 라신의 철저한 현실인식을 형성하고, 극작품의 세계관을 결정짓

는데 큰 역할을 한다.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자신에게 지식을 가르쳐준 수도원

마저 왕의 압박으로 폐쇄된 상황에서, 라신은 무엇보다 정치적 권력의 힘과 현실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그에게 세상이란, 인간의 노력을 통해 변화할 수 있거나 어떤 특

정한 이상을 추구해서 살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변화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는 가혹하고 냉정한 곳이었다. 라신의 이런 자각은 그 자신이 극작가

로서 철저하게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의 규범을 지키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

력했다는 사실, 작품 속에서 정치적 권력관계는 변하지 않고, 정념에 빠진 인간들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표현하면서도 체제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라신은 반드시 5막 구조여야 하고, 군주와 귀족들의 이야기여야 하고, 등장인물들이

반드시 군주와 귀족 계급에 한정되며, 그 계급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왕이나

여왕, 귀족들이 살았던 인위적이고 제한된 세계만을 묘사하며, 주의 깊게 구성된 12음

절 시인 '알렉상드린'을 대사로 써야하고, 행동-시간-장소의 삼일치를 이루어야 하

며, 상이나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배제하며, 권선징악을 표현해야 하며, 이성을 중시

한다는 절대왕정의 문학적 형상화인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규범을 철저

하게 지키면서도 동시에 이 규범의 준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 안에 인간의 정념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자신만의

극을 창조해냈다. 그의 비극은 체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이고, 창조적이면

서 체제 유지적인 문학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이 없었다

면 불가능했던 일로, 라신은 이 냉정한 눈으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 창조와 삶의 성공

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쥔다.

 

3.

세밀하고도 냉정했던 라신. 창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라신. 체제 유지적이면서도 체

제를 이용할 줄 알았던 라신. 삶에서는 철저하게 성공 지향적이면서도 문학에서는 정

념을 강조했던 라신.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문학에

서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보여줬던 라신. 이 모순적인 작가는 35세에 이미 아카데미 프

랑세즈 회원이자 문단의 지도자로 올라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페드르>를

써내지만, 적대자들의 음모로 인해서 이 작품이 저평가 받자 8개월 뒤에 공식적으

작가 자리에서 물러나 사료 편찬관이 된다.(나중에 두 편의 작품을 더 써내지만, 그것

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라기보다는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으로, 예술적인 목적이 아

니라 교육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라신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

들이다.) 그리고는 작가의 길로 다시는 돌아서지 않고, 정치적인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조용히 숨을 거두다.

 

4.

라신의 모든 것이 집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 그의 작품의 정수를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페드르>이다. 출세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자신의 작가

인생의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써낸 <페드르>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희곡의 규율을 철

저하게 따르면서, 라신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한다. 특히 여성들의 애정

심리를 철저하게 파고들어가면서 사랑의 무시무시함을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낸

이 작품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언어 중시적인 측면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언어로 인물 간의 갈등 관계, 애정,

치열한 대결의 양상을 표현한다. 그는 구절구절, 대사 하나하나마다 고전주의의 조화

미와 질서미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아름다운 시구들을 쏟아내고, 그것으로 인물들의

치열하기 그지없는 정념의 투쟁을 그려낸다. 새어머니의 양아들에 대한 금지된 사랑

을 그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서 소재를 취해서 조금

더 극적이고 투쟁적으로 변화시킨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이 초합리

적인 힘으로까지 변화해서 새어머니 페드르를 파멸로 몰아넣는 과정을 보여주며, 라

신 비극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시선 역시 놓치지 않고 제

시하고 있다. 사랑이 아무리 강력해도 견고하기 그지없는 체제에 균열조차 만들 수

없다는 냉정한 사실의 표출 또한 여전하다. 이 모든 것들을 포착한 이 작품의 독서가

끝나고 나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작품의 언어적 수사가 삶의 냉혹한 진실

앞에서 무용하다는.

 

5.

솔직히 라신의 이 작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과 문장들

즐비한데다, 구어체의 대화와 표현에 익숙했던 내가 노래하듯 주고 받는 운문 대사의

낯설음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읽다보면

노래하듯 주고받는 대사의 아름다움, 대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되는 독특함 예술성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부분에서 라신이 보여주는 정념의 무시무시함은 그

취하고 있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정념의 비극을 통해서 그가

살아간 사회적 체제의 견고함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당대의 지배층들은

연극을 보면서 파악했고, 그래서 그를 아끼고 종용했던 것이리라. 이 깨달음을 얻고

니, 갑지가 <페드르>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공을 위해서 향해서 걸어

는 이 남자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의 앞길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

니고, 그가 얼마나 성공이라는 목표를 이루려고 시달렸는지 너무다 잘 알고 있기 때

문이다. 어쩌면 이 남자가 만든 작품에서 파멸하고 죽음을 맞는 페드르 보다 그가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죽음을 통해서 삶의 억압에서 벗어난

페드르에 비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삶의 억압에 매여서 힘들게 허덕인 이 남자가 더

가엾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6.

라신은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고, 삶의 결말만 놓고 보면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몸부림이, 그의 삶의 면면이, 그가 삶이라는

길을 걸어간 길에서는 왠지 모를 비극의 냄새가 풍긴다.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었지

만, 그의 삶에서 비어져 나오는 비극의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비극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비극을 써야 했기에 썼다. 그는 비극의 운명에 취해서

비극을 토해냈다. 아, 이것이야말로 진짜 비극이다. 삶은 비극이 아니었으되, 삶을

살아간 인간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던 것. 이것을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하겠

는가! 이 삶의 비극 앞에서 라신이 쓴 <페드르>는 숨을 죽인다. 나는 <페드르>에서

이 숨죽임을 포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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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지만지 고전선집 494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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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

 

M에게

 

삶과 죽음

M, 내 주변의 어떤 친구는 종종 내게 이렇게 말했어. 죽을 때는 반드시 자살하겠

다고. 그런데 말이야, 지금까지 자살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면 자살하기

가 사는 것보다 쉽지 않은가봐.^^ 어쩌면 그 친구의 그런 말은 '살고 싶다'는 말의

변형은 아니었을까? 자기는 살고 싶고,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힘드니까, 그런 식의 발언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살아갔

던 것은 아닐까? 이 애기를 하니까 갑자기 에밀 시오랑이라는 철학자가 떠오르네.

에밀 시오랑도 종종 '자살하겠다'고 얘기했던 인물인데, 언제라도 자살할 수 있으

니까 오히려 자살을 미루고, 늙어서 자살하지 않고 평범하게 죽은 인물이거든. 그

에게도 '자살하겠다'는 말은 진짜 자살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가겠다'라는 말의 변

형이었던 것이야. 그러니까,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다가가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란 얘기지. 그냥 말로서만 '죽

니, 사니' 하는 거지.

 

살아가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먼 거야. 말로서만 떠들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지. 죽음에 대한 회피,무시,모른체하기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당연하거야. 그런데 그런 노력이 오히려 현대인들이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우리가 죽음을 무시하고,회피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무의

식적으로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문장을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죽음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모른체하려 한 것은 아닐까? M,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상호작용은 쉬운 듯 하면서,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달았거든.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모습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다음 이야기야. 오이디푸스 3부작

의 두번째 이야기로서,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고

있어. 그런데, 시간 순으로 보면 두번째 이야기지만, 작품이 쓰여지고 상연된 것으

로만 따지면 마지막 작품이야. 여기서 잠깐 오이디푸스 3부작에 대해 잠시 애기해볼

께. 3부작을 작품 내부의 시간대로 놓고 보자면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

디푸스>,<안티고네> 순이야. 하지만 쓰여지고 상연된 순서대로 보자면 <안티고네>

가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오이디푸스 왕>이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

포클레스의 유작으로, 소포클레스가 죽고 나서 이름이 똑같은 손자에 의해 상연된

작품이야. 소포클레스는 자신이 죽고 나서야, 오이디푸스를 죽음의 세계로 돌려보낸

셈이지.

 

소포클레스가 왜 이 비극적 주인공의 마지막을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했는지에 대

해서는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냥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을 수는 있겠지. 어

쩌면 소포클레스는 자신이 가장 마음을 쏟았던 자기 작품 속 비극의 주인공을 죽음

다가오는 시점에서 함께 동반자로 삼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이 모든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망상이야. 그러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기를.^^) 소

포클레스가 태어난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최후를 맞는다는 점도 나의 이런 망

상에 힘을 보태고 있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작품 속 인물의 죽

음을 맞게 하는 건, 자신과 함께 떠날 동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

혹독한 운명을 부여해서, 온갖 고생을 한 오이디푸스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 오이디푸스가 죽음을 맞는 장면을 쓰면서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몰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게, 친구여. 곧 있으면 따라갈테니.' 이거 너무 어이없는

망상인가?^^;;

 

그래도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마지막을 앞두고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는

봤을 때, 그가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에게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아. 애착이 없었다면 어떻게 노년에 이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애착이 있었

비극으로 마무리 지어진 <오이디푸스 왕>의 뒷 이야기인 <콜로노스의 오이디

푸스>를 쓰고, 오이디푸스에게 비극적인 운명의 마침표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선사

했겠지. 그래, 이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오이디푸스에게는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휴식이었어. 살아서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삼았으며, 자식이자 형제

매들인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낳은 근친상간의 패륜을 범하고, 그 모든 걸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어둠속에 자기자신을 유폐시키고, 계속해서 방랑할

밖에 없는 이 불운한 비극적인 인간에게 살아간다는 건 벌 그 자체이자 고통의 연

속이었던 거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그의 불행은 계속 이어져. 자신이

방랑하는 것에 상관없이 오직 테베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두 아들

은 서로 대립하다 결국 원수지간이 되어 싸우고, 오이디푸스의 시신을 차지하는 쪽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신탁때문에 테베의 시민들과 크레온, 권력다툼에 밀려

테베에서 쫓겨난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오이디푸스를 노리고 검은 마수를 뻗쳐오지.

장님에다 아픈 몸을 이끌고,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이 불쌍

한 노인에게 운명은 마지막까지 잔인했던 거야. 신탁에 따라서 자신이 최후를 맞는다

고 정해진 콜로노스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죽기 전까지는 잠시간의 평온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죽음은 죽음이더군. 태어났으면 죽는게 너

무나 당연한 인간의 삶에서, 이 당연함이 불운한 오이디푸스의 삶에서 어찌나 행복으

로 여겨지던지. 누구나 맞는 마지막이 그에게는, 그 누구와도 다른 삶의 선물이었던

셈이야.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레스를 기억하라!

오이디푸스의 죽음이 완벽하게 평온한 것은 아니었어. 죽기 전까지 많은 시련을 겪거

든. 또 비극을 불러온 자신의 격한 성정을 역시 제어하지 못해서 고생하거도 해. 그래

그의 죽음은 선물이 확실해. 자신을 가장 사랑했고, 자신이 가장 아꼈던 딸 안티고

네가 처남인 크레온 때문에 안타깝게 죽는 상황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혈육인 아들들이 권력 때문에 싸우다 서로 죽이는 걸 보지 못한다는 축복을 받았거든.

죽었기에 보지 못했고, 보지 못했기에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지. 만약 더 오래 살

서 그 모든 장면을 봤다면 그는 죽음을 맞아서도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거야. 하

지만 보지 못했기에, 그는 별다른 걱정없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던 거지.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와 함께 마지막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고,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가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의 마지막

을 지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그의 죽음은 선물이 맞을 거야.(이게 선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한 번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을 떠올려봐.^^)

 

신들은 그의 삶을 가혹한 비극의 장으로 만들었지.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평온

을 안긴 것 또한 신들의 계획이었어. 이 불가해한 운명의 신비, 삶과 죽음의 희비극적

인 교차, 아름다운 비극이자 비극적 운명극이기도 한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한 가지 말로는 쉽게 표현이 안 될 것 같아. 그의 성공과 몰락, 그의

자식들의 미래, 그 자신의 마지막을 담은 오이디푸스 3부작을 모두 봤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 M, 나는 이 3부작에서 삶의 무서움과 괴로움, 삶의 신비를 봤어. 그리고 인간

의지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운명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나약함도 봤지. 이

모든 모순적 사실들이 나를 하나의 감정으로 이끌지는 않더군. 복합적이기도 모순적인

감정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고 나서 샘솟았던 것이야. 그걸 뭐라고 한 가지

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나마 한 가지 문장은 머리를 스치더군. 그건 '평온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염원이었어. 우스운 얘기지만 평균 수명이 80세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30

대 초반인 내가 평온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갑작스럽게 하게 된거야. 이걸 나이 드신

들이 본다면 얼마나 우스워할까?^^ 그래도 나는 그 생각을 굽힐 생각은 없어. 나는

진짜 평온하게 죽음을 맞고 싶거든.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 이상한가?

^^ M, 그래도 반드시 평온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내 생각에 변함은 없어.

 

이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대한 글을 마칠 시간이야. 더불어 오이디푸스 3부작

에 대한 글도 모두 끝이야. 이렇게 적고보니 뭔가 한 것 같지만, 글쎄 그건 삶이라는

과정의 일부분에 불과한 일이었겠지. M,나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게 된 것이야. 이거 너무 소포클레스의 운명론 같은 발언인가?^^ 분명한 건 내가 이

3부작을 읽는 동안 행복했고, 삶에 대해서 예전보다 조금 더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사

실이겠지. 그게 나의 운명이었어. 운명, 이젠 이 두 글자의 무게감을 마음 속에 더 깊이

새길 수 있겠지. 피할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더 이상 피하지 않겠어. 이 3부작을 읽었

던 것처럼,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어. 이게 오이디푸스 3부작을 읽은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겠지.^^ 마지막으로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레스 모두 저 세상

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염원할께. 그럼, M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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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 지만지 고전선집 669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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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안티고네-소포클레스

 

M에게

 의지의 힘

M, 너는 의지의 힘을 믿니? 의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의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너는 알고 있니? 아마도 너는 의지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을지 몰라도, 그 말이 품

고 있는 무서운 힘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거야. M, 의지는 때로 사

람이 목숨을 걸 정도로 무서운 단어가 되기도 해. 우리가 '일찍 일어나야지'나 '열

심히 공부해야지'나 '열심히 일해야지' 라고 말하는 일상 속의 의지처럼, 한

이 목숨을 걸고 추구하거나, 외부의 강력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밀고

가는 것도 의지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야. 이런 강력한 의지는

리같은 평범한 이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거나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의지를 '의지'라는 단어 속에 쉽게 포함시키지 못하는 것이지. 그래도

의지는 의지야. 이것이 흔하지 않고, 쉽게 따라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의지가 되

지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하지만 난 이런 의지를 볼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안티고네>를 읽으면서도 강력한 의지의 힘 때문에 놀랍다는 생각과

더불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

 

의지의 비극, 안티고네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야. 이 정도만 얘기하면 이 작

품이 <오이디푸스 왕>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거야. 이 작품은 소포클

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한 오이디푸스 3부작

하나로서, 시대순으로만 보면 가장 마지막 이야기야.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이라

고 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보다 먼저 쓰여졌고,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초기작

야. 상연 순으로만 보면 이미 죽어있는 아버지가 갑자기 살아나서 젊어진 뒤에 등

하는 셈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있겠지만, 비극 3부작을 하나로 이어지게 만

었던 소포클레스의 선배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달리, 비극 3부작 하나하나를

결된 작품으로 만들었던 소포클레스답게 굳이 <오이디푸스 왕>과 연결지어 생각

필요없이 한 개의 독립된 작품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어. <안티고네>는 분명히

<오이디푸스 왕>과 이어져 있지만, 동시에 떨어져서 읽어도 별 문제 없는 작품이란 

얘기야.

 

무엇보다 <오이디푸스 왕>과 내용면에서 큰 차이가 있어.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못하고,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다 파멸을 맞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와는 달

리,<안티고네>는 분명히 비극을 맞지 않을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의지 때문에 비극

맞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이것을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신의 율법을

상징하는 안티고네와 인간의 율법을 상징하는 크레온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건 두 사람의 대립만으로도 충분히 바라

있다고 생각해. 사회 질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크

레온의 의지와 사회적인 압력이 있음에도 보편적인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

마저 굽히지 않는 안티고네의 의지의 충돌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이고, 감동적이라는

이야기야. 이것을 굳이 신의 율법과 인간의 율법이라는 해석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왔다는 말이지. 어쩌면 작품 중간에 나오는, 모든 것

을 인간 위주로 바라보는 소피스트에 대한 비판의 구절을 볼 때, 소포클레스는 이 작

품을 인간의 율법신의 율법을 대비시키며,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 때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메시지를 이 비극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 종교적인 의미가 강했던 그리스 비극

의 특성을 감안해 볼때, 분명히 소포클레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여. 하

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서 <안티고네>가 다가오

는 것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학'을 담은 텍스트로서 다가왔어. 이 '저항의 정치학'이

뭐냐고? 이왕 얘기에 나온 김에 한번 써보도록 할께.

 

안티고네, '저항의 정치학'을 보여주다.

우선, 이 얘기를 하기전에 전제 조건을 달고 싶어. 여기서 말하는 저항의 정치학이란

정치공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내가 여기서 하게 될 말은 '어떤 정당이 집

권해야 한다, 어떤 정당이 사회에 좋다, 어떤 정치사상이 어떤 정치사상보다 좋고, 그

정치사상을 지금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라는 정치공학과

는 거리가 멀다는 거야. 나는 정치공학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적 삶과 정치적 태도

에 대해서 말할거야. 삶을 살다보니 그것이 어떤 정치적인 태도를 보여준 한 인간에

해 말함으로써, 삶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삶과 이어지는 정치적 삶을 말하게 될 거

라는 말이야. 이건 정치공학보다는 정치철학에 가까울 거야.(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정치철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정치철학에 가깝다는 말을 쓸 수 밖에

없었어.)

 

이제 이야기를 해볼께. 안티고네는 작품 속에서 지도자 크레온이 정한 법에 저항하는

인물로 나와. 반면에 크레온은 자신이 보기에 그 법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 법을

정하고 그것을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강요하고 억압하는 인물로 나오지. 어떻게 보면

크레온의 법도 공동체에 필요한 것도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법이 무조건 옳

다고 볼 수는 없는 거지.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특정한 문화적 토양에서는, 보편적

인 정의의 측면에서 그 법이 반드시 옳다고 볼수는 없다는 거지. 안티고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크레온의 법에 저항하지. 많은 이들이 안티고네의 말에 동조하는 것

은, 크레온의 법이 보편적인 정의와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신의 율법에 어긋났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크레온은 지배자의 아집과 오만에 둘러싸여, 자신의 고압적인 태

도를 고수하지. 크레온에게 자신이 만든 법은 인간의 삶과 생활을 돕기 위해 만들

어진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하는 인간 삶과

활의 억압적 틀이 되어버린 것이야. 그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켜야 한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야. 크레온은 자신이 만든 법과 그것을 옹호하는 태도를 

통해 그것이 더 이상 사회와 동체와 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삶과 생활의

주인이 된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지. 분명히 자신이 틀릴수도 있고, 자신이

만든 법이 옳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는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무조건적

으로 주장하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아. 

 

평범한 이들이라면, 크레온의 위협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에 순응해서 조용히

살아갔거야. 하지만 안티고네는 범인들과 달리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

하다 죽음을 맞게 되지. 여기서 이제 안티고네의 모습은 범인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서의 아우라를 간직하게 돼.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그것으로서 '저항의 정치학'과

이어지지. '어떤 특정한 법령이나 규율이 옳지 않다면 그것에 관해 생각해보고 저항을

실천하고, 동시에 그 행동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저항의

정치학'은 안티고네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것의 이념적 토대를 실제적로 드러내게 된

것이야. 사실 우리가 만들어진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아. 사회의 질서 유지와 공동체

적인 평안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임에는 틀림없어.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만들어진 법이 반드시 옳을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해야해. 법을 지

키면서도, 어쩌면 그것이 반드시 정당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 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당성을 생각해보고, 의문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안티고네거기서 더 나아가서 의문을 저항의 행동으로 바꾸고

실천했어. 그러니 <안티고네>를 어떻게 '저항의 정치학'을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정치적인 오독의 즐거움, 그리고...

물론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어. 그렇게 읽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거든. 그래도 내 마음대로 정치적인 오독을 하다보니 더

재미있어지는거야! 작품과 은밀히 혼자만의 대화를 하고, 그 지극히 주관적인 대화의

성과를 자기 소유로 한다는 건 독서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중 하나거든. 특히 시

의 평가를 이겨낸 고전들이 이런 식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이 있는 열려 있는 텍스

트로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내가 고전 읽기를 계속하는 한 오독

은 계속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반드시 이런 행동이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즐거운데

어쩌겠어!^^;;

 

정치적 오독의 즐거움과 더불어<안티고네>가 보여주는 정치적 행동은 지금의 나에게

는 너무나 큰 감정의 배설구와 았어.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과 압력, 나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하지 못했던 저항을 안티고네는 끝까지 밀고 나가거든. 거기서 느끼는 카타르시

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 물론 비극적인 결말을 맞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꼈던 울분

과 흥분은 나로 하여금 작품에 몰두하게 했지. 안타까운 건,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야. 나는 현실에서 예전처럼 두려워하며, 숨죽이며, 조

용히 살아갈게 뻔하거든. 아!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다

만,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 내 마음 속에 안티고네가 들어왔다는 사실이야. 가끔

씩 그녀와 저항과 해방의 행을 내 마음 속에서 할 수 있다는 말이거든. 하, 그것이 얼마

나 행복할까? 이런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줄 수 있어서 진정으로 <안티고네>의 '안티고

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싶어.

 

이제 말을 끝내야겠어. M, 내 말을 또 게속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다시 내 애기를 들어줘.(너 같이 내 애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너무 행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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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오후 민음사 세계시인선 16
말라르메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평점 :
품절



26.목신의 오후-말라르메

 

1.

보들레르의 시도 읽었고, 랭보의 시도 읽었고, 발레리의 시도 읽었으니 말라르메의

시를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당연함은 언제

나 당연하지 않음을 동반했고, 나는 삶의 흐름 앞에서 말라르메와는 상관없는 듯이

살아갔다. 내게 '악의 꽃'을 이야기하는 시인 보들레르는 시의 상징성과 이중성을 감

각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악마적인 시인이었고, 랭보는 상징과 현실 너머의 낯선 세계

나를 인도하는 지옥에서 온 시인이었고, '해변의 묘지'로 나를 인도하는 폴 발레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 같은 시인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말라

르메의 시 속으로 뛰어들어 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집>을 거부했고, 프랑

스 상징주의를 추억에 파 묻은 채 삶을 살아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내 삶과는 상관없이 빛나고, 아름다운 추억의 사진같은 존

재들이 되었고, 나는 그 추억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채로, 삶이라는 대지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징주의가 내게 다시 찾아왔다. 목신 판의 

관능적인 피리소리를 동반한 <목신의 오후>라는 제목과 함께.

 

2.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언어 표현, 의미, 단어 생성, 다른

언어들과의 교류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모두 포괄하는 언어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

면, 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랑스 상징주시인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언어를 통해서 이 세상 너머의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나선다. 그들

은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 세상의 것도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보는 견자의

시각으로,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 '악의 꽃'을 피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인간 인식과 사고의 불완전성 때문에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필패라는 결과를 떠안고

그들은 여기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시를 써내려간다. 너무 당연하게도, 말라르메도

이 필패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시도에 도전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보이

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절대의 책을 쓰려는 감당할 수 없는 욕망

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절대적 꿈을 위한 여정의 일환으로 그는 계속해서 상징적인 시

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그것이 절대의 책이 아닌, 절대의 책의 조각이나 단편에 불

과할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써내려 갔다. 여기에서 그의 시들은, 이제 절대의 책이라

는 그 자신의 꿈을 향한 여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불가능한 꿈

을 이루기 위해서 차근차근 길을 밟아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초기의 도피적인 성향의

시들도, 절대의 책으로 나아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

게 <목신의 오후>도 절대의 책나아가는 시인의 발걸음에 포함된다. 목신 판의 관

능적인 꿈은, 시인 자신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3.

솔직히 말라르메의 시는 어렵다.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하기 쉽지 않다. 서정의 표현이나 묘사인 듯 보이면서도 상징을 품고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을 넘어서면서도 이 세상 모두를 표현하려는 모순적인 시인의 열정을 품고 있기

에,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다층성을 가진 시가 되어 읽는 독자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라르메의 시를 씹꼬 또 씹으리라. 씹다가 '이해불가'라는

에 걸려 이해라는 이빨이 빠져나가고 생각이라는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일이 있

어도 포기하지 않고 씹으리라. 씹다 보면 절대의 책에서 흘러나오든한 미약한 빛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인도 그것을 알기에 시를 계속 썼던 것이 아닐까.

 

'그대를 찬미하노라, 처녀들의 분노여,

오 성스러운 전라의 잠이 주는 미칠 듯한 감미로움이여, 번갯불이 몸을 떨듯,

불타는 내 입술의 목마름을 피하려 그대는 미끄럽게 달아난다.

살의 저 은밀한 몸서림치이여

무정한 여자의 발끝에서부터 수줍은,

여자의 가슴에까지.

광란의 눈물에, 혹은 보다 덜 슬픈

한숨에 젖은 순진함은 벌써 옛날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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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지만지 고전선집 575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5.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M에게..

 

현실

지난 주 토요일날 약속을 위해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는 곳에 갔는데, 무언가 집에 놔두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 추운 날에 대비해서 두

꺼운 파카도 입고, 내복도 입은 상태여서 집에 들어가서 놔두고 온 물건을 가져나오는데 너무 덥

더군.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어.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더워서 약간 땀이 나는 정도였어. 진

문제는 버스 정류장에서 발생했어. 눈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내가 타려는 버스가 나를

나쳐서 버스 정류장 앞에 서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뛰었지. 두꺼운 파카와 내복

입은 상태로. 운좋아간신히 탈 수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거야. 하,

이 겨울에 땀이라니! 추워버스 안에는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고, 남들은 모두 추워서

두꺼운 옷안에 움츠러든 상황에나는 글쎄,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여름의 풍경을 연출하

있었어. 이 모든 게 정말 싫더군. 그때 속으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사는 게 쉽지 않

군.' 물론 시간이 지나 땀이 식으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상황이 되었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한 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야. M, 너라면 아마 이해하겠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삶을 힘겹고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 말이야. 이번 일

같은 경우는 시간이 흐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서 별탈이 없었지만, 쉽사리 넘어갈 수 없

는 일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사소한 불운들이야 시간이 지나거나 마음 가짐을 바꿔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문제들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하겠지. 사실 산다는 건, 사소한 불운과 힘겨운 일들 뿐만 아니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계속해

서 반복되는 일들도 견뎌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

를 받고 사표를 쓸 생각을 계속 하면서도 견뎌내겠지. 수험생들도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살아나가는 것이지. 취업 준비생들도 취업이 안 되어 그것 자체가 삶의 고통이 되어도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야. 아이에게도,어른에게도,노인에게도,청년에게도,중년에게도,부부에게도,연인에

게도, 자식에게도,부모에게도,학생에게도,회사원에게도,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도

저마다 자신들의 문제가 있겠지.

 

그 문제의 순간마다 우리는 '사는 게 쉽지 않다'고 되뇌는 것 같아. 누구나 자신이 마주치는

문제가, 문제의 무게감을 떠나서 언제나 쉽지 않은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겠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가장 어렵게 여긴다는 말이지. 나는 가끔 그런 인식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어차피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을 내뱉고 생각하며 견뎌나가

는 것이라는 얘기야. 진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을 마주하거나, 감당 못할 운명 앞에 선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나올까? 그 사람에게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버거우니까, 이런 말이

오지 않을 거야. 사는 게 쉬운가 쉽지 않은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지 한 순간 한 순간 숨

쉬는게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런 말 자체를 할 수 없는 거야.

 

M, 나는 그러니까 자책을 하고 있는 거야.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나 자신의 순간적인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는거야. 이런 식의 비판을 시도하다

보니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라.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의 비극을 경험한 한 남자. 너무나도

유명한 이 남자는 신화와 비극과 정신분석학의 이론으로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와 오랜 시간에 흩뿌리고 다니며 불멸의 명성을 얻었지. 그래, 너도 짐작했겠지

만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오이디푸스야.

 

오이디푸스왕의 비극

그는 왕이었어. 도시를 괴롭히던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기도 했어. 아,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둔 행복한 남편이기도 했지. 자식들도 훌륭했어. 도시의 시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인정했으며, 아내의 동생인 크레온과 도시의 장로들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했어. 저주니 비극이

니 운명의 화살이니 하는 말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어. 가끔씩

그도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때도, 그건 행복의 표시일

뿐이었을 거야. 그는 커다른 문제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삶의

급전직하는 순식간이었어. 도시에 닥친 역병과 그것을 막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이 그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고간거야. 신탁에 의해서 도시에 들이닥친 역병을 막기 위해, 그는 전왕의 살인범

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그 자신이 탐정의 마음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한거야. 그런데, 재미

있게도 그 자신이 범인이었어. 진실을 얻기 위한 그 자신의 노력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가

는 노력이기도 한 거지. 이건 의도하지 않은, 자멸의 한 방식인거야. 그는 그 자신을 잡기 위해,

자신을 최악의 비극적인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 셈이야.

 

그의 노력이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두었다는 사실,

자신친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의 자식이자

동시에 자신의 형제자매들인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의 시민들을 죽만든 원인이었다는 사실이었어. 너무 비극적인 것 같지? 최선을

다한 노력으로 얻은 게 이런 말로 표현 못할 충격적인 사실이라는 사실이. 평범한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것 같은 최악의 운명 앞에서도 이 저주받은 왕이자 저주받은 사내인 오이디푸스

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이라면,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

는 것을 선택해. 그것은 그가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이었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계속해서 받겠다는 의미인거야. 나는

이 마지막 부분을 보고 감탄했어. 자신이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기에,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를 할 수도 있었건만,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자신이 저지른 를 시인하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기로 하고 결정하지. 오이디푸스는 누구나 할 수 없는 숭고한 의지의 힘을

보여준거야. 나는 여기서 인간의 위대한 일면을 봤어. 그리스 최고의 비극작가 중 한명이었

소포클레스도,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운명의 불가해성과 더불어 이런 인간의 위대한 일면을 말하

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주제가 극의 역동적인 구성과 함께 전해지기에,

<오이디푸스 왕>이 2000년의 시간을 어넘어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까.

시간과 상관없는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기에, 이 비극은 과거의 작품이지만

충분히 현재적일 수 있고, 현재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거야.

 

비극, 그리고 현재

M, 내가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말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나의 앞에 마주친 사소한 불운과 힘겨움 앞에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이나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그게 그것을 이겨내는 가장 사소한 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지. 다만, 나는 <오이디푸스 왕>

을 읽었기에 가끔씩 나보다 불행했던 오이디푸스라는 남자를 떠올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때,

나는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평온과 행복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몰라. 내가 살아가

는 일상이 얼마나 문제 없는 것인지 깨달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것이 사치에 가까운 표현이라

는 사실도 동시에 깨닫게 되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어. 그러니 기회가 되면 너도 한번

읽어봐. 어쩌면 너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제 이 글을 마칠 시간이야. M, 니가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어떤 생각을 하든 우리는 다음에 다시 만나는

거야. 알겠지?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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